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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외전. 종려 가지 기사단 (6)


"레오노프. 지금 나와 농담을 하자는 건 아니겠지."

아롈은 어깨를 들썩이며 비웃었다.

 "설마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고 말하지는 마라. 너를 그 자리에 앉힌 내 조부님을 모욕하고 싶지 않으니."

레오노프는 무안을 당한 것이 부끄러운지 입을 다물었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첫 번째 남자, 스미르노프 백작-공작이 뻔뻔하게 고개를 들었다.

 "전하. 이 천한 자는 용에 대해 말씀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존경하는 여제 폐하께서는 전하께서 상트 루스카부르크 ​인​근​의​.​.​.​.​.​.​"​

 "보급 기지?"

스미르노프도 입을 다물었다. 아롈은 팔짱을 꼈다.

 "모를 리가 없지. 내가 경애하는 이반 3세 폐하의 명령에 따라 건설 명령을 내렸으니. 폐하께서 이리 관심을 가지셨다면 내 서명 정도는 보셨겠지?"

아롈은 보란 듯이 손가락을 꼽았다.

 "코시카, 로렌, 카스티야, 아스투리아스, 아니 실질적으로 카스티야겠고, 비엔나, 웨데나. 그 근방 지형이 꽤 복잡하지. 따라서 이반 3세 폐하께서는 인근 무인도에 군 보급 기지를 세우실 것을 원하셨다."

앙투안은 정치 감각이 항상 부족했다. 타고난 재능도 없었고 후천적으로 키워지지도 못했다. 클라리 경이었던 시절 몸담았던 오를레앙 기사단은 대공가 소속 사병으로서, 독자적인 군사 작전을 펼칠 권리가 없었다. 따라서 그가 접할 수 있는 기밀은 몹시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또 발루아 경으로서 창설된 종려 가지 기사단은 모두가 비웃는 사실처럼 권한 없는 예쁜 장식물이었다.

루이 앙투안 드 발루아는 지금 그가 듣고 있는 것이 코시카 군 기밀이라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본토 바깥의 보급 기지, 특히 생 뤼스킨처럼 민감한 지역의 군 보급 기지가 얼마나 중요한 사항인지 알 능력도 없었다. 보급 기지의 존재는 식민지 확장이나 이후 생길 마찰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의 무지함은 앙투안을 북쪽 캬트 어를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기사들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스미르노프와 레오노프 모두 기밀을 줄줄 이야기하는 아롈의 말에 반사적으로 다시 한 번 주변을, 특히 푸른 눈을 가지고 있는 앙투안을 훑어보다가,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 것을 보고 다시 시선을 내렸다. 아롈이 맑은 목소리로 웃었다.

 "그래서? 내가 기지 건설에 관여했는지 알아보고 오라는 게 유일한 명령이었나?"

 "전하. 실은 샤라보스키 중장이 용이 나타난 이후 근처를 지나간 배와 항구 기록, 관측 기록을 전부 조사했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 푸른 장미(로렌 황실 가문 문장)를 단 군함 세 척과 칠색기(로렌 국기)를 단 상선 두 척이 정확히 사흘 간격으로 십이일에 걸쳐 기지 1.3마일 근해를 지나간 것을 확인했습니다."

 "로렌 군함과 상선?"

 "예."

 "그래서?"

 "전하."

 "그래서!"

목소리가 단숨에 높아졌다. 클레르 드 뤼시용의 눈이 동그래졌다. 레오노프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래서 여제 ​폐​하​께​서​는​.​.​.​.​.​.​"​

 "말 흐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당장!"

목소리는 점점 높아져 당장이라고 말할 쯤에는 고함이 되어있었다. 캬트 어가 아니라 사람 말을 모른다 해도 지금 아롈과 코시카 귀족들이 고향 이야기나 떠드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아롈은 그야말로 격노해 있었다. 말아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고 매끄러운 뺨에 홍조가 돌았다. 앙투안은 어리둥절하게 그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대공 전하, 고정하십시오."

레오노프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스미르노프와 나머지 하나도 따라서 무릎을 꿇었다.

 "너희가 지껄이지 못하겠다면 내가 말할까? 지금 너희들이 감히 나를 추궁한 거냐!"

포효였다. 앙투안은 그제야 이해했다.

 "스미르노프, 입을 놀려봐라. 그런가?"

 "고정하십시오, ​체​사​레​.​.​.​.​.​.​,​ 여대공 전하."

앤이 쪼르르 달려나가 찬물을 따라 바쳤다. 유리잔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신 아롈은 가슴을 들썩였다. 옆에서 봐도 찍어죽일 것 같은 시선이었다. 잠시 후 꺼낸 질문은 상당히 목소리가 낮아진 다음이었지만 여전히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이제 알겠군. 갑자기 예정에도 없던 특사, 결혼한 직후에도 오지 않았으면서, 그런 특사가 셋이나 하필 대회의 기간에 맞춰 부랴부랴 내려온 이유를."

 "전하. 그저 폐하께서는 확인하고 싶어하십니다."

 "팔아치운 딸이 자신이 아는 기밀을 어디까지 나불댔는지?"

스미르노프가 한 대 얻어맞은 듯 닥쳤다.

 "샤라보스키가 '사랑하는 어머니'께 속살거리기를 그 빌어먹을 생명체가 나타나기 전, 그 근처를 지나간 배가 로렌 국적선 뿐이었다고 했느냐?"

 ​"​그​건​.​.​.​.​.​.​.​"​

 "그건 아닙니다. 전하."

남자들은 아롈의 앞에서 주눅들어 있었다. 앙투안은 코시카의 정서를 몰랐으므로 신기하게 생각했다.

로렌의 이블린에서 나고 자란 앙투안은 황족에 대한 경의가 희미했다. 로렌에는 황제 이하의 지위 높은 대공이 여섯 명이나 있었고 대공가의 일원들이 이블린에 가득 부대껴 살았다. 로렌 황제의 칭호 중 하나로 '칠인의 맹세의 맹주'가 있다. '황제와 육인의 맹세'가 아닌 '칠인의 맹세'였다. 황제가 가장 높은 위치에 있고 모두가 그 앞에서 무릎 꿇고 황제의 권위를 인정했으나 대공은 대회의에서 황제와 같은 자리에 앉아 자신의 표를 행사할 수 있었으므로. 세시안은 온유한 성품과 성실함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는 세르였지만 아무도 세시안을 신성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코시카에서 막 내려온 귀족들은 아롈의 앞에서 무릎 꿇은 채 고함 한 번에 수그러들었다. 코시카 정교회 수장은 황제이며 코시카 황제와 그 피를 이은 황족은 가장 고귀하고 가장 푸른 피로 취급받았다. 황제가 아닌 휘하 귀족들은 사병을 가질 수 없었고, 코시카 황궁-황궁은 하나 뿐이므로 그저 황궁이었다-에는 황실 가족들만이 살고 있었다. 안나 여제에서 이반 3세로 이어지는 긴 치세는 황실에 안정성을 부여하고 권위를 드높였다. 그리고 아롈은 이반 3세가 유언장에서 직접 지목한 후계자였다.

제도, 종교, 역사, 그 모든 것이 아롈의 등 뒤에 있었다. 옐레나 여제가 굳이 스미르노프 공작을 선택한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그는 한 번 딸로 하여금 아롈을 배신하게 한 인물이었으니. 그러나 스미르노프조차 아롈의 입에서 '조부'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부터 심리적으로 위축되어있었다. 코시카 황제는 무오하다. 그리고 코시카 황제의 후계자는 무오에 가깝다.

아무리 쫓겨나 더이상 아무런 실권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도 그 존재와 핏줄만으로 아롈은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힘입어 마음껏 분노했다.

 "그 보급 기지가 기밀이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모양인데, 관대하게 설명해주지. 다른 나라에서는, 심지어 코시카 상선도 그 곳이 그냥 근방 무인도인 줄 안다는 뜻이다. 그럼 당연히 배들이 근해를 지나가겠지! 그 근처는 광산과 작물이 많은 곳이고 상선을 보호하기 위한 각국 군함도 같이 돌아다니니까! 애초에 기지 근처의 선박 움직임을 통제해서 배가 그 근처만 가면 실종된다면 대체 기밀에 무슨 의미가 있지?"

목소리가 다시 치솟았다가 가라앉았다.

 "매일 같이 지나다니는 수십 수백 척의 배 중 로렌 국적선이 고작 다섯 척 있었다고 해서 나를 의심하신다면, 나는 사랑하는 어머니께 다시 생각해보시라고 답변 드릴 수밖에 없겠군."

 "전하. 여제 폐하께서는 명확한 답을 원하셨습니다."

아롈은 기막히다는 듯이 숨을 토해냈다. 눈이 한 번 감겼다가 다시 뜨였다.

 "지금 당장 통역을 불러 문서로 남겨줄까?"

 "어찌 의심하겠습니까. 전하의 말씀이면 충분합니다."

 "그럼 폐하께 한 글자도 틀리지 말고 말씀올려라. 코시카의 옐레나, 내 이름에 걸고, 나는 내가 아는 것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그럴 생각조차 해본 적 없다고. "

 "전하. 폐하를 대신하여 전하의 관용에 감사드립니다."

레오노프가 무릎 꿇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말이 계속 떨어져내렸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생각이 조금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전하!"

레오노프가 사색이 되어 고개를 들었다.

 "내가 선황 폐하로부터 가르침 받은 것들이 적지 않아. 그리고 폐하께서는 지식만이 아니라 활용하는 법도 같이 가르치셨지. 내가 지금까지 입을 다문 건 그 가치를 몰라서도, 활용하는 법을 몰라서도 아니야."

지금의 아롈은 배에서의 모습에 가까웠다. 오만했고 날 서 있었다. 목은 꼿꼿하고 입가에는 비웃음이 감돌았다. 다른 점이라고는 옷차림과 틀어올린 머리카락 뿐이었다. 금발의 코시카 여대공은 상대가 어떤 기분일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 보였다. 사실 그녀는 그럴 필요가 없었으므로.

 "내가 키예나기 때문이다."

그 무게는 앙투안조차 철렁할 정도로 강렬했다.

 "너희들이 부러 빼먹은 말이 있지. 코시카는 키예나의 것이다. 키예나가 코시카의 것이 아니라. 나와 신에게 축복받은 나의 혈통은 국가의 위에 있다. 지금까지 내 입이 잠겨 있었던 건 결코 의무가 아니었음을 친애하는 폐하께서는 아셔야 할 거다."

 "전하, 폐하께서는."

 "승하하신 '폐하'께서 너희들이 그 분의 하나 뿐인 손녀에게 이렇게 무례할 수 있는 자들임을 알았더라면 너희를 그 자리에 앉히셨을지 의심스럽군."

남자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검게 변한 채 입을 다물었다.

 "내 답은 여기까지다. 명령이다. 단 한 마디도 빠짐없이 전해라."

아롈은 미련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올랐다. 앙투안은 그들이 쫓아와 매달리지 않는 데에 놀랐다. 4층까지 뛰어가듯 올라온 아롈은 응접실 문을 열려고 했다. 그 전에 문이 저절로 열렸다.

 "잘 하고 왔나요?"

세시안이었다. 아롈은 센 궁에 있어야 할 남편이 자신의 응접실에서 나타난 것에 조금도 놀라지 않고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앙투안은 입술을 깨물고 문을 닫았다.



아롈은 누가 보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연인의 어깨에 이마를 붙인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세시안의 손가락이 아롈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아롈은 한참이나 그의 품에서 숨을 고르더니 속삭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십시오."

 "그 전에, 사랑하는 아렐르. 괜찮나요?"

어깨에서 이마가 떨어졌다. 눈이 마주쳤다. 겨울날 몸을 떨다가 수프를 떠먹은 듯한 온기가 퍼졌다. 아직도 모욕감에 손끝까지 차가웠다.

 "다시 한 번?"

 "사랑하는 아렐르."

 "오늘 들은 헛소리보단 백 배쯤 낫군요."
본편에 들어갔을 내용인데 타임라인 때문에 외전에 들어갔더니 너무 길어지는군요. 하지만 결국 앙투안의 감정선과 깊은 연관이 있을 예정이니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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