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출(蓓出 : 봉오리가 나오다)
입학식날 신입생 선서를 했던 열 세살의 꼬마 고교생이, 바로 다음날 산백합회에 초대되었다-. 맛있는 음식에 감칠나는 양념이 더해졌다. 고로, 당연하게도 이야기는 흥미도 위력도 속도도 두배가 되어 퍼져나간다. 입학식으로부터 사흘이 지난 지금에 오자 스미레코는 과연 고등부 내에, 아직도 자신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의문이었다.
- 츠바키님도, 내 이야기를 들었을까.
멍하니 생각하다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얼굴이 조금 붉어지려는 것 같아 당황해 고개를 책상에 파묻는다.
왜 이리 신경이 쓰이는 걸까. 역시, 첫눈에 동경하게 되어 버린 걸까.
동성의 겉모습에 혹한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츠바키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떨릴 정도로 떠오르는, 아름다울 정도의 당당함. 실수할까봐 언제나 마음 졸이고 있는 소심한 자신은 그 점을 동경하고 있는 걸까?
그런 식으로 이리 저리 자신의 마음을 분석하려 애 썼지만, 해결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머리가 좀 굵었어도, 어차피 아직 어린애인걸 뭐. 하아.
“스미레코양?”
“예?”
이번에는 간신히, 히나타님을 만났을때 처럼 추태를 보이지 않고 우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스스로도 만족. 아가씨 입문은 순조롭습니다. - 라고 마지막으로 농담을 하고 앞을 보니, 노조미양이 어쩐지 흥분된 얼굴로 서 있었다.
“호출이세요. 어서 나가 보세요.”
“예··· 누구의?”
돌아보자 교실 밖에, 인형이 하나- 라고 착각 할 정도로 양손을 모으고 조용히 서 있는 사이코님. 밤중에 본다면 심장에 부담이 갈 만큼 정적이다.
황급히 일어나 나갔다.
“평안하세요, 스미레코양. 잠시 이야기할 수 있나요?”
“평안하세요, 사이코님. 예, 식사는 이미 마쳤으니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아직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 저쪽의 격식을 갖춘 말투에 이쪽도 익숙하지 않게 격식을 갖춰 대답했다. 방금 전 아가씨 입문은 순조롭니 뭐니 하며 스스로에게 농담을 했었지만, 이런 화려한 말투는 역시 아직도 거부감이 든다. 앞으로 자신이 이런 말투를 자연스럽게 쓴다고 생각하면 좀 걱정스러워 지기도.
“그렇다면 잠시 자리를 바꾸지요.”
그렇게 말하고는 한 박자 쉰 후,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런 작은 배려들이 이 사람이 자라온 환경을 떠올리게 한다.
두 사람은 잠시 걸어 뜰로 나왔다. 주변에 사람이 조금 적어지자, 사이코는 멈춰 다시 말을 꺼냈다.
“다름 아니라 부탁하나를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아직 산백합회의 정식 의뢰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스미레코양의 동의가 없다면 선배님들께 제안할 수도 없으니까요.”
사이코는 잠시 머뭇거렸다.
산백합회 사람도 말을 머뭇거릴 때가 있구나. 라고 어이없는 감탄을 해 본다. 생각해보면, 유미코님은 망설임없이 책상 앞까지 와서 자신에게 용무를 전달하셨었지. 반면 사이코님은 얼굴을 이미 봤음에도 교실 밖에서 클래스 메이트에게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두 분의 성격차가 보이는 듯했다.
“이번 마리아 제에서, 화륜을 추기로 했다는 말은 지난번에 지난번에 들으셨지요. 화륜의 춤의 구성은 아시나요?”
모른다고 대답하자, 말이 끝어진 적이 없다는 듯이 부드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고리를 만들며 춤추는 주역은 학생회의 세 임원 분께서 맡아 추십니다만, 그 주변을 돌며 꽃을 뿌리는 조역이 필요합니다. 주역과 같은 수의 사람이 필요하지요. 즉 세명이 필요 합니다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그 자리중 하나를 스미레코양이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조연 세명- 산백합회의 집회에는 한번 참가했을 뿐인 스미레코도, 곧바로 세명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눈앞의 사이코님, 친절한 스즈란님, 예리한 유미코님. 세명의 2학년. 단 한번 참가한 스미레코조차 저 세명이 다음 학생회 임원으로 꼽히는 후보란걸 눈치 챌 정도인데, 어째서?
무엇이 문제일까? 스즈란님은 가전 전통 무용의 계승자라니 춤 무대에 빠트릴 수 없는 인재일 것이고. 역시 사이코님이 뭔가 사정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설마 권력 다툼이라거나 하는 걸까?
“-어째서, 제가···?”
게다가 2학년은 저 세명을 제외하고도 몇 명이나 있다. 1학년생인 스미레코는 이번 마리아 제 뒤의 환영회에서는 환영받는 쪽에서의 입장이다.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유미코양이 폐가 안 좋기 때문입니다. 선천적으로 호흡기 질환류에 감염이 잘 돼, 이런 환절기에는 언제나 감기를 달고 삽니다. 게다가··· 꽃가루 알레르기도 가끔 생겨서. 아무래도 마리아제 당일에도 병을 앓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폐가 약해 춤을 추는 것 자체도 힘듭니다.
둘째로는,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1학년 생인 스미레코양에게 이 부탁을 드리는 이유입니다.”
사이코는 아주 잠시 머뭇거렸다.
“산백합회의 분들은 자존심이 강한 분 들이 많습니다. 그렇기에 ‘다음 학년도의 학생회 임원’이라는 세 자리를 두고, 불쾌한 감정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이런 공식 행사에 저나 스즈란, 유미코 이외의 2학년생이 나서는 것은 불안의 요소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 이른바 ‘정치적 이유’란 것이군.
“···그럴 바에는, 1학년 생인 저를 신입생과 재학생의 화합이라던가 하는 이유를 들어 양념처럼 넣는 편이 낫다, 는 거군요.”
“과연 명석하시군요.”
사이코는 탄복했습니다, 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스미레코는 조금 흥분과 긴장을 느끼고 있었다. 춤, 그 멋진 분들과 함께 출수 있다-. 생각하면 내가 따라 갈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저 조연이 아닌가. 오히려 그 세 3학년생의 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당장 받아들이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한가지가 의문을 해결 하지 않고서는 그럴 수 없었다.
“유미코님께서도 이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아니요. 제 독단입니다.”
- 뭐···? 서, 설마. 사이코님은 유미코님을-
“오해는 말아 주세요.”
사이코는 살짝 웃었다.
“죄송합니다. 이것부터 설명했어야 했는데, 조금 긴장했나 봐요. 이래 봬도 저와 유미코양은 1학년때 클래스 메이트로, 조금은 교제가 있습니다. 유미코양은 자존심이 강해 이 제안을 대놓고 말하면 절대 받아 들이지 않을 거에요. 그래서 스미레코양은 아마 마지막까지 ‘긴급시 대리’ 란 명목으로 연습에 참가할 겁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제의 무대에 설 수 있을지는··· 모른다는 거네요.”
“전 스미레코양이 서게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유미코가 이 시기에 몸이 좋기는 힘들고, 유미코는 몸이 좋지 않고, 대역이 있는데도 무대에 억지로 서려 할 정도로 무모하고 독단적이지 않습니다.”
사이코는 딱 잘라서 말했다. 이 사람은 태연한 얼굴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거나, 무뚝뚝한 얼굴로 친구를 위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틀림없이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무대에 서지 못한다 해도, 그 세 사람의 연습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친해질 둘도 없는 기회. 스미레코는 그렇게 생각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이 된다면 기쁘겠습니다. 단, 무대에 서는 것은 유미코님의 동의하에서만···.”
“물론이지요. 감사합니다.”
표정의 변화가 적은 얼굴에 안도감이 잔잔하게 퍼져 나갔다.
“이제 임원 분들과 유미코양에게 의견을 물어보고, 승낙을 받는다면 일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예.”
“아···. 그리고.”
인사를 나누고 막 헤어지려 할때, 깜빡했다는 듯이 사이코가 다시 불러 세웠다.
“유미코양의 호흡기에 대한 것과 대역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입에 담으시는 것은 자제를 부탁드립니다.”
“예?”
“그녀와 친한 사람들은 거의 알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유미코양은, 약점을 보이는 것을 싫어하기에. 배려를 부탁드립니다.”
그럼 정말로, 라고 인사하고 사이코는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표정이 적은 사람이라고, 감정도 적진 않았다. 차가워 보이는 유미코님에게도 저렇게 뒤에서 배려해 주는 친구가 있었다.
역시, 좀더 그들을 알고, 나를 알리고 싶었다. - 그리고 그 기회가 더없이 멋진 형태로 왔다.
- 그날 방과 후, 사이코는 스미레코에게 정식으로 조연 대리로 결정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마리아제가 앞으로 육일 남은, 그 날은 토요일이었다.
이동 수업을 마치고, 막 교실로 돌아오던 스미레코는 일학년 동백반 앞에서 사람들이 조금 뭉쳐 있음을 발견했다. 가까이 가보자, 그 사람들의 중심에는 아는 얼굴이 있었다.
“스즈란님···?”
“마침내 왔네요. 자아, 잠시 실례.”
스즈란은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을 헤치고 스미레코의 앞에 섰다.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고는, 급우들 떨어져 말이 안들릴만한 거리까지 이동했다.
“오늘 방과 후, 잠깐 시간을 내줬으면 하는데. 좀 갑작스럽나요?”
“예···? 예정은-.”
없다고 말하려다가, 문득 한가지가 있다는 것이 기억났다.
“사이코님께서 오늘 방과 후와 내일의 시간은 비워두라고 어제 말씀하셨어요.”
“아, 그게 이 용무에요. 아하하, 과연 사이코. 빈틈이 없네.”
사실 내가 어제 전해야 하는 건데, 그만 깜빡 해 버렸다고 스즈란은 부끄러운 기색을 조금 띄우며 해명했다.
사이코님은 이야기를 할때 단 둘이 있는 정원까지 갔지만, 스즈란님은 대강 말이 안들릴 것같은 곳까지만 간다. 두 사람의 성격 차이를 보여주는 듯 했다.
“내일이 마리아제 닷새전으로, 히나타님이 말했듯이 중간 호흡을 점검하는 날이에요. 그날 처음으로 정식 무대처럼 리허설을 해 볼텐데, 그 전까지 조연 파트의 춤을 출줄 알아야 이야기가 되지 않겠어요?”
“예? 저도 내일 춤추나요?”
“아니면 연습의 의미가 없잖아요. 괜찮아요, 처음부터 잘하길 바라는 나쁜 언니들이 아니랍니다. 게다가- 아직 화륜의 춤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스미레코양에게 서비스로. 오늘 방과후에, 부족하지만 제가 교습을 잠시 해 드리겠습니다.”
와아···.
친절한 배려에 조금 감동하고 있자, 스즈란이 부끄럽다는 듯이 웃었다.
“절 보고 감탄해도 미안한데요. 고백하자면 사이코가 ‘제가 끌어들였으니까요’라며 스미레코양의 지도를 간절히 부탁해서.”
과연. 사이코님의 이미지에 딱 맞는, 할 만한 행동이었다.
“괜찮으시다면, 방과후에 저희 집으로 초대할까 합니다만.”
“예-?”
이건 놀랐다.
아무리 붙임성이 좋다지만, 겨우 몇 번 본 자신을 집으로 초대하다니···?
“아주 오시는 김에 자고 갈래요?”
“그, 그런 실례를 어떻게-.”
“하지만 그게 편할지도 몰라요. 내일 연습 장소가, 저희 집이거든요. 오늘 제가 안내해 한번 방문하면, 내일 찾아 오시긴 힘들지 않겠지만 아무래도 계속 왕복하기는 귀찮잖아요?”
그러고보니 스즈란님의 집은 가전 무용의 종가라고 했지. 그에 걸맞게, 자택내에 연습실이 있는 모양이었다. 역시 부잣집 아가씨였구나.
“강당에서 연습해도 좋지만, 아무래도 꽃을 뿌리며 추는 춤이나 정리도 힘들고, 선배분들께서 신입생들께 비밀로 하길 원하고 계셔서.”
“예. 그렇군요.”
하긴 그런 공연이라면, 뭐가 나올지 모르는 편이 재미있을 듯 했다. 스즈란님의 댁에서 하루 묵는 것도 재미있을 듯 했지만 - 역시 너무 실례고, 집에 허락을 맡을 시간도 없어 포기하고 그저 저녁때까지 배우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스미레코를 바래다준 차가 사라져 간다.
어제, 토요일날 이미 한번 본 니와가의 저택 문은 여전히 화려 했다. 예술을 하는 가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재산도 상당한 모양이었다. 어제 몇 시간동안 화륜의 춤을 배운 연습실은 상당한 크기였음에도 ‘집안 사람 전용의 연습실’이라고 한다.
스미레코는 아버지와 오빠가 호들갑스럽게 들려준 생과자 상자를 손에 들고, 니와가의 문을 두드렸다. 이 상자가 어떻게 마련됐는지를 생각하자 슬몃 웃음이 나온다.
연습을 끝내고 집에 들어오자, ‘학생회 일을 돕는다’는 내용의 전화만으로도 이미 쾌히 늦는 것을 허락했던 아버지와 오빠는 스미레코가 ‘니와’의 이름을 이을 분과 함께 있다 왔다는 사실에 환호했다. 알고보니 사업 관계상 친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라던가.
아까는 ‘너무 늦게 오지 말라’고 했던 주제에, 지금은 ‘자고 오면서 천천히 친분을 쌓지’라고 아쉽다는 투로 말하는 두 남자를 보며 스미레코는 어이가 없었다. 뭐, 덕분에 오늘 만날 산백합회의 분들 중에 명가의 아가씨가 다수 있다는 걸 안 두 사람은, 호들갑스럽게 뛰어 다니며 지금 스미레코가 들고 있는 화려한 과자를 선물로 마련했다.
“어서 들어와요.”
2학년이지만, 오늘 모임을 주관한다고 봐야 할 스즈란이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다른 분들은 벌써 오셨나요?”
“스미레코양이 빨리 오시긴 했지만, 다른 분들은 더 빨리 오셨어요. 전부 오셨답니다.”
나름대로, 1학년 주제에 늦지 않으려고 아슬아슬하게 실례가 아닐 정도로 빠른 시간에 온건데. 다른 사람들은 스즈란과 친분이 있는 만큼 그 실례의 기준이 아무래도 좀더 빨랐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전부 왔다고?
“츠바키님도 이렇게 빨리 오셨나요?”
의외였다. 좋게 말하면 나른하고, 나쁘게 말하자면 귀찮아 하는 듯한 태도의 그 분이 이렇게 빨리?
“그 분도 할때는 하는 분이지만··· 이렇게 빨리 오시진 않아요. 단 이번엔 유미코가 수고해줬지요. 두 사람 다 기숙사에 거주중이거든요. 덕분에 상당히 부루퉁해 계세요.”
그 무서운 분도 유미코가 정색을 하고 덤비면 결국 귀찮아 어쩔줄 몰라하면서도 넘어오니, 신기하죠. 라며 스즈란은 재밌어 못견디겠다는 듯이 소매로 입가를 가리며 키득거렸다. 자택 안이라는 점 때문인지, 학교 내에서 보다도 훨씬 밝고 가벼운 사람이라는 느낌이었다.
스즈란은 스미레코를 어제와는 다른,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건물로 안내했다. 가족 연습실은 지금 누군가가 사용 중이어서, 작은 무대가 있는 방에서 연습을 하기로 했다고 한다.
“가만 있자, 연습시간까지는··· 아직도 한시간 가까이 남았네요.”
“다른 분들은 이미 모여 계시나요?”
“모여 있긴 하지만, 이쪽이 아닌 본채에 있어요.”
“예?”
그러면 왜 여기로 데려오신 거지? 놀라서 눈을 크게 뜨자, 스즈란은 재밌다는 듯이 다시 웃었다.
“어머, 죄송. 하지만 스미레코양은 정말로 귀여워서요.”
“···감사합니다.”
“다른 분들이 먼저 온건, 제 부모님같은 니와가의 어른들께 인사를 하기 위해서기도 해요. 자리를 빌려 주어서 고맙다, 따님은 아주 도움이 된다.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죠. 거기에 가고 싶으세요?”
“···이리로 데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빠나 아버지가 들으셨다면, 당장 가서 인사를 하고 얼굴을 익히지 않고 무슨 소리냐고 갈갈이 날뛰었겠지만. 도저히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스즈란님은 무척이나 활달하고 자유로운 기풍의 분이지만 스즈란님의 부모님도 그런 분이란 보장은 없으니.
“그럼 죄송하지만 이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고 계세요. 저는 돌아가서 다른 분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돌아오지요. 필요한게 있으시다면 별채에 있는 사람에게 부탁해 주세요.”
“예. 감사합니다.”
스즈란이 몸을 돌려 다시 사라지고, 스미레코는 잠시 주변을 둘러 보았다.
마루에 공손히 대기 중이던 고용인 노인이 차를 드시겠냐고 물었지만 목이 마르지 않아 사양했다. 대신 들고 있던 과자는 역시 맡겨 두었다.
뭘할까. 안에 들어가 있을까 했지만, 날이 너무 좋아 그러고 싶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자, 참 잘 가꾸어진 정원이었다. 크기도 상당해 한바퀴 돌면 시간이 상당히 가 있을 듯 했다. 좋은 생각이라 끄덕이고는, 천천히 길을 걸었다.
- 조금 있으면, 그 분들의 춤을 볼 수 있다.
영화를 처음 볼 때처럼 두근거리고 있었다. 영화 화면속의 배우들은 전부 아름다웠지만, 역시 눈 앞에 살아있는 사람 쪽이 더 멋있었다.
어제 스즈란님께 말로만 들었던 춤들을 본다. 기대된다.
햇살도 따사롭고, 바람은 부드럽고. 풀은 나긋나긋.
유쾌한 기분으로 걷다보니, 금방 상당한 거리를 걸어 버렸다. 잘 가꾸어진 정원이고, 터무니 없게 크진 않은지라 길을 잃을 염려 같은 건 없었지만 역시 조금 불안해졌다. 돌아가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경치를 보려 주변을 두리번 거려 본다.
- 순간 눈을 날카롭게 찌르는 작은 빛.
뭘까? 빛을 반사한 것은 금속의 물체 같았지만, 순식간에 빛은 사라졌다. 빛이 깜빡인 곳은 조금 멀리 떨어진 나무들의 사이.
아직 시간은 많으니, 마지막으로 호기심을 풀기로 하고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풀밭 위로 뭔가가 늘어져 있었다.
- 혹시.
고작 일부분만 보았을 뿐인데도, 저것이 무엇이란 강렬한 확신이 들었다. 말도 안 돼, 그런 일이 있을 리가- 라며 두근대며 조심스레 다가갔다.
마침내 나무 사이로, 나무 뿌리에 고개를 괸채 곤히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 정말로, 츠바키 님이다-.
스미레코의 심장이, 츠바키를 깨울 정도로 소리를 내려는 듯 두근 거렸다.
혹시라도 깨울까 조심스럽게 발을 디뎌, 바로 옆까지 다가갔다.
츠바키는 교복을 입고 있었다. 휴일인데도 교복을 입은 낯익은 사람을 보자, 스미레코는 어쩐지 평일 낮의 학교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방금전 그녀의 시선을 불러왔던 반짝이는 물건은 츠바키의 목 근처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은빛의 십자가, 그 위에 달린 작은 구슬들. 릴리안에서 몇 번 본 물건이었다. 기도할 때 쓰는 로자리오.
이런 걸 가지고 다니다니, 신앙심이 의외로 깊으신 거였을까.
실례인건 알지만, 잠자는 얼굴을 슬쩍 훔쳐 보았다. 이제 제법 따뜻한 햇살을 피해 그림자속에 누워 있었지만, 그림자 속에서도 눈에 띄게 하얀 얼굴. 단정한 이목구비와 합쳐져, 얼굴만 보고 있으면 정원에 장식된 조각상 같았다.
“···유미코, 미안하지만 물을 부탁해.”
갑자기 그 조각의 입술이 움직였다. 물론 정말로 그럴리는 없고, 츠바키님이 갑자기 말을 한 것이다. 깜짝 놀랐지만, 곧 유미코가 근처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낸 스미레코는 그녀가 잠이 덜 깼음을 알아차렸다.
그냥 잠꼬대일까? 아니면 대답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틈에, 츠바키는 대답이 없자 눈을 천천히 떴다.
“···아아, 꼬맹이양, 이었나.”
“펴, 평안하세요.”
꼬맹이양이라는 말을 다른 사람에게 들었다면 분명히 조금이라도 화가 났을텐데. 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져 화가 나지도 않았다.
“학교도 아닌데 그리 정중히 인사를 할 정도로 아가씨인줄은 몰랐는걸···.”
잠이 덜 깬 것인지, 아니면 몸이 안 좋은 것인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중얼 거리고는 몸을 조금 움직여 나무 줄기에 몸을 기댔다.
“물, 가져 올까요?”
“됐어. 벌써 정오가 다 되어 가는 것 같으니 내가 가서 마시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몸이 안 좋은 고양이 마냥 늘어져 있다. 걱정이 되서 떠나지 못하고 있자 다시 입이 열렸다.
“왜 여기로 왔지?”
“- 다른 분들은 어른들을 방문 중이시고, 저는 시간을 때우러···.”
“그건 나도 알아. 난 거기서 도망쳐 자고 거니까.”
설명을 시작하자마자 끼어들어 막혔다. 그러고는 다시 대답을 기다린다는 듯이, 입을 다물고 침묵한다.
여기라니, 뭘까. 곧 한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아마도 이 답이 틀림 없을 것이다.
“아버지와 오빠가, 체면을 세우고 싶어서 고등부로 넣었습니다.”
“후회나 반대는 하지 않아?”
눈을 감은 채로 입술만 움직이고 있으니, 조각상이나 시체와 이야기 하고 있는 기분이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왔지? 어른이 되고 싶었나?”
“아니요. 반대는 되었었지만··· 그다지 상관없다, 란 기분이었습니다.”
“지금은?”
왜 이런 걸 물어보시는 걸까. 그저 잠이 덜깨서, 아무말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는 걸까. 그런 의미없는 질문이라면, 고민하고 대답하는 자신이 바보 같아 보일 것 같아 생각하기 싫었다.
하지만 눈을 감고 나무에 기댄 츠바키의 모습은, 꼭 학교에 있는 마리아 상 같아서. 해본 적은 없었지만, 고해 성사를 하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 지금까지 누구도, 이런 무례하기까지 할 정도로 직접적인 질문을 하고, 이렇게 무감각하게 들어 주지 않았다. 단순히 예의가 없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 그렇게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대답했다. 짧지만 진심인 대답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중학교를 정상적으로 다녔다면, 당신은 졸업해 버렸을 테니까요. 라는 말이 떠올라 저렇게 말했다. - 무슨, 이제 겨우 두 번 말을 나눈 사람을. 말하기 부끄럽기에 앞서 스스로도 확신할 수가 없어 차마 이유까지 입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다행이네.”
하지만 츠바키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저 다행이다, 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신기하네. 요즘은 자다 일어나면 기분이 안 좋아 지는데. ···꼬맹이양이 옆에 있어서인가, 실로 오랜만에, 개운히 일어난 느낌이야.”
다시 눈을 감는다. 이번엔 졸려서가 아니라, 공기를 느끼고 온기를 즐기려는 듯한 동작이었다. 스미레코는 그 동작을 홀린 듯 보고 있었다.
갑자기 안뜰이 조금 소란스러워 졌다. 작은 소리였지만, 죽은 듯이 조용하던 둘의 주변에서는 충분히 들릴 정도의 소리였다. 비록 나무와 건물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친숙한 목소리들이 들리는 것으로는 아무래도 산백합회의 사람들이 돌아온 듯 했다. 스미레코는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츠바키는 움직이지 않았다.
“저-.”
“먼저 돌아가도 돼.”
“···예.”
말하고 싶었던 건, 같이 가지 않으시겠냐는 거였지만.
어차피 오늘은 계속 같이 있을 거니까. 스미레코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켜 모이기로 한 장소로 향했다. 반쯤 왔을때, 종종걸음으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목에서 친 머리카락과 안경 뒤로 엿보이는 날카로운 눈매. 유미코였다.
“평안하세요, 스미레코양. 지금 모이고 있습니다. 어서 가 보세요.”
“평안하세요, 유미코님. 예, 감사합니다.”
“전 츠바키님을 모시러.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예, 라고 대답하면서도 놀랐다. 유미코는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물이 찰랑이는 잔을 들고 있었다. 설령 츠바키님으로부터 이쪽에 숨어서 자겠다는 말은 아까 이 저택에 왔을때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목이 마르다는 것은 어떻게 알아 차렸을까.
물을 흘리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걸어가는 유미코의 뒷모습을 살짝 훔쳐보아 본다. 유미코님은, 주변을 두리번 거리고 있었다. 곧 스미레코가 걸어온 방향을 잠시 보더니, 그쪽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츠바키님이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알 수 있었다. 유미코님은 츠바키님이 어디에 있는지 들은 것이 없을 것이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모습에, 미묘한 긴장감과 기대감이 서린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걸어가는 발걸음에 신념이 있다. 그 사람의 행동을, 그 사람의 취향을 알고 있다는 듯한.
그 뒷모습을, 조금 분함과 질투, 동경이 섞인 시선으로 보았다.
스미레코가 산백합회 사람들과 합류하고 조금 후, 츠바키를 데리고 유미코가 돌아오자 일행은 안쪽의 연습실에 자리를 잡고 앉었다.
어제 스미레코가 연습했던, 가족의 연습실과는 비교할 수 없게 컸고 무대도 꽤 본격적이었다. 아무래도 실제 공연을 하기도 하는 장소인 듯 했다. 무대도 준비되어 있으니 실제 처럼 연습하기에는 더없이 좋다.
히나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리아제 당일에는 교복 위에 기모노 겉옷 만을 걸쳐 흉내만 낼 생각이니, 연습인 오늘이라고 특별히 의상을 갖추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옆에 놓아둔 세 개의 바구니를 손으로 살짝 어루 만졌다. 안에는 각각 빨강, 파랑, 노랑의 색종이가 들어 있었다.
“-마리아제 당일에는 색종이가 아닌 꽃을 뿌릴까 하는 변덕이 지금 막 들었는데요. 제멋대로라고 생각하지만, 의견을 들어 보고 싶습니다.”
“난 찬성이에요. 색종이로야 아무래도 풍류가 없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모두가 찬성했다. 히나타는 고개를 끄덕이자 아키하가 좋은 생각이 났다며 끼어 들었다.
“아예, 교복 위에 걸칠 기모노도 꽃 무늬로 할까?”
“- 글쎄. 그건 힘들걸. 이제 겨우 닷새가 남았는데, 빨강, 파랑, 노랑의 꽃이 어울리게 그려진 세벌의 기모노를 구할 시간으론 부족하다고 생각해. 좋은 의견이지만, 기각.”
“음··· 그러면 하다 못해 각자 꽃을 들거나 옷에 꽃고 춤추는건?”
“그 것 좋네요.”
오늘 모인 것은 연습뿐만이 아니라 이런 논의도 하기 위함인지, 아무도 ‘그만하고 연습하자’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럼 무슨 꽃을?”
“당연히, 장미! 백합도 좋지만, 아무래도 백합은 색이 다채롭지 못하니까 조금 모자란 느낌이야.”
확실히 화려하고, 색깔이 다채로운 꽃이라면 꽃의 여왕인 장미를 따라올 만한 것이 있을리 없었다. 하지만 장미엔 문제가 하나 있는데.
“하지만 장미에는 파란색은 없습니다.”
“- 그렇네. 물감이라도 칠할까?”
“그럴 필요가 있나? 장미의 가장 유명한 세가지 색을 쓰면 되잖아. 빨강, 하양, 노랑.”
그럼 되겠네요. 라며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 유명한 세가지 색이라면 황장미 보다야 흑장미를 꼽겠지만, 카톨릭 계열의 학원에 다니다 보니 아무래도 흰색이 들어간 것이 좋고. 경사스러운 환영식이니 검은색은 조금 피하게 되는 건 다들 공통인 듯 했다. 흑장미 보다는 황장미쪽이 더 예쁠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색깔 분담은 어떻게 할까요?”
“회장이 제일 메인인 빨간색을, 부회장이 다음으로 유명한 백장미를, 내가 노랑장미를 맡지.”
“난 찬성. 츠바키는?”
“난 할미꽃이라도 상관 없어.”
“그럼 결정.”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비로서 본격적인 연습이 시작되었다.
스미레코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일단 구석진 곳으로 걸어 가려 했다. 막 몸을 일으키려는 그때 갑작스럽게 유미코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왠지 모를 박력에 조금 위축되어 돌아 보았다.
“스미레코양, 나비역의 춤을 부탁해요.”
어제 스즈란님께 춤을 배우며 배운 바로는, 정식으로 부를때는 중심에서 둥글게 춤을 추는 주연을 <꽃>, 그 꽃을 보조하며 춤추는 조연이 <나비>. 즉 조역의 춤을 부탁한다는 말.
“예? 하지만 전, 유사시의 대역이니까···”
“눈 가리고 아웅은 그만 해요. 제 대역이잖아요?”
유미코의 입가에, 조금 자조적인 느낌의 미소가 걸렸다.
“사이코양, 당신의 짓이죠? 스미레코양을 끌어 들인 것.”
“···예.”
사이코는 부정하지 않고 천천히 유미코를 바라 보았다. 유미코도 그 시선을 바라본다. 다른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며 방관했다.
유미코가 스미레코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갑작스러운, 그리고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유미코는 순식간에 이 쟁쟁한 사람들 한가운데서도 완벽하게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그 점을 깨닫고 자신도 공격받는 입장임에도 역시나 이 사람도, 라며 감탄했다. 하지만 그런 느낌은 정말 잠시. 유미코님의 눈이 가늘어 지자, 그야말로 한자루의 칼이 자신을 노려보는 것 같았다. 귀신의 앞에 서면 이런 느낌일까.
“제가 봄에 약하다는 것 때문에 한 배려 겠지요. - 마음 씀씀이는 고맙고, 다른 면에서도 좋은 생각이지만 정작 제 생각은 안 해 주시는군요. 그런 식으로 본인도 모르게 뒤에서 신경 써주는 것, 신경에 거슬립니다.”
···말이 조금 심하지 않은 걸까. 그래도 자신을 배려해서 친구가 한 악의 없는 일일뿐인데. 혹시라도 유미코님이 춤을 출 수 있다면 미안하지만 스미레코양은 추지 못하는 역이란 걸 명심해 주세요, 라고 말하던 사이코님이 떠올라 스미레코는 조금 화가 났다. 사이코님이 얼마나 조심스럽게 배려해 줬는데, 유미코님은 그걸 모르고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얼굴은 - 웃고 있었다?
“어머나. 유미코양이 고맙다고 하고 있어요.”
“좋겠다, 사이코양. 나는 언제나 유미코에게 감사 들어 보나.”
사람들은 유미코의 따지는 말에는 신경쓰지 않고, 가운데의 ‘고맙지만’이란 말만 쏙 빼서 편한대로 떠들고 있었다. 스미레코가 어이가 없어 멍하니 서 있자, 심지어 츠바키마저 실실 웃으며 유미코를 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 정작 유미코 본인도, 조금 상기된 얼굴로 서 있을뿐 반론을 하지 않고 있다. 그 얼굴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어쩐지 부끄러워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스미레코양, 어쨌건 나비 역은 정식으로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하지만, 유미코님이 몸이 좋으시다면-.”
“아니요. 그런 확률을 이유로 스미레코양의 시간을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사실 더 전에 이야기 했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이제 닷새밖에 안남아서야 지금이라도 확실히 해 두는게 좋지요. 전 마리아제 당일에는 춤이 아니라 반주로 샤미센(三味線)을 타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나비 역은 스미레코 양이. 라는 논리로 계속 일관하는 유미코였지만, 스미레코로서는 받아 들이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뜻은 알겠지만, 아무래도 이래서야 자신이 대타가 되니 유미코님이 알아서 빠지겠다는 모습 같지 않은가.
계속 스미레코가 난처해 하며 머뭇거리자 유미코가 한숨을 내쉬었다.
“스미레코양, 이쪽이 제게도 좋습니다.”
“예?”
빈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때 스미레코의 시야 한구석에서 히나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조심스레 둘러보니 모두가 유미코의 말에 공감한다는 얼굴이었다.
- 아.
그렇구나. 준비했다는 듯이 대역이 선다면, 행사 하나 제대로 못 치루는 그녀의 건강을 이유로 학생회의 일을 할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으니. 차라리 처음부터 반주 전담으로 나서는 것이 보기도 좋다는 거구나.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보잘것 없는 솜씨지만, 샤미센은 어릴때부터 만져 조금 익숙합니다. 스미레코양이라면, 폐가 약한 저보다 분명 멋지게 출 수 있을 겁니다.”
쌀쌀맞은 표정으로 저런 말을 한다. 지나가던 사람이 들으면 엄청나게 비꼬는 말로 여기겠지만, 이제 스미레코는 어쩐지 그 말속에서 온기를 찾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차리고, 일어나 목이 마를 걸 생각해 물을 준비하는 사람. 실은 따뜻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스미레코는 잠시 생각했다.
잡 생각을 오래 할 수는 없었다.
이미 꽃 역의 세 사람이, 무대의 중앙에 원을 그리며 서고 있다. 유미코씨가 조금 떨어진 곳에 편히 자리를 잡고, 준비해 온 듯한 샤미센을 조율하고 있었다.
“자, 받아요.”
스즈란이 푸른색 색종이가 든 바구니를 건네 준다. 그걸 받고, 머뭇거리는 걸음으로 츠바키님의 곁으로 다가 섰다. 히나타님의 옆에 사이코님, 아키하님의 옆에 스즈란님이 선다.
츠바키가 이 여섯명중 가장 키가 크고, 스미레코가 가장 작다. 둘이 나란히 서 있자 다른 두 쌍에 비해 너무 튀어 보이는 느낌이 들어 괜시리 안절부절해 졌다.
“준비들 되었나요?”
“예.”
“그럼 제가 시작하겠습니다.”
고전 무용의 전승자라는 스즈란님은 당연하다 치더라도, 다른 사람들도 이 화륜의 춤 정도는 다들 춰 본 일이 있거나 문제도 안된 다는 듯이 태연하다. 긴장하고 있는 것은 자신 뿐인가. 실수하면 어떻게 하지. 유미코 님께도 실례가 된다. 실수할 수는 없다. 내가 실수하면, 내가 보조해 드리는 츠바키 님께도-
“- 긴장하지 말고, 잘 부탁해.”
갑작스럽게 들려온 속삭임.
놀라 고개를 들자, 슬쩍 웃고 있는 츠바키의 얼굴이 자신을 내려 보고 있었다.
- 이렇게, 가까이에 서는 거구나.
단순한 부탁의 말 임에도, 조용히 자신만을 내려다 보는 시선이, 참을 수 없이 기뻤다. 춤에 대한 긴장 따위는 이 시선을 받는 긴장에 비하면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시작합니다.”
샤미센의 현이 울리고, 동시에 주역의 "꽃" 세명이 무대를 발로 쿵. 하고 한번 구른다.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춤의 시작이다. 츠바키님의 몸이 매섭게 회전하며 멀어져 간다. 이렇게 하면, 나는 따라가며- 일단 바구니에서 한번 종이를 뿌리고.
빨강, 노랑, 파랑의 종이가 동시에 허공으로 흩날려 졌다. 그 속에서, 세명의 미인이 춤추고 있었다.
- 아름답다. 꽃처럼.
생명수를 찾아 꽃을 향하는 나비처럼, 거기에 자연스레 끌려 춤추며 따라간다.
긴장을 할 틈도 없다. 그저, 눈앞에서 춤추는 꽃을 따라 가는 것만으로도. 몸도 마음도 모두 그것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다시 색종이를 집어 뿌린다.
아직 자신의 실력에 자신은 없었지만, 마리아제의 일은 더 이상 걱정되지 않았다.
이렇게 아름답다니.
분명, 모두가 감탄할 것이라 생각하자. 그토록 긴장되었던 마리아제를 이제는 흥분해 기다리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