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푸른 눈에 담긴 세상 (4)
인노첸시오 7세는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안젤로 추기경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Qui omnes homines vult salvos fieri et ad agnitionem veritatis venire(주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 진리에 다다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북부에 있는 양들 역시 주님의 자식입니다. 어찌 그리 쉽게 버리려 하십니까."
"목자로부터 등 돌리고 마녀의 손아귀로 걸어들어가는 양도 주님의 자식입니까? 추기경 예하."
고막을 찢는 듯한 노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안젤로는 고개를 들었다. 붉은 커튼 뒤에서 체구가 건장한 남성이 걸어나왔다. 쌍꺼풀이 짙고 코가 존재감 있는, 전형적인 서부 남성이었다. 예순이 한참 지난 나이였으나, 교황 옆에 있으니 마치 중년처럼 젊어 보였다. 추기경은 노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피렌체 공! 바로 그런 양을 위해 목자가 있는 것 아니오! 게다가 어찌 이 신성한 곳에서 마녀라는 말을 망령되이 부르짖는 거요!"
피렌체 공이면서 밀라노 공작인 남자, 체사레 오르시니는 성황의 친조카이자 카스티야 전 왕비 마리아의 사촌남동생이었다. 체사레가 변명을 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설파하기 전에 성황이 나섰다. 인노첸시오 7세는 찰싹 조카의 손목을 때렸다.
"못된 장난꾸러기 녀석. 너는 항상 그 입이 문제로구나. 안젤로 추기경은 올곧은 사람이야. 이 숙부야 네가 주워섬기는 말장난에 익숙하다지만 추기경은 깜짝 놀라 쓰러질 수도 있단 말이다."
일곱 살 어린 애 다루듯 꾸짖었는데도, 체사레는 전혀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더니 정말 숙부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인 양 성황의 검버섯 핀 손등에 뺨을 댔다.
"아무렴, 숙부님 말씀이 다 옳습니다. 제가 장난이 심했지요. 숙부님께서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그래. 그래. 착하지, 착하고 말고."
백 세 가까운 노인이 새치가 절반은 섞인 조카의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쓰다듬는 광경은 몹시도 평화로웠다. 코시카 여제이자 보르디 대공녀를 성황의 조카가 마녀라고 칭했다는 사실은 둘 모두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안젤로 추기경은 마음 속에서 불 같은 성급함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고 성황을 불렀다.
"성하."
"음. 안젤로. 내 그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 알고 있네. 하지만 그대가 무어라 하든 공의회 소집을 취소할 순 없어."
안젤로는 고개를 숙였다.
"성하께서 삼중관을 머리에 쓰신 뒤로 대륙에는 큰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늑대는 쫓겨나고 어린 양은 풀을 뜯어 살찌며 어미 양은 주님을 찬미하며 노래하는 태평성대가 아니었나이까. 주님께서는 단 한 마리 양이라도 버리지 말고 거두라 하셨거늘. 하물며 이런 성세(盛世)에 양끼리 편 갈라 싸우라 부추기십니까."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남편 죽인 여자가 피아스트 국왕을 목매달 때에는 마땅히 자신의 목이 졸릴 것도 예비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늙은 성대가 닳아없어질 만큼 긴 말이었다. 수명을 깎아 나온 듯한 대답에도 안젤로는 꺾이지 않았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용서를 베푸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사랑도 단죄도 주님의 몫이니 그저 인내하며 기다리소서."
"우리는 칼이 될 수 없다 말하는 것인가?"
안젤로는 교황의 입에서 나온 '우리'가 공식적인 발언을 의미하는 장엄복수형이 아닌, 오르시니 가이기만을 바랐다.
"목자가 어찌 칼이 된단 말씀입니까? 하물며 성하께서는 눈먼 어린 양들에게 서로를 난도질하라 허락하매, 칼을 담금질하여 세상에 흩뿌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추기경 예하. 한 말씀 올려도 되겠는지요."
피렌체 공 체사레는 이번에 예의바르게 대화에 끼어들어 안젤로가 허락의 말을 하기 전에 말을 이었다.
"친애하는 코시카 대교구장께서는 저 간악한 코시카 여제가 피아스트로 모자라 웨데나에 선전포고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 카스티야의 귀족인 마드리드 공작부인의 신병을 요구한 것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는지?"
코시카 대교구장이라는 자리는 그야말로 성교회의 남은 자존심의 상징이었다. 페란트 제국의 멸망 이후 성교회는 세력을 많이 잃어버렸다. 신교의 발발을 막지 못하고 인정했고, 성황이 아닌 자신들의 황제를 신의 대리인이라 말하는 정교회를 무릎꿇리지 못했다. 코시카에는 외국인 말고 성교회 신자가 존재하지 않는데도 코시카 전체를 하나의 대교구로 선포하고 그 장(長)에게 추기경의 자리를 주었다.
피렌체 공 체사레는 안젤로를 두고 코시카 대교구장이라 코시카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냐고 비아냥거리는 동시에, 그가 얼마나 허울 뿐인 명분으로 수단에 붉은 깃을 덧댔는지 지적한 것이다. 안젤로는 자연스레 귀가 붉어질 정도로 분노했다.
"피렌체 공. 속계의 일은 속계의 이들이 해결하게 두시오! 공의회는 오로지 주님을 향한 길을 한층 밝히기 위한 것이어야 하오."
"막시밀리아노 공의회에서는 마귀가 주님의 대적자라 주장하던 체르타토르(certátor) 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악마조차 주님의 창조물임을 분명히 했지요. 첼레스티아노 2세께서 공의회를 소집하실 때 과연 종전의 의도가 없었다고 단언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분께서 속계의 일에서 눈 돌리고 그저 기도만 하셨다면 지금쯤 대륙이 이토록 찬란할 수 있었겠느냔 말입니다."
"사실관계를 호도하지 마시오. 첼레스티아노 1세께서 악마의 사역자를 마녀라 규정하고 마녀를 잡아들이라고 당시의 국왕들에게 명하시매 그 피해가 극심하였소. 결국 전쟁이 터졌고! 첼레스티아노 2세께서는 주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온건한 방식으로 성황청의 실수를 바로잡으신 거요!"
"허면 악마의 사역자를 마녀라고 규정한 게 잘못이라는 말씀이시군요?"
"고얀!"
"체사레."
성황은 조카를 말림으로써 안젤로가 더 화내지 못하도록 막았다. 차마 성황 앞에서 더 소리지를 수 없었던 추기경은 어깨를 들썩였다.
"죄송합니다, 예하. 그럼 이렇게 생각해볼까요? 공의회야말로 교회법이 허락한 정당한 성하의 권리입니다. 그 권리에 왈가왈부하는 것이야말로 예하의 월권이 아니신지요."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인게요? 나에게 보필의 의무를 팽개치라 말씀하시는 거요?"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안타깝게도, 저희 어리석은 인간들은 주님의 곁에 쫓겨날 때에 마음껏 선하기만 할 자유를 마귀에게 빼앗겨 타락하고 말았지요. 어리석은 양들이 헐뜯고 물어뜯고 죽이도록 놔두어야 합니까? 성하께서는 현세의 첼레스티아노 2세가 되시려는 겁니다."
"숫자를 잘못 말씀하셨다고 말해보시오. 단죄의 손잡이는 오롯이 주님의 것이요. 그것을 잊지 않게 경계의 말씀을 올리는 것이야말로 이 미력한 몸의 사명이오."
"지금 대륙은 이단과 이단 아닌 자들이 뒤섞여 몹시 혼란스럽습니다. 하늘로 향하는 찬송가가 불협화음이 되어 주님의 귀를 더럽힙니다."
"목숨이 있어야 주님을 찬미할 수 있는 거요. 목숨이 있어야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거요! 어리석은 자들은 평화를 두지 않을 거요. 명분을 얻어 더 당당히 타오를 거요!"
"어느 쪽이 전쟁을 부추길지, 저와 예하의 생각이 이토록 다르군요. 제 생각에, 예하의 의견은 성황께서 인세의 지옥을 그저 방관하여야 한다는 말씀으로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백 번 양보하여 그대의 말이 옳다고 칩시다. 하지만 그게 어찌 신권이 속세에 개입해도 된다는 전가의 보도가 된단 말이오? 주님은 무결하시되 인간은 그렇지 아니하오. 유스티아노 3세께서 코시카 정교회를 규탄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소? 한낱 인간을 무오(無誤)하다 하는 오만함이 가장 크지 아니하였소? 주님께서 인세에 한 번도 개입한 적 없으시다면 모를까, 천 년 전의 일을 돌이켜보시오. 로렌의 황후와 대공비들이 어찌 순백의 특권(Privilege du blanc)을 받았는지 모른단 말이오?"
천 년 전, 로렌의 일곱 왕들은 천사의 계시와 함께 증표로 푸른 장미를 받았다. 용을 물리치고 나라를 세우고, 성황으로부터 가장 신성한 군주임을 공인 받았다.
"천 년 전, 천사가 내려오기 전에는 용과 맞서 싸운 이가 없었을까요? 예하께서는 용과 싸우며 죽어간 이들의 명예를 말 한 마디로 인간의 무용한 발버둥으로 격하하셨습니다."
"아니! 주님의 어린 양들에게는 마음껏 싸울 자유가 있소. 목자께서 둘이 편갈라 싸우라고 부추기시는 것이야말로 그 자유를 더럽히는 일이오!"
"성하께서도 주님의 어린 양입니다. 몸소 마귀에 맞서 싸우시려 하는 겁니다!"
"그만!"
성황이 소리쳤다. 둘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인노첸시오 7세는 진정 노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안젤로. 아니, 막심의 아들 어린 유리여. 내가 네게 새로 안젤로라는 이름을 주고 이마에 성수를 묻혔다. 그러한 내가 학살을 즐기는 천하의 망종으로 보였다니,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나보구나!"
명백히 권위에 호소한 오류였으나 안젤로는 곧 100세가 되는 성황에게 차마 그를 지적하지 못했다.
"우리가 몇 날 며칠을 잠자리에 들지 못했는지 아느냐? 이 몸의 믿음이 부족하여 주님의 목소리가 임하지 아니하였고, 천사께서도 강림하시지는 아니하였다. 다만 우리는 마귀가 번성함을 더 두고볼 수 없음이다. 그대의 의무가 경계라면 우리의 의무는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경계의 뜻을 받아들여 공의회를 취소한다. 우리의 이름으로 선포하노라. 주님의 자식들은 들으라! 현세에 마귀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는지 경계하라. 마귀는 여자아이를 더 사랑하여 그 어깨를 움켜잡으리니 특별히 등불을 밝히고 사내아이라도 방심하지 말지어다. 동쪽에서 해가 뜨고 서쪽에서 해가 지며 남쪽에는 해가 비추나 북쪽은 하루 중 해가 닿지 아니하여 그늘지기 쉽다. 속세의 빛은 그림자를 어둡게 하지만 천국의 빛은 그렇지 아니하리니 성경을 가까이 하고 부모는 가르치고 아이는 배우며, 남편은 다스리고 아내는 순종하는 것으로 세상을 밝히라! 이것이 우리의 뜻이다."
안젤로는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가르침을 받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