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바라마지 않는 (15)
“일 년 전 오늘, 저는 잠이 오지 않아서 침실에서 책을 보고 있었습니다. 제 시녀들은 옆에서 차를 마시며 저들끼리 수다를 떨고 있었고. 자정을 넘기고 한참 지나서 슬슬 자리를 파하려는데 갑자기 시끄러워졌습니다. 타냐, 아니 율리야였을 겁니다. 그 애가 주의를 주겠다며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셋이 더 죽고 둘은 살았습니다.”
생각도 못했던 말들에 아찔했다.
“제 시녀들 넷의 피를 뒤집어 쓴 낯선 남자들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회랑으로 도망쳤습니다.”
회랑이 무언지는 물어볼 수 없었다. 흔히 말하는 그림을 걸어놓는 빈 방이나 열주로 지탱한 복도를 뜻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생각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계획이 들킨 건가. 그렇다면 왜 시녀 여섯 중 넷만 죽고 둘은 살았을까. 스미르노프 백작가, 모스크바 공가. 그 둘이 배신한 걸까. 누군가 배신한다면 그 사람은 제냐일 줄 알았는데 내 예상이 틀린 건가. 들켰다면 어서 도망쳐야 하는데 왜 다리가 움직이질 않을까. 그리고 어머니가 회랑에 들어왔습니다. 만삭이었던 배가 홀쭉했습니다. 그 때 알았습니다. 어머니가 낳았을 아이는 건강한 남동생이라는 걸. 어머니는 이 일을 오랫동안 준비하고 있었고, 저는 어머니에게 졌다는 걸.”
아롈은 미소를 머금다가 기침을 했다. 당장 피가 흘러내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격렬한 기침이었다.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헐떡였다.
“하아, 하아.”
괜찮으냐고 묻는 것이야말로 기만일 터였다. 괜찮을 리가 없으니.
“그 다음은 지루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어머니의 앞에 무릎 꿇었고, 육 개월 정도 갇혀 있다가, 결혼을 받아들였고, 계승권을 포기했고, 지금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일 년이나 지난 지금, 오늘만은 침실에는 못 있겠더군요. 그 뿐입니다.”
옐레나 ‘파블로브나’는 등불에서 눈을 떼어 세시안을 바라보았다. 항상 새싹 같다고 생각했던 눈이 녹조 낀 호수 같았다.
“전하, 제가 저열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채 질문을 꺼내기도 전에 설명이 뒤따랐다.
“전하께 계승권을 내놓으라는 식으로 떼를 쓴 것 말씀입니다.”
“그게 왜 아렐르가 사과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군요.”
“제가 사람을 가려 화를 낸 것이 부당했노라고 인정하는 겁니다.”
소녀는 손깍지를 꼈다. 적갈색 소매 아래로 가늘게 뻗은 손에는 족쇄처럼 반지 두 개를 끼고 있었다.
“저는 제 어머니께 왜 제게 그러셨느냐고 따진 적이 없습니다. 조금 빈정거리다가 얌전히 시키는 대로 결혼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제게 정치에 상관하지 않고 아이를 낳는 데에만 힘쓰라고 암시하셨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읽으라고 하시니 읽고, 가라고 하시니 숨 한 번 못 쉬고 물러났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저를 무릎 꿇리셨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벌어진 상처에서 뿜어지는 피처럼 토해지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심장에 가까운 쪽을 묶거나, 상처를 꿰매거나, 하다못해 손으로 상처를 막아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못하고.
“그런데 전하께는 화내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건 전하께서 제게 주신 이유 없는 호의와 관대함에 기대어 제게 크게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해서 낸 화였습니다. 제가 졸렬했습니다. 다른 날 말씀드리려 했지만 만난 김에 말씀드립니다.”
그야말로 고상한 결벽이었다. 아버지의 원수에게까지 적용되는 자기 검열. 결코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성격은 아니었다.
“아렐르. 사과하지 말아요.”
“아실 필요가 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제가 이반 3세 폐하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사과하는 것은 꼬박 십 년만입니다. 저는 사과하지 않아도 될 일에 사과하지 않습니다.”
“스스로에게 가혹하게 굴지 말아요.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차라리 절 원망해요. 어떻게 보상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왜 제 계승권을 전하께서 보상하십니까?”
“저 때문에 아렐르가 이렇게……, 예, 이렇게 되었으니까요.”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다. 아버지와 시녀들과 그 이외의 모든 것을 잃고 남쪽에 홀로 떨어진 소녀. 바짝 말라 옷의 허리 부분이 헐렁했다.
“자의식 과잉이십니다. 저는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만큼 가엾지 않습니다.”
“저는 아렐르를 동정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제가 아렐르에게, 아니 코시카 황위 계승권에 관여한 일에 대해서 사과하고 있는 겁니다.”
“칠천만 코페이카,”
아롈의 입에서 처음 듣는 단위가 튀어나왔다.
“루아르 금화로 환산하면 약 일억 정도 되겠군요. 대회의에서 듣기로 올해 예산이 삼억 루아르. 다른 잡다한 물품들의 가격은 넘어가더라도 제 지참금으로 로렌에 넘어간 금화만 일 년 예산의 삼분의 일입니다. 로렌 포도주에 대한 관세를 감하고, 코시카 령(領) 항구에 정박한 로렌 배에 대해서 항만세를 면해주고. 옐레나 1세 폐하께서 얼마나 더 많은 이권을 넘기셨는지는 모르지만 그 모든 이익을 얻는 대가로 중앙기사단 연대 한 개면 값싸지 않습니까.”
그 역시 눈을 감았다. 그가 사랑하는 소녀는 한 번 울먹이지도 않고 그가 그녀를 떨어뜨려야 마땅했던 이유에 대해서 차분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나요. 중앙기사단 1연대에 대해서.”
“대회의 며칠 전에 실수로 서류를 봤습니다.”
“기억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 서류에 코시카라는 말은 단 한 마디도 없었어요.”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만큼의 정보가 있었습니다.”
“포도주 관세나 항만세 감면에 대해서는?”
“무도회에서 부인들과 떠들면서 얻어들은 정보로 어림짐작했습니다. 방금 확신을 주신 건 전하십니다만.”
나 역시 당신과 같은 자격을 가지고 있던 자였노라고 외치는 듯했다. 일상적인 대화를 부드럽게 이어나가는 것도 간혹 힘들어하면서, 이런 면에서는 놀라울 정도다. 그러나 그는 이전처럼 찬탄하며 그녀를 끌어안을 수 없었다. 그녀가 거부한 죄책감은 가슴에서 떨어지기는커녕 점점 무거워졌다.
“단언하건대, 일개 연대 하나로 로렌 황위와 그 모든 것을 손에 쥘 방법이 있었더라면 저 역시 마땅히 그리 했을 겁니다.”
우는 게 그토록 무서웠는데, 차라리 이런 이야기를 할 때에는 울었으면 했다. 아롈은 오랜 병 끝에 유언을 읊는 사람처럼 초연하기만 했다.
“그러니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요.”
“동정 또한 필요 없습니다. 이 모든 건 제가 선택한 겁니다.”
“아렐르. 제가 잘못한 거예요.”
"저는 패배하지 않을 방법이 있었습니다. 제가 어머니께 진 것은 저울에 달았을 때 제 패배가 저와의 맹세보다 가벼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혼하기로 결정한 것은 제 패배로 인한 모욕보다 제 삶에 대한 욕구가 무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는 저 이외에 아무도 원망할 자격이 없습니다. 조의를 표할 자격도 없습니다.“
“아렐르.”
그 성격은 실로 자기파괴적이어서, 세시안은 조금 화가 났다. 긍지, 명예, 좋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사람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소녀는 그런 모든 가치보다 자신을 아래에 놓는 듯 보였다. 긍지나 명예, 신의는 사람을 이루는 구성 요소다. 보석처럼 소중히 여겨야 할 것들이지만 보석을 위해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그러니 제게 죄책감 때문에 잘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분노를 잠시 접어둔 채 고개를 들었다.
“아렐르, 제가 좋아서 한 일이에요.”
“바로 그런 동정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진심 없이 달래려고 하시는 말씀은 비참합니다.”
“달래려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전 진심이에요.”
아롈은 입술을 꾹 깨물곤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저는 오늘만큼은 전하와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물으시는 대로 대답해드린 건 그 때문입니다. 그저 솔직하게 이야기하셔도 저는 죽지 않을 겁니다.”
“저는 아렐르를 사랑해요. 아렐르가 죽을까봐 달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긴 한숨이 뿜어졌다. 아롈은 긴 대화에 지친 듯 잠시 이마를 짚었다.
“분수대에 앉아계시다가 창가에 있던 저와 눈 마주쳤던 날, 기억하십니까?”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아롈은 빈정거리듯 턱을 약간 기울였다.
“그 날, 제가 죽을까봐 뛰어 올라오셨던 것 아닙니까? 보통 사람은 창가에 앉아있는 여자를 보고 투신을 떠올리지 않습니다.”
“그건…….”
“황제 폐하께서 저를 불러다가 성경을 읽게 하셨던 날도, 황후 폐하께서 절 무릎 꿇리셨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상심해서 죽어버릴까 그렇게 원인을 캐묻고 달래려고 애쓰셨던 거잖습니까.”
세시안은 거짓말을 고려해보다가, 이내 그것이 통할 사안이 아님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예. 처음엔 그랬어요. 하지만……, 아렐르.”
“제 몸에 손대시면 소리 지를 겁니다.”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아롈은 이를 악물곤 손수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았다.
“울지 말아요. 제가 다 잘못했으니까, 제발 울지만 말아요.”
“솔직하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끝내려고 하지 말아요. 부탁할게요. 제발 끝까지 들어줄래요?”
세시안은 아롈의 치맛자락이라도 붙잡을 기세로 매달렸다. 그리고 아롈은 눈을 꼭 감으며 숨을 골랐다. 그러나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계속 흘러나왔다.
“чёрт, чёрт, чёрт, чёрт, чёрт.”
“아렐르.”
눈이 뜨였다. 눈물 맺힌 금빛 속눈썹에 호위 받고 있는 초록빛 눈동자에 분노라고 할 만한 것이 서려있었다.
“그럼 대답해주십시오. 제가 손목에 유리조각을 박으려고 하기 전에는 왜 한 번도 ‘그 말씀’을 안 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