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바라마지 않는 (29)
유리로 된 수반에 물고기 다섯 마리가 떼를 지어 헤엄쳐 다녔다. 손가락 한 마디만 한 몸통을 빨간 줄무늬와 파란 줄무늬가 길게 가로질렀다. 파란 줄무늬가 희미하게 빛을 내는 이 희귀한 물고기는 식민지 강에서 가져온 것이다.
물고기를 아무리 많이 퍼다 배에 실어도 몇 주 간의 항해를 거쳐 상인의 손을 지나면 백 마리 중 한 마리나 살아남을까 말까, 나머지는 대부분 시체가 되어 수면 위에 배를 뒤집고 둥둥 뜨게 된다. 때문에 이 물고기는 어마어마하게 비쌌다. 그 몸 크기만큼의 다이아몬드를 값으로 치렀다고 들었다.
‘왕자’의 선물이었다. 웃기지도 않은 사연이 있었다. 아롈은 앤이 보던 해양 생물에 관한 책에 짧은 관심을 보였고, 아내가 읽는 책에 그 ‘왕자’가 눈길을 주더니 이런 비린내 나는 선물을 가져온 것이다.
릴레벨트는 이 물고기는 민물고기지 바닷물고기가 아니라며 비웃었으나 아롈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침실에 어항을 가져다두곤 밤낮으로 들여다보았다.
“무슨 생각이지?”
그래, 지금처럼.
[아무 것도 아니란다.]
긴 목을 흔들며 귀여운 시늉을 하자 아롈은 역겹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는 혼자 있고 싶다며 시녀들을 전부 내보내고는, 소금물을 타서 벨타를 불러냈다.
이런 식의 대면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럼 이야기에 집중해라.”
[그러지 뭐. 그래, 무슨 일이니?]
목이 바싹 타는 듯했다. 벨타는 고개를 숙여 소금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릴레벨트 해의 푸른 해룡은 여전히 욕구 불만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녀의 두 계약자 중 한 명은 너무 자신의 삶에 만족한 나머지 ‘기원’이라곤 전혀 하지 않았고, 다른 하나는 질리도록 고집스레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왤까.
벨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원하기만 하면 이루어주는 힘을 가지고 있는데 왜 쓰지 않지? 과자 접시를 눈앞에 둔 어린아이가 꾹 참는 것이나 진배없이 불가능한 일 아닌가.
그 어이없는 일을 해내고 있는 소녀는 허리를 곧게 세우고 냉랭하게 말했다.
“내 사촌에게 마법사 혈통의 소녀들을 찾아달라고 했다.”
[어머머, 그랬구나. 알았어. 이제 자러 가도 괜찮니?]
아롈은 미간을 문지르더니 낮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조금만 진지하게 들어라. 미래에 관한 이야기니.”
[내 미래? 아니면 네 미래?]
“둘 다.”
[그래, 말해보렴.]
무거움이라곤 한 톨 담겨있지 않은 발랄한 목소리에 아롈은 눈을 치떴다. 이내 깊은 한숨이 수면에 파문을 만들었다.
“여럿 찾아 달라 했으니 마음에 드는 아이로 골라라.”
[아하. 그리고 그 애를 산제물로 삼아서 날 보내버리고 너는 내게서 벗어나겠다?]
“그래.”
벨타는 소녀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설마 죄책감이라도 느끼니?]
“나는 사람이지 낯짝 두꺼운 짐승이 아니라서.”
[모르나본데 용과 마법사의 계약은 종신제란다.]
이름과 이름을 나누는 것이 계약의 조건이고,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계약의 유지 조건이었다. 용은 잊지 않고, 마법사가 고작 이름을 잊을 일은 없다. 자연히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계약은 종료되지 않는다.
“알아.”
벨타는 수반 위로 긴 목을 늘어뜨리고 빼꼼 물고기를 쳐다보았다. 그림자가 비치자 고기들이 빠르게 꼬리를 흔들며 구석으로 도망쳤다. 한 입도 안 될 것들이.
“그래, 취소하지. 내가 이기적이었다. 너를 통제할 수 없는 곳에 보내더라도 너를 떼어내고플 만큼 네가 끔찍했으니.”
벨타는 이를 드러냈다. 앙증맞은 송곳니가 희게 빛났다.
[아쉽네. 계약자가 늘어나면 나야 좋은데.]
“그 말을 들으니 더더욱 철회해야겠군. 잊어라.”
어차피 생각도 없었다. 릴레벨트는 이 이블린을 돌아다니며 적당히 탐색해보았지만 쓸 만한 사람이 없었다. 일단 똑바로 된 힘을 가진 마법사부터가 적었다.
마법사는 결국 ‘기원’을 해야 힘을 가질 수 있는 족속이다. 그리고 물질적 감정적 욕구가 충족될 경우 절박해지는 인간은 극히 드물었다. 안 그래도 형편없는 재능에, 안온한 환경까지 곁들여지니 혈통은 마법사이나 각성하지 못한 이가 태반이었고, 각성한 이들도 고작해야 잔재주를 부릴 뿐이었다.
그나마 쓸 만한 이들은 구슬리기가 어려워보였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몇 달을 공을 들여야 겨우 성립할까. 그런데 아롈이 고집스레 마법을 쓰지 않는 통에 다시 사람으로 변하려면 몇 달 동안 묵언 수행을 해야 할 판이었다.
결국 릴레벨트는 세 번째 계약자를 찾아내는 것을 잠정적으로 포기한 상태였다.
“그럼 두 번째 제안을 하지.”
[그게 뭐니?]
“코시카와 로렌 인을 먹지 않겠다고 다시 한 번 맹세해라. 그렇다면 곁에 두겠다.”
호박(琥珀) 같은 노란 홍채가 둘러싼 새카만 동공이 금세 가늘어졌다.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제안을 하는 걸까. 안타깝게도 용이 인간의 사고(思考)를 읽을 수 있는 경우는 단 두 가지.
잠에 든 용을 마법사가 불러 깨어날 때, 마법사가 아닌 인간을 집어 삼킬 때.
그 둘 중 어느 곳에도 해당하지 않았으므로, 벨타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롈의 표정뿐이었다.
[언제까지?]
“내가 책임져야 할 대상에 너를 포함시키겠다는 뜻이다. 그러니 내 숨이 이어지는 한.”
벨타는 그녀의 계약자가 얼마나 융통성 없게 책임감을 가진 성격인지 알고 있었다. 용의 긴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럼 난 뭘 먹고 살라고? 마법을 줄 거니?]
“헛소리.”
[굶어죽으라는 걸 참 고상하게도 돌려 말하는구나?]
용을 깨우는 것은 마법사의 기원이다. 그리고 깨어난 용은 그 기원을 양분으로 하여 활동하게 된다. 이번에 그녀를 깨운 마법사로부터 받은 ‘예지’는 분명 기다리라고 했다. 기다리면 달콤하고 풍성한 마법을 가득 받아 정신을 풍요롭게 할 수 있으리라고. 하지만 초조하기만 했다.
“네가 먹어도 되는 인간을 공급해주겠다.”
[첫 번째 제안과 다른 점이 대체 뭐니? 산제물인 건 똑같잖아?]
벨타는 까르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지지 않았다. 눈을 내리뜬 모양이 고상하기만 했다.
“네가 내 통제 하에 있다는 것.”
[어쩌지? 싫은데.]
“그럼 내게 죽든가.”
긴 꼬리가 긴장을 감추려 흔들렸다. 또박또박한 말투의 설명이 뒤따랐다.
“몇백년 전, 이 나라는 용을 죽이고 세워졌다. 그 때 동원된 병사가 천 명이었다고 한다. 물론 화약도, 대포도, 총도 없었지.”
그 몸에 용을 죽일 수 있는 독을 품고 있는 소녀는 작은 칼을 들어 손에 가져다 댔다. 그으려는 생각은 없어보였으나 벨타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지금은 세상이 바뀌었어. ‘충분한 희생’을 감수한다면, 넌 죽겠지. 이 근처에는 바다도 없으니. 어때. 생명을 걸고 싸워보겠어? 오히려 그 편이 네가 앞으로 먹을 사람의 수보다 적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설마 내가 조용히 죽으리라고 기대하는 건 아니겠지?]
“물론. 네가 그 가벼운 주둥이를 놀려 내가 마녀라고 고래고래 소리칠 거라는 사실은 익히 짐작하는 바다. 네가 죽은 다음에는 내가 아주 피곤해지겠지. 생명을 잃을지도 모르고.”
둘은 목숨을 내걸고 싸우면 어차피 둘 다 질 수밖에 없는 기묘한 관계였다. 둘 모두 자신의 생명과 안위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마법만 좀 써봐. 가끔 쓰면 내가 얼마나 협조적으로 대해줄 수 있는지 알고 있니?]
“노망이 들어서 헛소리하는 건 이해해줄 수 있지만 되도록이면 앤을 붙들고 해라.”
[노망이 아니란다, 이 갓 태어난 카나리아 같은 어린 것아. 그거 쓴다고 세상이 멸망하진 않는단다. 너 하나의 힘은 커 보이지만 네가 아무리 난동을 피워봐야 이 세상의 시점에서 보면 겨우 피부에 올라온 뾰루지 같을 거야.]
“내 긍지와 책임을 포기하는 건 결국 나 자신을 포기하는 거야, 멍청한 것.”
초조했다. 릴레벨트는 마치 과자 접시를 앞에 둔 어린애처럼 침을 뚝뚝 흘리며 발을 굴렀다. 조금만 더 충동질하면 쓸 것 같은데. 하지만 그녀의 계약자, 이 아름다운 소녀는 죽기 직전까지 정신적으로 몰려 시들시들하게 말라가면서도 절대 자신의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녀를 깨운 마법사로부터 받은 ‘예지’는 기다리라고 했다. 기다리면 달콤하고 풍성한 마법을 가득 받아 정신을 풍요롭게 할 수 있으리라고. 하지만 대체 언제? 얼마나 기다려야 해?
짜증이 났다.
[좋아. 그런데 문제가 있네.]
“뭐냐.”
[내가 널 지키려면 결국 사람을 먹어야 하거든?]
“죽이기만 하면…….”
[시체에 내 흔적이 남을 텐데? 잇자국이라거나. 뭐 그 꼴을 보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어. 너희 엄마가 참 좋아하겠구나.]
아롈은 속눈썹을 내리깔고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그래. 세세한 부분은 더 생각해보지. 그럼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걸로 생각해도 되겠나?”
사실 벨타는 지금 아롈을 버리고 떠나도 그만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을 들이면 다시 바다로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벨타는 지금까지 들인 공을 생각했다. 예지가 알려준 그 황홀함, 이 소녀가 그녀에게 줄 굉장한 규모의 마법을 생각했다.
노란 눈의 용은 방글방글 웃었다.
[어쩌겠어. 나도 생명은 소중하단다. 세상 무엇보다 소중하지.]
안도의 한숨이 수면에 파문을 만들었다. 갸름한 얼굴에 복숭아 같은 혈색이 돌았다. 정말 기다려야 하나보다. 아롈은 요즘 주변에 빛가루를 두르고 다니는 듯 행복해했다. 우울해서 죽어버릴 것처럼 빌빌댈 때에도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물며 지금 사용할 리가 없지.
심통이 난 벨타는 지느러미로 물을 헤치며 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러는 거니? 내가 저번에 도발해서?]
“아니.”
[그럼?]
시선이 벨타를 지나쳐 이리저리 헤엄치는 물고기에 닿았다. 아롈은 제 얼굴이 흐릿하게 비치는 수면을, 그 속의 물고기를 몹시도 애틋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벨타는 불현듯 울화가 치밀었다.
그 감정이 향한 대상은, 고작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이었으므로.
은발이든 흑발이든 ‘왕자’는 이래서 싫다.
“이제 외면하고 도피할 때가 지난 것 같아서.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지.”
정말 끔찍하게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