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바라마지 않는 (4)
빅투아르 조제핀 피아프 - 사망.
조르디 루이 피아프 - 사망.
이다 소피 부이에 - 사망.
나탈리 가브리엘라 피아프 – 부적합.
라파엘 크리스티앙 리슬링 – 부적합.
보르디 대공자이자, 샤를루아 공작인 필리프는 손에 든 서류들을 한 장 한 장 죽 확인하고는 외눈 안경을 올려 썼다. 마음에 드는 게 없다. 그는 부싯돌로 양초에 불을 붙인 뒤, 서류를 불살랐다.
그의 뺨에 품위 없이 바람이 들어갔다가 빠졌다. 그가 보르디 본성에 전갈을 넣어 받은 서류들은 모두 보르디 가문의 일원이 만든 사생아들에 대한 서류였다.
로렌의 대공가치고 사생아 없이 깨끗한 혈통으로 유지되는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간혹 정부도 두지 않고 창녀를 멀리하는 ‘별종’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대부분의 인간은 허락된 유혹에 취약했다. 가랑이에 있는 막대기를 여인의 몸속에 쑤셔 넣고 자제력 부족의 증거인 희고 탁한 액체를 마음껏 분출하는데 아이가 생기지 않을 리 만무했다. 아비가 누구인지 알 바 없는 창녀들이 밴 아이들은 차치하더라도, 아이를 낳고 그 대가로 여생을 보장받길 원하는 정부들의 수만 해도 상당한 수였다.
따라서 어지간한 가문들은 언제나 사생아의 거취 문제에 골머리를 썩였다. 루이 오귀스트 황제만큼 통 크게 사생아에게 공작 작위와 영지, 계승권(비록 그 계승권이 한없이 미약하다 하더라도)을 주는 것은 아니더라도, 수십 명의 사생아를 건사하는 데에는 당연히 상당한 금액의 돈이 매년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필리프는 사촌 누이의 부탁으로, 그 사생아들에 대해 한 명 한 명 자세히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사망신고서가 첨부된 아이들에 대한 서류와 조사 결과는 빠르게 넘겼다. 서른 살 가까이 어린 친애하는 사촌누이가 필리프에게 부탁한 것은 ‘살아있는’ 마법사 혈통의 아이였으므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7인의 맹세 당시 보르디 가문의 공작이었던 테오도르의 딸 에디트와 오베르뉴 가문의 로베르의 부인인 엘레오노라는 마녀였다. 그녀들이 마지막 용이었던 크루아흐(Cruaich)의 이름을 알아내었고, 그 덕에 일곱 명의 기사와 그들이 이끄는 수천 명의 병사들은 크루아흐의 목을 베고 심장을 가르는 데에 성공했다.
그 당시에도 로렌은 마법사를 천대하는 나라였다. 마법사가 황족과 왕공족이 되어 혈통을 보존한 북쪽과는 달리 남쪽에서는 특별히 마법을 푸른 피가 독점하지 않았다. 천민들 사이에서도 심심찮게 마법이 나타났고, 그들이 일으키는 이적도 강하지 않아 그저 잔재주에 불과했다.
역사에서 흔히 부리는 사내들의 오만함에 ‘마녀’들의 공적은 진흙 속에 묻혔다. 하지만 혈통은 묻히지 않았다.
오베르뉴의 로베르는 엘레오노라를 죽인 뒤 재혼해서 아들을 얻어 오베르뉴 대공가를 물려주었다. 엘레오노라는 죽기 전 딸 둘을 남겼다. 그녀들은 각각 오베르뉴의 방계 가문에 시집갔다. 후일 로베르의 아들이 죽자 엘레오노라의 둘째 딸이 오베르뉴 대공비로서 가문을 이었다.
보르디의 경우에는 조금 더 화끈하게 마녀의 피가 섞여들었다. 테오도르 역시 가문을 물려줄 아들이 없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는 조카와 딸 에디트를 결혼시켜 조카에게 보르디 대공 작위를 바친 뒤 은퇴하여 시골로 내려갔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모든 보르디 가문의 후손들은 에디트의 후손이었다.
약 백이십 년 뒤 성황청의 마녀 사냥 명령이 떨어졌다. 마녀와 마법사를 신의 역사(役事)로 인정한 북쪽의 코시카 정교회와 달리 성황청은 마녀(witch)를 반인반마, 혹은 악마에게 처녀성을 바친 사악한 계집으로 정의하고 숙청을 시작했다.
당시 로렌의 일곱 가문은 이미 피가 섞일 대로 섞인 상태였다. 대공가와 일반 공작가는 격이 맞지 않다는 인식이 슬금슬금 생기면서, 대공가들은 가신들과 결혼하는 것을 그만두고 대공가끼리 통혼하기 시작했다. 약 여섯 대 정도 피가 정신없이 뒤섞였다. 여섯 대공가의 일원들을 죽 세워놓고 둘을 찍었을 때 공통조상이 없는 사람이 없었다.
그 때 성황청의 마녀 사냥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정적을 찍어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며 신나게 가계도를 펼쳐든 대공과 황제들은 당황했다. 그들 자신에게, 혹은 누이의 남편에게, 이복동생에게, 아들에게 마녀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로렌 건국 이후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졌다. 여섯 대공가와 황가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그렇게 떳떳하지는 않아도 지나가듯 내려오던 마녀의 도움 이야기가 완전히 잿더미 속으로 사라졌다. 일곱 가문이 합심해서 묻어버렸던 것이다.
애초에 로렌에 있는 대부분의 마녀와 마법사들이 부리는 마법은 북쪽의 마법사들이 부리는 규모가 거대한 마법, 예를 들어 한 지형의 기후를 바꿔버리는 등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이나 다름없는 잔재주였다.
쉬쉬하고 숨기며 이야기는 묻히고, 시간이 흘러 동부의 마지막 마법사 이래로 세상에서 마법이 사라졌다. ‘공식적으로는’ 마법사가 발견된 바가 없었다.
하지만 필리프는 가벼운 잔재주를 부릴 수 있었다. 허공에 불을 일으켜 물건을 태우는 재주, 그리고 원하는 곳에 어떤 물건을 보내는 재주였다. 열다섯 살 때부터 가능했고, 그는 후계자의 장자였으므로 쉬쉬하며 어디론가 보내져 실종되는 일은 겪지 않을 수 있었다.
보르디 대공가에서는 필리프와, 필리프의 딸인 소피만이 이런 ‘성황청을 뒤집어놓을 수 있는’ 잔재주를 부릴 수 있었다. 부인이자 사촌누이인 이본느나 아들인 아를랭 공작 도미니크도, 필리프의 아버지인 보르디 대공도 할 줄 몰랐다.
보르디 대공가에 마법이 전해오는 것을 보아, 다른 대공가에도 이런 잔재주를 부릴 줄 아는 마법사 혈통이 아직 내려오고 있음은 분명했다. 오를레앙의 미셸과 황제의 사생아 멘 공작 앙투안이 마법사라는 푸른 용의 증언으로 보았을 때 이미 모든 대공가와 황가에는 그런 혈통이 섞여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 때부터 필리프는 모든 기록을 뒤졌지만 사생아와 보르디 성을 가진 직, 방계 후손에 대한 정보를 전부 털어보아도 삼백삼십 년 전부터 사십 년 전까지는 이적을 일으킨 흔적이 없었다. 쉽게 추론할 수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세상에 마법이 사라졌다가, 조금씩 돌아온다. 용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벽난로에 흔들의자를 놓고 앉아 손자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할아비로서는 흥미로운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으나, 필리프는 거기에 어떠한 모험적 흥분이나 호기심을 느끼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마담 라 세르가 요청한 마법사 자질이 있는 아이였다. 아롈은 되도록 여자였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필리프는 한숨을 쉬었다. 최소한 그가 관리하고 있는 가문의 사생아 중에서는 이적을 일으킨 자가 없었다. 사생아의 자식, 혹은 자식의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가문의 사생아가 가장 쉬운 길이었는데 귀찮게 되었다. 필리프는 파이프에 담배를 채워 넣고 연기를 빨아들였다.
사생아들의 유모가 이단으로 몰릴까 두려워 죽여 버렸을 가능성이 있다. 혹은 가문의 추궁에 숨겼거나, 본인이 숨기고 있거나. 살아있는 이들을 데려다가 조금 더 집중적으로 추궁해볼까, 아니면 돈줄을 끊어볼까. 아니, 보르디 본성에 눈에 띄는 짓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리고, 둥그런 얼굴의 중년 부인이 들어왔다. 샤를루아 공작부인이자, 이제르 공작녀인 이본느였다. 이본느는 선대 보르디 대공의 손녀인 필리프의 사촌인 동시에 필리프의 부인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본성에서 뭐가 왔다고 하던데요.”
“도미니크 말이야, 젊었을 때 놀던 여자들 누구누군지 당신 기억하고 있나?”
“글쎄요. 잊어버리지는 않았지요. 무슨 일인가요?”
“애는? 생겼나?”
이본느의 얼굴이 흐릿해졌다.
“아뇨. 제가 알기로는요.”
이본느는 생각보다 세심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이었다. 필리프는 파이프를 내려놓고 고개를 저었다.
“직접 물어보는 게 낫겠군.”
“사생아가 필요한 일이라도 있나요?”
“응. 있는 대로 필요한데. 여기 있는 자들 말고 아는 사람 있나?”
필리프가 자연스럽게 서류를 넘기자 이본느는 서류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가문의 사생아를 챙기는 것은 안주인의 일이기도 했다.
이본느는 생긋 웃었다.
“언니가 죽기 전에 낳은 여자애들이 있어요. 모계여도 상관없다면요.”
아무렇게나 욕망을 싸지르면 신체에 해가 없는 사내들과는 달리 여인들은 임신을 하면 열 달 동안 배가 부푸는 등 온갖 고초를 겪게 된다. 자연히 여성이 사생아를 낳는 일은 매우 적었다. 따라서 서류에 있는 아이들은 전부 보르디 부계의 사생아들이었다.
필리프는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사생아, 그것도 여자애.
“살아있어?”
“시체를 당신에게 들이대는 취미는 없는 걸요. 불러올까요?”
필리프는 아내의 손등에 입 맞추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그냥 소재만 적어주면 내가 알아서 하지.”
“알았어요. 그럼 도미니크를 불러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