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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12. 시작을 알리는 소리 (1)


 "와."

작센의 조피 도로테아 루도비카는 마차에서 채 내리기 전부터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드넓은 바닥을 전부 흰 돌로 말끔하게 포장해놓았고, 중간중간 드러나는 땅은 잘 다듬은 파란 잔디로 덮여있었다. 수많은 건물은 성당부터 도서관까지 무엇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가장 호화로운 것은 역시 본관이었다. 이블린 본관은 나란히 마주보는 두 개의 건물이었다. 흰 벽에 지붕은 파란 색이었다. 파란색 정복을 입은 근위병이 허리에 칼을 차고 정문 양쪽에 정렬해 있었다. 본관 앞에는 둥그렇고 큰 분수가 시원한 물을 뿜어올렸다. 저 멀리 인공적으로 조성해놓은 숲이 보였다.

 조피의 할아버지 대에 지어진 작센 왕궁은 이 드넓고 호화로운 이블린에 비하면 귀여운 생쥐나 다름없었다. 마차가 내달리는 동안 조피는 창문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화사하고 아기자기했다. 

 "음흠."

 마차 안에 앉은 시녀가 헛기침을 한 덕에 조피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남쪽의 예절로는 신분 높은 사람이 먼저 말을 걸어주어야 한다. 조피는 마차의 문을 열어준 기사를 향해 턱을 들어보였다. 

 "그대의 이름은?"

 "조피 도로테아 공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순백의 제복을 입은 기사는 가볍게 예도 자세를 취해보였다.

 "종려가지 기사단 부단장 루이 앙투안입니다. 마담 라 세르께서는 평화의 방에서 공주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능숙한 예도와 달리 어설픈 감이 남아있는 듀츠 어였다. 조피는 앙투안의 손을 잡고 할 수 있는 한 가장 우아한 발걸음으로 마차에서 바닥에 내려섰다. 갈라진 치마 사이로 드러난 속치마가 돌바닥 위로 드리웠다. 

 "그대는 본 기억이 나는 것 같은데? 이 몸의 기억이 틀린 것인가?"

 "정확하십니다. 이 년 전, 마담 라 세르의 혼행길을 수행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아, 역시! 다시 만나 반갑네."

 열한 살의 공주는 소리치며 생긋 웃었다. 그도 잠시, 에스코트를 받아 자비관에 들어선 소녀의 입은 멍하니 벌어졌다.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거대한 홀이 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계단이었다. 하늘색 융단 위로 색색의 옷을 입은 숙녀들이 바쁘게 오가는 모습은 조피의 눈에 꼭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천장에는 악룡 크루아흐를 무찌르는 용사들의 모습을 신화적으로 과장해서 그려놓았다. 천장에서부터 뻗어내려오는 흰 기둥은 저마다 다른 부조가 그 모습을 자랑했고 천장과 기둥이 만나는 부분마다 금빛 줄장미를 섬세하게 조각해놓아 꼭 마차를 타고 온 장미 정원을 보는 것 같았다. 

 이 어린 공주는 평생 처음 보는 광경에 그야말로 넋을 잃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HRH 공주다운 품격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빌헬미네 왕비의 당부는 허상이 되어 흩어졌다. 

 ​"​공​주​님​(​P​r​i​n​z​e​s​s​i​n​)​,​ 이쪽으로."

 그제야 정신을 차린 비단신이 사뿐히 융단을 밟았다. 조피는 여러 아치를 지나 문에 가브리엘이 새겨진 방에 이르렀다. 앙투안이 직접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문이 열렸다. 평화의 홀은 복도보다 훨씬 더 휘황했다. 진한 꽃향기가 풍겼다.

 "어서 오려무나, 어린 조피."

 조피를 맞은 것은 모국어나 다름없이 유창한 중부 듀츠 어였다. 오히려 작센 사투리가 섞인 조피보다도 깨끗하게 들릴 지경이었다. 

 조피는 치맛자락을 들고 가볍게 목례를 했다. 회색 머리칼을 덮은 ​남​주​석​(​a​q​u​a​m​a​r​i​n​e​)​ 머리띠가 빛을 냈다. 작센의 공주인 조피는 위튼 가문의 일원으로서, 코시카에게도 로렌에게도 허리 숙이지 않아도 되었다. 빌헬미네 왕비가 귀에 따갑도록 어린 딸을 교육시킨 부분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당고모님. 초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당고모'는 조피보다 꼭 일곱 살이 많아 고모보다는 언니에 가까웠다. 아직 소녀의 티가 가시지 않은 갸냘픈 몸에 붉은 어깨띠를 두르고 다이아몬드를 잔뜩 박은 훈장의 별을 가슴에 달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조피가 반해서 가지고 싶었던 옅은 금발을 틀어올리고 진주가 달린 베일을 쓴 그녀, 엘리엔 필리피느 소피 아델라이드는 조피의 어깨 너머를 흘끗 바라보더니 조피에게 자리를 권했다. 조피는 냉큼 아롈의 맞은편에 앉았다. 

 "머리카락을 잘라줄 수는 없지만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구나."

 조피의 귀가 붉어졌다. 

 "조피는 이제 어린 아이가 아닌걸요!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 안타깝구나. 오늘 입을 옷을 미리 준비해 두었는데."

 아롈의 혼행길에서, 조피는 같은 색의 옷을 입겠다고 고집을 부렸었다. 말귀를 알아들은 조피는 생긋 웃었다. 조피는 오늘 어머니 빌헬미네 왕비가 빌려준 남주석 장신구에 어울리도록 파란 계열의 옷으로 치장했는데, 아롈 역시 목에 파란 보석이 달랑이는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다분히 의도한 바로 보였다. 차림에서 환영의 뜻을 읽어낸 조피는 몹시 뿌듯하게 웃었다.  

 "오늘이요?"

 "네가 왔다는 걸 들으시고 가장 신실하신 두 분 폐하께서 환영해주고 싶다고 하셨단다. 너무 피곤하지만 않다면 저녁에 내려와 식사라도 하자꾸나."

 "좋아요! 고모님께서는 어찌 지내셨나요?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안부를 물으라 하셨답니다."

 "나야 너처럼 어여쁜 조카를 맞는 것으로 소일할 만큼 평온하단다."

 그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앤이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전하(HIH, 아롈)와 전하(HRH, 조피)께 소녀가 인사 올리옵니다."

 "와, 오랜만이야, 앤!"

 조피는 예법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앤을 끌어안았다. 시녀들은 모시는 공주가 결국 예법을 집어던진 것에 한숨을 쉬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조피는 한참이나 재잘거리다가 방으로 올라갔다. 아롈은 내내 웃으면서 조피의 재롱을 들어주었다. 조피가 나가면서 조피를 따라온 시녀들이 줄줄이 평화의 홀을 나갔으나, 한 명만은 못박힌 듯 그대로 남아있었다. 

 아롈은 뒤에 앙투안과 앤을 세워둔 채 천천히 일어났다. 공단 소재의 치맛자락이 사그락거렸다. 긴 목이 가볍게 기울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HIH 코시카 여대공이자, HIH 로렌 마담 라 세르가 먼저 고개를 숙이는 상대라니.

 "옐레나가 고모님께 인사드립니다."

 캬트 어였다.

 아롈의 고모, 즉 조피의 이모할머니이자 앤의 할머니, 마리야 이바노브나 키예나는 꼿꼿이 선 채 인사를 받았다. 아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바로 예를 거두더니 자리에 앉았다. 마리야 여공이 따라 앉았다. 

 어디까지나 혈통에 대한 예의를 차렸을 뿐, 공식적인 지위는 아롈이 훨씬 높았다.

 "재롱을 부렸더구나."

 "재롱이라뇨. 저는 감사인사를 하러 오신 줄 알았습니다만."

 고모와 조카는 사이좋아 보일 만큼 동시에 잼으로 손을 뻗었다.

 "그래. 앤은 좋아보여 내 마음이 흔흔하구나."

 앤 마리아 폰 레르헨펠트는 작센에선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화려한 것들로 치장하고 있었다. 가냘프던 몸에 포동한 살이 올라 몸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그 모든 것을 내어준 아롈은 마치 거지에게 동전 한 푼을 적선한 부자처럼 시큰둥했다.

 "그 뿐이겠습니까?"

 "허면?"

 "제가 이리 화려하게 조피를 불러들인 덕에 당분간 앤의 순서는 미뤄질 테지요."

 뒤에 시립한 앤의 눈이 동그래졌다. 반면 한 때 체사레브나였던 노인은 입가에 주름을 나붓이 잡으며 웃었다.

 "네 목숨 챙기는 일에 내 고마워 하랴?"

 "그러셔야 할 터입니다. 어찌 되었든, 제 순위는 조피나 앤보다는 먼저일 테니까요."

 "허면 조피는 왜 불러들인 게냐? 네가 부른 순간 뒤에 있던 이름도 앞으로 끌어당겨졌을 것을."

 "제가 조피와 앤을 가엾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여공은 싸늘하게 웃었다. 

 아롈은 안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일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면, 빌헬름은 작센과 조피 중에 조피를 선택하고 보호해주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조피를 딸로서 사랑하지만 그 뿐이라는 것을.

 하지만 어찌 수가 거기까지라고 장담하랴. 조피는, 앤은, 마리야 여공은 각기 완벽하지는 않지만 코시카 황위 계승권의 파편이나마 가진 존재들이었다. 그들을 불러들여 손아귀에 넣은 것이 단순한 동정심 때문이라고?

 "내 아버지는 형을 죽였다."

 찻잔을 휘젓던 흰 손이 덜컥 멈추었다가 다시 돌아갔다. 여공의 아버지란 승하한 이반 3세였다. 존경하는 조부의 치부를 들은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냉막한 얼굴로, 아롈은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내 할머니는 숙부를 폐위하고 황위에 올랐다."

 "가문의 치부입니다, 고모님."

 마리야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손녀인 앤은 몰라도 앙투안을 생각하라는 것이겠으나, 믿지 못할 이였으면 뒤에 세워두고 아는 척 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만일 그 정도로 멍청하다면 배려해줄 가치조차 없었다.

 "핏줄이 이런데 너를 믿으란 말이냐?"

 아롈은 두 번 말리지 않았다.

 "맞습니다. 저는 냉정하게 다만 행동하라는 키예나의 딸입니다."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배어 지독하게 정돈된 예법이었다. 아버지를 폐위시키고자 했던 소녀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고모님도 키예나의 딸이며, 동시에 핏줄의 인도를 따르지 않으셨다는 것을 압니다."

 마리야 여공은 허를 찔린 듯 멈칫했다. 

 그녀는 아버지를 죽이고 여제의 위에 오르는 대신 도망쳤다. 변명할 말이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사랑을 하고 싶었지 자살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엄격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정쟁에서 졌다간 자신의 목숨이 아니라 사랑하는 반려의 목숨이 날아갈 터였다. 조금의 위험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도망은 그녀의 선택이었다.

 황위는 사랑과 목숨보다는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그 목숨에는 아버지와 동생의 목숨도 포함되었다.

 "시집 오기 전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이 손에 칼을 들려 어린 미하일을 죽이라 내몰았습니다." 

 핏줄의 힘일까. 아롈은 평생 두 번째로 만난 고모에게 지독하게 솔직하게 굴었다. 빈정대고 날을 세워 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은 필리프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제가 어린 동생을 죽였더라면 저는 여기 있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저는 여기에 있고, 후회하지 않습니다. 고모님이 아시는 어떤 일을 포함해서요."

 아롈의 목에 걸린 보석-릴레벨트가 반짝하고 빛을 냈다.

 "저는 삼십 년 전 고모님이 그러하셨듯, 저와 제 사랑을 위하여 살아가고자 합니다."

 파란 빛은 가슴에 단 금강석 별에 반사되어 턱 아래를 희미하게 비추었다.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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