9. 설익은 혹은 농익은 - (31)
미셸의 비밀 서랍을 따보니 리젤로트의 초상화, 봉인이 뜯긴 편지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오라비의 특권으로 연애편지라도 훔쳐볼까하는 충동을 고이 누르고 편지의 더미를 옆에 치우니 술병이 튀어나왔다.
웬일로 술 가지고 쩨쩨하게 구나 의아했는데, 정말로 좋은 술이었다. 오십 년은 묵은 중부산 위스키였는데, 잔에 따르자마자 방 안 가득 퍼지는 짙은 향기가 일품이었다. 세시안은 홀로 술을 따라 안주도 없이 홀짝였다. 술기운이 조금씩 올라왔다.
어디부터 자책해야 할지, 어디까지 화를 내야할지 알 수 없었다. 한꺼번에 생각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유리조각을 이용한 자해시도. 손바닥에 선명하게 남은 자상. 그 자신의 옹졸함과 유치함. 눈에 고여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 같던 눈물. 루이즈 마리의 자살. 계승권의 박탈.
굵직한 주제만 떠올렸는데도 어지러웠다. 사실 루이즈 마리를 입에 올린 것에 대해 그가 화를 내는 것이 정당한지조차 알 수 없었다.
-제 계승권을 돌려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순간 죽은 사람을 위해서 화 낼 권리도, 아롈을 걱정할 권리도 없는 듯 느껴졌다. 혼란스러웠다.
-자살한 여자 말입니다.
죄책감에 활화산 같은 분노가 섞이는 순간, 그는 세 가지 충동을 동시에 느꼈다. 끌어안고 달래고 싶은 마음과, 흔들린 그녀를 더 다그치고 싶은 마음과, 먹먹한 화를 토해내고 싶은 마음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그 충동 중 어느 것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쳤다. 비겁하게도.
세시안은 한숨 대신 술을 천천히 삼켰다.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황제와 그 자신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루이즈 마리의 시녀들은 모두 결혼해서 시골로 내려가거나, 죽었다. 아니면 그냥 넘겨짚은 걸까.
그리고 계승권.
뛰쳐나온 게 후회되었지만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아직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얼굴을 마주하면 화가 날지, 아니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을지도 알 수 없었다.
한 잔을 다 비웠을 때 미셸이 들어왔다. 포도주를 한 병 들고 있었다. 그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쳐두더니, 자기 잔에도 술을 따랐다.
“일찍 왔네.”
“응.”
“내 얘기는?”
“안 했으면 여기 올 수 있었을 것 같아?”
“그러네.”
둘은 잠시 말없이 술을 마셨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미셸이었다.
“그래서, 둘이 싸웠어?”
“집안일이야.”
“싸웠다는 거네. 이모님 때문에?”
분명 촉매는 되었을지 몰라도 싸움의 본질은 아니었다. 그저 서로 모른 척 묻어뒀던 것이 지금 터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을 하지 않고 술을 털어 넣자 미셸은 납득한 듯했다.
“삼십 년을 앙심 품고 계신 이모님도 참 대단하시지.”
“설마 그런 걸 저지르실 줄은 몰랐어.”
“황후의 방 앞에 네 시간 무릎 꿇려놨다는 게 사실이야?”
“내가 듣기론 다섯 시간이었지만.”
“명목은?”
“보고 싶어 불렀는데 깜빡 잠이 드셨다고.”
어쩔 수 없이 비꼬는 목소리가 나갔다. 미셸은 상당히 놀란 듯했다. 그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보르디 쪽 항의는? 아니면 그런 건 생각도 안 하고 저지르신 건가?”
“오를레앙 대공자에게 말해줘야 하나?”
“오를레앙 대공녀의 아들이 할 말은 아니지 않아?”
세시안은 납득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안 할 것 같다는데.”
“그럴 리가. 샤를루아 공작이 어떤 사람인데.”
“폐하의 눈치를 볼 생각인 것 같아. 원래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항상 관대하셨지. 시끄럽게 만드느니 납작 엎드려 점수를 따려는 계획이 아닐까? 순전히 추측이지만.”
“그럼 이모님께서는 이걸로 멈추지 않으실 텐데?”
“그렇겠지.”
“또 반복하실 테고.”
“지당한 추측이야.”
“아롈이 그걸 버틸 리가 없잖아. 그 자존심에 한 번은 참았겠지만 두 번도 참겠어?”
“이번이 두 번째야.”
“무슨 소리야?”
세시안은 크라바트에 매달린 브로치를 툭툭 건드렸다.
“존경하는 폐하께서 몇 달 전에 한 번 들쑤시셨어.”
“뭐?”
“정의관 집무실에 불러다가 성경을 읽으라고 하셨다는군.”
그리고 아롈은 그 때도 펑펑 운 흔적이 역력한 얼굴로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문득 눈물이 그렁거리던 연둣빛 눈과, 그걸 황급히 감추던 몸짓이 떠올랐다. 아직도 울고 있을까. 가슴이 지끈거렸다.
미셸도 그의 이모부이자 이 나라의 황제가 단순한 성경낭독을 위해 며느리를 불렀을 리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해가 안 되네. 왜 그러셨는데? 이유가 없잖아.”
“몰라.”
캐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아롈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인 채 완고하게 입을 다물었으므로, 세시안은 아직도 아버지가 아내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몰랐다.
“무슨 말을 하셨는지도 모르는데, 정확한 이유를 알 리가 있나. 추측할 뿐이지. 아마도 기선제압?”
“이런 말하긴 미안하지만, 설마 두 분 폐하께서는 다음이 있을 거라고 믿으시는 거야?”
미셸은 정곡을 찔렀다. 세시안은 희미하게 웃었다.
“글쎄.”
“대공의 딸, 손녀, 외손녀. 네가 결혼할 수 있는 범위의 여자 중에 지금 나이 찬 미혼이 몇 명이나 돼? 고작해야 다섯 명? 여섯 명? 이번에 아롈마저 ‘그렇게 되면’ 그 중에 결혼한다고 나설 사람이 누가 있겠어. 물론 어찌어찌하면 없지는 않겠지만.”
“사실 그건 중요한 게 아닐 것 같은데. 결혼은 신부만 하는 게 아니잖아. 신랑이 있어야지.”
세시안은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난 이번이 마지막이야.”
마음속에서 잠정적으로 생각하던 일을 입 밖에 내자 속이 시원해졌다.
“결혼할 수 있는 여자 다섯이 아니라 백 명이 줄 서 있다 해도 이번이 끝이야. 다시는 안 해. 남들은 한 번, 많아야 두 번 하는 결혼. 이번이 마지막일 거라고 줄곧 생각했는데 다음이 생기고, 이번이야말로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뒤에도 그 다음이 생겼지. 이젠 지긋지긋해.”
미셸은 동정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세시안은 ‘친구’에게 속에 있던 말을 털어놓았다.
“이걸로 끝이야. 다시는 약혼이고 결혼이고 안 해. 사생아라도 보라고 여자 들이밀면 받아들이고, 몇 달 간격으로 애가 안 생긴다고 갈아치우는 짓 따위 또 할 것 같아?”
지극히 동어반복적인 말이었다. 안 해! 안 할 거야! 장난감을 뒤집어엎는 어린애가 빽빽 울어대는 것이나 다름없는 푸념이다. 이십 년쯤 어렸을 때도 이런 식으로 떼를 쓰진 않았는데. 스스로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그는 제법 단호한 말투로 선언했다.
“아렐르가 내 끝이야.”
“진심이야?”
“이런 말을 농담으로 하지는 않아.”
미셸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빈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사랑해?”
“그 말이 지금 왜 나와?”
“나는 리즈 말고 다른 여자를 내 끝으로 삼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게 상상이 안 돼서.”
세시안은 초록빛 눈을 가늘게 뜨고는 친구를 노려보았다.
“그런 놈이 다른 여자랑 약혼을…….”
“아, 파혼한다고! 아직 대회의 약혼 승인도 안 났어!”
“보르디가 순순히 파혼해준대?”
“위자료 오십만 루아르 선에서 합의보기로 했어.”
“오십만?”
아직 승인 받지 못한 약혼에 대한 위자료로는 꽤 큰돈이었다. 거의 지참금에 준하는 금액이 아닌가.
“그 쪽에서 삼십만 제의했는데, 아버지께서 더 말 안 나오게 그냥 오십만 주라고 하시더라. 오를레앙으로 내려가신 우리 어머니는 이 얘기 들으면 우리 부자를 한꺼번에 묶어서 묻어버리려고 하시겠지만 어쩌시겠어. 예비금을 전부 털고 모자라는 한이 있어도 이미 생긴 손자를 지우라고는 차마 못 하시겠……, 아, 여기 검 없어!”
그는 일어나 휘휘 둘러보는 시늉을 하고는 다시 앉았다.
“리젤로트만 아니면 자르는 건데.”
미셸은 연극적인 태도로 다리를 꼬았다.
“살려줘.”
“안 죽어.”
“거길 자르면 죽어. 내가 공부 좀 열심히 하라고 했잖아.”
“군사학 시간에 벽 타고 도망친 누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러는 너는 검술 수업 있을 때마다 아프다고 꾀병 부렸잖아.”
“꾀병이라고 고자질했을 때 잘랐어야 했는데.”
“그러니까 왜 자르려는 쪽으로만 생각이 가냐고!”
유치한 입씨름이 잠시 오간 뒤 둘은 술병에 깔린 마지막 술을 사이좋게 반씩 따라 잔을 부딪쳤다.
“이거 진짜 아껴마시던 건데 하루아침에 바닥이 나네.”
“괜찮은 술이네. 어디서 난 거야?”
“아롈 따라 오는 길에 선물로 한 병 받았어.”
“그래?”
뜬금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세시안은 술을 다 마시고 포도주를 땄다. 미셸의 비밀 서랍에는 코르크 마개를 딸 수 있는 기구도 구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포도주 용 잔은 따로 없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위스키를 마셨던 잔에 포도주를 약간 따랐다. 향이 섞였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직 대답을 못 들은 것 같은데.”
“뭘.”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