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2. 린
3. 만남
4. 마법의 포니테일
5. Baseball Queen
작가 후기
역자 후기
2. 린 (1)
‘흐읍~~…….’
가즈히로는 마음속으로 신음을 흘리긴 했지만, 격통 때문인지 소리로 나오지는 않았다.
머리 쪽에서 격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섣불리 건드렸다간 그렇지 않아도 욱신욱신 쑤시는 통증이 자다가도 벌떡 깨어날 격통으로 바뀔까 두려워 차마 손을 대지 못했다. 가즈히로는 주저앉은 채로 격통을 눌러 삼킬 수밖에 없었다.
“괘, 괜찮니?”
“맞아, 맞아! 무지 큰 소리였어! 꽈당, 하고!”
뒤편에서 생소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하고 의아해하며 뒤돌아보자 그곳에 처음 보는 얼굴의 여학생 둘이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산뜻한 쇼트 보브 모양의 머리에, 다카라즈카(*여성으로만 구성된 일본의 가극단.)의 배우와도 같은 늠름함이 배어나는 다소 가느다란 눈동자가 특징적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여학생은 얼굴 형태가 묘하게 귀여워 보인다. 아마도 ‘처진 눈’ 때문이리라. 여기에 세미롱의 머리카락을 둘로 나눠 땋아 내린 머리 모양이 더해져서,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천진난만한 여자아이 느낌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즈히로에게는 그 두 사람이 입은 교복이 충격적이었다. 바탕색은 연지 빛깔이고 목깃과 소맷부리를 하얀색으로 마감한 세일러복. 가즈히로가 다니는 죠난 고교의 감색 세일러복과는 전혀 닮지 않았다.
가즈히로는 마치 다른 세계를 헤매고 있는 듯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가…… 어디지?’
바로 조금 전까지 러닝을 하려고 학교 바깥으로 나가던 참이었다. 그런데 주변 풍경이 돌변하여 본 적도 없는 교정에 앉아있다. 게다가 눈앞의 두 사람뿐 아니라, 마찬가지로 생소한 연지색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계속 지나다닌다.
가즈히로는 한순간 통증도 잊고 의문 어린 신음을 내뱉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음을 내뱉으려고 입을 벌렸을 뿐’이었다.
‘어라, 목소리가…… 안 나와?’
목소리가 아예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고……, 평소처럼 목소리를 내려 해 봐도 잘되지가 않는다는 느낌이다. 가즈히로는 다시 한 번 소리를 내 보려 하면서 오른손을 목으로 가져다 댔다. 그런데 손에 닿는 감촉에 얼마간 위화감이 있었다. 매끈매끈 부드럽기만 하고 목젖이 만져지지 않았던 것이다.
‘……읍?’
목에서 위화감을 느낀 순간이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마치 이 몸이 자신의 신체가 아닌 것만 같은 강렬한 위화감이 가즈히로를 덮쳤다.
가즈히로는 무의식중에 자신의 신체를 내려다봤다. 눈앞의 두 사람이 입고 있는 옷과 완전히 똑같은 세일러복……. 그리고 스커트. 마치 여자아이처럼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주저 앉은 자신.
하늘하늘 나부끼며 시야 가장자리를 가로막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온다. 머리카락……? 같은 것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길이로 자신의 어깨와 목덜미에 내려앉아 있다. 가즈히로는 주뼛주뼛하면서도 손을 가져다대봤다. 가볍게 당길 때마다 머리카락이 나 있는 부근의 두피까지 당겨지는 감촉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물론 이 머리카락이 가발 따위가 아닌 ‘자신의 머리카락’이라는 증거나 다름없다.
‘뭐지……, 이거?’
야구부에 소속된 가즈히로의 머리 모양은 중학교 시절부터 줄곧 스포츠머리다. 적어도 방금 전까지는 틀림없이 스포츠머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기다란 머리카락 때문에 머리가 이상하리만큼 무겁게 느껴졌다.
아연실색하는 가즈히로를 조금 전의 여학생 두 사람이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본다. 그때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가 다른 방향으로부터 가즈히로의 귓가로 날아들었다.
“미안! 안 다쳤어?”
목소리의 주인은 야구부 유니폼을 입은 남학생이었다. 스파이크로 지면을 박차고 요란한 소리를 울리며 가즈히로의 곁으로 달려온 남학생은 큰 키에 날렵한 체형을 가진 훈남이다. 그리고 훈남의 뒤를 이어서 어디에든 있을 법한 굵직한 체격의 남학생도 같이 따라왔다.
“얘! 하필 머리에 맞았잖아! 린이 여기서 더 이상해지면 어쩔 셈이니!?”
두 여학생 중 키가 큰 쪽이 아무렇지도 않게 얄미운 소리를 한다.
“괜찮아! 바로 맞은 건 아니니까, 그리 많이 이상해지진 않을 거야♪”
다른 한쪽은 편들어 줄 작정으로 말한 모양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전혀 기운이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금 머리에 이는 격통의 원인은 야구공인 듯하다. 지면을 한 번 튕긴 공에 머리를 맞은 거다.
“정말 미안. 내가 던진 공 때문에…….”
“무슨 소리야, 내가 글러브로 쳐올리는 바람에 펜스를 넘긴 거니까 네 탓이 아니라고.”
굵직한 체형의 남학생이 두툼한 눈썹을 여덟 팔(八) 자 모양으로 내려뜨리고 굉장히 미안한 기색으로 사과했지만 다른 한 사람, 잘생긴 남학생이 그를 감싸고 나섰다. 아마도 캐치볼을 하던 중 한쪽이 던진 공을 미처 잡지 못해서 발생한 사고였던 모양이다.
사고의 전모를 파악한 여학생 두 사람이 단죄하듯이 쏘아붙였다.
“뭐야, 그럼 다 너 때문이었네.”
“응응. 내 생각도 그래♪”
“큭…….”
궁지에 몰린 잘생긴 남학생이 이상한 신음을 흘렸다. 흔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고들 하는데, 저래서는 입이 스무 개라도 아무 말 못 할 것 같다……, 고 가즈히로는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정말 어디 다치진 않았어?”
키가 큰 여학생이 염려의 말을 건네며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주저앉아 있는 가즈히로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맞잡은 가즈히로를 힘껏 끌어당겨서 일으켜 세운다. 여자치고는 상당히 강한 힘이었다.
다른 한 사람, 처진 눈을 한 여학생이 막 일어선 가즈히로의 스커트에 묻은 모래를 털어 준다. 모래를 대강 다 털어 냈을 때에는 네 사람의 시선이 하나같이 가즈히로에게 향해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격통은 제법 가셨다. 오히려 조금 전처럼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어쩌나 그게 더 걱정이었다. 가즈히로는 마른기침을 한 번 하고 나서,
“괘, 괜찮아…….”
라고 겨우 대답했다.
참으로 맑고 깨끗한 미성(美聲)이었다. 분명 ‘꾀꼬리 같은 목소리’란 이런 음성을 가리키는 말이겠지……, 하고 가즈히로는 감탄했다.
네 사람은 일단 안심했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마주했다. 그때 운동장 방향에서 몹시 커다란 고함이 들려왔다.
“인마, 야마자키! 거기서 뭉그적대고 뭐하는 거냐!”
운동장에서 연습 중이던 야구부 선배인 듯한 인물의 목소리다. 어지간히도 무서운 호랑이 선배인 모양이었다. 반사적으로 남학생 둘의 등줄기가 꼿꼿이 펴졌다.
“이런! 그럼 우린 가 볼게!”
“미, 미안…….”
달려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요란하게 스파이크 소리를 울리며 허둥지둥 떠나가는 남학생 두 명.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이번에는 체육관 쪽에서 여자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집합 시간 벌써 지났는데 뭐하는 거니!”
아마도 체육관에서 부원이 모두 모이기를 기다리던 선배의 목소리인 듯했다. 저 목소리가 눈앞에 있는 여학생 둘에게 향하고 있다는 건 틀림없었다.
두 사람은 “큰일 났다!” 하고 어깨를 움츠리더니,
“미안, 그럼 우리도 부활동 다녀올게!”
“내일 봐, 린!”
이라는 말을 남기고 총총히 멀어져 갔다.
이리하여 그토록 소란스러웠던 자리가 순식간에 정적이 흐르는 공간으로 변했다. 새삼 가즈히로는 이곳이 본 적도 없는 장소임을 실감했다.
‘어떻게…… 된 거지?’
낯선 장소에 있는 게 전부가 아니다. 자신의 몸 또한 ‘자신의 신체가 아니게’ 되어 있었다.
발아래에는 나일론제 스쿨백이 떨어져 있다. 십중팔구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쓰던 물건이겠지? 가즈히로는 무심코 그것을 주워들었다.
‘그러고 보니…… 린이라고 했었나…….’
조금 전 떠나갔던 여학생들이 분명히 그렇게 불렀었다. 가즈히로의 짐작대로 스쿨백의 네임 태그에 ‘린’이라는 이름이 커다랗게 쓰여 있다. 아마도…… 이 몸의 원주인을 일컫는 이름이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 망연자실하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가즈히로는 등 뒤편에서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뒤돌아섰다. 그곳에는 키가 유난히 작은 여자아이가 무언가 서류로 가득한 골판지 상자를 안은 채 서있었다.
“어디 아프니?”
작은 키는 물론이고 초등학생 혹은 중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동안을 보면 고등학교 교사로 헤매어 들어온 어린애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면 도저히 고등학생이라 여기지 않았을 거다.
“얼굴빛이 안 좋아 보이는데, 보건실로 데려다 줄까?”
여자아이는 앳된 겉모습 때문에 한층 더 어른스럽게 느껴지는 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언제부터 가즈히로를 보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말에는 분명 걱정하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가즈히로는,
“아, 아니야! 그, 게……. 괘, 괜찮, 아! 아무렇, 지도…….”
라고 말하며 뒷걸음쳤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다. 이대로는 머리가 터질 것만 같다. 그렇게 생각한 가즈히로는 교정을 가로질러 곧장 교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동안의 여자아이는 무거워 보이는 골판지 상자를 안은 채로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며 가즈히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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