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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10. 바라마지 않는 (2)


 “저기, 아렐르…….”

“리젤로트.”

하필 말이 동시에 나왔다. 둘은 약속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가 또 다시 한 번 충돌을 일으켰다.

“제가.”

“저기!”

이러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아롈은 먼저 선수를 잡아 말을 끊으려 했다. 결코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때마침 달갑잖은 현기증이 찾아왔다. 아롈이 어지러움을 참으려 입술을 깨무는 사이, 리젤로트가 발언권을 가져갔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요,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싫습니다.

아롈은 진심으로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녀가 평생 봐야 할 시누이이며, 차기 오를레앙 대공비이며, 놀라거나 화를 내면 안 되는 임신부만 아니었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말​씀​해​보​십​시​오​.​”​

리젤로트는 한참이나 아롈의 눈치를 보는 듯 애교스럽게 그녀를 올려다보다가 말을 꺼냈다.

“오라버니와 화해하시는 건 어떠세요?”

역시나.

리젤로트는 아롈이 상대해 온 인간 중에선 상당히 속이 투명한 편에 속했다. 남쪽 황제의 막내딸은 복잡한 것을 싫어했다. 아름다울 정도로 단순했다. 그리고 그만큼 대하기 까다로웠다.

“저기요, 리젤로트가 어마마마 대신 사과드리겠어요. 물론 오라버니께서도 대신 사과하셨을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많이 속상하셨지요? 죄송해요.”

남쪽 사람들은 참 사과를 쉽게도 한다. 미안하다, 죄송하다. 아롈은 입에 담아본 게 언제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롈은 그 날의 싸움, 아니 자신의 폭주에 대해서 억지로 떠올렸다. 황후의 탓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롈의 문제였다.

“딸로서 이런 말씀드리긴 뭐하지만요, 어마마마께서 잘못하셨어요. 화내셔도 좋아요. 미네트에게도요! 아, 미네트의 몫까지 제가 사과드릴게요. 그 애는 제 쌍둥이지만요, 항상 얄미운 구석이 있었거든요. 어마마마 뒤에 서서는 아무 것도 말리지 않고 말이죠, 가끔 부추기는 게 아닐까 의심이 된다니까요!”

리젤로트.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샜습니다. 지금 마담 미네트의 이야기를 할 때는 아니지 않나요?

그리고 마담 앙리에트 안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리젤로트의 말은 틀렸다. 아롈이 아직도 가지고 있는 황후의 마노 카메오가 그 증거였다. 이유는 모르지만, 미네트는 분명히 황후의 계략을 훼방 놓으려 했다.

아롈은 딴죽을 걸어 그녀의 말을 멈추지 않고, 물처럼 흐르는 수다스러운 사과를 조용히 들었다. 리젤로트는 둥근 뺨을 붉히며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그러니까 제 말은요, 오라버니께는 화내지 마시라는 뜻이에요. 아렐르도 오라버니를 아시잖아요? 그런 분이 아니세요. 네? 그 일이 있었던지 벌써 열흘도 넘었는데요, 화를 푸실 때도 되지 않으셨나요?”

“순전히 제 문제입니다, 리젤로트.”

“예, 알아요. 하지만요, 아직 화해하신 것 아니잖아요? 그렇지요?”

발뺌할 길이 없었다. 화해는 싸워야 할 수 있는 것이고, 싸운 적 없다고 말하기에는 아롈의 실수가 너무 컸다. 아롈은 딱 한 번 삼십여 분 동안 약혼반지 없이 거울의 홀에 내려갔다. 이블린의 사람들은 사람의 손만 보는지 그걸 알아챈 사람이 있었고, 소문은 들불 번지듯 퍼졌다.

아롈은 화를 내야 하는가 따져보았다. 필리프는 호의적인 사람을 적으로 만들지 말라고 했다. 리젤로트는 아롈이 남편의 아내라는 이유로 친근하게 굴었다. 그녀는 차기 오를레앙 대공비이며 황제의 막내딸이다.

아롈이 결혼하기 전, 크리스틴이 수도원에서 돌아오기 전에 그녀는 이블린의 살림을 실질적으로 책임지고 있었다. 숙녀들과 두루두루 친하다. 조언을 들을만한 일도 많을 것이다.

멀어지면 잃을 것이 너무 많았다. 미셸과의 사이가 소원해지는 것은 덤으로 따라올 테고.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에서 벌컥 화를 내어 그녀의 입을 틀어막는 것은 옳은 선택이 아니었다. ‘행동해라, 다만 냉정해라.’ 아롈은 냉정하게 리젤로트의 오지랖을 참아냈다.

“물론 언젠가는 화해하시겠지만요, 그 날이 하루라도 빨라졌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제 마음 아시겠지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머리는 입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롈은 남편과 화해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원히 사이가 괜찮아지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롈은 그만한 일을 했다. 만약 누군가가 사샤의 일을 입에 담으며 빈정거린다면 그 뺨을 손수 후려갈길 자신이 있었다. 칼이 있다면 칼로 찌를지도 모른다. 알렉산드르는 죽지 않았다. 도망쳤을 뿐이다. 그래도 그는 그만한 무게였다.

그런데 ‘자살’을 입에 올렸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남편으로 하여금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가 자살할까봐 무조건적으로 다정하게 대하도록’ 만들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사이가 괜찮아질 수 있을까. 고작 화풀이를 위해서, 사람의 가장 아픈 부분을 찾아서 쑤셔버리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상처를 후벼 파면서 의기양양했는데.

아롈은 계승권을 잃었다는 사실을 되새기면서 느낀 비참함보다 스스로의 비열함에 더 수치심을 느꼈다. 릴레벨트, 그 역겨운 짐승에게는 긍지 없이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당당하게 지껄여놓고 채 두 시간도 안 되어 그 말을 어겼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아롈 자신에게 백 번이나 천 번쯤 들려주어야 할 말이었다.

어쩌면 노아이유 부인, 그 꼬장꼬장한 노부인의 말이 다 맞을지도 모른다. 아롈은 의기소침해진 채 몇 번이고 되뇌었다.

몇 달만 버티자. 몇 달만 버티면 다 괜찮아질 것이다.

주변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은 금세 다른 먹잇감을 찾아 몰려가겠지. 리젤로트는 아이를 낳으면 요양하느라 아롈의 일에 참견할 엄두도 내지 못 할 것이다. 필리프는 잔소리를 하겠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망쳐버린 것을 돌려놓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리고 남편은 그 때쯤이면 아롈이 죽을까봐 장의자에서 잠드는 것에 지쳐 정의관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아무도 아롈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조용히 자비관에서 해야 할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다. 황후가 가끔 불러다 화풀이 인형으로 삼는 것은 참으면 된다. 열두 살부터 열네 살까지, 거의 삼 년 가까이 조부의 고함을 참아왔듯. 황후는 아롈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적어도 아롈보다는 먼저 세상을 뜨겠지.

아롈은 멍하니 잘 꾸며놓은 정원의 경관을 바라보았다. 꽃의 이름에는 소양이 없어 하나하나 무슨 꽃인지 이름을 부르며 품평할 자신은 없었다. 그저 붉고 노랗고 희고 보랏빛인 꽃과 연둣빛 잎사귀가 어울려 알록달록했다.

날은 따스하고 바람은 서늘했다. 햇살이 머리카락을 데웠다. 외출 복장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챙 넓은 모자도 장갑도 없었다. 노곤노곤 잠이 왔다.

아롈은 항상 필요 이상으로 생각이 많은 소녀였고, 스스로의 판단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 번 어떤 일에 대해 판단하면 스스로 틀렸을지도 모른다고 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절망과 자기 비하 속에서 정교하게 짜낸 미래에 대한 전망은 너무 길고 무거웠다.

“있죠, 그러면요. 준비한 게 있는데요.”

“리즈. 늦어서 미안해.”

익숙한 목소리에 아롈은 소스라쳐 반쯤 감은 눈을 떴다. 미셸이었다. 그는 나무 뒤에서 나타나 리젤로트를 향해 팔을 벌리곤 환하게 웃어보였다. 태양 같은 애정에 가슴이 따끔거렸다. 미셸은 리젤로트에게 걸어오다가 뒤늦게 아롈을 발견한 듯 팔을 거두었다. 그는 대단히 곤란해보였다.

“아…….”

“괜찮습니다, 미셸.”

“죄송합니다. 아롈. 계신 줄 몰랐습니다.”

엄격히 따지자면 리젤로트가 미셸보다 이블린에서의 지위가 높았다. 리젤로트가 혼자 있었다고 해도 미셸은 먼저 기척을 내고 다가와야 했다. 하지만 리젤로트가 그런 예의를 미셸에게 요구할 리 만무했다.

“아닙니다. 리젤로트.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늦었다’고 말하는 걸 보면 리젤로트가 미리 미셸을 부른 것이 틀림없었다. 미리 약속을 해두었으면서 저녁 약속을 잡았단 말인가. 셋이 같이 식사를 하고 싶었다면 미리 말했어야 했다. 아롈은 이제 곧 결혼할 잉꼬 같은 한 쌍 사이에 끼어서 식사를 할 기분이 아니었다. 아롈은 불쾌감을 억누르며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아니, 아렐르.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오라버니! 왜 숨어서 안 나오시는 거예요?”

피가 식었다. 주먹을 채 말아 쥐기도 전에 손끝이 차가워졌다. 미셸을 똑바로 쳐다보자 그가 눈을 피했다. 같이 온 것이다.

목구멍에 후회가 치밀었다. 아롈은 수면 부족을 핑계 삼아 침실로 도망치지 않은 것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조금이라도 남편을 만나는 시간을 늦추고 싶었기 때문에 당장 쓰러질 것 같은 몸을 하고 리젤로트의 제안을 승낙했건만, 도리어 가장 피하고 싶던 사람의 앞에 곱게 묶여 배달된 꼴이 아닌가.

어떻게 이걸 모를 수가 있지. 준비한 게 있다는 말을 하자마자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어야 했다.

리젤로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토끼처럼 겅중겅중 미셸이 방금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나무 뒤로 달려갔다. 임신 초기의 임신부가 뛰는 것에 기겁한 미셸이 뒤를 따랐다.

“어서요. 숨어 계시면 뭐가 바뀌나요?”

리젤로트가 남자의 팔을 붙잡고 끌어냈다. 이내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한 녹색 눈이 햇살을 직접 받아 따뜻한 기운을 띠었다. 리젤로트와 미리 짜고 한 행동은 아닌 듯, 그와 미셸이 난감하다는 듯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연기는 아니었다. 입모양으로 서로 대화를 하더니, 미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렐르. 오라버니. 좋은 시간 보내세요.”

리젤로트는 재빨리 미셸의 팔짱을 끼더니 시녀들까지 죄다 채근해서 사라져버렸다. 축복받은 맑은 오후, 아롈은 세상에서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랑하는 사람과 단 둘이 정원에 남겨졌다.

한 편 더 쓰고 자고 싶은데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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