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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10. 바라마지 않는 (28)


기도를 올리고 있는데 발소리가 들렸다. 성당을 홀로 차지하고 있어, 다른 신도가 있으면 폐가 되겠거니 했다. 그러나 찾아온 것은 기도하기 위한 신실한 신자나, 고해성사를 위해 급박하게 신의 품을 찾은 어린양이 아니었다. 훤칠한 청년이었다. 머리카락이 타오르듯 붉었다.

“경?”

앤은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음이 주춤했다. 로렌의 예법은 신분 낮은 이가 먼저 말을 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니, 실례를 저질렀사옵니다. 공작 전하(HSH).”

“아닙니다, 레르헨펠트 양.”

“주님께 기도를 올리러 오신 것이온지…….”

혹시 자신을 보러 온 것이 아닐까. 앤은 삿된 기대에 두근거리다가, 이내 그녀가 저지른 모든 실수와 죄를 떠올리고는 금세 침울해졌다. 앤은 이제 아말리에 왕비가 예뻐했던 흠 없는 신붓감이 아니었다.

기실 이블린에서 ‘순결’은 별로 의미가 없는 개념이었으나, 앤은 지극히 보수적으로 교육받아왔다.

“허면 소녀가 자리를 ​비​켜​드​리​겠​사​옵​니​다​.​”​

“저는 레르헨펠트 양께 용무가 있어 왔습니다.”

변성기 끝물의 거친 목소리가 앤의 심장을 할퀴었다. 그는 코트 안주머니를 뒤져 작은 편지를 하나 내밀었다.

“마담 라 세르께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앤은 김이 빠지듯 실망했다.

​“​전​하​(​H​I​H​)​께​서​ 말씀이시옵니까?”

“예.”

사뿐사뿐 다가가 공손히 편지를 받아들었다. 편지칼이 없어 손으로 봉투 옆을 찢었다. 손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쓴 어린애 같은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앤의 주인은 달필과는 거리가 멀었다.

「앤.

오늘 하루는 시킬 일이 없다. 자정 전에만 들어오거라.

몸조심 하고.」

그 밑에 코시카의 옐레나 파블로브나, 라고 썼다가 두 줄을 긋고 다시 코시카의 엘리엔 필리피느 소피 아델라이드라고 서명해두었다.

내용을 읽자마자 앤은 크게 동요하여, 저도 모르게 편지를 와그작 구겼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무슨 내용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고, 공작 전하.”

“제 이름은 앙투안 드 클라리입니다.”

“클라리 경……. 아, 아무 것도 아니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얼굴이 아니십니다.”

앙투안은 머리칼보다 색이 짙어 적갈색을 띠는 눈썹을 찡그렸다.

“레르헨펠트 양. 제가 숙녀께 실례되는 질문을 하나 해도 될는지.”

​“​말​씀​하​시​옵​소​서​.​”​

“제가 중매의 대상이 된 것은 마담 라 세르 혼자만의 생각이십니까?”

앤은 저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올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중매라뇨?”

“허면 약혼자가 있으십니까?”

“어, 없사옵니다.”

앤은 아롈의 뜻을 모르지 않았다. 한 번은 우연일지 몰라도 두 번부터는 우연이라 하기 어렵다. 대회의 연회 중에 아롈이 앙투안에게 앤의 춤 상대가 되어줄 것을 부탁했다.

그 때는 앤의 지위를 높여주는 편애의 일환이리라고 생각했다. 멘 공작 루이 앙투안은 황제의 사생아였으나, 전하 지위를 가진 미혼 남성이므로.

그러나 이 편지를 굳이 앙투안에게 들려 앤에게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너무 뻔하지 않은가.

시녀의 혼처를 찾아주는 것은, 그것도 친정에서 데려온 시녀의 혼처를 찾아주는 것은 주인의 의무 중 하나다. 친정 시녀는 대체로 외국인이기 마련이고, 스스로의 기량과 가문의 힘을 사용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으므로.

실제로 아롈은 앤에게 약속하기도 했다. 삼 년만 벨타를 책임지고 맡으라고. 그 뒤에는 좋은 혼처를 알아봐주겠노라고.

그 ‘좋은 혼처’가 푸른 눈을 짜증스레 내리뜨고 앤의 앞에 서 있었다.

공작, 전하, 계승권을 지닌 발루아 가문의 아들.

물론 그는 사생아였다. ‘로렌의’라고 지칭되는 세시안을 비롯한 황제의 적자녀들과는 대우가 달랐다. 그는 루이 앙투안 르 로렌이 아니라 루이 앙투안 드 발루아였으니. 그러나 앤 역시 흠없는 신분은 아니었다.

작위를 박탈당한 할머니, 귀족 출신인 어머니. 일찍 죽은 아버지. 애매한 신분.

루이 앙투안 정도면 좋은, 아니 과분한 혼처다. 그녀가 저지른 잘못을 아롈에게 들켰더라면 결코 주어지지 않았을.

앤은 무거운 불안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경, 소, 소녀는…….”

“레르헨펠트 양.”

그리고 이 남자는 앤의 죄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비록 돈을 전부 털어 그 파란 사파이어(앤은 파란 보석의 이름이라곤 사파이어밖에 알지 못했다) 목걸이를 만들어다 아롈의 보석함 속에 몰래 넣어두는 것으로 해결했지만 어쨌거나 앤은 그에게 있어 주인의 물건을 가로챈 시녀였다.

한순간의 실수가 못내 후회되고, 부끄러웠다. 주님께 아무리 빌어도 얼룩진 과거는 지워지지 않을 테고 눈앞의 ‘남자’는 그 일을 잊어주지 않을 것이다.

“말씀하십시오.”

“아, 아닙니다. 경께서 먼저 말씀하시옵소서.”

앙투안은 사양하지 않았다.

“저는 레르헨펠트 양과 혼인할 생각이 없습니다.”

앤은 눈을 내리깔았다. 가슴이 쿵쿵거렸다.

“소, 소녀는, 그런 생각은 추호도 한 적이 없사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결혼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조금 좋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거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고, 새파란 눈이나 붉은 머리를 비롯한 외모도 좋았다. 앙투안은 지금 흔히 귀족 사내들이 입는 예복을 걸치고 있었지만, 혼행길에서 입었던 오를레앙 기사단 제복이 더 잘 어울렸다. 몸에 맞는 코트 자락 사이로 장식용 ​궁​정​검​(​S​a​b​r​e​)​ 손잡이가 비죽 나와 있었다. 검이 어울리는 분위기도 좋았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가 앤의 죄를 덮어준 것은 정말로 ‘단순한 호의’였다. 알고는 있었다. 앙투안은 앤에게 관심이 없었다. 춤을 추는 내내 얼굴 한 번 제대로 바라본 적도 없었다.

그리 대단한 감정은 아니었다. 그저 잠깐 이 사람 괜찮다고 생각했을 뿐이고, 그 사람이 앤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자 그 마음이 증폭되었을 따름이었다.

“그럼 용건이 없으시다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앙투안은 깍듯이 고개를 숙이고 뒤돌았다. 으레 숙녀에게 하듯 손등에 입맞추지도 않았다. 보이지 않는 벽이 느껴졌다. 이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앤은 그를 잡지 않았다. 아니, 잡지 못했다. 검은 머리에 얹혀있던 흰 미사포가 스르륵 흘러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연정과 풍요가 궁금하여 시녀가 되기로 했다. 끼니를 굶지 않고 보석을 두르는 삶이 어떨지 상상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아무런 가치 없다는 듯 버리고 가난을 둘러도 행복한 연정이란 어떤 것일지 알고 싶었다.

아롈이 준 금전적 여유는 앤을 길들였다. 아름다운 옷과 빛나는 보석, 따뜻하고 맛있는 식사 모두 좋았다. 그래서 사랑 때문에 코시카 여제 지위를 버린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앤은 앙투안이 좋았지만, 그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으로 돌아갈 자신은 없었다.

그저 짧은 설렘, 두근거림, 하루를 살게 만드는 기대 같은 사소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앤은 차마 그 마음을 내세울 수 없었다. 성소(聖所)의 빛이 앤을 따갑게 내리쬐었다. 과거가 진득하게 발목을 잡아챘다.

그녀를 로렌 이블린으로 이끈 것은 행운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를 솔직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순전히 그녀 자신이었다.

목걸이를 가로채어 하고 나가지만 않았더라면, 잃어버리지만 않았더라면, 함부로 남을 믿고 남자가 권하는 술을 의심없이 마시고 담배를 피우지만 않았더라면.

몇 번의 선택지에서 고른 실수와 잘못 때문에 앤은 간신히 찾아온, 연정의 싹을 그대로 날려 보내야 했다. 그 사실이 너무 안타깝고 속상하고 후회되어서 앤은 내내 그 자리에 못 박혀 서있었다.

시험 끝난 기념으로 부랴부랴 써서 올립니다. 조금 많이 짧네요.
이번에야말로 두세 화 더 쓰면 챕터 끝날 것 같아요. 

항상 읽어주시고 기다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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