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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륜(花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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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 | 淸風

재개(再開 : 다시 피다)


  나, 니죠 스미레코는 이번 해가 되자 실로 오랜만에 흥분감을 맛보고 있었다.
  조카손녀 뻘 되는 먼 친척이 고등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다. - 다시 말해, 마침내 친척을 릴리안에 입학 시킬 기회가 온 것이다.
  확률적으로 여자 아이가 태어날 확률은 분명 둘에 하나일 것인데, 어떻게 된 것이 나의 혈족은 우주인이 Y 염색체에 개조 수술이라도 했는지 고작 십몇년 전까지만 해도 남자 아이만 쑴풍쑴풍 태어났다. 최근 여자 아이가 몇 명 태어 난 집도 있지만, 고등학교까지 진학하려면 15년은 기다려야 하니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을지 장담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예정이야 120살까지 살 계획이다만.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릴리안은 명실상부 1류에 속하는 고등학교다. 바로 거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마리아님 용서하소서)젠장, 이 손녀는 공부를 너무 잘했다.

  릴리안은 분명 1류지만, 아무래도 대학에도 상당수가 에스컬레이트로 올라가는 만큼 학구열은 조금 느슨한 편이라 진학 성적만으로는 ‘초일류’라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 손녀는 초일류 학교에도 들어갈 성적. 릴리안이라면 거의 수석을 차지할 정도니 사립인 릴리안 보다야 싼 공립 학교에 가길 원했다.
  난 학업 이외에 인맥도 중요한 힘이니, 인생에 한번쯤은 아가씨가 되어 보고 싶지 않느니 하며 조카손녀를 꼬드겨 보았지만, 오히려 “그런 인맥-학벌주의는 타파되어야 한다”는 귀엽지 않은 반론이나 들어 버렸다.
  ···뒤통수를 기습 가격해, 지능을 조금 떨어뜨려 주면 릴리안으로 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망상도 잠시 했지만 역시 차마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그저 늙은이인 나보다 더 늙은이 같은, 불상 구경이란 취미를 위해 다른 학교 입학원서 비용을 횡령 하는 것을 묵인 하는 정도에서 참기로 했다. 물론 릴리안 고교 응시료 만큼은 횡령하게 둘 수야 없는 노릇이니, 이 몸이 몸소 가 접수를 해 주었다.

  이제 남은 것은 저 귀엽지 않은 조카 손녀가 유일하게 릴리안 이외에 원서를 넣은 공립 고등학교에 시험을 치러 가지 못하게 하는 것뿐.

  사실 아무리 욕심이 들더라도 남의 인생에 멋대로 손을 대서야 인간으로서도 실격이겠지. 하지만 나는 정말 손녀가 공립 학교 시험을 보기 전날 불러 수면제나 설사약이라도 먹일까 막판까지 고민을 할 정도로, 그 아이를 릴리안에 보내고 싶었다. 실제로 약국에서 그 약들을 사와 버린 후, 나란 사람은 인생을 헛산건 아닐까 고뇌했을 정도로.
  그런데 사실은 내가 손을 쓸 것까지도 없었다. 손녀는 불상 구경을 한답시고 공립 학교 시험 전날 교토로 여행을 떠났다가, 폭설로 발이 묶여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 이건 실로 하늘의 뜻이 아닌가.

  이리하여 하늘이 점지해준 대로, 내 조카 손녀 니죠 노리코는 경사스럽게도 릴리안에 입학하게 되었다. 릴리안의 엄한 교칙은 외부에서 통학하는 아이는 반드시 친척이나 기숙사에서만 통학하도록 정하고 있었고, 예상대로 노리코는 숨막히는 규칙의 기숙사 보다는 내 맨션에서 통학하기를 원했다. 마침 방도 하나 비어 있고, 나로서도 릴리안에 다니는 아이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은 몹시 기쁜 일인지라 흔쾌히 승낙했다.

  이 모든 시련이 끝나고, 입학식.
  노리코는 정말로 신입생 선서를 했다 - 즉 수석을 차지할 정도의 성적이었다. 아무리 릴리안 중학교는 입시의 부담이 없어 공부를 등한시 하는 분위기가 있다지만 그래도 장한 마음에 찬물을 끼얹을 이유는 못됐다. 릴리안 고교는 외부에서 입시를 치는 사람에게도 충분히 일류 고교니까.
  덕분에 난 노리코를 안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귀여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게 되었다. 입학 준비를 하며 준비물 목록을 체크하던 노리코를 그런 속마음을 들키지 않도록 기특해 하며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노리코는 ‘판쵸가 뭐냐’ 고 물어왔다.

  “하얀색 판쵸?”

  -뭐였지, 그게. 분명히 멕시코의 민족 의상인데, 왜일까 좀더 친숙한걸.
  아. 기억 났다.
  하지만 이런 재미있는 것을 순순히 알려주면 재미가 없지. 조금 장난기가 들어 모르는게 훗날의 즐거움이란 엉뚱한 대답이나 하며 놀려 주었다.

  “그 훗날이 왔을 때, 창피 당하는건 나라고요.”
  “리코는 말이지, 재미가 없어. 실수하지 않을려고, 실수하지 않을려고, 그렇게 애쓰기나 하고.”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해야 한다니까. 정말로.
  결국 노리코는 혼자서 천을 사와 판쵸를 만들었다. 가끔 슬쩍 가서 살펴보니, 아직 뭐에 쓰는건지 짐작 못한 것이 분명하지만 토라져서는 꼼지락 거리며 만들고 있다. 그 모습마저 귀여워 보이는건 이미 저 아이에게 내가 푹 빠져 있어서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똑똑하고, 실수 하지 않으려 안달하고. 저 아이, 반 세기 전의 나와 너무 닮았으니까.






  비가 내리는 금요일은 우울한 기분이 들게 한다. 나 역시, 오늘은 조금 차분하고 착잡하게 가라앉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노리코가 비를 맞은 듯 꽤나 후줄근한 모습으로 들어오자 깜짝 놀라 버렸다.

  “우산 가지고 갔잖아? 왠일이니?”

  몸은 말라 있었지만, 우산을 썼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한번 젖은 티가 났다. 폭풍이 몰아치는 것도 아닌데 우산을 썼다면 이리 젖었을 리가 없지. 이해할 수 없는 건 그런 모습을 하고도 뭔가 개운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으응, 조금 급한 볼일이 있어서 빗속을 뛰어 다니느라요. 오히려 기분은 아주 좋아요.”
  “헤에.”

  처음엔 학교에 적응을 못하나 싶었지만, 요즘 들어서는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게되어 걱정을 하지 않았었다. 그러다 다시 최근 들어서는 뭔가 고민이 있는 것 같아 염려가 되었는데, 해결한듯 하다. 나름대로 알찬 생활을 보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몸은 이미 말랐지만 교복은 아무래도 세탁 해야 겠다.”
  “예. 갈아 입을게요.”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노리코를 보며, 난 따뜻한 차를 준비했다.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진 않지만 몸이 좀 식었을테니, 아무래도 뜨거운걸 먹고 싶겠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사복으로 갈아입은 노리코가 책상위에서 뭔가 반짝이는 것을 집어 들고 있었다.

  “어머, 그거 뭐니?”

  목걸이 같은데. 본적이 없는 것이었다.
  - 아니, 자세히 보니 사슬의 끝에 십자가가 메달려 있었다. 저건 로자리오였다.
  -- 로자리오.

  “스미레코 아줌마도 릴리안 졸업생이잖아요. 로자리오, 모르세요?”
  “···모를 리가- 있니.”

  목소리가 떨리진 않았겠지. 방망이치는 가슴을 손으로 살짝 누르며, 뜨거운 코코아를 노리코에게 넘겼다. 손이 떨리는 걸 감추려고.

  “하지만 의외네. ‘숨겨진 역 크리스찬’이 로자리오를 받게 만들 정도로 대단한 ‘언니’가 있었다니.”
  “-으응. 정말, 저도 얼마전까진 상상도 못했지만.”
  “네 언니, 어떤 분이니?”
  “토도 시마코라고 해요. 2학년인데 로사 기간티아를 계승한 재원이죠. -더 자랑하자니 팔불출 같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대단한 미인이고요.”
  “로사 기간티아? 그게 뭐니?”

  로사 기간티아라고 말할 때, 노리코는 명백하게 내 반응을 관찰하고 있었다. 아마 내가 놀라기를 기다리던 모양인지, 내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자 노리코는 놀라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한 듯 했다.

  “에? 스미레코 아줌마가 릴리안에 다닐때는 아직 없던 제도인가? 그렇게 오래전 분이셨구나, 스미레코 아줌마.”
  “이런 건방진 녀석. 도대체 뭔데 그래?”
  ​“<​산​백​합​회>​라​고​ 불리는 학생회의 세 간부중 한명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백​장​미​님>​이​라​고​도​ 부르죠.”
  ​“​·​·​·​·​·​·​그​렇​·​·​·​구​나​.​ ​백​장​미​님​·​·​·​인​가​.​”​
  “깜짝 놀랄줄 알았는데, 재미없네요. 클래스 메이트들의 말로는, 릴리안 재학생은 물론 졸업생에게도 동경의 대상이라던데.”

  노리코는 실망한 표정으로 코코아를 입으로 가져갔다. 난 ‘50년쯤 더 숙성하면 내 상대가 될지도 모르지’ 라고 웃어주곤 밖으로 나왔다. 그 길로 내 방으로 들어가, 비틀거리며 책장을 뒤졌다.

  백장미. 2학년에 계승.
  로자리오.
  자매(스루). 릴리안.

  늙어서 둔해진 손가락 보다, 지금껏 어디에 있었는지 궁금할 정도로 터져 나오는 단어들이 더 내 행동을 방해했다. 간신히 책들 사이에서 꺼낸 두꺼운 책이 묵직하니 가슴에 안겨 온다. 그 묵직한 느낌에, 방금전부터 가슴을 짓눌러 왔던 감정이 꾹 눌려. 터져나와서. 울면서. 흐느끼며, 웃었다.

  - 감사합니다. 짖궂은 운명이여, 상냥한 신이여. 감사합니다.

  기쁨, 그리움, 안도. 압도적인 감정들이 휘몰아 쳤다. 혹여 노리코가 들을까봐 숨죽여서 흐느끼며 웃는 것으로 밖에 그 감정을 배출하지 못해,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상관없어. 지금 이 기분 그대로 라면 죽어도 좋을 것 같으니까. 이렇게 늙으면서 지켜왔던 보답을, 마침내 받았으니까.

  기대했던 것보다, 천배는 화려한 과실을 얻었다. - 기적.

  그저 노리코가 릴리안에 입학했을 때, 충분히 만족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선물을 갑작스럽게 받다니, 반칙이다. 늙은이의 심장에 이 감정의 격류는 고문이었다.
  한참 후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어느틈엔가 침대 위에서 뒹굴던 나는 가슴 위를 답답하게 누르고 있는 두꺼운 책을 가슴에서 내려 놓아 펼쳤다.
  오래 묵은 책의, 그윽한 향이 책장과 함께 펼쳐진다. 자연스럽게 펼쳐진 책장에는 한 장의 사진이 끼워져 있었다. 행여라도 손에 눈물이 묻어 있을까 싶어 손가락을 잘 닦고, 그 사진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이 사진도 나와 함께 나이를 먹어, 이제 반세기가 되어간다. 칼라 사진인지라 흑백 사진보다 고풍스러움은 덜했지만 내게는 추억을 그대로 담아낸 더없이 고풍스러운 한 장의 사진.

  나는 그중 한명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목구멍에서 간신히, 두마디만을 쥐여 짜냈다.

  “약속, 지켰습니다-.”

  반세기 만에 마침내 이 보고를 올립니다. 좀 늦었지만, 용서해 주세요. 앞으로도 계속 이루어 질 테니까. 기대해 주세요.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눈물과 섞여 욱하고 막혀 버렸다. 뭐부터 말해야 할까. 뭘 말해야 할까.
  ···아아. 제일 중요한 말을 하지 못했잖아.
  오랜만입니다.

  ​“​·​·​·​평​안​하​셨​어​요​.​ (ごきげんよう)”

  사진속의 나의 ​‘​언​니​(​그​랑​-​스​루​)​’​는​ 하얗게 미소 지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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