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짝사랑 (1)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었다. 옐레나는 모피로 된 털옷을 껴입고 토끼털 귀마개를 하고 부츠까지 신은 채 열심히 발이 폭폭 빠지는 눈밭을 걸었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위로 눈송이가 계속 달라붙었다.
코시카 정교회는 1월 6일, 즉 바실리예프의 저녁부터 열이틀 간의 축일을 기념한다. 마법사와 정령을 숭배하던 시기에는 동지 축제였다가 정교회가 들어와 성령 축일과 합쳐진 이 휴일을 스뱌트키라고 불렀다.
바실리예프의 저녁에는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만찬을 즐기며 덕담을 즐기는 것이 전통이어서 웬만한 가문 출신의 시종과 시녀들은 가족들과 함께 보내기 위해 짧은 휴가를 받아 집으로 돌아갔고, 황궁은 최소한의 인원만이 남아 호젓해졌다.
옐레나는 정원에 들어가 여러 번 길을 꺾었다.
왼쪽, 오른쪽, 왼쪽, 왼쪽, 오른쪽.
곧 아주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옐레나 다섯 명이 손을 맞잡고 원을 그려도 다 감싸 안기 힘들만큼 컸다.
옐레나는 나무 둥치에 몸을 기대고 숨을 뿜었다. 여기로 혼자 나오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예브게니아는 자긴 돌아갈 집이 없다며 옆에 꼭 붙어 있으려고 했지만 아롈이 그녀의 외할머니를 소환해서 보내버렸다. 그래서 옐레나는 정말 오랜만에 혼자 있을 수 있었다.
눈이 내리는 모습이 정말로 예뻤다. 하얗고, 보송보송하고, 정말로 예뻤다.
“파피.”
옐레나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요사스러운 혀는 그래도 계속 꿈틀거리며 말을 뱉어냈다.
“파피.”
어린 아이는 필사적으로 참으려고 애썼다. 잘못 하면 빌어버릴 것 같았다. 제발 파피를 돌려주세요.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까 제게 친구를 돌려주세요.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니까. 자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안 되는 거니까.
괜찮다. 사샤만 있으면 견딜 수 있다. 이렇게 눈이 올 때면 그 때 그 눈 녹지 않는 계곡으로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 들지만, 겨울만 조심하면 된다. 황도는 키예프와 비교할 수 없이 따뜻해서 봄이 오면 금방 눈이 녹아버린다.
“나는 파피 같은 거 몰라.”
“송구하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옐레나는 고개를 돌렸다. 기척도 없이 나탈리야가 와있었다.
“아무 것도 아니야.”
“예. 부르셨나요, 아롈 여대공 전하.”
옐레나는 불만스레 나탈리야를 올려다보았다. 아롈이 아닌데. 정말 요즘은 궁정 사람들 전부 알렉산드르를 따라하는지 옐레나를 아롈이라고 불렀다.
“그래. 불렀어. 눈이 많이 오니까 무릎은 꿇지 않아도 좋아.”
“황공하옵니다.”
무릎을 꿇는 정식 인사 대신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가 펴는 약식 예를 표한 나탈리야는 입술을 부드럽게 올렸다. 하지만 그녀의 눈매는 긴장으로 굳어있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나요?”
옐레나는 조금 뒤늦게 몸을 똑바로 세우며 귀마개를 내렸다. 차가운 공기가 땀에 젖은 귀에 닿았다. 그래도 바람이 안 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는 덜 시렸다.
“알렉산드르가 네게 칠칠치 못하게 굴었다지?”
그녀는 아주 애매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붉은 기를 띠는 갈색 머리카락이 구불구불거리며 목덜미를 장식하고 있었다. 별로 예쁘지도 않은데. 사샤는 눈도 참 낮지. 성격은 정말 안 좋지만 내 시녀인 알렉산드라도 예쁘고, 어머니 시녀들 중에서라면 금발인 애 둘이 더 반짝반짝하게 생겼는데. 옐레나의 눈에 나탈리야는 하나도 예쁘지 않았다.
“대신 사과할게.”
알렉산드르 대공이 옐레나 대공비의 시녀인 나탈리야 미하일로브나 돌로루코바 공녀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궁정에서는 비밀도 아니었다. 요즘 들어 옐레나를 앉혀놓고 멍하니 한숨만 쉬는 일이 늘었다. 지난번에는 옐레나를 앉혀놓고 자작시를 평가해 달라고 하질 않나, 갑자기 동부 말-슬프게도 알렉산드르보다 배운 지 1년 된 옐레나가 동부 말에 더 능숙했다-로 된 시를 번역해달라고 하지를 않나, 그 시가 흑발 미인을 찬양한 것이라는 걸 친절하게 알려주자 시무룩해져서는 머리를 헝클어트리질 않나, 심지어 그가 나탈리야의 실내화를 훔쳐내어 안고 잔다는 망측한 소문까지 돌았다.
주코바와 쿠트조바를 다그치자 그녀들은 옐레나에게 친절히 알렉산드르에 대한 소문을 물어다 주었다. 주코바는 소문을 잘 물어오는 편이었고 쿠트조바도 다른 이의 시녀들과 활발하게 어울려 소식통이 빨랐다. 그래서 옐레나는 알렉산드르가 조부의 명으로 지방 시찰을 다녀오는 동안 나탈리야와 알렉산드르에 대한 모든 소문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소문일 뿐이니 전하께서 신경 쓰실 것 없답니다.”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는 내 하나 뿐인 오빠야. 내가 그에 관한 소문에 신경을 쓰질 않으면 누구에게 쓰겠어?”
사샤가 그랬다. 키옌, 키예나의 핏줄을 이은 남매는 이제 둘밖에 없다고. 옐레나는 알렉산드라가 신이 나서 떠들어댄 내용을 종이를 보고 읽듯이 나탈리야의 눈을 보고 말했다.
“돌로루코프 가문도 한 때는 잘 나갔다지? 폐주의 일로 쫄딱 망하기 전에는 공국도 있고 전하라고도 불렸다면서? 웨데나의 아스트리드 공주만 아니었다면 분명히 돌로루코프 가문에서 황후가 나왔을 거라고 소문이 자자하던걸.”
안나 여제는 사촌을 유폐하고 황위에 올랐다. 안나 여제의 아버지인 알렉세이 대공은 일찍 죽었는데, 소피야 여제가 후계자를 정할 때 안나 여제와 동생인 옐리자베타 여대공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알렉세이 대공의 동생인 표트르 대공이 표트르 2세로서 황위에 올랐다. 그 때 표트르 2세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한 이가 돌로루코프 공이었다.
표트르 2세는 웨데나의 아스트리드 공주와 결혼해 자식을 세 명 낳았지만 아들이 채 다섯 살이 되기 전에 죽었다. 그가 황위에 오른 명분이 '여인보다는 사내가 먼저 황위에 올라야 한다'였으므로 열다섯 살짜리 딸을 후계자로 삼지도 못 했다. 그리고 안나 여제는 세 살 배기 표트르 3세를 폐위하고, 그와 두 누이를 탑에 가둔 뒤 옥좌에 앉았다. 그 뒤로 돌로루코프 가문은 숙청당해 과거의 영광을 빼앗기고 명맥만을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배경은 대단히 복잡했기 때문에 아직 어린 옐레나가 이 모든 것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무리였다. 이해를 어려워하는 옐레나에게 알렉산드라는 간결하게 상황을 요약해주었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이반 3세 폐하와 내 증조모신 안나 여제 폐하께는 돌로루코프 가문이 역신이나 다름없다고 들었어.”
뭐가 다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탈리야는 눈썹 하나 떨지 않았다. 옐레나는 초조해진 나머지 잡히는 대로 말들을 마구 내뱉기 시작했다.
“폐주를 충동질해서 나라를 좌지우지하려고 했으니 죽어 마땅한 가문 출신이면서, 체사레브나의 시녀로 들어온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일 아냐?”
소피야 황후가 붕어하고, 그 딸들도 없는 지금 옐레나 대공비의 권한은 황후와 다름 없었다.
“알렉산드르는 언젠가 황제가 될 거야. 그런데 너는 알렉산드르와 결혼해도 황후가 될 수 없잖아?”
“그래서 전하께서 말씀하고 싶으신 게 뭔가요? 제가 황궁을 떠나달라는 건가요?”
나탈리야는 당돌하게 반문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생각해보지 않으셨나요? 저는 이미 거절을 했고 거절의 말을 하는 것조차 제게 부담이 된다고 충분하게 설명을 해드렸는데도 대공 전하께서 저를 계속 쫓아다니며 부담을 주고 계신다는 거요.”
옐레나는 돌변한 나탈리야의 태도에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다.
“여대공 전하. 전하의 시녀도 아닌 제 집안 사정에 대해서 정말 지나치게 자세히도 알고 계시는군요. 아무리 수업을 열심히 하고 계신다곤 해도 벌써 폐주의 일에 대해 가르칠 정도로 역사 선생이 겁이 없는 것은 아닐 테고요. 어리신 전하의 귀에 들어갈 정도면 궁에 그 소문이 얼마나 파다한지 아시겠지요?”
나탈리야는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다시 천천히 뱉어냈다.
“솔직히 말하면 이미 대공비 전하께도 말씀드린 상태예요. 부디 아드님을 단속해주십사 하고요. 대공비께서도 스뱌트키 주간 이내에 말하겠다고 말씀하셨고요. 그런데 여대공 전하마저도 저를 괴롭히시는군요. 전하의 눈에도 제가 망한 가문을 어떻게든 일으켜 세워 보려고 천박하게 대공 전하를 유혹하는 창녀로 보이세요? 이제 전하라고는 불리지 못 해도 엄연히 공녀인 제가, 그렇게 자존심도 명예도 모르는 것처럼 보이시나요?”
나탈리야는 차분하게 말하는가 하더니 창녀라는 단어를 발음할 무렵에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고른 나탈리야는 천천히 웃으며 처음 만날 때도 꿇지 않았던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옷에 눈이 스며 자국이 남았다.
“전하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치죄하시길.”
“됐어, 일어나.”
옐레나는 머리가 너무 복잡해져서 낑낑거렸다. 한꺼번에 모르는 말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상황을 이해 못 하겠다. 그런데도 꼭 한 마디는 뒤에 붙였다.
“그런데 나 아롈 아니야. 옐레나야.”
옐레나는 만찬에 참석하러 다시 본관으로 향했다. 걸으면서도 뒤에서 따라오는 나탈리야가 신경 쓰여 뒤를 계속 돌아보았다.
“무언가 하문하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러니까, 너는 알렉산드르가 싫다는 거야?”
“‘옐레나’ 전하. 대공 전하가 싫다, 좋다 제가 감히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아까 전하께서 통렬하게 지적하셨듯이 저는 감히 호불호를 말할 주제조차 되지 못한다고 말씀드린 거예요.”
통렬하다가 뭘까. 파피는 물어보면 가르쳐줬을 텐데. 파피의 생각을 해버린 옐레나는 문득 다시 울어버릴 뻔 했다. 이래서 겨울이 싫어. 눈도 싫어.
건물의 처마에 도착한 옐레나는 발을 탕탕 굴러 부츠의 눈을 떨어냈다. 나탈리야가 옐레나의 모자를 벗겨서 털고 손수건으로 머리카락과 망토를 정리해주었다.
“이건 네가 하는 거 아니야.”
“제가 해야지요. 지금 전하의 시녀가 곁에 없으니까요.”
“난 네 주인이 아니야.”
“전하께서는 제 주인의 따님이시지요. 정성을 다 해 모셔야 마땅합니다.”
아까 억울하다며 열변을 토하던 이와 같은 사람이 아닌 것처럼 공손했다. 나탈리야는 옐레나의 망토와 모자와 귀마개를 받아들었다. 옐레나는 어깨를 감싸는 추위에 급히 건물로 들어갔다.
식당은 이층에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식당에는 시찰을 갔다던 알렉산드르와 어머니 체사레브나, 콘스탄틴 대공, 예카테리나 대공비, 안나 콘스탄티노브나 여공이 앉아 있었다. 안나 여제의 직계손 중 남은 사람은 여기에 더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조부와 파블 대공 정도였다. 옐레나는 여기서 가장 지위가 높은 어머니 옐레나 대공비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물론 옐레나의 뒤에 서있던 나탈리야도 마찬가지였다.
“안녕하세요, 체사레브나.”
“일어나 앉거라.”
이 자리에 초대된 이들의 서열은 이반 3세, 체사레비치 파블 대공, 체사레브나 옐레나 대공비, 파블 대공의 장자 알렉산드르 대공, 장녀 옐레나 여대공, 죽은 이반 3세의 형 미하일 대공의 아들인 콘스탄틴 대공, 그 부인인 예카테리나 대공비, 그들의 외동딸인 안나 콘스탄티노브나 순으로 옐레나의 자리는 알렉산드르의 바로 옆이었다.
시종이 빼주는 의자에 올라가 앉은 옐레나는 알렉산드르가 자신보다 먼저 나탈리야를 쳐다보는 걸 분명히 보고 아주 기분이 나빠졌다. 나탈리야는 옐레나를 따라왔으므로 대공비가 아니라 옐레나의 뒤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녀가 하녀로부터 식전주를 대신해 꿀을 탄 우유를 받아서 놓자마자 예카테리나 대공비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아롈 여대공이 데려온 저 아이는 체사레브나의 시녀가 아니던가요? 딸에게 주신 건가요?”
“아니오. 시중인이 다 돌아가서 제가 쓰라고 허락했답니다.”
옐레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적이 없는데. 나탈리야는 옐레나가 제멋대로 불러내서 여기까지 따라온 것뿐인데. 알렉산드르가 살짝 손끝을 건드리고는 고개를 아주 살짝 저었다. 옐레나는 입을 다물었다.
옐레나 대공비는 말을 건 예카테리나 대공비보다 나이가 열 살은 많은데도 훨씬 아름다웠다. 어린 옐레나의 눈으로 봐도 그랬다.
가는 목선을 타고 어깨까지 이어지는 선은 백조처럼 우아했는데 그 위로 소피야 황후의 유품인 흰 베일이 자연스레 흘러내렸다. 귓불에 단 귀걸이와, 화려한 목걸이와, 브로치 같은 것들이 원래부터 그렇게 입고 태어난 것처럼 조화를 이뤘다.
그림 속의 성모 같았다.
“어머나, 시중인을 다 돌려보내다니요? 여대공의 독단인가요?”
“물론 아니지요. 스뱌트키 주간에는 가족들과 보내게 하고 싶다고 옐레나가 제게 부탁했고 제가 허락했답니다.”
오촌 백부인 콘스탄틴 대공은 멋진 콧수염을 쓸어내리며 헛기침을 했다. 그는 옐레나가 보는 앞에서만 이미 식전주 두 잔을 전부 들이켰다.
“그렇다고 해도 코시카 황제의 손녀가 2주 동안이나 아무런 시중인 없이 지낸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 모두는 아니더라도 황도에 사는 이들 정도는 다시 불러올리는 게 어떠하오.”
“저는 괜찮아요. 예전에 키예프에서는 유모만 두고도 잘 지냈는걸요.”
옐레나는 ‘키’라는 발음을 한 순간 자기가 실언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겁먹은 아이는 급히 변명거리를 생각해내려 애썼지만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여기는 황도지 키예프가 아니오. 여대공이 키예바 여공이었을 때에는 그 곳의 군주였으니 자기 마음이지만 황도의 군주는 이반 3세 폐하시고 여대공은 아직 어리지 않소. 황도에 본가가 있는 이들만이라도 불러 올리시오.”
권유는 명백한 명령으로 바뀌었다. 옐레나는 도리질을 쳤다.
“그럼 그녀들이 실망할 거예요.”
그 까다로운 알렉산드라도 콧노래를 부르며 몇 번이나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이면서 집으로 돌아갔는데. 다시 돌아오라고 하면 분명 슬퍼할 테지.
예카테리나 대공비는 붉은 연지를 칠한 입술로 웃어보였다. 그 모습이 꼭 입가에 피를 바른 것 같아서 옐레나는 잔뜩 움츠러들었다.
“어린나이에도 웃전으로서 아랫사람들의 사정을 봐주는 마음씀씀이는 훌륭하다만 자신의 불편을 감수하면서 사정을 봐주는 것은 여대공 뿐만 아니라 황실의 체통을 깎아먹는 일이오.”
“하지만 이미 집에 간 사람들을 다시 부르는 것도 체통을 깎아먹기는 마찬가지일 걸요, 대공비 전하.”
알렉산드르는 턱을 괴었다.
“생각해보세요. 오손도손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황도에서 전령이 와서 귀한 딸내미 다시 내놓으라고 하면 있던 존경심도 사라지겠죠. 황제고 나발이고 지랄하지 말라는 상욕이나 안 튀어나오면 다행이지.”
“알렉산드르 대공!”
“아야야. 되게 무섭게 구시네요, 대공비.”
“예카테리나. 제가 잘 타이르지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한 말이니 너무 노여워하지 마세요.”
“그래요, 어머니. 대공께서도 악의를 품고 하신 말씀은 아닐 거예요.”
옐레나가 안나 공녀를 만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안나 콘스탄티노브나 키예나는 어린아이인데도 얼굴이 길고 볼이 푹 꺼져서 꼭 무슨 원한이 있는 영혼처럼 보였다. 차분한 말씨로 말을 마친 그녀의 눈이 잠시 옐레나와 마주쳤다. 갠 하늘처럼 맑은 파란색이었다. 키옌 가문 출신이라면 둘 중 하나는 파란 눈이었지만 안나의 눈은 유독 맑고 깨끗했다.
“사실 딸 하나밖에 낳지 못 한 제가 아들을 훈육하는 것에 대해 뭘 알겠어요? 체사레브나께서는 가엾은 이반을 포함해서 아들을 여럿 키워보셨으니 제가 믿고 의지할 수밖에요.”
“그러게요. 박복하여 그 많은 자식들을 잃었으나 그래도 둘은 남아있군요. 황실에 아이가 많은 것이 복이라고는 하지만 쭉정이 같은 일곱이 전횡을 일삼는 것보다야 멀쩡한 둘이 낫겠지요.”
옐레나 대공비의 눈가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웃으며 입가에 손을 가져가자 가느다란 손가락에 끼고 있는 색색의 반지가 보였다.
“높은 이들이 앞장서 천한 이들을 이끌지 않고 오히려 천한 이들이 바치는 금전에 홀려 자기 배를 불린다면 국고가 비는 것은 당연지사이지 않겠어요?”
“지당하신 말씀이세요.”
이상하다? 예카테리나 대공비의 목소리가 잠깐 부르르 떨렸다. 콘스탄틴 대공은 아예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었다. 옐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로 묘한 신경전은 끝났다. 시종이 크게 외쳤다.
“황제 폐하 드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