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푸른 눈에 담긴 세상 (2)
산 세라피나(San Serafína) 궁은 호화스럽게 차려입은 아가씨 같았다.
건물 앞의 분수대는 로렌의 이블린을 본땄지만, 분수대를 둥글게 짓는 대신 길쭉한 사각형으로 만들고 사이사이 대리석 조각상을 세웠다. 서부 성황청을 흉내내어 네모진 건물 중앙에 커다란 지붕을 올리고 네 귀퉁이에 탑을 세웠다. 지붕은 돔이 아닌 사각뿔 모양이었다. 뾰족한 지붕 위에는 십자가 대신 몸에 불꽃을 휘감은 치천사(Serafín, 熾天使)가 창을 치켜들고 있었다.
카스티야 건축가들 사이에서는 암암리에 튀기라 불리며 비웃음을 샀지만, 아무도 이 건물이 아름답다는 사실만은 부정하지 않았다. 동부 특유의 맑고 환한 햇살이 비추면 비취색 지붕의 물결 무늬가 반짝이고, 유리 창문 가득한 외벽에 조각된 천사의 부조가 승천할 듯 희게 보였으므로.
마드리드 공작부인 마리아는 이층 테라스에 앉아, 천사 조각상 사이로 뿜어져 올라와 무지갯빛으로 부서지는 물방울을 내려다보았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파란색 눈이 지루하게 깜빡였다. 그녀의 앞자리는 비어있었다. 초대한 사람이 늦은 것은 아니었다.
초대장에 언제든지 편하게 방문하라고 되어있어서 점심을 먹자마자 저택을 나왔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낮잠시간이었다. 코시카 출신인 마리아는 동부 카스티야의 낮잠 시간(la siesta)을 항상 잊어버렸다. 고개를 숙이는 시녀에게 마리아는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어쩌면 두 시간일지도 모른다. 마리아는 부채를 부치며 따분함을 달래려 애썼다. 손도 대지 않은 유리잔 표면에 이슬이 흘러내렸다. 마리아가 기어이 일어나 누군가를 부르려던 참에 시녀 하나가 황급히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마드리드 공작부인 전하(HRH). 아스투리아스 여공 전하(HRH)께서 곧 당도하신다고......"
"이미 당도했다."
시녀가 물러나 무릎을 꿇었다. 마리아 역시 천천히 일어서 무릎을 굽혔다. 늘씬한 여자가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검은 머리를 틀어올리는 대신 한 갈래로 땋아내렸고, 몸에 걸친 장신구라고는 결혼반지 하나 뿐이어서 활달한 인상이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시녀를 물러나게 하고는 마리아의 앞에 놓인 안락의자에 걸터앉았다.
"오래 기다렸다던데, 공작부인."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어요."
아스투리아스 여공, 즉 카스티야의 추정왕위계승자이자 국왕의 외동딸인 카타리나였다. 마리아는 무릎이 채 땅에 닿기도 전에 일어나 자리에 도로 앉았다. 카타리나는 마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흰 이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날도 더운데 어서 음료라도 들도록 해."
마리아는 음료를 마시는 대신 부채를 펼쳐 얼굴에 팔락였다.
"아나나스(ananás, 파인애플)를 싫어하니?"
일국의 후계자로서 유서깊은 공작가의 안주인을 대하는 태도로서는 신기할 정도로 격의없었고, 그리 왕래가 없던 열두 살 연하의 재종숙모를 대하는 말투라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친근했다. 마리아는 그 호의에 감격하는 대신 고개를 돌렸다.
"네. 싫어요."
거짓말이었다. 마리아는 아버지를 닮아 단 음식을 좋아했다. 탐탁찮은 것은 과일이 아니라 상황이었다.
-당신은 가서 아무 말도 하지 마, 알았어?
남편은 마리아가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그녀를 쫓아다니며 숨소리처럼 당부했다.
-뭘 묻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생글생글 웃어. 기분 나쁜 티 내지 말고.
꾹꾹 눌러참다가 폭발한 마리아는 버럭 소리질렀다.
-알았어요, 안 가요! 거절하면 되잖아요!
마드리드 공작, 페드루스의 얼굴에는 만족 대신 경멸이 깃들었다.
-당신은 이게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는군?
그는 모멸감에 굳어버린 마리아의 눈앞에서 초대장을 흔들었다.
-거절할 수 있으면 해보든가!
가출 이후로 남편에게 있어서 마리아는 골칫거리, 그것도 발이 달려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는 골칫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마드리드 공작위는 카스티야 인판테(infante)들에게 주어지는 유서깊은 작위였다. 그런 가문의 안주인이 집을 나갔다는 소식은 마리아의 부모님 일과 함께 카스티야를 강타했다. 마리아가 로렌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대단한 화젯거리가 되어있었다. 마리아의 부모님이 어떻게 만났는가부터 부모님와 오라버니의 죽음, 그것도 모자라 대공비 전하와 아롈의 일까지 샅샅이 까발려져 천한 잡서인 양 나돌아다녔다.
"그럼 나랑하(naranja, 오렌지)를 먹겠어?"
"그것도 싫어요."
"사과는?"
"싫어요."
카타리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럼 좋아하는 과일을 말하렴. 기껏 맛보는 만년설인데 아깝잖아."
만년설이 귀하다고? 모르는 말씀.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동쪽에서야 귀할지 모르지만, 북쪽에서는 높은 산마다 으레 사시사철 눈이 깔려 있었다. 마리아의 아버지는 더운 날이면 무릎에 사랑하는 딸을 앉혀두고 한 입 한 입 과즙을 떠넣어주곤 했다. 그리운 얼굴을 떠올리자 코끝이 시큰해졌다. 가엾고, 가엾은, 경애하는 나의 아버지.
"이런 건 고향에서도 실컷 먹었어요."
마드리드 공작부인 마리아 이사벨라, 혼전에 마리야 파블로브나 유리예프스카야라고 불렸던 처녀는 어금니를 악물고 손끝으로 잔을 툭 밀었다. 그리고 흠칫했다. 마노(瑪瑙) 같은 갈색 눈이 마리야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검은 눈썹이 언짢게 꿈틀거렸다.
"시, 싫다고 했잖아요?"
아버지는 태양, 어머니는 달. 마리야 파블로브나는 두 빛을 한 몸에 받아 어둠 없이 자라온 꽃이었다. 고개 숙여본 적 없이 사랑스러운 꽃. 그러나 영원할 줄 알았던 태양이 꺼지고 달이 쪼개진 지금 마리야는 고개를 곧게 드는 대신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리고 손을 거두었다. 수치심에 귀는 물론이고 쇄골까지 붉어졌다.
카타리나는 허둥거리는 마리야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 난간에 팔꿈치를 기댔다.
"아름답지?"
"네? 네."
"할머님께서는 싫어하시지만 나는 이 궁을 좋아해."
갑자기 나온 이름에 턱이 갸웃 기울어졌다.
카스티야의 대비, 마리아 전 왕비는 겨울날 가랑잎 같은 노인이었다. 마리야는 공교롭게도 이름이 같은 그 서부 여자를 단 한 번 만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숄로 칭칭 감은 채 웅크리고 있어서, 당장이라도 수도원에 들어가야 할 것처럼 보였다.
마리야도 카스티야의 비극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십 년 전, 대비의 자식과 손자들은 대부분 10년 전 화마에 휩싸여 죽었다. 살아남은 것은 연회에 나가지 못 하는 어린 아이들과, 마침 결혼식을 위해 로렌에 있었던 카를로스 3세와, 현 아스투리아스 여공 카타리나 뿐. 그리고 치천사, 즉 세라핀의 어원은 불이다. 때문에 산 세라피나 궁은 천사 조각상들이 대부분 불꽃을 휘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곳 저곳에 불꽃 장식을 많이 사용했다. 마리아 대비는 화재 이후 단 한 번도 산 세라피나 궁에 발걸음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모르는 마리야는 두 일을 연결지어서 이해하는 대신 '그렇구나, 대비께서는 이 궁을 싫어하시는구나'하고 무심히 말을 흘러넘겼다.
"여긴 원래 큰백모님의 소유였는데, 백모님께서 후아나 언니한테 주셨거든. 나는 외동딸이라서, 여기에만 놀러오면 언니들이랑 말을 타고, 오빠들이랑 춤을 추는 게 좋았어. 여름에는 저기 분수대에서 물놀이도 하고, 배도 띄우고, 피곤하면 낮잠도 자고. 즐거웠어."
카타리나의 얼굴에 어렴풋한 그리움이 서렸다.
"스무 살 때는 여기서 초상화도 그렸지. 시집가면 이 궁을 다시는 못 보는 게 아쉬워서 말이야. 공작부인도 집을 떠나는 건 서운했겠지?"
마리야는 조금 망설이다가 유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랬어요. 어머니께서는 많이 우셨고요."
파란 바다에 둥둥 뜬 배를 타고 동쪽으로 오기 전에 마리야는 갈매기의 날개처럼 펼쳐진 항구 위에 있는 아름다운 성에 살았다. 상록수와 유리조명으로 꾸며진 아늑한 건물에서 아버지의 공주로서 웃기만 하면 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는 왜 그러셨을까. 나는 공작부인 같은 거 안 되어도 괜찮았는데. 공녀로 살아도 행복했는데. 어머니는 마리야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끝끝내 혼인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머니.
마리야는 말을 돌렸다.
"그런데 아스투리아스 여공 전하께서는 데릴사위를 들이신 것 아닌가요?"
"아, 공작부인이 시집오기 전 일이었나? 나는 원래 로렌에 시집갈 예정이었어."
"로렌, 이요."
마리야는 멈칫했다. 가출 사건을 언급하려는 걸까?
"그래. 우리 어머니께서 로렌 쪽 대공의 손녀셔서 돈 치에르보와 약혼했었지."
돈 치에르보. 세르. 로렌의 체사레비치. 검은 머리카락에, 목소리가 매력적이고, 다정해보이던 남자. 그 남자와 결혼할 예정이었구나. 문득 기분이 이상해졌다.
-연약하신 몸으로 제 결혼식에 참석해주신 것에 사의(謝意)를 표합니다.
검은 머리카락에, 초록 눈. 웃음기가 짙었었다. 목소리가 몹시 매력적인데다 정중하고 다정해보이던 남자. 그 남자와 결혼할 예정이었구나. 문득 기분이 이상해졌다.
"결혼하지 못해 아쉽다는 말은 아니니 오해말도록 해."
카타리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마리야는 그제야 그가 아롈의 남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
"그러고보니 공작부인은 형제자매가 많았지?"
"네, 오빠가......."
-유리예프스카야 공녀. 그대의 말대로 그대는 체사레비치의 딸이지. 그 분께서 인지한 이상 부정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내 여동생은 아니다. 그리 부른다면 모욕으로 간주하겠다.
-너한테는 네 오빠가 있잖아. 나한테도 내 여동생이 있어.
-유리예프스카야 공녀. 너는 나를 그렇게 부를 신분이 못 된다. 한 번만 더 그 말을 지껄였다간 결투를 신청하겠다. 내 가문과 부모님의 명예를 위하여.
"둘......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