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붉은 관(冠), 나부끼는 죽음 (4)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작센의 루드비히 테오도르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라인베르크 백작부인 알리체는 천둥 같은 고함에 어깨를 움츠렸다가 다시 당당하게 폈다.
"말씀드린 대로예요, 왕자. 저희 브라운슈바이크는 정말 왕자에게 죄스러운 마음 뿐이에요."
루드비히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지 않은 것은 단순히 그녀가 브라운슈바이크 공비의 시녀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 브라운슈바이크 공은 말년에 가정교사 출신인 여자에게 빠져 알리체를 만들었다. 어머니가 공비 칭호를 받지 못했으므로, 알리체는 '브라운슈바이크 공녀(Prinzessin von Braunschweig)' 칭호를 받지는 못했으나 교회의 승인을 받아 인지된 자식이었다.
따라서, 알리체는 신분이 낮다 해도 엄연히 브라운슈바이크 공과 아말리에 선왕비의 여동생이었고, 마르타 왕자비의 고모이자 루드비히 왕자의 의붓이모였다.
"마르타를, 물론 이제 와서라고 하시면 할 말은 없지만 자녀도 낳지 못하는 그 불쌍한 아이를, 집에 데려가서 돌봐주고 싶은 게 저희의 소망이에요. 부디 가납해주세요."
루드비히의 회색 눈에는 알리체의 아름다운 입술이 개주둥이처럼 보였다.
"마르타는 주님 앞에서 맹세한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십 년도 넘었는데 이제 와서...."
"공과 공비께서 말씀하셨어요. 왕자께서 잃어버리신 시간에 대해 최대한 보상하고 싶은 마음 뿐이라고요."
"정녕 '브라운슈바이크 공'께서 하신 말씀입니까?"
알리체의 얼굴이 굳었다. 마르타의 아버지, 브라운슈바이크 공으로 말할 것 같으면 벌써 이십 년 전에 가문에서 이어져내려오는 광기가 발병했다. 하늘에서 벼락이 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비가 오면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식사 시간에 칼에 찔릴까봐 고기를 손으로 들고 뜯어먹었다.
작센의 선왕, 카를 1세 아우구스트가 첫 아내인 옐리자베타 여대공에게 같잖은 열등감만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굳이 고르고 골라 작은 가문에서 부인을 고르지 않았더라면, 광기의 가문인 브라운슈바이크의 비텔스바흐에서 계비를 맞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이지요, 왕자."
알리체는 노여움에 짙은 적갈색 눈썹을 파르르 떨면서도 목소리를 감히 높이지 못했다. 오히려 어깨를 펴고는 짐짓 자선을 베푸는 어투로 루드비히를 달래려 들었다.
"가장 맞는 짝을 찾아 자녀를 보는 것이야말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숙명이 아니겠어요? 물론, 마르타, 그 아이가 받은 상처를 왕자께서 보듬어주신 데에는 비텔스바흐의 모든 신민들까지 왕자께 감사하고 있어요. 하지만 왕자. 사랑만이 모든 걸 해결해주는 건..."
이모라는 이유만으로 헛소리를 더 들어줄 인내심이 바닥난 루드비히는 단칼에 말을 잘랐다.
"얼맙니까."
"예?"
"파혼당한 마르타를 옳다구나 저한테 시집보내실 때는 그 죄스러움과 송구함을 느낄 염치가 없었다가 근간에 다시 생기신 건 아닐 테고, 누구한테 얼마를 받으셨기에 그 돼지가죽보다 두꺼운 낯짝으로 여기까지 기어오셔서 뚜쟁이 짓의 서막을 늘어놓으시냐는 말입니다."
루드비히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하노버의 빌헬미네가 조피 공주를 낳은 뒤로 오 년 넘게 아이를 가지지 못했을 때에도 왕이 될 지도 모른다는 하찮은 기대는 한 일 분도 가진 적이 없었다. 빌어처먹을 빌헬름이나 초조해했지, 루드비히는 마르타를 끌어안고 방에 처박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데에 익숙했다.
"왕자, 제게 사과하실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나라 꼴이 참 잘 돌아가나 보군요. 일개 가정교사의 딸 따위를 사절로 보낼 정도로 안 미친 사람이 없어서는..."
찰싹!
루드비히의 뺨이 돌아갔다. 그는 혓바닥으로 입 안쪽에 상처가 났는지 더듬어보고는 피식 웃었다.
"고작 이 정도를 못 참을 정도의 액수인 건 알겠군요."
"네가 내 언니를 생각한다면, 아니, 마르타를 생각해도 어찌 감히, 이런 모욕을..."
"방금 전까지 마르타를 제게서 떼어놔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일장연설하지 않으셨던가요?"
마침 때 좋게 문이 열렸다.
프리드리히 1세 빌헬름이 들어와 루드비히의 부은 뺨과, 손목을 부여잡은 라인베르크 백작부인을 번갈아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모님, 나가서 쉬십시오. 제가 죄송합니다."
얼굴을 손으로 가린 알리체 부인이 황급히 뛰쳐나가자마자 빌헬름 왕의 표정이 변했다. 저보다 키 큰 동생을 보는 눈이 야수처럼 사나웠다. 왕은 뚜벅뚜벅 걸어 루드비히의 앞에 섰다. 루드비히가 아주 조금 컸지만 둘의 눈높이는 거의 비슷했다.
"대체 언제까지 어리광부릴 셈이냐, 루드비히."
"하."
"십 년 쯤 봐줬으면 많이 봐주지 않았느냐."
"......."
퍽!
루드비히가 갈긴 주먹이 빌헬름의 손에 막혔다.
"봐줬다고? 네가? 나를?"
"이제라도 나라와 왕실을 위해 헌신하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다른 건 바라지도 않아. 이 결혼은 해."
"난 이미 유부남이야."
"이제 아니게 되겠지."
"그렇게 하고 싶으면 네가 하지 그래? 이미 한 번 한 짓, 두 번은 못 할 거 있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 이제 형수를 주워 줄 동생이 없어서 그 짓은 못 한다는 핑계라도 대시려고?"
빌헬름은 왼손으로 루드비히의 손을 잡은 채로 오른팔로 뺨을 후려갈겼다. 루드비히는 비명도 지르지 않고 나동그라졌다.
그의 발이 동생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켁."
"네가 나라를 위해 뭘 했어? 이 위튼 왕실을 위해, 네가, 대체 뭘 했냐고."
코시카에서는 조피 공주를 인질로 요구하고 있다.
마리야 여공의 말에 따르면, 조피를 로렌에 보낸 지금은 아마도 전쟁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작센은 덩치만 컸지 왕국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코시카-작센 전쟁이라니, 상상도 하기 싫은 단어였다.
하노버든 브라운슈바이크든 전쟁에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보르디 대공가와 혼맥을 맺을 수 있다면, 보르디 대공가 뿐만이 아니라 보르디 대공가를 외가로 두고 있는 로렌의 마담 라 세르, 아롈과도 조금 더 가깝게 연을 맺을 수 있다. 로렌을 등 뒤에 세운다면 코시카도 작센을 건드리기에 앞서 조금은 고민할 것이다.
이런 설명은 번거롭지만 폭력은 손쉬웠다.
때로 자식은 부모의 가장 싫어하는 부분을 닮는다. 프리드리히 1세 빌헬름은 외국에서 온 귀한 손님들이 뻔히 보는 앞에서 동생을 갈길 수 있는 남자였다. 그의 인식 안에서는 이미 루드비히는 감히 형인 그에게 대든 것만으로도 맞을 이유를 제공했다. '형으로서 동생을 정신차리게 이끌어주어야 한다'는 미명 하에 그의 구둣발은 무자비하게 쏟아졌다.
루드비히는 몇 대 얻어맞다가 몸을 굴려 빠져나왔고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옆구리를 감싸안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위튼 왕실을 위해서라고? 같잖은 소리 하지 마. 빌어먹을 형, 너나 나나 태어날 때는 왕자도 아니었잖아."
그 말대로였다. 카를 1세 아우구스트가 코시카의 옐리자베타 이바노브나 키예나 여대공과 혼인하여 삼 형제를 낳았을 때에, 그들은 HH 작센 공자들에 불과했다. 그들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아들이 남아있는 작센-함부르크 분가가 작센 통일과 왕국 선포에 찬성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여전히 왕과 왕자가 아닌 공작과 공자였을 테고, 위튼 왕실이라는 이름 따위는 쓰기 어려웠을 터였다.
루드비히는 요즘 빌헬름이 느끼는 열등감을 아주 정확하게 건드렸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외가에 여태 기대서 여기까지 온 주제에."
"닥쳐."
"무슨 천 년 묵은 왕실을 지켜야 되는 고오겨얼한 임무와 사명이라도 띤 척."
"닥치라고."
"그냥 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마르타를 희생시켰고, 또 한 번 희생시키려는 것 뿐이면서! 어쭙잖은 명분 주워섬기지 마!"
빌헬름의 숨 역시 거칠어졌다. 눈의 핏줄이 터질 듯이 불거졌다. 그러나 동생을 일방적으로 폭행했다는 사소한 죄책감, 어렸을 때부터 항상 느꼈던 폭력에 대한 거부감이 뒤늦게 그를 찾아왔으므로, 국왕은 한 번 더 주먹을 드는 대신 억지로 숨을 억눌렀다.
"마르타는 곧 알리체 이모와 함께 돌아갈 거다."
"헛소리. 남편인 내가 여기에, 윽, 있는데."
"그거 알아? 나는 브라운슈바이크에 아무 것도 약속하지 않았어."
루드비히의 회색 눈이 일그러졌다.
"그럼 누가 약속했을까? 네가 주워섬긴 대로, 갑자기 우리의 친애하는 외삼촌이 딸을 보고 싶어져서 알리체 이모를 보냈을까? 그리고, 네가 계속 마르타를 내세워 혼담을 거절하면, 브라운슈바이크는 대가를 못 받게 되겠지. 그럼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태어날 때는 왕자가 아니었던 루드비히 테오도르 폰 위튼."
"잘나셔서 좋겠어, 빌헬름 요한 프리드리히 폰 위튼."
지기 싫어서 반사적으로 대꾸했으나, 루드비히는 명백히 당황한 상태였다. 통증을 잊을 만큼 강한 충격이었다.
"너야말로 고결한 사랑인 척, 마르타와 결혼한 게 순수한 희생인 척 하지 마라. 마르타는 작센에 있든 브라운슈바이크에 있든 똑같을 거다. 잡아두고 싶은 건 네 욕심이지."
숨을 고른 빌헬름은 마지막으로 쏘아붙였다.
"잘 생각해 봐라. 네가 이렇게 버티는 게 과연 마르타를 위한 건지, 아니면 네 자신의 자기만족을 위한 건지."
쾅!
형이 옷자락을 휘날리며 방을 나가버리자마자, 루드비히는 얼굴을 감싸쥔 채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