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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외전. 종려 가지 기사단 (10)


인기척을 내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싸늘하게 여름밤을 울렸다.

 "사촌은 내 목숨이 그리 하찮은가요?"

앙투안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목소리는 익숙했지만 언어는 이블린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중부 듀츠 어였다.

 "어찌 신하로서 그런 참람한 생각을 품겠습니까."

목소리를 들으니 상대는 아롈의 외사촌인 샤를루아 공작이었다. 보르디의 필리프는 풀숲에 가려져 앙투안이 선 자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아롈의 보드라운 입술에 웃음이 맺혔다.

 "하지만 여전히 쫓겨난 주제에 건방지다 생각할 테고?"

 "그렇게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만, 이미 충언 드린 바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알아듣지 못하실 만큼 우둔하신 분도 아닐진대, 듣지 않으시는 데에는 필경 연유가 있는 것이겠지요."

직설적인 폭언을 들었음에도 아롈은 여전히 흠잡을 곳 없이 웃고 있었다. 머리카락과 흰 살결이 달빛에 빛나는 모양이 흡사 작은 은(백금, Platine)을 가늘게 뽑아 만든 나뭇가지 같았다.

 "그야, 내가 어찌 굴든 사실 사촌에게는 남은 길이 없지 않습니까."

 "흥미로운 말씀이시로군요."

 "내가 사촌이라면 시체 둘을 치우느니 분명 연 끊긴 고모와 후계자 기분에 젖은 사촌 쪽을 택하겠다 싶어서요."

아롈이 빈정거렸다.

 "말씀이 송구하여 감히 일개 공작이 감당할 바가 아닌 듯합니다."

필리프의 대꾸는 여상했으나 그토록 다듬어져 흘러나올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동안 아롈은 옥좌 위에서 내려다보듯 기다렸다.

 "하오나 보르디 대공의 장자도 샤를루아 공작도 아닌 저 개인의 좁은 소견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혈통만 짙푸를 뿐 날개 잘린 새끼 독수리가 주검보다 간신히 나을 따름이지 벽장 속 어여쁜 인형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쏟아지는 주먹 같았다. 옆에서 숨어 듣고 있던 앙투안이 질릴 정도로. 매끈한 도자기 같던 웃음에 노여움으로 잠시 금이 갔다.

 "황위 계승자의 자리에 인형을 앉히는 법은 없지요. 설령 그 자리에 앉았다 한들 무언가를 가르치는 이가 있을 리도 없거니와."

숨이 점차 가빠졌다. 목소리에 진한 노여움이 배어났지만 웃음만큼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낮에서 본 것과 꼭 같았다. 평생을 쌓아올린 오만함과 자부심이 견고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앙투안은 당장이라도 아롈이 소리지를까봐 어깨를 긴장시켰다.

 "인형은 아는 것을 내뱉을 혀가 없잖습니까."

앙투안은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능력이 없었다. 다만 당장 말을 끊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느꼈다'. 잽싸게 팔을 들어 정원수 가지 하나를 잡아당기자 우수수 나무가 흔들렸다. 아롈이 돌아보았다. 미처 거두지 못한 감정들이 잠시 반짝였다가 금세 불티처럼 사그라들었다.

 "무슨 일이지?"

외국어로 밀담을 나누던 흔적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남부 갈리아 어였다.

 "마담 라 세르. 그것이."

며칠 전에는 근무하러 왔다는 변명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핑곗거리도 없었다. 그저 보고 싶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나온 연회였다. 옷도 예복 차림이 아닌 평복인데다 검조차 없었다. 당황한 파란 눈이 대중 없이 흔들렸다.

 "그것이, 제가, 사실은."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가 계속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더듬거리자 아롈이 얼굴을 찡그렸다. 찡그렸는데도 마냥 아름답기만 했다.

 "생 제멜 경이 보냈나?"

 "예? 예! 예!"

입을 돌로 찧고 싶었다. 보고는 무슨 보고. 앙투안은 생 제멜 경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다.

 "직접 와서 할 것이지 또 게으름은. 길어질 말인가?"

 "예에."

아롈은 구원의 동아줄을 아무렇지 않게 던져서 앙투안을 건져올리고는 필리프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는군요, 사촌. 내일 센 궁에서 보지요."

 "마땅히 찾아뵙겠습니다."

필리프가 두어 발짝 걸어나와 허리를 숙였다. 아롈의 손등에 입맞추고는 앙투안과 눈을 마주쳤다. 보르디 특유의 섬세한 얼굴선 위에 주름이 앉았다가 다시 펴졌다.

 "그럼 멘 공작(HSH)."

 "공작 ​전​하​(​H​G​D​H​)​.​"​

저도 모르게 예도 자세를 취하려다가 허겁지겁 손을 가슴에 올리고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스쳤다. 필리프는 이블린 본관을 향해 느긋하게 멀어져갔다. 남자의 뒷모습이 충분히 작아지자마자 서릿발 같은 추궁이 날아들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할 말이 없었다.

아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술과 감정에 흠뻑 취해 있었지만, 지금 갈비뼈 안에서 펄떡이는 마음을 한 줄기라도 들켰다가는 큰일이 나리라는 판단력만은 남아있었다. 하지만 앙투안의 머리와 가슴을 아무리 훑어내도 그 말들 말고는, 하면 안 되는 말들 말고는 정말이지 남은 것이 없었다. 고장난 오르골처럼 머뭇거리자 아롈은 팔짱을 낀 채로 앙투안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경, 술 마셨나?"

 "예!"

 "얼굴이 붉은데."

 "죄송합니다!"

 "뭐가 말인가?"

근무 중도 아니고 술 마신 것에 죄송해야 할 턱이 없었다. 당황스러워 얼굴이 시뻘게졌다. 언제 자연스레 낄낄댔냐는 듯, 앙투안은 순식간에 할 말을 잃고 버벅거렸다. 자괴감이 훅 끼쳤다. 대체 얼마나 한심해 보일까.

 "나쁘지 않게 입었군."

문득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미셸이 애용하는 재단사에게 지은 옷이었다. 몸에 딱 맞게 떨어지는데다 조끼가 짧아서 요새 유행에 알맞는. 연회에 나온 것부터 얼굴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어서 할 수 있는 한 좋은 옷을 입고, 어중간하게 길어진 머리카락을 말끔하게 빗어넘겨 이마를 드러냈다. 남루한 신분은 기울 수 없어도 복장은 갖출 수 있는 것이니 최선을 다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앤은 지금 여기 없다."

기분이 순식간에 지옥 밑바닥에 처박혔다. 표정을 어찌 해석했는지, 아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애써 찾아왔나본데 앤은 지금 자비관."

 "그런 게 아닙니다."

말이 끊긴 아롈은 몹시도 불쾌한 얼굴이었으나 한 번 참아준다는 듯 갸름한 턱을 기울였다. 아롈을 아는 이라면 누구나 놀랄 법한 관용이었다.

 "레르헨펠트 양을 찾아온 게 아닙니다. 제가 찾을 이유도 없고요."

 -그 고고하신 마담 라 세르께서, 아랫사람 일에 그 정도로 나서신 건 네가 두 번째잖아.

싸늘한 표정 아래로 드러난 관용이 등대처럼 따스하게 반짝였다. 힘들어 포기하고 바닷속 깊은 곳에 가라앉으려 마음 먹을 때마다 흔들리는 그 빛이 너무 고와서 포기할 수가 없었다. 애정이 아닌 것은 알았다. 그러나 연정이 아니라 해도 빛이 어둠이 되지는 않는다. 불나방처럼 홀려 달려왔다.

 "화해하려 한 게 아닌가보군?"

 "화해할 일도 없습니다!"

앙투안은 저도 모르게 빽 소리쳤다가 주눅들었다. 아롈의 눈초리가 잠깐 날이 섰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또 한 번 봐 준 것이다. 이어지는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사이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래? 나는 잘 어울린다고 여겼는데."

아롈은 팔짱을 낀 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제 팔을 톡톡 두드렸다.

 "그럼 왜 왔지?"

 "그냥 여기로 와야 할 것 ​같​아​서​.​.​.​.​.​.​.​ 와보니 전하께서 계셨습니다."

선후가 바뀐 변명이었지만 아롈은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왜 혼자 계십니까?"

아롈은 시녀도 기사도 데리고 있지 않았다.

 "대동했다간 달이 지기도 전에 내가 샤를루아 공작과 만나서 수군거리더라고 온 이블린이 알게 될 텐데?"

 ​"​아​.​.​.​.​.​.​.​"​

 "그러니 경도 입 다물고. 좀 걸을까 하는데 따라와라."

흐르는 듯 자연스러운 명령이었다. 아롈이 휙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앤의 일도, 따라온 이유도 의외로 순순히 납득한 기색이라 안심한 그는 바로 뒤따랐다. 자연스레 그가 선택한 자리는 두 걸음 뒤였다. 검도 없는데 우습다는 생각이 스쳤으나 옆에 서서 뻔뻔스레 희고 고운 손을 받쳐들 용기가 차마 나지 않았다.

밤의 이블린은 사실 한적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거울의 홀이 있는 이블린 본관이 가장 떠들썩했지만 근처의 다른 별관들에서도 연회가 벌어졌다. 머리를 식힌다는 핑계로 산책을 나오는 남녀도 적지 않았다. 아롈은 소리없이 허리 굽히는 남녀를 다섯 쌍쯤 지나쳐 사뿐사뿐 걸어 후원 쪽으로 향했다.

복잡한 문양의 철 울타리 위로 줄장미 수천 송이가 휘감겨 짙은 향기를 뿜었다. 여기에서 키우는 장미 중 흰색은 파란색 물을 들여 발루아 가문의 '푸른 장미'로 쓰였다. 늦봄에 걸쳐 늦여름까지 지지 않는 장미는 이블린 후원의 명물 중 하나였다.

장미를 따서 여인에게 바치는 남녀 수십 쌍을 무시하고 또 한참을 걷자 여름 꽃을 색깔 별로 무리지어 심어놓은 곳이 나타났다.

후원 깊숙한 곳인데다 본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인기척도 없이 고요했다. 아롈은 근처 의자에 걸터앉았다.

앙투안은 같이 앉을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으므로 엉거주춤하게 떨어져 섰다. 손수건을 깔아야 한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다급히 품을 뒤졌지만 손에 잡히는 건 먼지 뿐이었다.

 "경. 생각해본 바 없다면 이제부터 고려해보는 건 어떤가?"

코트 안자락으로 들어가 있던 손이 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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