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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눈송이


12. 시작을 알리는 소리 (7)


 가사와는 달리 세시안의 눈물은 좀처럼 말라붙지 않았다. 길고 빽빽한 속눈썹에 물이 조롱조롱 맺혀, 진한 녹색 눈이 마치 비오는 날 이끼 낀 연못 같았다. 끌어안고 달래주던 아롈의 옷이 흠뻑 젖었을 때에야 간신히 울음이 멈추었다. 분위기는 아롈의 소맷자락처럼 축 늘어졌다. 이블린으로 돌아오는 마차는 바퀴가 돌을 밟아 덜커덕거리는 소리에 맞추어 조용히 흔들거렸다.

 아롈은 연인의 손을 꼭 잡고 생각에 잠겼다. 

 "세시안, 내가 당신에게 말하지 않는 게 좋았을까요?"

 "아뇨."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단호했다. 

 "모르고 행복해하느니 차라리 알고 괴로워하겠어요. 이런 심정은 아렐르도 잘 알 텐데요."

 통제에 대한 강박관념은 군주라는 종족의 슬픈 습성이었다. 지도에 상아말을 올려두고 밤새 눈이 빠지게 들여다보노라면 머리가 빠개질 듯 아파오곤 했다. 단 하나라도 놓치면 어쩌지? 손으로 달랑 들어 원하는 곳에 놓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주는 법이 없었다. 사람을 다루는 데에는 비할 바 없이 능숙한 남편조차 밤마다 골머리를 앓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렐르를 사랑해요."

 "저도 세시안을 사랑해요."

 아롈은 흙탕물처럼 둥둥 떠오르는 죄책감을 조금씩 가라앉히려 애썼다. 

 하필 나를 사랑해서 우는구나. 

 평생 수치스러워하면서도 남몰래 애정을 바라왔다. 누군가 다가와 가슴 한가운데에 뚫린 구멍을 메워주길 바랐다. 그러면서도 오빠처럼 모든 것을 버리지는 않으리라 이를 악물었다. 아롈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은 극도로 한정되었다. 단 한 번 뿐인 기회, 기적처럼 주어진 다정함. 뺨에 입맞추고, 끌어안고, 세상에서 가장 반짝인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세시안은? 

 성교회의 마녀사냥 운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아롈이 태어난 이후 세 번 정도는 같은 일이 있었다. 신교 국가나 정교회 국가와 충돌이 있노라면 의례적으로 지껄일 뿐이라고 여겨왔던지라, 압박감을 받기는 해도 이것 때문에 반드시 들키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밀을 아는 사람이 한 명이 아니라는 불안감은 언제나 부부를 좀먹었다. 

 아롈이 마법사이기 때문이었다.

 코시카에서 아롈은 자신이 마법사임을 밝히지 않는 것을 마땅하고 고귀한 희생으로 여겨왔다. 처음 키예프에서 황도로 돌아오는 길에 죽은 여인의 딸에게 약속했기 때문에, 약속은 키예나로서 지켜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흰 용이 사람을 더 죽이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오빠의 자리를 빼앗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밝혀졌을 때 아롈에게 이득이 될 일만 있었다. 

 그러나 로렌에 시집온 지금, 마법사라는 사실은 오직 독만 되었다. 마법사임이 밝혀지면 어머니가 눈에 불을 켜고 아롈을 잡아죽이려고 하는 것은 물론이요, 성교회에서는 아롈을 파문할 게 틀림 없었다. 그리고 마담 라 세르는 성교회 신도여야 한다. 

 세시안은 그저 아롈이 옆에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옆에서 살아 숨쉬기만 하면 되는 사랑이라고. 그저 평범한 공주나 공녀라면 누구든 해낼 수 있는 일이었을 텐데, 왜 하필 내가 당신의 곁에 왔을까.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아롈은 생각을 끊으려 잡지 않은 반대쪽 손을 꼭 쥐었다. 물어뜯은 지 오래 되어 모양좋게 기른 손톱이 손바닥을 따끔하게 파고들었다. '그 때 나를 사랑하지 말지'라는 말만은, 도저히 내뱉을 수 없었다. 여름밤 땀에 젖어 미끈거리고 더워도 하다못해 손끝이라도 맞대고 잠드는 연정이었다. 심장을 눌러 뛰게 하고, 공기에 깃들어 숨쉬게 하는.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사람이 필요했다. 아롈은 사랑에 빠진 이 특유의 이기심으로 원망을 스스로가 아닌 마법에게 돌리려고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아롈의 몸에 흐르는 마법사의 혈통이야말로 태고부터 내려오는 푸른 혈통의 가장 선명한 증거물이었으므로. 

 생각에 잠긴 사이 마차는 금세 이블린에 들어섰다. 아롈은 꼭 쥔 손을 살그머니 폈다. 남편은 아롈이 이런 생각을 하여 스스로에게 생채기를 내는 걸 속상해할 테지. 마법사인 걸 미안해하지 말라고, 릴레벨트가 싫은 것이나 마법사라 상황이 더 복잡해진 것과는 별개로 아롈은 아롈이라고 말하겠지. 하지만.

 마차가 멈추었다. 

 아롈은 바퀴와 함께 생각을 멈추곤, 마차에서 훌쩍 내렸다. 종려가지 기사, 페린 경이 흰 제복을 차려입은 채 부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중 나왔나?"

 "가장 신실하신 황제 폐하께서 두 분 전하를 급히 찾으십니다."

 이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롈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부부의 입에서 동시에 질문이 튀어나왔다.

 "지금 당장?"

 "나까지?"

 "예, 세르, 그리고 예, 마담 라 세르."

 세시안의 얼굴이 진중해졌다. 아버지는 무도회 중 정부의 허리를 끌어안고 침실로 올라갔다. 바로 그래서 오늘 연회에서 몰래 빠져나와 놀러 나온 것이다. 정사 중에 가면 무도회, 그것도 렌 시내까지 놀러 나간 아들 부부를 다음날까지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불러오라고 한다는 건 어마어마하게 심각한 일이 생겼거나 아버지가 미친 것이다.

 그리고 로렌의 세르는 아직 아버지가 명료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으므로 군말 없이 대답했다.

 "곧 들어가서 의관만 정제하고 바로 찾아뵙지."

 바로 돌아갈 줄 알았던 페린 경이 머뭇거렸다. 

 "그게, 당도하자마자 바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아롈의 표정마저 심각해졌다. 




 "늦었구나."

 로렌 황제, 루이 오귀스트는 아들 부부의 옷차림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걸어오면서 검은 가발을 급하게 벗는 바람에 반짝이는 금발이 착 가라앉은 채 이마로 흘러내렸다. 일부러 진하게 한 화장은 앳된 얼굴에 그리 잘 어울리는 편은 못 되었다. 가냘픈 몸에 걸친 장신구가 없어 초라해보이는 것은 덤이었다. 세시안의 옷 역시 연극단에서 빌린 만큼 그리 고급스러운 편은 못 되었다. 황제의 응접실에 설 복장은 아니었다. 

 그에 비해 황제는 아롈과 세시안이 이블린으로 돌아오는 동안 옷을 갈아입었는지 완벽한 정장을 갖추고 있었다.

 지적을 하지 않았는데도 눈빛으로 지적을 들은 것처럼, 아롈의 귀가 붉어졌다. 

 "죄송합니다."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속보다."

 황제는 아들과 며느리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아버지, 대체 무슨."

 "받아 읽어라."

 세시안이 종이를 받아들어 아롈에게 보여주었다. 색채가 다른 네 개의 녹색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이며 맨 윗줄의 글자를 훑은 순간, 아롈은 휘청이지 않기 위해 남편의 손을 꼭 쥐었다. 

 [코시카의 세르가 사흘 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시작을 알리는 소리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제발 올해에는 완결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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