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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10. 바라마지 않는 (13)


 아롈은 그를 보고도 울거나 소리지르지 않았다. 대신 앤에게 손짓했다.

"앤, 먼저 돌아가서 벽난로에 불을 좀 켜놓거라."

"예, 전하."

검은 머리의 처녀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건 가져가고."

아롈은 등불을 땅에 잠시 내려놓더니 목걸이의 잠금쇠를 풀었다. 은빛 줄에 파란 보석이 달랑달랑 흔들렸다. 앤은 그 보석을 공손히 양손으로 받아 손목에 매었다. 그리고는 아롈이 들고 있던 등불과 자신의 등불을 바꿔들고 저 멀리 총총히 사라졌다. 아롈은 등불을 다시 힘겹게 들어올렸다. 유리에 보호받고 있는 등불은 기름을 먹고 기세 좋게 타올랐다. 기름이 꽉 차 있었다.

"앤을 몰래 쫓아오신 겁니까?"

"보고 싶었어요."

아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한 손에는 우산, 한 손에는 등불을 들고 있어 문지를 손이 없었다.

“레르헨펠트 양이 아니라, 아렐르가 보고 싶었어요.”

흰 숄을 두른 어깨가 잠시 들썩이다가 내려앉았다.

"침실에 있었는데, 아렐르가 보였어요. 사실은 레르헨펠트 양이었지만. 우산이 너무 커서 머리카락도 체구도 안 보이고 치맛자락만 보였거든요. 그 옷이 기억에 남았어요. 그냥 몸이 따라 움직여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조리 없는 말이었다. 빗방울이 차가웠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아렐르는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나요? 물어봐도 될까요?"

"산책 나왔습니다."

날이 섰던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러나 세시안은 그 기색을 깨닫지 못했다.

얼굴을 보았으니 이만 여기에서 깔끔히 인사하고 돌아서면 그나마 모양새가 좋을 것이다. 그러나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여자 혼자 두는 것이 걱정된다느니 하는 이유가 아니었다. 물론 걱정되긴 하지만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은 다른 감정이었다.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소녀는 유독 휘황했다. 그 미모가 아니라 단단한 눈빛이. 언제 울었냐는 듯이, 무너졌냐는 듯이 며칠 만에 금세 추스르고 서 있었다. 비록 그 근간이 그에 대한 거부나 원한이라고 해도 그 강단은 찬란하기만 해서, 불꽃에 뛰어드는 부나방의 심정으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 펜대, 혹시 네가 줬어? 상아로 된 거.

세시안은 미셸이 물었던 말에 기대어 약간의 희망을 품고 조용히 서 있었다. 그가 준 선물을 아직 아끼는 거라면, 아직 그 역시 아롈에게는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할 말이 없었다. 말을 잘못 꺼냈다간 금세 쫓겨날 것 같았다. 이 늦은 시간에 산책이냐고 잔소리를 하는 것도, 앤을 보내면 안 되었다고 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아 보였다. 그 많은 사교기술은 다 어디로 가고 그는 벙어리가 되었다. 아롈은 멀뚱히 그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는 아롈이 당장 꺼지라고 소리를 지르거나 울지 않는 것만으로도 안도했다.

그렇게 빗속에서 얼마나 서 있었을까.

"에취."

그의 어깨가 먼저 들썩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머리부터 조끼, 셔츠, 크라바트까지 몽땅 젖어 있었다. 소나기보다는 부슬비에 가까운 비인데 언제 이렇게 젖었을까. 그는 간신히 팔 안쪽으로 입을 막고 고개를 돌려 기침을 했다. 앓다가 막 일어난 사람에게 병균을 옮기기는 싫었다. 그는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때 아롈이 세 발짝 다가왔다. 새파란 우산은 아주 컸다. 팔을 조금 내밀자 그의 몸까지 우산 안에 들어갈 정도로.

고무나무의 진액을 발라 방수처리를 한 천 위로 빗방울 튀기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빗방울 한 개당 한 번 씩,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얼얼했다.

“우비도 안 가지고 나오셨습니까?”

“아렐르를 놓칠까봐 급했어요.”

충동이 강해졌다. 눈도, 코도, 입술도, 그가 입 맞추고 싶은 부분들이 죄다 너무 가까웠다. 겨우 한 발자국, 아니 발걸음을 뗄 필요도 없이 고개를 숙이면 닿을 텐데. 차가운 피부 속으로 열기가 피어올랐다.

“아렐르가 저 때문에 젖는군요.”

그는 생긋 웃으며 뒷걸음질 쳤다.

다시 빗소리가 작아지고, 몸을 때리는 비는 많아졌다. 차가운 비가 몸속을 식혔다. 남자가 우산을 쓸 수 없다는 체면 때문이 아니었다. 거부당할 용기가 남아있지 않았다.

소녀는 두 번 권하지 않고, 우산대를 원래대로 거두어 비스듬하게 어깨에 얹었다. 철이 아닌 나무로 대와 살을 만든 우산인데도 한 손으로 받쳐 들기 버거운 듯 팔이 경련했다.

그리곤 소녀는 갑자기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걸음걸이에는 약간의 짜증이 섞여있었다. 따라가도 되는가 고민하던 그 순간에 아롈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홀린 것처럼 뒤따라갔다. 도서관이 나왔다.

아롈은 현관 처마 밑으로 들어가 등불을 내려놓고 우산을 접었다. 채 비가 들이치지 않았던 입구의 계단이 짙게 얼룩졌다. 세시안은 조심스레 그 처마 밑으로 따라 들어가 조끼 주머니 안쪽에 있는 손수건을 꺼내어 얼굴과 머리카락을 닦고, 어깨를 털었다. 그러나 온 몸이 젖어 물기가 털려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롈은 지친 듯 입구에 있는 계단 난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사실 난간이라기보다는 턱에 가까울 정도로 낮았으므로, 무릎이 솟 아올라 있었다.

구두코가 툭툭, 등불을 쳤다. 와서 불이라도 쬐라는 뜻이었다. 목울대가 떨렸다. 그는 몸에 밴 웃음을 머금어보였다.

"고맙군요."

그는 난간에 입지 않고 들고 온 코트를 뒤집어 깔았다. 겉은 다 젖었지만 속은 그럭저럭 보송한 채였다.

"찬 바닥에 앉지 말아요."

아롈은 그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순순히 그 위로 자리를 옮겼다. 세시안은 조심스레 거리를 재어보았다. 몸이 닿지 않고, 그녀가 포르르 도망치지 않을 법한 가장 가까운 거리. 그 곳보다 아주 조금 가까운 곳에 욕심내어 앉았다. 아롈은 미동도 하지 않고 불꽃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술이 달싹였다.

"전하, 전 오늘 방에 안 들어갈 겁니다. 그러니 놔두고 가셔도 됩니다."

가달라는 말이 아니라 놔두고 가도 된다는 말이었다. 세시안은 미셸의 말을 잠시 떠올렸다. 간파하기 쉽다고. 하지만, 그건 실패해도 괜찮은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는 바짝 긴장한 그대로였다.

"놔두고 가라는 말은 하지 않는군요?"

"가달라고 말씀드려도 안 가실 것을 압니다. 저는 지금 피곤하고, 또다시 추하게 울거나 소리 지르고 싶지 않습니다."

아하, 이 관용은 그에 대한 불신에서 나온 모양이었다. 씁쓸했다.

"누구 만날 사람이라도 있나요?"

"없습니다."

"그럼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싫다고 하면, 말씀드릴 때까지 또 다그치고 강요하실 겁니까?“

-뭐라도 말하라고 하셨습니까?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제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마음대로 하실 것 아닙니까? 그런 면에서 전하께서도 제게 잔인하기론 두 분 폐하와 매한가지십니다.

"아뇨."

세시안은 무조건 솔직하게 굴기로 결정했다. 수작을 부렸을 때 모를 만한 사람도 아니었다. 통하지 않을 수작이라면 처음부터 부리지 않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말해주면 고맙겠어요. 듣고 싶군요."

아롈은 그에 대한 불신을 가늠하는 듯하다가, 체념하듯 대답했다.

"오늘은 저 때문에 죽은 사람들의 일주기 기일입니다."

예브게니아 드미트리예브나 카나예바, 이오아나 세르게예브나 벨라예바, 타티아나 이바노브나 솔다토바, 율리야 알렉세예브나 코발리예바,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켈친 대위, 근위대 제3연대 대원들, 아롈은 나지막히 몇 명의 이름을 읊조리더니 무릎을 끌어안고 마지막 이름을 불렀다.

"파블 1세 폐하.“

로렌에는 그런 황제가 없다. 그리고 일 초 뒤 충격이 머리를 때렸다. 아롈은 여전히 흔들림 없이 불꽃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코시카의 파블 1세는 그녀의 아버지였다. 삼십 년 전 세계를 휩쓴 염문의 주인공이자, 그 염문의 다른 주인공인 아내에게 죽어 황위를 빼앗긴 북쪽의 황제. 

오늘은 조금 짧네요. 
모니터가 생각보다 빨리 도착해서 아마 밤에 한 편 더 올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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