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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12. 시작을 알리는 소리 (2)


 -저는 삼십 년 전 고모님이 그러하셨듯, 저와 제 사랑을 위하여 살아가고자 합니다. 
 아롈은 저녁 만찬을 위해 치장을 다시 하면서 스스로 내뱉은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프리드리히 1세 빌헬름은 마리야 여공과 친분이 있으니 반드시 의논하리라 생각했다. 무슨 꿍꿍이인지 알려면 고모가 로렌을 방문하리라는 계산도 있었다. 하여 어찌 설득을 할지 세시안과 머리를 맞대고 준비했다. 그러나 미리 예습한 말에 방금 그 이야기는 들어있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 끝에 소피야 훈장의 별이 차갑게 와닿은 순간 진심이 튀어나왔다.

 '조국과 사랑을 위하여(За любовь и ​О​т​е​ч​е​с​т​в​о​)​'​.​

 그리 새겨진 별을 손수 떼어, 시녀가 떠받친 상자에 조심스레 얹었다. 자줏빛 융단 위에서 훈장의 별과 붉은 어깨띠와 리본과 배지가 찬란히 빛났다. 배지에는 성녀 소피야와 세 딸 피데스, 스페스, 카리타스의 초상화가 그려져있었는데, 각각 지혜, 믿음, 희망, 사랑을 의미했다. 성 소피야는 표트르 대제의 황후인 소피야 여제와 같은 이름의 성인이어서 훈장의 상징이 되었다.

 아롈이 배지를 만지작거리는 동안 시녀들이 등 뒤에 있는 자잘한 단추들을 풀어 옷을 벗는 것을 도와주었다. 본래 사라판은 등 뒤에 단추가 없지만 로렌에 와서 개량되었다.

 -알량한 동정심만으로 모든 것을 감수했다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고모님의 어머니이자 제 조모님께 물려받은 이 베일에 맹세코, 저는 조피를 가엾게 여기고 앤을 아낍니다.

 베일을 벗고, 가볍게 틀어올린 머리카락을 풀어내리자 금발이 햇살처럼 찰랑거렸다. 조피가 탐내던 아롈의 머리카락은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땋아서 틀어올리면 관(冠) 같았고, 풀어내리면 여름날 폭포수 같았다. 옐레나 여제의 꿀 같은 금발은 키예나의 색소 부족증을 만나면서 레몬즙처럼 옅게 색이 빠졌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평화의 홀에 들어서던 조피의 머리카락도 그랬다. 코시카의 피가 없었더라면 검은색이었을 긴 머리는 빛바랜 회색이었다. 남주석 머리띠를 두른 소녀의 표정은 심각함이라고는 한 점 찾아볼 수 없이 환해서, 아롈은 잠시 당황했다.

 이 아이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 

 작센 왕인 사촌은 장녀에게 작금의 상황에 대해 조금도 알려주지 않고 이 먼 남쪽 나라까지 보낸 것이다.

 조피의 웃음은 죄책감으로 따끔거리던 위장에 한 숟갈 미음이 되어주었다. 그래, 너 하나라도.  

 아롈은 모든 친척을 지켜줄 수 없었다. 조피를 초대했지만 작센 왕실 모두를 초대하여 이블린에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고조부 때 갈라져나온 키옌 분가들을 감싸안을 수는 없었다. 옛날 아롈을 배신한 안나와, 그 여동생인 아나스타샤는 이미 어머니의 손에 있었다. 마르타와 루드비히가 죄책감을 자극했으나 그들은 이미 어른이었다.

 빌헬름은 브라운슈바이크의 마르타를 지켜주지 않았다. 그렇듯 조피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조피를 지켜주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가 계승권을 포기하는 증거로 조피를 내놓으라고 한다면 고민하고 슬퍼할 테지만 내줄 것임을 알았다. 아롈은 명석한 직관으로 그리 판단했고, 세시안은 단 한 번도 빌헬름을 실제로 본 적이 없었지만 아롈을 믿어주었다. 또한, 아무런 이득 없이도, 많은 정치적 부담을 지고 조피를 데려오고 싶다는 아롈을 위해 같이 밤을 새서 고민해주었다.

 이렇게 되면 로렌에는 코시카 황실의 핏줄이 모이게 된다.

 승계권을 포기한 아롈, 마리야 여공. 마리야 여공이 귀천상혼하여 낳은 핏줄인 앤. 옐리자베타 여대공의 정당한 손녀인 조피. 

 넷은 어머니인 옐레나 여제가 경기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수였다. 물론, 이렇게 모으는 것이 아롈에게 손해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너도 내게 책사 노릇이라도 원하는 게냐?

 맹세를 들은 마리야 여공은 한참이나, 정말 한참이나 아롈을 쳐다보았다. 아롈은 그 눈에서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마리야 이바노브나는 이반 3세의 딸이었다. 몇십 년 전에 아롈보다 먼저 조부가 후계자로 선택한 사람이었다. 그 눈의 모양이, 주름의 형태가, 홍채의 파란색이 너무 닮아서 몹시 그립고 서글퍼졌다.

 -아뇨.

 조피가 착용하고 온 남주석 장신구와 어울리도록 아롈도 남주석과 파란 ​첨​정​석​(​s​p​i​n​e​l​)​ 귀걸이를 골라 치렁치렁 귓불에 늘어뜨렸다. 가냘픈 팔목에 흰 리본을 감았고, 머리카락에도 흰 리본을 섞어 땋아올렸다. 아롈은 보석과 옷의 색을 똑같이 맞추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여기 계시면 됩니다.

 -언제까지?

 -아실 터입니다.

 마리야 여공은 아롈이 마법사인 것을 아는 사람인 동시에, 릴레벨트의 존재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다시 말하면 반드시 아롈이 손에 넣어야 하는 인간이며, 동시에 철저한 것을 원한다면 죽여 없애 입을 막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만에 하나 어머니에게 찾아가 앤의 목숨을 두고 거래하여 비밀을 팔아넘긴다면 위험도는 지금과는 비할 바 없이 높아지므로. 아롈이 진심으로 살아남고 싶다면 그게 가장 나은 길이었다.

 세시안은 아롈에게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전달했다. 아롈이 아무리 반대해도 자신의 생각은 꺾이지 않는다고 했다. 마리야 여공을 죽여야 한다. 마리야 여공을 죽이지 않겠다면 최소한 연금은 해둬야 한다고. 아롈이 설득하지 못하면 본인이 나서서 무력을 사용하겠다고.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고. 

 남편의 초록빛 눈은 비할 바 없이 진지했다. 

 '내 삶의 끝'.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묵직해지곤 했다. 세시안은 사실 앤조차 죽여 입을 막고 싶어했다. 직접 그리 말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앤을 보는 눈빛을 볼 때마다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아롈은 은근히 세시안이 뒤에서 앤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을 차단하는 것을 알면서도 참견하지 않고 두었다. 앤이 희한한 남자에게 코를 꿰여 멀리 시집가게 되는 것은 아롈도 바라지 않았다.

 아롈은 굳이 이 모든 것을 입 밖에 내어 협박을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조부와 같은 모양새의 그 눈을 본 순간 알아차렸으므로. 

 -부디 제 초대를 받아들여 로렌에 머물러 주십시오.

 마리야 여공은 모든 것을 읽을 수 있도록 교육 받은 사람이었다. 나이들어 낡았다고 해도, 이미 아롈이 뱉을 협박까지 생각하고 이 자리에 섰으리라.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옐레나 파블로브나 키예나는 그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마리야 이바노브나 키예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 쓸데없는 적을 만들어 피흘리지 않도록, 자존심을 굽혔다.

 "옷도 흰색으로 할까요?"

 시녀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아롈은 고개를 저으며 자줏빛을 가리켰다.
조금 짧은데 장면 나누기가 애매해서 올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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