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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10. 바라마지 않는 (24)


 아롈은 자비관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었다. 묵직한 남빛 옷감에 금실로 수놓은 옷, 큼직하고 장중한 느낌의 보석들은 쉽게 보이지 않으려 고르고 고른 것들이었다. 귓불에 무겁게 달려있던 귀걸이를 손수 빼냈다. 흰 손끝에서 보랏빛의 사파이어가 달랑였다.

아롈은 속옷 차림인 채로 가만히 보석을 들여다보았다. 직사각형 모양으로 세공한 돌 속에서 빛이 아롱거렸다. 생각이 얽혀들었다.

“전하.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옵니까?”

아롈의 시중을 들던 앤이 물었다. 들고 있던 귀걸이를 내려놓았다.

“아무 것도 아니다. 이걸로 하자꾸나.”

“예.”

앤은 아롈에게 옷을 입혀주었다. 초록 기가 도는 노란색이 화사하면서도 가을 분위기를 냈다. 가슴팍까지 길게 늘어지는 마노 목걸이와도 잘 어울렸다. 귀걸이는 너무 과한 듯해서 하지 않았다.

곁방 밖으로 나가자 남편이 이미 도착해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아롈을 끌어안다시피 이끌어 앉혔다.

“그렇게 안으시면 옷이 구겨집니다. 내려가야 하지 않습니까.”

“내려가지 않아도 괜찮아요. 폐하께서는 마음이 바뀌셨다는군요.”

“그렇습니까.”

탁자에는 차가 놓여 있었지만 손대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황제의 결정을 기다리는 동안 차를 잔뜩 마셔 뱃속에 찻물이 출렁이는 것만 같았다. 여태 긴장이 풀리지 않아 속이 울렁거렸다.

“그보다 오늘도 눈부시게 예쁘네요.”

손가락, 손등, 손목에 차근차근 입술이 닿았다.

“이런 색도 잘 어울리는군요. 몰랐어요.”

애정 표현은 좋았지만 지금은 남편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몇날 며칠 잠을 아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준비하여 고민하였건만 대화를 그렇게 끊어버린 것이다.

언짢은 기색이 비쳤는지 세시안은 생긋 웃었다.

“할 말이 있나요?”

“대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약속은 석찬이었으니 시간은 한참 남아 있었습니다.”

“제가 기분을 상하게 했나요.”

아롈은 거짓말에는 서툴렀다. 조금 망설이다가 결국 솔직하게 내뱉었다.

“예.”

남편의 말이 비로소 이해가 갔다. 화가 나는 것과 애정은 별개였다. 이 사람이 좋아서 정신없이 두근거리는 것도 사실. 하지만 그가 아롈을 속상하게 한 것도 사실.

입술을 깨물고 눈을 내리까는 대신 눈을 마주쳤다. 짙은 녹색 홍채에 흰 얼굴이 거울처럼 비쳐보였다.

“저를 부끄럽게 만드셨습니다.”

​“​이​야​기​해​줄​래​요​?​”​

“고작 차 한 잔 마시는 자리였을 뿐입니다. 걱정하실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정말인가요?”

물론 아니었다. 세시안은 아롈의 손등을 쓸어내렸다.

“솔직하게 말해줘요.”

“걱정하실 일이 없었다는 건 사실입니다. 폐하께 드려야 할 청이 있어 제가 먼저 알현을 청했습니다.”

“무슨 청인가요?”

살려달라는 청이었다.

해상 봉쇄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악수였다. 코시카가 대국인 것은 사실이고, 두 개의 전쟁을 감당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었으나, 세 개부터는 문제가 된다. 언제든 선전포고를 할 수 있는 상황을 유지하지 않으면 위엄이 서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압박할 수단이 약해진다는 것은 곧 코시카 영향력의 축소와 연결되는 일이었다.

코시카 뿐만 아니라 아롈에게도 힘든 일이엇다. 고르고 골라 웨데나라니. 어머니가 폐주의 딸들을 죽이고, 이 김에 계승권자들을 싹 쓸어버리겠다는 생각을 못 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말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는지 다시 한 번 점검하여 말을 거르고 있는데, 세시안이 뺨에 손을 올렸다.

“아렐르. 무슨 일이 있으면 제게 말해줘야죠.”

“저는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제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습니다.”

뺨에 올린 손이 따뜻했다. 세시안은 아롈보다 체온이 높은 편이었다.

“알았어요. 말해줄 수 있을까요?”

“그리 싸고도실 필요 없습니다.”

너무 냉랭하게 말하지 않았는가 잠시 머뭇거렸다. 아롈은 뺨을 감싼 손을 떼어 꼭 잡았다.

“아렐르와 폐하 사이의 일이라서요?”

남편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오해가 두려워 고개를 저었다.

“참견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전하께서는 제가 혼자 하고 싶은 이야기도 못 하고, 차 한 잔 제 손으로 못 마시는 사람으로 만드셨잖습니까. 오늘은 제가 오래 생각하고 신중하게 결정해서 폐하께 알현을 청했던 것이었습니다.”

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 털어놓자 너무 솔직했던 것 같아 후회가 되었다. 굳이 구구절절할 필요 없는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곁에 있기로 했다. 그리고 남편은 아롈이 이야기를 해주길 바랐다.

“예. 그래서 화가 납니다.”

문득 짙은 숲 같은 녹색 눈이 무척이나 애틋한 빛을 띠었다.

“저는 분명 아렐르의 그런 점을 사랑하지만.”

그는 손을 들어 올려 손끝에 입을 맞추었다.

“저를 조금만 생각해주면 안 될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아렐르가 정의관에 폐하를 뵈러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는 정말로 걱정했어요. 폐하께서 무슨 소리를 하셨을지 몰라서 조마조마하고, 아렐르가 또 울면 어쩌나 싶어 머릿속이 하얗게 비더군요.”

“과장이 심하십니다.”

“정말이에요. 아렐르만 아는 비밀이지만, 저는 겁이 많아요.”

“…….”

“무슨 일인지, 왜 가는지, 하다못해 뵈러 간다고 미리 이야기해줬더라면 그렇게 안절부절못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아롈은 습관적으로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추태를 보이기 싫다거나, 비밀을 말하기 싫다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걱정할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로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자랐다.

“많이 걱정하셨습니까?”

“아주 많이요.”

한숨 섞인 목소리였다.

“아렐르가 우는 게 너무 무서웠어요.”

“저는 그리 쉽게 울지 않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설득력이 없었다. 그런 것치곤 남편의 앞에서 너무 눈물을 자주 쏟았다.

“정말입니다. 요 한 달이 특이했던 것뿐입니다.”

“알았어요.”

비로소 그가 웃었다.

“제 행동이 과했어요. 미안해요. 그러니 화를 풀어줄래요?”

“다시 그러지 마십시오. 저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간식을 밀어주신 건 정말로 창피했습니다.”

세시안은 짧게 웃었다.

“미안해요.”

“약속하셨으니 그걸로 되었습니다.”

“제가 대화를 끊어서 미안해요. 폐하께 다시 만나 달라 청하지요.”

“알현 신청 정도는 저 스스로 할 수 있습니다.”

남편은 손을 올려 천천히 뺨을 쓸어내렸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무척 자상하고 다정해서 기분이 이상했다. 이대로 눈을 감고 안주해버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강해서 좋다고 했는데.

“저를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처럼 다루시면 저는 정말로 쓸모없는 사람이 될 겁니다.”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서 남편의 고백을 되새겨보았다. 강하고, 성실하고, 책임감 강하고, 똑똑하고, 항상 노력하고, 의연하고, 자존심 강하고, 긍지 높아서 좋다고 했다.

원래도 소중히 여기던 덕목들이지만, 인정을 받자 흠 없이 간직하고 싶었다.

“그럴 리가요. 이렇게 반짝이는데.”

노래 같은 목소리가 시 한 구절을 읊조렸다.

그대 알고 있나요? 별은 낮에도 별이고, 꽃은 시들어도 꽃인 것을.

인정받는 기분은 늘 새롭게 두근거렸다.

“제가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면 미안해요. 하지만 저는 아렐르가 다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 뿐이에요.”

이미 준 상처가 너무 많아서. 그가 말을 흐렸다.

“전하, 저는 줄곧 혼자서도 괜찮았습니다.”

검술을 연습하다가 근육통 때문에 온몸이 욱신거려도, 배울 게 산더미 같아 아무리 외우고 공부해도 끝이 보이지 않아도 아롈은 참을 수 있었다. 간혹 외로워서 미칠 것 같은 날도 있었지만 사람을 잡아먹는 짐승을 부르는 불명예를 저지르지 않았다. 조부가 얼굴에 서류를 집어던지든, 파블 1세가 후계자 자리를 박탈하려 들든 무너지지 않고 살아왔다.

“그저 옆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지가 됩니다.”

“조금 더 많은 것을 바라도 괜찮은데요.”

꼬리를 한껏 펼친 공작새 수컷 같은 표정이었다.

“오늘은 제가 아렐르의 기분을 상하게 했으니, 아렐르가 원하는 걸 들어줄게요.”

“그럼 안아주십시오.”

“이리 와요.”

그가 팔을 벌렸다. 머뭇거리다가 팔을 목에 감고, 뺨을 어깨에 기댔다. 희미하게 향수 냄새가 났다. 가벼운 감귤 향 밑에 깔린 백단향(白檀香)이 묵직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 다음은요?”

“두 가지나 들어주실 겁니까?”

“백 가지라도 괜찮은데요.”

실소가 났다.

“그러다 거덜 나시겠습니다.”

“아렐르가 좋아한다면 얼마든지요.”

아롈은 끙끙거리면서 고민했다. 원하는 것. 금방 떠올랐다. 귀가 화끈 달아오를 정도로 부끄러운 소망이었지만.

이 부분을 완전히 마무리하고 올리려고 했는데 잘 안 써지네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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