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휴식
일어나서 해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는 오전이란 어쩜 이렇게 달콤할까.
미셸과 리젤로트의 결혼식이 끝나고, 겨우 서류 더미로부터 풀려난 아롈은 연인과 함께 한껏 빈둥거릴 계획을 세웠다. 세안도 하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기로 약속했다.
게으름의 시작은 늦잠이었다. 꿈도 꾸지 않고 물리도록 자다가, 눈부신 겨울 햇살이 눈꺼풀을 뚫고 쏟아질 때쯤 일어났다. 빛깔 옅은 홍채는 유독 강한 빛에 취약했다. 새카맣게 얼룩진 시야 사이로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곧게 뻗은 콧날도 모양 좋은 입술도 모두 정돈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속눈썹이 짙었다. 매끈한 이마에 검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다.
순식간에 웃음이 피어났다.
허리와 어깨를 휘감은 팔이 단단했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심장소리가 한없이 마음 편했다. 일어나서 해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는 하루란 너무나도 달콤했다. 미래를 빼앗겨 팽개쳐진 것과는 달랐다. 어둠 같은 막막함이 없이 순수한 성취감만이 남았고, 그런 감정은 순전히 ‘다음’이 기약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으응.”
충동적으로 입 맞추자 눈꺼풀이 반짝 뜨였다. 기척에 민감하기로는 아롈이나 세시안이나 매한가지였으므로.
“아렐르?”
“일어나십시오.”
“무슨 일일까요?”
정말로 졸린지 개암색 눈이 가물거렸다. 그 와중에도 그의 팔은 아롈의 어깨와 허리를 단단하게 감고 있었다. 비몽사몽 하는 상태인데도 그의 목소리는 매끄럽고 다정했다. 정중하기도 했다.
아롈은 다시 짧게 입 맞추곤 속삭였다.
“일어나십시오.”
“조금만 더 자면 안 될까요?”
“지금 보고 싶단 말입니다.”
옆으로 누워있던 몸이 순식간에 뒤집혔다. 너무 노골적인 어리광에 부끄러워할 틈도 없었다. 입술이 맞닿고, 숨결이 뒤섞였다. 혀끝이 질척하게 섞이는 동안 아롈은 눈을 말똥하게 뜨고 있었다.
아롈은 입 맞추는 동안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게 좋았다. 아니, 사실 입술이나 살갗을 맞대고 있지 않더라도 그가 아롈을 바라보는 눈길이 좋았다. 그는 간혹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지워진 채 아롈 하나만이 남은 듯 애틋하게 바라볼 때가 있었다.
어느 순간 입술이 떨어졌다. 세시안은 잠이 완전히 깬 얼굴로 생글거렸다.
“아렐르가 새롭게 고안한 잠 깨우는 법인가요?”
“깨셨습니까?”
“확실하게요. 그런데 부작용이 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부작용이라면?”
"이런 걸 하고 싶어졌거든요.“
쇄골 위에 입술이 떨어졌다. 아롈은 킥킥거렸다.
“간지럽습니다.”
“그래요? 그럼 여기는?”
옆구리에 손이 닿았다. 아롈은 소리 내어 웃으면서 몸을 빼려고 버둥거렸다. 하지만 꼭 안긴 통에 호흡과 옷차림이 흐트러질 뿐 간지럼의 습격으로부터는 완전히 무방비했다. 숨이 넘어가게 웃던 아롈은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그만, 그, 그만. 하하핫.”
간지럼이 멈춘 뒤에도 웃음은 관성으로 계속 터져 나왔다. 코끝이 찡하고 눈물까지 맺혔다. 너무 웃어 배가 아팠다. 아롈은 연인의 목을 끌어안은 채 숨을 헐떡였다.
“하아. 하아. 너무하셨습니다.”
“아렐르가 먼저 시작했는데요? 보고 싶다면서요?”
뺨에 닿은 입술이 서늘하게만 느껴졌다. 얼마나 웃었는지 뺨이 잔뜩 달아올랐다.
저도 모르게 사르르 눈이 감겼다. 짧은 웃음소리가 들리고 입맞춤이 쏟아졌다. 밤마다 몸을 섞는 사이이니만큼 접촉의 수위는 농밀했다. 시간에 쫓겨 허둥거릴 일이 없었으므로 느긋하기도 했다.
내키는 곳에 내키는 만큼 입술을 댔다. 금세 몸이 나른하게 풀렸다. 그러나 그도 잠시, 침의의 옷깃이 풀려나가려는 순간 아롈은 다급하게 앞섶을 쥐었다.
“대낮부터 이러실 겁니까?”
“대낮이면 안 되나요?”
연둣빛 눈이 동그래졌다.
“진심이십니까?”
“왜요?”
“하지만.”
“하지만?”
“지난밤만 해도.”
“지난밤만 해도?”
아롈의 말을 따라하는 목소리가 노래하는 듯 태연했다. 문득 두려워졌다. 피곤함이라는 걸 모르는 것 아닐까. ‘내일은 놀기로 했으니까 괜찮잖아요?’라는 꾐에 넘어가 몸을 섞은 것까지는 좋았다. 그게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아서 문제였지. 지쳐서 꾸벅꾸벅 조는 아롈을 어르고 달래서는 눈물이 흥건해질 때까지 괴롭힌 것은 이미 이 사람의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린 걸까?
세시안은 아롈의 손목을 잡아 내리누르곤 뺨에 소리 내어 키스했다.
“이야기해줄래요?”
아무리 눈앞의 상대가 사랑하는 연인이자 남편이라곤 해도 정사 횟수나 그 내용 같은 외설적인 말을 꺼낼 용기는 없었다. 당혹감에 젖은 눈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데 갑자기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롈은 옴짝달싹 못하게 손목을 잡힌 채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이 사람은 정말이지 혼자 잘 웃는다. 대화하다가 맥락을 알 수 없는 곳에서도 불쑥불쑥 잘 웃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모를 일이었다.
어깨를 움츠리고 웃던 그는 손목을 놓아주곤 아롈을 일으켰다. 영문을 알 수 없어 그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침 먹을까요?”
사실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의 세기나 태양의 위치를 가늠했을 때 ‘아침’을 먹을 시간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점심이나 저녁에 가까울 터였다. 아롈은 본능적으로 시계를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미리 시계는 다 치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시안은 아롈의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정돈해주며 속삭였다.
“시계가 없을 텐데요?”
“저도 압니다.”
볼멘소리를 하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녀들이 들어와 식사를 차렸다. 모두 가볍게 침대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뿐이었다. 치즈, 절인 올리브, 잘 구운 크루아상과 우유.
아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시간을 어떻게 맞추신 겁니까?”
하녀를 부르는 종의 줄은 저 멀리에 있었다. 침대에서 나가지 않고는 도저히 당길 수 없는 위치였고, 종을 당기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제 미리 시켰는데요. 열두 시부터 한 시간에 한 번씩 오라고요.”
“왜 하필 열두 시입니까?”
둘의 기상 시간은 말도 안 되게 이른 편이었다. 겨울이 되어 해가 짧아지면서 일출 전의 어둑함에 싸여 눈을 뜨는 날이 태반이었다. 그런데 열두 시라니. 몸이 아플 때에도 그보다는 일찍 일어나곤 했다.
“그야 정오 전에는 못 일어나게 할 만 한 자신이 있었거든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 데에는 숨을 한 번 들이쉴 시간이면 충분했다. 목까지 달아올랐다. 아롈은 황급히 빵을 입에 물었다. 짭짤하면서 기름진 버터의 풍미가 입안에 퍼졌다. 귀까지 맥박이 치밀었다.
다행히 두 번째 기습은 없었다. 식사를 마칠 즈음 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놀랍지도 않았다. 시중을 받아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미리 골라놓은 책을 받아들었다.
식사를 마친 둘은 베개를 등에 대고 나란히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아롈은 책의 표지를 쓰다듬었다.
“정말 재미있을까요?”
비교적 최근에 인쇄된 이 책은 며칠 전 둘이 짬을 내어 손을 잡고 직접 골랐다. 일과도, 공부와도 전혀 관계가 없는 책을 고르기란 과장을 섞어 모래밭에서 자개 귀걸이를 찾는 만큼이나 까다로웠다. 계단을 올라 종이와 책장의 숲을 거닐며 이 책은 페란토로 쓰여서 자칫 공부하는 기분이 드니 안 된다, 저 책은 위인전이라 저도 모르게 역사 공부가 될 수 있으니 안 된다, 저 책은 정치 이야기라 서류 생각이 난다, 하나하나 퇴짜를 놓았다.
그러다 극적으로 합의를 본 책이 있었다. 다름 아닌 동화 모음집이었다.
“왜요, 지루할 것 같아요?”
“이런 책은 여덟 살에나 마지막으로 읽었단 말입니다.”
“저는 열여덟 살 때까지도 많이 읽었는데요. 동생들이 읽어달라고 졸라서.”
세시안은 옆에 앉은 아롈을 끌어안고는 관자놀이에 입 맞추었다. 아롈은 기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주변에 풍랑이 일거나 지진이 나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발이 땅에 붙어있는 감촉.
문득 뭉클하게 치밀어 오르는 애틋함이 부끄러워서 괜히 투덜거렸다.
“저는 전하의 동생이 아닙니다.”
사실 알렉산드르는 동화를 읽어준 적이 없었다. 아니 아무도 그런 걸 읽어주지 않았다.
그 시절의 아롈은 지금과 달리 옆에 누가 있으면 한숨도 잠들지 못했으니까. 혹여 꿈에서라도 흰 용과 마법에 대한 이야기를 흘릴까봐 따뜻한 온기에 감싸여 잠드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예브게니아에게는 밤마다 유모가…….
생각에 잠겨있는데 뺨에 입술이 닿았다. 아롈은 화들짝 놀라서 옆을 바라보았다. 단정한 얼굴에 다정한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당연하지요. 저는 아렐르에게 남자이고 싶지 오빠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요.”
키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입술에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얼굴에 홍조가 번졌다.
“하지만 남편도 동화책 정도는 읽어줄 수 있어요.”
간절한 생각을 눈치 채인 게 창피했다. 아롈은 벨타와 마법에 대한 일을 고백한 이후로 남편의 앞에서는 유독 느슨해졌다. 사실은 애정을 갈구하는 어린 아이에서 탈피하지 못했다는 진실을 계속 들켰다. 그 때마다 그는 능숙하게 아롈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애정을 부어주었다.
“저는 이제 동화책이 필요한 나이가 아닙니다.”
“알아요. 하지만 전 오랜만에 읽고 싶은데요. 와, 이것 봐. 잠자는 숲속의 미녀로군요.”
이런 면에서는 발을 빼는 재주도 얄미울 정도로 능숙했다.
그의 손가락이 목차 부분을 훑어 내렸다. 펜을 쥐는 데에 익숙한 손이라 그런지 길쭉하고 손톱도 정돈되어 있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용이 지키는 가시나무 성에서 저주를 받아 잠든 공주님을 왕자님이 입맞춤으로 깨워주는 이야기예요. 이건 리젤로트가 좋아해요. 툭하면 여기저기 숨어서는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있었거든요. 미셸이 고생했지요. 찾아서 입맞춰줄 때까지는 나오지 않았으니까요. 사실 이 이야기는 다들 좋아했지요. 몰래 물레를 수소문하다가 들킨 적이 있었던 게, 마리안느였을 거예요. 요즘은 물레에 바늘이 안 달려있다고 했더니 울더라고요.”
동화는 채 시작도 하지 않았다. 목차만을 보고도 따뜻한 색을 띠는 목소리가 줄줄 일화를 풀어놓았다. 항상 그렇듯, 그는 풍경이나 상황을 묘사하는 데에 재주가 있었다. 상세한 설명을 듣고 있으면 그의 추억에 직접 들어간 듯했다.
“상드리용(Cinderella). 이것도 인기가 좋았어요. 여주인공이 무도회에 가려고 마법사 할머니에게 호박 마차와 다람쥐 가죽 구두를 받거든요. 다람쥐를 잡아서 가죽을 벗기겠답시고 명색이 마담이라는 아이들이 시녀들을 끌고 몰려다니면서 온 이블린의 나무를 다 뒤지는 모습이 장관이었어요.”
문득 거리를 느꼈다. 아롈에게는 저런 색깔 어린 추억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항상 갈구하던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풀어내놓고 있었다.
“하루 종일 뒤져서 결국 한 마리를 잡긴 잡았는데 귀여워서 못 죽이겠다는 거예요. 다시 놓아줬어요. 그럴 거면 왜 그리 고생을 한 건지.”
그가 웃었다. 아롈은 따라서 웃으면서도 씁쓸했다. 빨리 따라잡고 싶은데. 이만큼 여유가 생기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걸까. 저런 알록달록한 일을 얼마나 겪고 흡수해야만 자랄 수 있는 걸까.
“당나귀 가죽은……, 아렐르?”
이런 오라비에게서 넘치게 사랑받았을 그 동생들에게 질투심이 들었다. 그 마음이 정당하지 않다는 건 알아도 혼자 가지고 싶었다. 여동생이든 남동생이든 그를 나누어주고 싶지 않았다.
목을 끌어안고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는 정말이지 당연하다는 듯이 책을 놓고 아롈을 안아주었다. 이럴 때마다 자꾸 욕심이 커졌다. 몸이 꼭 안겼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훈훈한 열기 혹은 감정 비슷한 것이 폐부에 스며들어 몸속을 감돌았다.
아, 이거구나.
제아무리 구두쇠처럼 아낀다 해도 진심이라면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아롈은 지금이 바로 그 때가 찾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예지 능력 따위는 없어도 알 수 있었다.
“사랑합니다.”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비틀거리며 이야기하던 때에 비하면 제법 능숙하게 흘러나왔다. 이미 몇 번이나 해본 말이었다.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사라진 상태에서 아롈은 한없이 솔직해졌다. 분홍빛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 날것 그대로의 마음이 파닥였다.
“정말 많이 사랑합니다.”
멋을 부릴 수 있는 시나 문학작품을 그토록 수없이 읽었는데도 결국 나온 말은 단순했다. 남부 갈리아 어가 아니라 북부 카트 어라고 해도 더 나은 표현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제 옆에 계십시오.”
감상적인 말이 마구 흘러나왔다. 이야기를 듣던 세시안은 갑자기 말을 끊었다.
“아렐르는 참 손해 보는 요구를 하네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야, 이미 가진 걸 원한다고 하니까 그렇지요. 하루 종일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아렐르 생각뿐인데 여기에서 저를 어떻게 더 줄 수 있을까요?”
“요구가 아니라……, 그저 확인해본 겁니다.”
그는 아롈을 안은 팔을 풀고는 가신이 주군에게 예를 취하듯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내리깐 눈의 속눈썹이 우수 짙었다.
“숙녀 분. 이미 저를 지배하고 계시니 의심이나 의혹은 태양 앞의 촛불만큼이나 부질없답니다. 그저 원하는 게 있으시다면 명령만 하시면 됩니다. 기꺼이 따를 테니.”
무릎 꿇은 것도 아니고 예복도 없이 느슨한 옷차림인데도 묵직한 분위기가 흘렀다. 말투와 목소리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아롈은 저도 모르게 그가 만든 분위기에 휩쓸렸다.
“보상은 필요 없나요?”
“헌신에 어찌 감히 보답을 요구할까요? 그저 원하여 하는 일이니 이 마음 한 자락 향하는 방향을 알아주시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연약하고 세월은 길고 쓴데 어찌 원하는 것 없이 고통스러운 길을 걷길 자처하십니까? 기탄없이 말씀해보세요.”
순발력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아무 서사시나 펼쳐도 나올 법한 상투적인 대사였으니. 그러나 어마어마하게 창피했다.
지금껏 화려한 꽃다발 같은 사탕발림을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고 줄줄 읊고 다니던 미셸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새삼 사무쳤다. 물론 눈 깜짝 않고 있는 남편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남쪽 사람의 낯이 두꺼운 걸까 북쪽 사람이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걸까. 아무래도 둘 모두가 정답 같았다.
“진정이십니까?”
“충직한 가신에게 허언을 하는 법은 없습니다.”
가신이 아니라 기사가 더 적당했을까.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가 웃었다.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말씀드리지요.”
세시안은 아롈의 어깨를 감싸 안아 천천히 침대에 눕혔다. 어깨부터 손목, 허리부터 발가락까지 잔뜩 긴장했다. 이번만은 ‘아침을 먹자’는 말로 피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름다우신 공주님, 당신께서도 하루 종일 제 생각만 하시길 원합니다. 그렇게 만들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겠어요?”
창에서 쏟아지는 빛이 금발을 달구어 목덜미며 정수리가 따스했다. 세상이 온통 사랑하는 사람으로 가득 찬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입술과 입술 사이에는 아무런 장애물도 없었다. 사악한 용은 앤이 데리고 갔고, 심장을 두르고 있던 가시나무는 어느덧 녹아내렸다. 둘 사이에 남은 것은 그저 진심 뿐. 그저 원한다는 말 한 마디면 충분할 터였다.
아롈은 입맞춤을 기다리는 대신 손을 들어 허락을 기다리는 용감한 기사의 뺨을 쓸어내렸다.
“저는 공주님이 아니라 여대공이랍니다, 용감하신 ‘황자’님.”
“이런 실례를.”
세시안은 간신히 웃음을 참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시트 위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금빛 머리카락을 한 줌 쥐어 소중히 입 맞추었다.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여대공 전하?”
아롈은 짐짓 뜸을 들이며 그의 목선을 따라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동화책은 이제 잊으셨습니까?”
“그런 것도 있었던가요?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고 하셨잖습니까?”
“뭐든지 말해보라면서요?”
하여튼 말로는 이길 수 없다. 아롈은 마음의 준비를 하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사랑합니다.”
입술이 맞닿았다. 북쪽 나라의 아름다운 여대공은 사랑하는 황자님의 키스를 통해 깊은 잠에 빠질 준비를 시작했다. 침대 한쪽으로 던져놓은 책이 자리를 피하듯이 바닥에 떨어졌다. 시트가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