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봄의 성 (1)
아롈은 말에 탄 채 저 멀리 나타난 성을 바라보았다. 아주 오래된 양식의 성이었다. 요즘 짓는 건물은 저렇게 첨탑을 올리지 않는다. 첨탑마다 머리에 원뿔형의 파란 지붕을 얹고 있었다. 벽은 흰 빛 도는 돌이었고, 네모진 창문들이 나 있었다.
“아름답지요?”
세시안이 뒤늦게 따라와 옆에 말을 멈춰 세웠다.
“예.”
그토록 자랑할 만큼은 사랑스러운 풍경이었다. 바람이 불고 비가 들이치는 현실에 놓아두기보다는, 액자에 넣어 벽에 걸고 싶어졌다. 파릇한 봄잔디와 흰 돌벽이 잘 어울렸다. 곳곳에 의도한 듯 놓여있는 돌과 그 밑에 자리 잡고 핀 들꽃, 가느다란 가지에 매달려 한 송이씩 떨어져 내리는 흰 사과꽃.
아롈은 가볍게 달려 정문 앞에 도달했다. 사뿐히 등자를 밟고 땅에 내려서자 풀잎 위로 옅은 푸른색의 치맛자락이 드리웠다. 무게중심을 잘 잡아 깨끗한 동작이었다.
따라 내린 연인이 뒤에서 아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목에서부터 어깨로 이어지는 선에 입 맞추고는 소리 내어 웃었다.
“꼭 같이 오고 싶었어요.”
물론 조금 춥고, 아주 많이 불편할 테지만요. 그가 속삭였다. 허리를 끌어안은 손 위에 흰 손을 겹쳤다. 두 겹으로 낀 결혼반지와 약혼반지가 반짝였다. 아롈은 파묻히듯 안긴 채 웃었다.
“괜찮을 겁니다.”
막상 닥치면 짜증을 낼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풍경은 아름답고 날씨는 좋고 사랑하는 사람의 품은 포근했다. 집토끼처럼 긴장이 풀렸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오랜만이구나.”
뒤에 따라붙은 인사는 아롈이 아니라 고용인들에게 건네진 것이었다. 윗사람이 먼저 말을 건네지 않으면 입을 열 수 없는 로렌의 예법 상 그들은 미리 나와 있었으면서도 침묵을 지켰다.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무릎을 꿇은 채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세르.”
“소개하지. 이 눈부신 숙녀 분이 내 삶의 끝.”
“마담 라 세르께 삼가 인사드립니다. 세자르입니다.”
“릴리안느입니다, 전하.”
아롈은 눈짓으로 인사를 받았을 뿐 따로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일개 고용인에게까지 일일이 인사를 할 만큼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다. 대신 허리를 안고 있는 손등을 살짝 할퀴었다. ‘내 삶의 끝(ma fin de la vie)’이라는 말이 부끄러웠다.
미셸이 리젤로트와 함께 오를레앙으로 내려간 뒤부터 그는 친구의 빈자리를 메우려는 듯 종종 부끄러운 수식어를 입에 담곤 했다. 내 삶의 끝은 수식어들의 산 정상을 장식하는, 가장 자주 나오는 말 중 하나였다.
오죽하면 마담 라 세르 대신 마담 라 페(fin)라는 별명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 웃기지도 않은 말이 그리 달갑지 않았던 아롈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고용인에게 당부의 말을 건넸다.
“머무는 동안 모쪼록 수고해다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세르. 한 치의 불편함도 없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인사를 마칠 무렵 뒤늦게 짐을 실은 마차가 나타났다. 데리고 온 하인들이 짐을 내리려놓았다. 앤이 마차에서 뛰어내려 아롈의 뒤에 섰다. 부러 이번 여행은 단출하게 앤만을 데리고 왔다. 세시안 또한 벨망 경만을 끌고 온 참이었다.
“늦었구나.”
“송구하옵니다.”
“가서 짐들을 방에 풀어 놓아라, 그 다음에는 저녁때까지 쉬어도 좋다.”
“알겠습니다, 전하.”
아롈은 앤이 뒤돌아서자마자 연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주변을 둘러보고 싶습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그는 말고삐를 잡아끌거나 거절을 하는 대신 오묘한 표정으로 아롈을 바라보았다.
“혹 피곤하십니까?”
이블린에서 멀지 않다곤 해도, 꼬박 한나절을 쉬지 않고 내달렸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아롈은 스스로가 마음이 너무 급했나 돌이켜보곤 반성했다.
허락된 시간은 꼬박 닷새였다. 일주일의 시간을 허락받았으나 그 중 이틀은 오고 가는 여정에 사용해야 했다. 간신히 허락받은 귀한 시간이었다. 후계자 부부가 나란히 자리를 비우는 일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인지 아는 만큼 한 시가 아까운 것이 사실이었다.
“괜찮아요. 가지요.”
아롈이 이유를 캐묻기도 전에 그가 먼저 말에 훌쩍 올라탔다.
“내기라도 할까요?”
“전하!”
채 고삐를 잡기도 전에 그가 내달렸다. 아롈은 급하게 등자를 밟아 올랐다. 등이 한참이나 멀어졌다.
먼저 출발했지만 금세 추월당했다. 둘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순도순 달리다가 결국 적당한 곳에서 멈추어 섰다. 내기는 흐지부지 잊혀졌다. 애초에 건 것도 없는 내기였다.
시골이라 그런지 저 멀리 지평선이 보였다. 농사를 짓는 밭이며 마을은 성으로부터 다소 떨어진 곳에 있어 보이지 않았다. 풍광을 위해 드문드문 심어놓은 과일 나무만이 인공적인 부분이었다.
세시안은 작은 앵두나무에 말고삐를 묶으며, 근처에 있는 편평하고 큼직한 바위를 눈여겨보았다. 치마 입은 숙녀를 바닥에 앉힐 수는 없는 노릇이니 코트라도 벗어 깔면 그럭저럭 괜찮은 곳이 되리라 싶었다.
그러나 그 근처에 잠깐 앉았다가 돌아가리라는 것은 순전히 그만의 생각이었다. 아롈은 그의 손을 잡은 채 자꾸만 앞으로 나아갔다. 재잘거리는 성격은 아니어서 산책은 조용했지만 발걸음은 차츰 빨라졌다.
말과 멀어지면 돌아갈 때 힘이 들 텐데. 그렇게 생각했지만 차마 말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창백한 뺨이 잘 익은 사과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아롈은 정말로 잘 걸었다. 굽 높고 꼭 끼는 구두를 신었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 할 정도였다. 호기심 많은 어린 아이처럼 고개를 휙휙 돌리거나 갑자기 내달리는 일은 없었으나 들떠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시선이 팔랑거리는 나비를 쫓았다가 저 멀리 무리지어 핀 토끼풀에 앉았다가, 또 포르르 날아올라 지저귀는 지빠귀를 따랐다.
손을 잡아 걷기 쉬운 길로 인도하면서 그는 내내 그 활기찬 옆모습을 바라보며 설렜다. 항시 뚱하던 입술이 보기 좋은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또 누구의 가슴을 터트리려 하는지 요새 아롈은 웃음이 늘었다. 원래 표정이 풍부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언뜻언뜻 미소가 어렸다. 빈정거려 사람을 상처 입히기 위한 웃음도, 사교를 위해 억지로 얼굴을 덮는 그런 웃음도 아니었다. 그저 속에서 톡톡 두드려 벌어지는 꽃송이처럼 머금는 웃음을 볼 때마다 심장 어느 한 구석이 뻐근해졌다.
“전하?”
시선을 느꼈는지 문득 눈이 마주치고, 발걸음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멈추었다.
“사랑해요.”
몇 번을 말해도 질리지 않았다.
“저도 사랑합니다.”
돌아오는 답변도 마찬가지였다. 단 한 번도 그를 흔들지 않고 덤덤하게 스쳐지나가는 적이 없었다.
그는 흔들림에 순응했다. 여전히 미소 띠고 있는 입술에 입 맞추었다. 따뜻했다.
“가서 요깃거리를 가져오너라.”
석양이 질 때에야 침실에 들어온 아롈은 의자에 앉자마자 명령했다. 피곤해서 눈이 가물거렸다. 허리부터 발가락까지 온 하반신이 작신작신 쑤셨다. 승마는 원래 하반신에 힘이 많이 들어가는 운동인데다, 풍광에 정신이 팔려 하루 종일 걸었다. 무엇보다 배가 고팠다.
관리인인 릴리안느가 무릎을 꿇고 물었다.
“마담 라 세르. 선호하시는 식재료가 있으신지요?”
“딱히 없다.”
싫어하는 식재료는 많아도 특출하게 좋아하는 음식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하오면 알아서 준비하겠습니다.”
이제 나가려니 했는데 릴리안느라는 고운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중년의 여인은 머뭇거렸다. 아롈은 눈을 치켜떴다.
“무얼 하고 서 있느냐?”
“전하, 곤하시오면 소인이 먼저 시중을 들어드리오리까?”
“앤에게 시킬 테니 음식이나 가져오너라.”
아무리 사람을 얼마 데려오지 않았다지만 작위도 없는 관리인 따위에게 머리며 옷가지를 손대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본래라면 아롈이 직접 말을 섞을 일도 없었다.
릴리안느의 눈길이 아롈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두 번 토를 다는 것은 질색이라 긴장했는데, 다행히도 그녀는 바로 뒤돌아 나갔다.
아롈은 의자에 기대어 앤이 돌아올 때까지 불을 쬐며 기다렸다. 봄이라곤 해도 순전히 돌로 지은 성에는 밤이 되자 냉기가 감돌았다.
심심했다. 말동무를 해줄 만한 앤은 짐을 다 못 푼 듯 보이지 않았고, 남편은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고 싶다며 사라졌다.
책이라도 뒤적일까 했으나 이 성의 침실에는 가져다 놓은 책이 없었다. 그렇다고 초대장이나 서류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보아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목욕을 하러 갈 걸 그랬나 후회가 들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음탕하게 혼욕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하.”
아롈은 눈을 번쩍 떴다. 앤이 무릎 꿇고 있었다. 벽난로의 온기에 하루 종일 쌓인 피로가 더해져 깜빡 존 모양이었다. 미간을 문질렀다. 깊은 잠에 들었는지 정신이 탁했다.
“늦었구나.”
“송구하옵니다. 치장을 풀어드리겠나이다.”
옛날 양식의 성인지라 따로 곁방이 없었다. 이 성이 지어질 때에는 시녀가 침대 발치나 침대 밑에서 잠들던 시절일 테니 당연했다. 가구나 내장은 바꿀 수 있어도 건물의 구조 자체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무로 틀을 만들고 얇은 비단을 씌운 칸막이를 둘러치곤 머리를 풀었다.
앤은 가장 먼저 이마를 두른 식물을 조심스레 탁자에 올려두었다.
식물?
아롈은 손가락 끝으로 축 늘어진 줄기를 집어 들었다. 토끼풀로 둥글게 엮은 화관이었다. 흰 꽃이 군데군데 매달리게 솜씨 좋게 엮었으나 시간이 지나 시들었다.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이걸 이때까지 하고 돌아다녔던가.
남편이 엮어준 것이었다. 그는 무리 지어 피어있는 토끼풀 사이에서 네 잎이 붙은 돌연변이를 찾아 헤매다 포기하고는 길쭉한 꽃대를 몇 촉 뽑아내어 화관을 만들었다.
-이런 것도 만들 줄 아십니까?
알렉산드르에게는 이런 재주가 없었다.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엮어서 나탈리야의 머리에 씌웠을 테니 아롈이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놀라서 묻자 세시안은 생긋 웃었다.
-여동생이 여섯 명이면 강제로 배우게 되어 있어요.
순식간에 단순한 원형도 아니고 두 개의 끈이 서로 교차하며 꼬이는 변형 화관을 만들어낸 그는 그 관을 아롈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제비꽃이며 민들레 같은 들꽃도 적당히 섞어놓아 화려한 모양이었다.
-잘 어울리네요.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남편이 준 것이라 좋았고, 잠시만 이고 있으려 했는데 잊어버리고 하루 종일 쓰고 다닌 것이다. 어쩐지 한낱 성의 고용인 따위가 참견하려 하더라니, 이것 때문이었던가.
“전하, 가져다 버리는 것이 좋겠사옵니까?”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앤이 리본을 풀고 땋아놓은 머리를 아프지 않게 전부 풀어주었다.
고개를 젓자 레몬색의 긴 머리카락이 따라서 찰랑였다.
“아니다. 두어라.”
손톱으로 쪼갠 줄기는 이미 시들었고, 거기에 매달린 꽃도 곧 풀이 죽을 테지만 던져 버리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은 것이니.
“조금만 더 보련다.”
물론 부끄럽게 머리에 달고 다닐 생각은 없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