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시작을 알리는 소리 (4)
앤 마리아 폰 레르헨펠트는 수틀을 들고 눈치를 보았다.
자비관 4층 마담 라 세르의 응접실에는 몇몇 숙녀들이 모여앉아 한창 바느질 중이었다. 면면은 모두 화려했다. 마담 라 세르인 아롈, 마담 리젤로트, 작센 공주 조피 도로테아, 샤를루아 공작부인 이본느, 로르쉘의 아가씨 소피, 그리고 레르헨펠트 백작녀인 앤 자신이었다. 다른 시녀들은 서있는 반면에 앤은 아롈의 권유로 구석 자리에 같이 앉아있었다.
여기까지만이라면 굳이 이렇게까지 눈치를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앤의 검은 눈이 잠시 조피 공주의 어깨 너머를 보다가, 날카로운 시선을 마주하고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조피의 뒤에는 앤의 할머니가 서 있었다. 마리야 여공은 신분을 밝히지 않고 조피의 시녀로서 로렌에 방문하여 꼬박꼬박 조피를 따라다녔다. 본인보다 신분 높은 할머니가 서 있는데 앉아서 수를 놓아야 하는 심정은 가시방석 그 자체였다.
-앤, 정말 많이 컸구나.
그 말 한 마디만을 남기고 평화의 홀을 나가버렸던 할머니가 앤은 어쩐지 낯설었다. 지금도 그랬다. 예전에는 평범해보였건만, 온갖 호화로운 것에 익숙해진 눈에는 낡은 천쪼가리 같은 옷을 입고 당당히 허리를 편 채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할머니는 새파란 눈으로 천공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앤을 노려보았고, 앤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둥그런 수틀 안에는 자그마한 종달새가 사과꽃 가지 사이에서 날갯짓을 하는 그림이 있었다. 그녀는 아말리에 왕비로부터 자수를 배워 꽤 능숙한 편이었다.
"앤, 거기 가위를 좀 다오."
"예."
앤은 부리나케 작은 수예용 가위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주인에게 달려갔다. 아롈은 미간을 문질렀다. 둥그런 수틀 안에는 R, V, D가 큼직하게 자리했는데, 앤이 아닌 누가 보아도 가관이었다.
RVD는 루 발레리 데지레의 머릿글자였다.
시조카에게 홀딱 반해 스스로 옷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일념에 빠진 아롈이 수틀을 든 것은 무려 석 달 전의 일이었다. 재단사가 곱게 재단하여 바친 옷본과 천에 손을 대기도 전에, 바늘에 실을 꿰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겨우겨우 실을 꿴 바늘로 재봉선에 따라 박음질을 하는데 선은 제법 곧았지만 바늘땀의 간격은 취객의 걸음걸이보다 자유로웠다.
항상 고급스러운 것만 걸치던 안목에 본인의 솜씨가 찰 리가 없었거니와 속도도 느려서, 아롈은 이대로라면 루가 시집가기 전에 완성을 못하겠다며 옷본을 내동댕이쳤다.
간단한 손수건이면 그나마 외숙모의 마음을 표현하기에 좋겠지? 의기양양하게 수틀을 잡은 것도 잠시, 아롈은 자잘한 수를 놓으며 바늘에 계속 손을 찔렸다. 릴레벨트는 귀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앤에게로 도망쳐왔고, 흰 천은 피로 물들었다. 처음에는 웃던 세시안도 바늘이 거의 손가락을 관통할 뻔 했을 때는 기겁해서 수틀을 빼앗아들었다.
평생 바늘이라곤 잡아본 적 없는 남편이 수놓은 V와 D가 본인이 수놓은 R보다 서른 배는 예쁘게 완성되는 걸 보면서, 아롈은 몹시 의기소침해졌다. 세시안은 아롈을 응원해주면서 연습하면 잘 할 수 있을 거라며 네 배는 큰 알파벳을 손수 수틀에 적어주었고, 지인들이 하나씩 참석하면서 이런 모임이 생겼다. 자리에 참석한 모든 시녀들과 하녀들까지 마담 라 세르가 자수에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오기로 가득 찬 아롈의 자수 솜씨는 조금씩 나아지기는 했으나 가끔 짬을 내어 붙잡는 정도로는 솜씨가 나아지기 요원해보였다.
"당고모님! 저도 봐주세요!"
조피가 테이블 너머로 수틀을 내밀었다. 열한 살이 놓았다기에는 과하게 잘 놓았다. 이본느가 칭찬했다.
"어머, 만져보고 싶을 만큼 고운 꽃이네요."
"고맙소, 공작부인."
조피의 콧대가 하늘로 솟았다.
레몬색의 눈썹 끝이 약간 처졌다. 아롈은 굳이 수틀을 뒤집어 내려놓고는 찻잔을 집어들었다.
"앤, 차나 한 잔 따라다오."
앤은 군말 없이 차를 새로 따라 주었다. 김이 피어오르는 차에 얇게 저민 레몬 설탕 절임 한 조각을 띄운 앤은 공손한 자세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분위기는 자연스레 휴식시간으로 변해갔다. 시녀들은 바쁘게 제 주인이 수놓은 수틀을 치우고 다과상을 차렸다. 조피는 차에 살구잼 한 스푼을 호쾌하게 풀더니 휘휘 휘저어 홀짝였다. 손짓을 보면 당고모인 아롈을 따라하는 것이 뻔해서 아주 귀여웠다.
"그러고보니 공주께서는 약혼자가 있으신가요?"
"아니, 아직 없소."
"그런데 갈리아 어를 참 잘 하시네요! 시집 오셔도 되겠어요."
물론 조피의 갈리아 어는 '열한 살의 외국인치고' 훌륭한 수준이었지만 로르쉘의 아가씨 소피는 있는 힘껏 조피를 칭찬해주었다. 칭찬에 약한 조피는 이름이 같은 소피와 함께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나이가 두 배 넘게 차이나지만 죽이 잘 맞아보이는 것은 순수하게 소피의 덕이었다. 샤를루아 공작녀는 저보다 높은 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어 어느 사람을 붙이든 무난하게 대화를 이끄는 데에 능했다.
"그럼 음, 로르쉘의 아가씨는."
"부디 소피라고 불러주세요, 공주 전하."
"좋소, 소피는 약혼자가 있나?"
"지금 당장은 없습니다만, 좋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답니다."
이본느가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정말? 작센에 왔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나라는 나이 맞는 사람이 없어서."
소피와 이본느가 눈을 맞추더니 잠깐 웃었다.
"공주님께서 로렌에 시집오셔도 되지요. 이처럼 능하신데요."
"그러게요, 마담 조피. 우리 둘째 언니네 아들이 마담이랑 나이가 맞는답니다. 한 번 만나보겠어요?"
리젤로트가 끼어들면서 로렌의 많은 남자들이 물망에 올랐다. 응접실에 수많은 이름들이 오가는 동안 앤은 잠시 어깨를 움츠렸다. 아롈의 얼굴이 아주 싸늘해진 것을 보고 말았으므로.
자리를 파하고 이틀 후 아롈은 이본느를 따로 불러 공연을 보았다. 음악과 공연과 문학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가 오간 뒤 아롈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로르쉘의 아가씨가 좋은 이야기가 오간다는 곳, 작센입니까?"
"나이가 찼으니 부모로서 어디든 보내야지요."
"내가 알아보았는데, 조피가 말했듯 작센에는 나이 맞는 청년이 없습니다만."
샤를루아 공작부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마담의 사촌 오라버니가 계시지 않나요?"
작센의 왕가는 엘리자베트 여대공의 자손으로서, 프리드리히 1세 빌헬름과 루드비히 왕자는 아롈의 고종사촌이었다. 고운 미간을 두세 번 문지른 아롈은 옆자리에 앉은 이본느를 노려보았다.
"내가 알기론 내 사촌들은 보르디와 작센을 막론하고 죄다 혼인했는데?"
무대의 가수는 들어주지 않을 노래를 소리 높여 불렀다.
"혼인의 조건이 성사되지 않는 분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답니다."
"지금 루드비히 왕자를 말하는 건가?"
아롈은 나이 많은 사촌인 이본느와 필리프에게는 지위가 한참 낮음에도 공대를 해주었다. 존대의 단계가 한 단계 내려갔다는 것은 화가 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본느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그렇답니다. 새로 생긴 지 얼마 안 된 왕가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여느 대공가보다는 구색이 맞겠지요. 재혼이라고는 해도 소피도 나이가 그리 어린 편은 아니고 저희가 급해서요. 필리프도 괜찮은 생각이라고 했답니다."
"똑바로 얘기하게. 이야기가 '오가는' 건가, 아니면 생각인가?"
"저희 부부는 이야기가 끝났어요. 안 그래도 마담께 설명드리고 허락을 구하려고 했답니다."
아롈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흰 손이 귀걸이를 내내 만지작거렸다. 머리카락을 틀어올리게 된 다음 새로 생긴 습관이었다. 이본느게 곱게 웃었다.
"허락도 구하지 않고 작센과 이야기를 하는 건 안 될 일이지요."
"아니, 대회의가 아닌 내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지요."
한숨을 삼키고 내뱉은 그 말이야말로 이본느가 원하던 말이었다. 그리고 아롈은 그 말을 해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볼 수는 없는 건가?
혀 끝에 말이 굴러다녔다. 아롈은 빌헬름을 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큰 타격을 입었다고 해도, 브라운슈바이크에 비하면 보르디가 훨씬 매력적인 사돈인 것이 당연했다. 하물며 몇 년 동안 미쳐있어 후사를 기대하기 힘든 여인인 바에야. 작센은 코시카의 사돈 가문인 만큼 구교를 믿지 않았다. 신교가 칠 할에 정교도도 삼 할 가량 섞여 있어 이혼은 국왕의 승인만 있으면 되었다.
-거기 계신 아름다운 숙녀 분께서 루드비히의 약혼녀인가요? 거봐요! 루드비히. 세상에는 좋은 여자가 많다고 내가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요? 평생 약혼하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
브라운슈바이크의 마르타는 그 '좋은 여인'일 수 없었다. 알고는 있지만.
하지만.
정말, 하지만.
-착각하지 말아주게. 그녀가 미친 건 내 탓이 아닐세.
그렇다. 아롈의 탓은 조금도 없었다.
-내가 지금 당장 죽어준다고 해도 마르타 공녀는 죽을 때까지 미친 그대로일 걸세.
치기 어린 말이었다. 사실이기는 해도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었다.
-제 아내를 못 본 척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롈은 이콘에 맹세코 나불거린 적이 없었다. 그저 필리프도 작센에 있었고, 어떤 식으로든 알아내기가 어렵지 않았을 뿐이겠지. 그런데도 죄책감이 묵직하게 가슴을 눌러왔다.
모든 친척을 다 구할 수는 없었다. 하물며 이 일은 작센과 보르디의 일. 아롈이 참견할 일이 못 되었다. 아롈은 다시 한 번 정의관 문 앞에 서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시아버지의 앞에 무릎 꿇고 성서를 읽었을 때의 굴욕적인 기분이 스멀스멀 손가락 끝으로 기어올라왔다. 소녀는 깊은 한숨을 쉬며 포기하려고 애썼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이야기가 성사되면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경애하는 우리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