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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11. 푸른 눈에 담긴 세상 (6)


 안나 콘스탄티노브나 키예나는 항상 어중간하게 운이 나쁜 처녀였다. 

 안나 1세의 장자의 장손녀로 태어났지만, 안나의 할아버지-미하일 대공은 콘스탄틴 대공을 유복자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안나 여제는 차자인 이반 대공을 체사레비치로 삼았고, 안나는 여대공이 아니라 황제의 증손녀, 즉 '여공'의 작위에 만족해야 했다. 

 조금만 운이 좋았더라면 황위에 오를 수 있었으리라는 억울함을 간직한 아버지를 두었고, 그 심정을 이해할 만큼은 머리가 좋았다. 그러나 작은할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본인의 혈통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을 용기와 결단력이 없었다.

 범재보다는 뛰어나지만 수재나 천재는 아니었다. 

 이름은 안나이되 여제가 될 수 없는 몸이었다.

 이반 파블로비치나,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와는 육촌이었으므로 정교회의 교회법에 따르면 혼인할 수 있었지만, 이반은 요절했고 알렉산드르는 안나와 혼인하여 황위에 오르는 대신 귀천상혼하여 달아나버렸다. 

 당숙모의 첩자 노릇을 하여 육촌 여동생-옐레나 여대공을 몰아내는 데에 공을 세웠으나, 그녀가 받은 것은 당숙부의 사생아, 표트르 파블로비치 유리예프스키의 죽음 뿐이었다.

 이제 남은 키옌의 육촌이라고는 미하일 대공 뿐이었다. 안나는 황후조차 될 수 없었다. 차라리 어린 여동생, 아나스타샤 콘스탄티노브나라면 가능성이 있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항상 어중간한 위치의 안나 콘스탄티노브나에게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외양이었다.

 아름답다는 뜻은 아니었다. 

 코시카의 주인인 키옌은 아름다운 용모로 유명한 가문은 아니었다. 옐레나 1세를 비롯하여 별처럼 많은 고귀한 혈통의 미인들이 가문에 미모를 수혈했고, 많은 이들이 어머니에게 그 미모를 물려받았는데도, 여전히 키옌 혈통을 가진 사람들의 평균적인 미모는 평범보다 아래에 가까웠다. 안나는 그 중에서도 평균을 끌어내리는 편이었다. 

 가냘프다기보다는 오싹하게 말랐고, 투명하고 맑은 파란색 눈은 스산함을 더했다. 밤에 흰 옷을 입고 정원을 돌아다니노라면, 꼭 한 명쯤은 깜짝 놀라 비명을 삼키고 성호를 긋곤 했다. 코는 매부리코였고 입술은 종잇장처럼 얇은 데다가 창백했다. 

 어머니인 예카테리나 대공비는 안나를 볼 때마다 미간을 찌푸리곤 했다. 대공비는 안나를 두고 '네가 조금 더 ​아​름​다​웠​더​라​면​'​이​라​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안나의 귀에는 속마음이 들렸다.

 아버지 콘스탄틴 대공은 숙부인 이반 3세를 두려워하여 공공연히 말 꺼내지는 못 하여도 정당한 계승법대로라면 본인이 체사레비치여야 한다고 믿곤 했다. 안나 여제가 이반 3세에게 황위를 물려주었으니, 이반 3세는 형의 아들인 자신에게 황위를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믿음은 딸인 안나와 아나스타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마땅히 '코시카 여대공'의 지위에 어울리는 혼처를 찾아주어야 한다는 믿음에 문제가 있다면, 안나의 지위는 HIH 여대공이 아니라 HSH 여공이라는 데에 있었다. 

 성은 키예나였으나 자손들에게 유의미한 계승권을 물려줄만한 위치는 아니었다. 관과 보주를 지닌 통치 군주들은 조금 더 낫거나 아예 안나보다 훨씬 못한 혈통의 여인을 원했다. 콘스탄틴 대공은 언젠가 본인이 황위에 오르면 안나와 아나스타샤가 여대공의 지위를 얻어 더 좋은 혼처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백일몽을 꾸었다. 

 안나는 아버지를 흔들어 꿈에서 깨우는 대신 슬쩍 그 허망한 꿈에 탑승하여 스물 중반이 되도록 혼인하지 않았다. 열일곱이면 약혼하지 않은 처녀를 찾기 어려운 코시카에서, 안나 또래의 여인들은 죄다 아이 한둘 키우기에 정신 없었다. 안나는 황궁이 아닌 대공저에 살았고 홀로 정원을 고고하게 거닐며 세월을 흘려보냈다. 

 그렇다. 옐레나 1세가 안나와 아나스타샤를 황도 위의 황궁으로 불러들였을 때까지만 해도 안나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여제는 대공비 시절부터 붕어한 황후를 대신하여 내정을 관여한 세월이 길었다. 친척 아이들을 불러 맛있는 다과를 먹이고 덕담을 해준 다음 선물을 안겨 돌려보내는 일은 늘 있었다. 예카테리나 대공비는 딸들을 단장시킨 뒤 마차에 태웠다.

 안나와 달리 아나스타샤는 빨간 볼이 통통해서 귀여운 소녀였다. 여제의 시녀들이 아나스타샤를 귀여워하며 과자를 잔뜩 가져다주었다. 아이는 금세 배가 부른지 꾸벅꾸벅 졸았다. 여제는 가볍게 손뼉을 쳐 아나스타샤를 다른 방에 데려가 재우라고 일렀다. 안나의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그제야 떠올랐다. 예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 때 여제는 안나에게 첩자 노릇을 요구했다. 옐레나 여대공에게 파블 3세와 콘스탄틴 대공이 손을 잡았다고 아뢰어야 했다. 콘스탄틴 대공이 황위를 노리는 것은 진실이었으므로 거짓을 섞어 속이기는 쉬웠다. 

 "송구하게도, 옥음을 제대로 듣지 못하였습니다."

 안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여제는 웃지 않았다. 

 "주님께서 미하일을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총애하시는구나."

 총애하시는 이를 곁에 두고자 빨리 데려가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미하일은 가벼운 감기라고 하지 않았단 말인가? 손끝이 차가워졌다. 당장이라도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문을 지키고 있던 남자는 분명 근위대가 아니었다. 안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뭐라고 말하지? 아닙니다? 감히 신에게 총애받는 코시카 황제의 후계자를 두고 그리 말할 수 있을 리가. 어쩌지. 어쩌지. 간단한 위로의 말조차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자작나무 가지 같은 손이 안나의 손을 감싸쥐었다. 실례라는 생각조차 잊고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슬픔 서린 얼굴이 고아했다. 손자를 보아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인데도 여제의 아름다움은 곧 선(善)처럼 보였다. 남부인 특유의 진한 녹색 눈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안나, 미하일이 누구 덕에 체사레비치가 되었는지, 나는 잊지 않는단다."

 안나 콘스탄티노브나는 여제의 명령에 따라 아롈 여대공에게 거짓 정보를 주었다. 아롈 여대공은 그 정보를 듣고 파블 3세와 콘스탄틴 대공을 경계하다가 어머니에게 배신당해 패배했고, 옐레나 여제가 황위에 올랐다. 여제는 교묘하게도 그런 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대신 아들의 이름을 꺼내들었다. 

 "미하일이 우리 곁에 더 오래 있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만일 내 곁을 떠나야 한다면 그 빈 자리를 채울 사람은 마땅히 정해져 있겠지."

 "어찌,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폐하."

 안나는 간신히 적절한 말을 생각해냈다. 

 "체사레비치께서는 곧 쾌차하셔서 오래오래 폐하의 곁에 머무실 것입니다."

 한편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어지간히 위독하지 않고서는 이런 말을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그렇다면? 

 만일 '안나 2세'가 될 수 있다면, 평생의 불행을 다시 한 번 겪는다고 해도 좋았다. 여제가 잡고 있는 손가락에 짜릿짜릿 자잘한 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여제에게 내팽개쳐졌던 과거는 이 날의 보상을 받기 위한 마땅한 고난처럼 느껴졌다.

 여제는 안나의 손을 놓아주고는 한숨을 쉬었다.

 "우리 사이에는 진심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장벽도 같이 있지. 승계법 말이다."

 정수리 위로 찬물이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안나 1세의 증손녀인 안나의 위에는 아버지, 콘스탄틴 대공이 있었다. 옐레나 여제는 갸름한 턱을 기울였다. 귀걸이가 달랑거리고 베일이 사그락거렸다.

 "살아보니 세월이 항상 내 편은 아니더구나. 위대하신 시아버님조차 저어하셨던 금기를 내가 어찌 감히 범할 수 있겠니."

 이반 3세는 아들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면서도 끝끝내 손주에게 양위하는 대신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었다. 안나는 이해했다. 그러나 막 손에 넣은 귀한 보석이 모래로 변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듯 안타까웠다. 

 "그저 내 편은 아니었던 시간이 이번에는 네 편이기를 바랄 수밖에 없겠구나. 이 말을 하려고 불렀단다."

 내 진심은 너에게 있단다. 

 여제는 안나가 대공저로 떠날 때 손수 선물을 건네주었다.

 아름다운 회중시계였다.
굉장히 오랜만에 여제가 나왔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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