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개(滿開 : 활짝 피다)
태양은 아무런 소식도 물어다 주지 않으며, 언제나처럼 계속해서 뜨고 지기만을 반복했다.
릴리안 학원 내 전체가, 학생회 부회장의 입원으로 뜨겁게 달아 올랐었지만 그 불길을 유지할 수 있을 만한 내용의 소문도 없었다. 춤을 너무 격렬하게 추었다, 지병이 있었다는 현실적이고 그럴듯한 소문부터 시작해서는. 허무맹랑한 것으로는 춤에 너무 몰입해 현실로 돌아오지 못했다, 병을 가장해 사랑의 도피 중이다- 같은 소설에 가까운 소문까지 있었다.
정보에 대한 갈증을 풀기 가장 좋은 샘물은, 당연히 츠바키가 속해 있고 그녀가 쓰러지는 것을 지켜보았던 산백합회. 하지만 산백합회 사람들이야 말로, 사실은 가장 그 정보에 대한 갈증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힘이 빠져 있는 것이 보인다.
언제나 웃는 얼굴이던 히나타님의 미소도, 눈에 띄게 기운이 없고. 담담한 표정의 사이코님도 애수와 걱정이 어린 눈동자를 하고 있다. 가장 변한 사람은 유미코님이었다. 츠바키님이 그녀의 삶의 활력을 가져가 버린 듯,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 졌고 신경질 적이 되었다.
이런 건 싫어.
스미레코는 진저리가 났지만, 그렇다고 산백합회에서 도망가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 더워지기 시작한 햇살이, 짜증스럽다. 토요일의 방과 후. 불과 지난 주까지만 해도 휴일을 반기며 즐겁게 집으로 돌아갈 날이었지만, 스미레코의 발걸음은 거칠기만 했다.
“스미레코양.”
“아··· 유미코님. 평안하세요.”
“···별로···지만.”
너무 기운 없는 목소리라, 일순간 누구인지 알아 듣지 못했다. 돌아 보고서야 조금 파리한 얼굴의 유미코가 서 있는 것을 보고 인사를 했다.
“무슨 일이에요, 그렇게 거칠게 걷고.”
“···아니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차마, 방금 전 어떤 무책임한 사람들이 ‘츠바키님은 벌써 돌아가신게 아닐까-’라고 근거도 없이 떠드는 걸 듣고, 화를 내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라고 중얼거리기만 하고는, 유미코는 스미레코의 곁에서 걸었다.
조금 불편한 침묵이 흐른다. 오늘 산백합회의 모임은 있지만, 긴급한 용무가 있는 건 아니었다. 거기로 가야 하나. 잠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나는 기숙사로 돌아가야 하니까, 이쪽이에요.”
“예. 그럼 저는 여기서-.”
잠깐.
문득 한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유미코님!”
“응?”
“츠바키님의 방, 아시죠?”
“물론 알지만, 이제 돌아 오셨을리는···.”
스미레코의 박력에 눌려서인지, 아니면 최근 들어 정신이 나간 상태여서인지. 유미코는 어물거리며 누구라도 알만한 말만을 했다. 고개를 크게 휘저어 부정하고, 다시 외친다.
“아니요, 우리가 몰래 방에 들어가는 거에요.”
“-뭐? 그런 몰상식한, 아니 그건 범죄에요!”
“하지만 비상 사태잖아요! 뭔가 츠바키님에 대해 추측할 수 있을만한 증거가 있을지도 몰라요!”
“그, 그건 그렇겠지만···.”
대번에 눈이 흔들린다. 정통으로 먹혀 들어간 스미레코의 공격이, 가슴속에서 양심과 치열한 대결을 벌이고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안하며, 누군가가 모든걸 알려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기는 싫어요!”
“- 그건, 저도지만-. 역시 멋대로 방에 침입하는 것은 좀···.”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의 일이라도, 평소에 엄격하게 지켜온 규칙이라던가 생활 태도가 장애인 모양이었다. 스미레코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츠바키님의 방까지만 안내해 주세요. 나머지 잘못은 제 독단으로 하겠습니다.”
“그런 궤변이 통할 줄 알아요?”
아무리 상태가 안좋아도 과연 뿌리까지 무너진건 아닌가. 안되는 걸까, 라고 스미레코가 막 생각했을때 유미코의 말이 이어졌다.
“할 수 없지요.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예!”
아직 뭔가 수확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유미코님도 말은 안했지만 마찬가지였는지, 은연중에 활력이 돌아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조금 빠른 걸음으로, 기숙사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예, 학생회의 용무입니다.”
딱부러지게 말하는 유미코의 모습은 이것이야 말로 정진정명 모범생, 학생의 사도. 란 느낌이었다.
“용무라니··· 도대체 다른 사람의 방에 무슨 용무가···.”
그 박력에 눌려서, 두배 이상 나이차가 남에도 불구하고 기숙사의 관리인 직을 맡고 있는 시스터는 허둥대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이쪽에는 현재 고등부 1, 2학년의 성적 톱을 달리는 두 사람이 짠 각본이 있다. 유미코는 차갑게 말을 잇는다.
“츠바키님이 갑작스럽게 쓰러지셔서, 그 분께서 개인적으로 처리하던 서식들과 자료가 아직 방에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나 해서 학생회실을 수색했지만 도저히 발견하지 못해서 츠바키님이 방과 후 편한 기숙사의 방에서 개인적으로 처리하려 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대해 반론의 여지가 있을리 없었다. 거기에 저쪽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을지는 뻔하므로 추가로 말을 붙인다.
“저는 2학년의 유미코, 1학년의 스미레코양입니다. 둘 다 츠바키님과는 친한 사이인 만큼 설령 츠바키님이 아셔도 문제가 될 건 없습니다. 무엇보다 걱정이 되신다면, 함께 있으셔도 상관 없습니다.”
해석. 절도 행위를 할 사람들로 보이지는 않지요? 자랑은 아니지만 13살의 천재 꼬마가 낀 도둑 일당은 너무 눈에 띄는 특징이다. 수녀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맙게도 다녀오는 길에 열쇠를 반납하라고만 했다. 보았다면 수색에 조금은 보였을 텐데.
두 사람은 열쇠를 받고 츠바키의 방으로 향했다. 츠바키의 방은 독실이 있는 쪽이었다. 긴장감과 흥분때문에, 말 없이 복도를 통과해 문에 열쇠를 밀어 넣었다. 달칵.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 몇일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말하듯 조금 차갑고 먼지 냄새가 나는 공기가 둘을 맞이했다.
“스미레코양은 책상을 부탁해요.”
“예.”
유미코는 곧장 침대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한다. 스미레코는 책상과 그 옆의 책장을 바라 보았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교과서와 사전, 노트들. 자신의 책상을 보는 것 같았다.
잡념을 떨치고, 일단 책상 서랍을 열려 했다. 하지만- 잠겨 있다. 허리를 숙여 보자 작은 열쇠구멍이 보인다. 이건 열쇠가 근처에 있나 둘러 보았지만 보이지 않아, 일단 이건 포기한다. 개인 사물을 뒤적이고, 실례를 무릅쓰고 일기가 있는지 찾아 본다. 하지만 아무것도 ‘이거다’싶은건 발견되지 않았다.
“뭐 좀 찾았나요?”
“아니요···. 유미코님은?”
“저도 그다지···.”
옷장과 침대등을 찾아보고 돌아온 유미코는 정작 소득이 없자 실망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역시 이렇게 쉽게는 발견 되지 않는 걸까. 라고 생각했지만 문득 미련이 솟아 말했다.
“혹시 작은 열쇠는 못 찾으셨나요?”
“장난감 같은 열쇠라면 하나 찾았는데요?”
“그거, 줘 보세요!”
유미코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침대가로 걸어가 머리맡을 뒤적이더니, 작은 열쇠를 가져왔다. 그걸 재빨리 받아 들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책상 서랍에 밀어 넣었다. 틀림 없을 거야. 실내에 열쇠를 따로 숨겨둘 정도로, 중요한 물건이 들어 있을 거야. 유미코도 상황을 알아 차렸는지 바싹 다가와 얼굴을 들이 밀었다. 찰칵. 환호성이 나오려는걸 참고 서랍을 열었다. 열린 서랍 안에는 -
작은 유리병들이 굴러나온다.
“뭐···.”
하나를 잡아 올렸다. 안에서 커다란 하얀 구체가 가득 들어 있다. 뚜껑이 개봉되어 있는 것을 하나 열어, 손바닥 위에 굴려보았다.
뭔가 과당이 코팅된 것 같았다. 정황으로 보건데, 아무래도 이건 약.
유리병에는 레이블이 붙어 있었던 듯 하지만, 전부 뜯겨져 나가 있었다. 그나마 많이 남아 있는 레이블에도 짤막한 이름 뿐이었다. 하긴 레이블이 남아 있었더라도, 무슨 약인지 여고생들이 알아보기란 요원한 일이겠지만.
“···하나, 가지고 갈까요.”
“그렇게 하죠. 그나마 단서라 할만한 건 이것 뿐인 듯 하니.”
두 사람은 병을 품안에 갈무리 하고, 방을 나왔다.
열쇠를 돌려주고는 두 사람은 일단 학생회실로 향했다. 혹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의논을 하기 위해.
학생회실에 들어간 두 사람은 조금 놀랐다. 누군가 있길 바라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남아 있을 줄은 생각 못했다. 남아 있던 사람은 히나타와 아키하, 사이코에 스즈란. 털어 놓고 싶은 사람은 전부 남아 있었다.
“어라, 두 사람도···.”
방금 전까지 차를 마시며 한숨을 섞고 있었던 듯. 히나타가 살짝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녀가 권하는 자리나 사이코가 권하는 찻잔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히나타의 앞으로 달려가 약병을 내밀었다.
“뭐지요, 이건?”
“···츠바키님의 방에서 찾아 내었습니다.”
“잠깐, 두 사람.”
“잘못인건 잘 알아요. 하지만 가만히 있는건 더 잘못이라고 생각 해서 제가 유미코님을 설득했습니다.”
스미레코가 한발짝 앞서며 말하자 히나타는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 쉬었다.
“츠바키가 알면 정말로 화 낼겁니다.”
“다시 한번 혼나는게 소원입니다.”
히나타는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이고 병을 집어 들었다.
“저는 햇병아리라 불러주기도 어려운 풋내기 한의사고, 서양 의학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어요.”
그러니 기대는 하지 마세요. 라면서도 더 없이 진지한 눈으로 병을 바라보고, 레이블 앞의 흰 종이를 뜯어 나갔다.
흰 종이는 의외로 쉽게 뜯어졌다. 견고하게 붙였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팔랑이며 떨어진, 레이블을 가리고 있던 흰 종이의 안쪽에 작은 점들이 있었다. 스미레코가 잽싸게 받아 들었다. 글자였다.
“···<멋대로 보면 못써>.”
-이게 무슨 장난인가. 모두 어이가 없는 얼굴이 되었지만, 히나타님만은 딱딱하게 얼굴이 굳어 있었다. 흰 종이가 떨어지면서 나온 병의 레이블을, 다른 사람들이 흰 종이에 신경 쓰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채 정신 없이 읽고 있었다. 시간으로 보아 약의 이름뿐만이 아니라 꽤나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는 듯하다.
레이블을 다 읽기 충분한 시간이 흘렀지만, 히나타님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작게 어깨가 흔들리고 있다. 그리고-
“이-- 바보 년---!!”
있는 힘껏 병을, 벽을 향해 버렸다.
깨어져 박살나는 유리병과, 사방으로 흩어지는 알약.
하지만 그 충격보다도, 그 행위를 한 것이 히나타님이라는 사실 자체에 모두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무슨 약이야.”
우리에게도 알 권리가 있어. 라는 의지가 확고하게, 아키하가 말했다.
“하이드레아!”
히나타는 비웃는 듯이 일그러진, 떨리는 입술로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외쳤다.
“무슨 약이 냐니까!”
“하이드레아, 경구 투여 항암제. 백혈구 감소제!!”
- 경구 투여라면, 입으로 먹는 다는 거고. 항암제? 하지만 백혈구라면, 피 속에서 병균을 막는 좋은 것 아닌가. 그럼 저건, 독약? 츠바키님은 왜 독약을 가지고 있던 거야? 독약을 먹은 거야?
“독약인건가요···?”
“아니에요.”
사이코가 떨리는 목소리로 반문하자 히나타는 차갑게 잘라 말했다. 독약이 아니란 걸 알았지만, 아무도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차가운 어투가, 그것이 더 질이 나쁜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 백혈병의 치료제···, 아니, 완화제야.”
“백혈···병.”
아. 그래, 그래서 얼굴이 하앴구나.
라고 우습지도 않은 감상을 말 할 리가 없잖아! 무슨 소리야, 그게!
“말도 안 돼!”
아키하가 비명에 가깝게,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백혈병이면, 죽을 정도의 중병이잖아? 그런데 학교를 다닐 리가, 아니, 약만 먹어도 되는 거 아냐? 그리고 학교 생활을 할 수 있는 거야?”
횡설수설에 가까운 의문에 히나타는 하나씩, 차갑게 대답했다. 그 비정상적인 이성과 차가움이 오히려 그녀의 분노와 실망을, 두렵도록 보여주고 있었다.
“백혈병, 다시 말해 혈액암에는 급성과 만성이 있어요. 급성은 발병 몇주만에 생명이 위험해 지니, 정황으로 보건데 츠바키가 걸린 것은 수 년씩 잠복기가 있기도 하는 만성. 만성기 상태에서라면, 하이드레아 만을 복용해도 관해상태, 즉 정상적 생활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 상태는 호전되는게 아니라- 단순히 가속기로 넘어가는 걸 막을 뿐이야.”
“···그렇게 말해도 알아 들을 수 없어. 히나타. 부디 진정하고 설명해줘.”
“아아. 간단히 말하면 되는 거지? 만성기 다음이 가속기, 가속기 다음이 급성기야. 아마도 상황으로 보건데, 츠바키는 이미 가속기에 들어섰어. 좀더 간단히 말해줄까?”
눈물이 두 방을, 짓깨문 히나타의 입술 옆으로 흘러 내렸다.
“앞으로··· 아마도, 길면 2년.”
“······.”
무슨 말을 할수 있겠는가. 거짓말, 이라고 한마디만을 중얼 거리고는 유미코는 소파로 쓰러졌다. 사이코는 창백하게 질려 어째서, 왜, 라고 계속 고장난 레코더 마냥 중얼거리고 있다.
스미레코는, 멍한 머리 속에서 한가지를 떠올렸다.
- 아아, 그래서 ‘봄이 끝났다’ 라고 하셨던 건가.
“다시 설명해 줄까? 그 바보, 우릴 속였어. 요즘 개발된 따끈한 신약을 먹어서 몸을 정상처럼 꾸민 채, 고교 생활을 즐긴 거야. 제대로 치료 받지 않고, 즐거운 학창 생활을 즐기고 죽고 싶었나 봐. 그리고-”
“히나타!”
아키하가 덥썩 히나타를 끌어 안았다.
“···됐어, 그만. 진정해···.”
“···못 해, 그 괘씸한 계집애, 얼굴을 한 대, 때리기··· 전 까지··· 진정··· 할 것 같아···.”
흐느끼는 히나타님. 그걸 껴안고 얼러주는, 하지만 얼굴을 히나타님 못지 않게 무섭게 굳어 있는 아키하님. 쓰러져 떨고 있는 유미코님,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는 사이코님.
어째서 일까. 이렇게 차갑게 모두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머리가 맑다.
슬픈데. 가슴이 짓눌리고 있는데. 머리만이 하늘에 뜬 것처럼.
“그럼 찾지요.”
모두가 하나 둘씩, 나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찾아서, 뺨을 때려 드리고, 왜 속였냐고, 왜 말하지 않았냐고 따지죠. 그리고.”
나는 냉정해. 냉정해야 해. 지금 나마저 무너지면, 이대로 우린 흩어져 버릴 테니까.
“그리고, 그러니··· 찾지요. 2년이 지나기 전에. 그래야 남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을 테니까.”
다 말했다. 그러니, 자신의 뺨을 흘러내리는 간지러운 감촉의 눈물은 용서해 주기로 마음 먹었다.
하나씩, 모인 소녀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천천히, 스미레코가 동경했던 빛이 그녀들에게 돌아오고 있다.
여섯명은 총력을 다해 츠바키의 행방을 찾았다.
학교 내에서는 모두에게 동경 받는 산백합회라 불리는 자들이었지만, 울타리를 벗어 나는 순간 그녀들은 조금 좋은 집안의 아가씨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들이 시도하는 일은, 나이와 성별의 벽에 시도하는 족족 벽에 부딫히기 일쑤였다.
조금씩 지쳐갔지만, 일상 속에서도 그녀들은 잊지 않았다. 더 이상 릴리안 학원 내에서도 휴학중인 부학생회장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 나오지 않게 되어도, 계속 알아보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봄이 정말로 가 버리고. 여름이 되고.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 히나타는, 츠바키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
방학이 몇 일 남지 않아 클래스는 들떠 있던 상태였기에 좀더 소란스러워 진 것을 처음엔 눈치채지 못했다. 누군가 불러 돌아보자, 클래스 메이트들의 너머로 사이코님이 조용히 이쪽을 보며 서 있었다.
여전히 감정 표현이 적은 얼굴이었지만, 반짝이는 눈동자와 홍조를 띈 얼굴이 그녀가 몹시 기뻐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이 반년 가까이 그렇게 기뻐하는 사이코의 얼굴을 본 적이 없던 스미레코는, 즉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쑤셔 넣듯이 짐을 챙긴 그녀는 가방을 들고 사이코에게 달려 갔다.
“찾은 건가요?”
“편지가 왔어요.”
동시에 둘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학생회실로 향했다. 지나가던 길의 창문 너머로, 방학 중에 공사에 들어갈 학생회 건물에 쓸 재료가 쌓여 있는 것이 보인다.
“편지··· 쓰실 수는 있는 거군요.”
길어야 2년, 이라는 말을 들으니 20살까지도 살지 못하는 구나. 라고 막연히 생각했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암으로 반년도 못산다는 환자도 그 때까지는 별로 자각을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의외로 몸이 튼튼한 걸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속아 넘어 갔던 것이겠지만. 그 생각을 하자 아직도 가슴이 조금 아파왔다.
학생회실에 들어서자 이제 반년이 흘러 완전히 친숙해진 얼굴들이 보였다. 이미 소식을 다들 듣고 모였는지, 기대에 찬 얼굴로 종이를 든 히나타를 중심으로 모여 앉아 있었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밝은 얼굴인 것이 도대체 얼마만인가. 스미레코는 사실 문제가 해결된 것은 전혀 없었지만, 촉촉이 가슴을 적셔오는 안도감과 기쁨에 따라 미소지었다.
“스미레코양을 불러 왔습니다.”
“유미코 양은?”
“부르지 않았습니다.”
에? 모두가 깜짝 놀라 사이코를 돌아 보았다.
“실례지만 그 편지를 가장 먼저 읽어 본 것은 저였습니다. 그래서 제 독단으로 유미코양께는 이 일을 비밀로 했습니다.”
“왜지요?”
츠바키님을 누구보다 좋아하고 숭배했던 분인데. 사이코를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말이었지만, 모두는 사이코가 그렇게 이유없는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편지를 읽어 보시면 아실 겁니다.”
사이코의 눈을 잠시 바라 본 히나타는, 시선을 편지로 떨궜다. 바스락. 곧 학생회실 내에 낭랑한 목소리로 낭독하는 소리가 울렸다.
“- 분노하고 실망하고 있을, 나의 친구와 후배들에게.
지금쯤이면 이미 나에 대해 상당히 많은걸 추측해 냈거나, 아니면 내 아버지의 방해에 부딫혀 아무것도 알아 내지 못했거나 둘중의 하나겠지.
어느 되었건.
편지란 멋진 물건이라고 생각하지만, 난 목소리와 얼굴 쪽이 더 좋아.
너희들도, 아마 내가 모든 것을 편지에 적어 보낸다 해도 그대로 납득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이 편지가 도착할 때쯤이면 방학이 육박해 있겠지.
찾아와 준다면, 죽기 전에 고마워 해 줄게. 요양원에서 조금 떨어진 별관을 전세 내다시피 해 지내고 있으니, 열명 정도는 방학 내내 숙박하면서도 지내게 해 줄 수 있어. -.”
거기까지 읽고 히나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사이코를 바라 보았다. 사이코는 그 시선을 받아 고개를 슬프게 끄덕였다.
“- 발송지는, 야마나시 현, 미노부 인근에 위치한··· 결핵 요양원.”
“결핵? 백혈병이라고 했잖아!”
“그랬지. 그렇잖아도 추신에, ‘결핵에 걸린건 아니고 이곳에서 요양중.’ 이라고 친절하게 적혀 있어.”
아키하는 이해가 안간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백혈병이면··· 암이잖아? 결핵 요양원에서 뭔가 치료를 받아도 되는 거야?”
“될리 없지. 결핵 요양원은 그저 공기가 좋은 곳에 세워질 뿐이야. 아마-. 츠바키가 결핵에도 걸린게 아니라면, 제대로 백혈병의 치료를 받기를 거부하고 있는 걸 거야. 제대로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을 정도로 제대로 마음을 먹고 있었다면 이런 약을 숨기고 먹어가며 학교를 무리해 다녔을리 없지.”
이미 짐작했다는 일인 듯, 히나타의 잘라 말하는 태도에는 거침이 없었다.
“···필경, 불치란 판정을 받았을거야.”
오늘날에는 거의 모든 세균이 면역이 생겨버려 쓸모없다는, 일반적인 항생제인 페니실린이 발명된 것이 불과 1929년. 그것이 임상실험으로 효과가 있다고 입증된 것은 41년의 일로, 당시로는 겨우 10년을 좀 넘긴 일. 그 시대의 의학으로는 혈액암의 치료는 절망적이었다.
“그렇다고, 도망쳤다는 거야? 츠바키 답지 않아!”
“츠바키 다운게 뭔데?”
아키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히나타의 눈을 보고 숨을 멈췄다. 애수를 띤 웃음 속에, 헤아리기 두려울 정도의 슬픔과 한탄이 배어 있었다.
“···나는, 모르겠어. 이렇게까지 배신을 당하고 나니.”
“······.”
“어쨌건, 사이코양.”
“예.”
“폐가 약한 유미코양이, 결핵 요양원에 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건가요?”
“예. 초등부 때부터 단 일년도 빠짐없이 감기가 유행하면 유미코는 걸렸습니다. 아무리 요양원이라지만, 저는 유미코에게 이 소식을 전할 수 없습니다.”
전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따라갈 테니까.
“원망을 들을 거에요.”
“원망 정도로 끝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두 사람이나, 그런 중병에 걸리게는, 제가··· 견딜 수 없습니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모두는 같은 마음이겠지. 이 모임의 일원이 된지 이제 반년밖에 되지 않은 스미레코 였지만, 한가지 예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여기에 똑같은 방식으로 한 자리가 더 빠진다면 이 모임은- 끝이다. 산산히 부서질 것이다.
이미 산백합회라 칭하던 다도회는, 츠바키가 입원하고 나서부터 깨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비상으로 인해 평소의 화기애애하던 모습을 잃고 나서, 츠바키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이 자리의 여섯명을 제외한 산백합회의 다른 사람들은 조금씩 소외되기 시작했다. 돌이켜 보면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공부와 공무, 츠바키의 수색까지 하며 그 사람들까지 신경써줄 여유는 아무에게도 없었다.
“츠바키님이 결핵 요양원에 계신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츠바키님이 결핵에 걸리신 것이 아니라면 그 분을 다른 곳에서 유미코와 만나게 하면 됩니다. 히나타님의 예측 대로라면, 적어도 한두달에 쓰러지시지는 않으실테니···. 잘만하면, 방학이 끝나는 대로 유미코와 츠바키님의 만남을 주선할 수도 있습니다.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겁니다.”
확실히-. 발상을 강제로 뒤집어 생각하면, 아직 2학년인 유미코가 졸업하기 전까지 츠바키는 죽지 않는다고 보아도 좋을 시간이 있다. 굳이 지금 확률은 작지만 치명적인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었다.
히나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산백합회는 방학이 시작되는 대로 될 수 있는한 빠르게, 이 원수같은 부회장을 방문합니다. 아마 세리자와 가문이 츠바키를 버린게 아닌 이상, 숙박 시설 정도는 충분할 정도의 시설에서 지내고 있을테니 숙박도 가능하리라 봅니다. 마음 같아서는 방학이 되는대로 가고 싶지만 계속해서 사람이 방문해서야 츠바키의 건강에도 오히려 나쁠테니 참고, 각자 시간이 되는 날을 말해 주세요.”
각자 다투어 날자를 맞추어 보았다. 가족 여행이 있다는 스즈란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방학 때도 무슨 일이 있으면 빠지겠다고 미리 못 박아 두었었다니 문제는 없었다. 허술해 보이는 사람이지만 중요할 때는 빈틈이 없는 것 같아 기뻤다.
맞추어 보자, 6개의 막대기는 방학 중간쯤에, 무려 일주일이 넘는 긴 줄 하나를 겹치는 부분으로 남겨놓고 있었다.
“- 정리해보면, 최고로 긴 기간은 총 7박 8일까지도 가능한 거네요. 조금 방학이 지난 후라 아쉽지만 방학 초에는 고작 2박 3일 정도가 한계니 너무 짧아요. 이 기간 전부로 할까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아무도 이의는 없었다. - 말은 안했지만, 이 만남이 최후의 것이 될 수도 있으니까. 하루라도 오래 본다면 좋을 것이다.
“탈 것은···. 요양원은 보통 길에서 한참 들어가야 할테니 자동차가 좋을 듯 합니다. 저희 집에서 차를 한대 준비하겠습니다. 총 인원이 다섯명이니 한대론 모자랄테니, 한 대쯤은 더 필요할 것 같은데요.”
아키하와 사이코가 곧 자기가 지원할 수 있을 거라고 손을 들었다. 일단 유비무환이니 세대로 가기로 했다.
“···가장 힘든 것은, 유미코에게 비밀을 지키는 겁니다.”
“절대 비밀 엄수해 주세요. 예, 스즈란님?”
“와아, 이 꼬맹이양이 나를 도발했어!”
실로 오랜만에 밝은 웃음소리가 퍼진다. 종업식 전까지 계속 이런 분위기여선 유미코님이 눈치를 채고 말거라 생각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반년동안 헤메이던 저축했던 웃음을 조금 찾은 것 같아, 막을 수가 없었다. 이제 이 웃음에 이자가 붙어 돌아온다면 바랄 것이 없을 텐데.
결론적으로 말해, 속이기는 성공했다. 사실 감추고 있는 비밀이 워낙 큰 것이었는 지라, 스스로 당찬 편이라고 생각하는 스미레코도 유미코가 정색을 하고 덤벼온다면 완벽하게 둘러댈 자신은 없었다. 유미코가 사실을 알아 차리지 못한 것은, 그들의 위장이라기 보다는 스스로 넋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될 듯 했다.
유미코는 무너지고 있었다. 극적으로, 화려하게 무너지지 않았지만 바람에 삭아가듯이 천천히 풍화되고 있었다. 그녀의 성적은 여전히 최고였고, 일 처리는 확실했다. 하지만 점점 변해가고 있었다. - 자신에게 모두가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을리 없었다. 몇 번이고, ‘결핵 요양원에 가다고 해서 결핵에 걸리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생각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결핵에 안걸린다는 보장도 없으니 역시 무리다. 역시 최선의 방법은, 츠바키와 만나 츠바키를 바깥으로 데려 오는 것.
괴로움과 흥분을 품고 시간은 흘러 갔다. 더운 날의 태양은 길었지만, 확실히 넘어간다-. 종업식을 하고, 방학이 되고. 시간을 보내고, 만남의 날이 된다.
몇 일 전부터 흥분해 있던 탓에, 당일에는 오히려 차가운 기분으로 있을 수 있었다. 산백합회의 합숙이라고만 알고 있는 부모님과 오빠들은 스미레코에게 아무런 의심의 기색도 없이 밝게 웃으며 차로 마중을 해 주었다.
- 결핵 요양원으로, 중환자의 문병을 가는 거라면 분명히 반대하겠지. 비록 전염되는 병이 아니더라도 분명 망설일 것이다. 주변 사람을 모두 속이는 기분이라 새삼 죄책감이 들었지만···. 만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결국 스미레코는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가기로 약속했던 산백합회의 다섯명은, 전원이 있었다. 처음 보는 남자, 운전기사들이 세명있었다.
짧게 인사를 나누고 그녀들은 곧장 출발했다. 기다림이라면 이미, 반년이나 있었다. 더 이상 기다릴수는 없다. 차는 두 대만을 쓰기로 하고 사이코의 집에서 나온 사람은 돌려 보냈다.
“후지산이 보이네요.”
퍼뜩 고개를 들자, 히나타님이 웃으며 차창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 그렇군요.”
“마음은 알겠지만 기운내요. 걱정마요, 앞으로 일주일 간이나 함께 있을 수 있으니까.”
“예.”
그래, 앞으로 일주일을 함께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 몇시간이나 차를 더 타고 가야 만날 수 있는 걸까-. 몇 달을 기다렸는데, 고작 몇 시간이 견딜 수 없이 답답했다. 괴로운 가슴을 안고 눈을 감고 있자, 꿈도 꾸지 않고 잠을 잤다.
깨어난건 주위가 소란스러워서였다.
어느새 저녁이 되어가는 하늘. 주변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무슨 소립니까, 그게?”
히나타님의 조금 놀란 목소리. 거기에 늙은 남자가 곤혹스럽다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아, 요양원은 이 앞에 있지만···. 지금은 안 들어가는게 좋다고 충고 한 것 뿐이야.”
“면회가 안되나요?”
“그건 아니지만···.”
“실례지만, 이유를 확실히 말씀해 주실수는 없으신지요?”
저 노인은 아마 10대의 여자아이가 이렇게 당찬건 인생에서 처음 맞는 일인지, 땀을 뻘뻘흘리고 있었다. 하긴. 눈앞의 사람은 도쿄에서도 최고의 아가씨 학교, 그 정점에 서 있는 분이라고. 카리스마도 박력도 보통의 사람과는 다르지.
그런데 여긴 어디? 요양원이란 말이 나온 것을 보면, 벌써 도착 한 것?
스미레코는 순식간에 잠이 깨어 일어났다. 옆좌석에 앉아 있던 사이코님이 ‘일어났나요’라며 인사를 하고는 물통을 내밀었다. 일단 받긴 했지만 마시는건 미루고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차는 두 대 다 멈춰 있었고, 근처에서 밭일을 하고 있었던듯한 늙은 농부 한명이 히나타님과 이야기 중이었다.
“처자에게 헐 이야기가 아닌데···.”
“괜찮습니다.”
딱 잘라 말해 버리자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마 기가 막히다고 속으로 욕이라도 하는 모양이지. 하지만 결국 "난 분명히 말했다"라고 서두를 떼고는 말했다.
“지금 요양원에서, 죽을 거라고 생각한 남자 한명이 난동을 피웠단 말이 있어. 방금 경찰들이 차로 우르르 올라 가더라고.”
“난동?”
“에··· 그러니까, 정말 하기 싫은 말인데. 간호원 한명을 덮쳐서··· 범하고 죽인 후 도주 중이라더구먼. 참···.”
노인은 것 봐라. 듣지 말랬지. 라는 듯이 중얼거렸지만 그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비명을 지르거나 할 사람이 아니었다. 흔들림 없이 노인을 바라보며 말합니다.
“아직 체포하지 못한 겁니까?”
“그, 그렇네.”
“그렇군요. 충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저희는 꼭 가봐야 하니, 부디 요양원의 별관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실수 없나요?”
“···뭔가 사정이 있는 거 같으니 알려 주겠네. 별관이 어딘진 모르겠고, 요양원을 알려줄테니 거기에서 물어가 보면 될거야. 조심해 가게나. 남자가 두명이나 있지만 도망중인 녀석은 칼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구먼.”
“감사합니다.”
잠시 길 설명을 두 남자와 들은 후, 히나타님과 남자들은 다시 차에 올라탔다.
“들어 버렸나요?”
“예.”
“주저되면 여기 남아 있어도 좋아요. 하루쯤 츠바키를 늦게 보아도···.”
“아니요, 가겠습니다. 그 요양원의 별장이란건 아마도 요양원보다 산속에 있겠지요?”
“···그렇겠지.”
“그럼 더더욱 가서 츠바키님을 지켜 드려야지요.”
- 이제 2년도 안남았을 지도 모르는 분이야. 그 시간을 뺏게 놔둘 것 같아.
히나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 차에서 아키하가 ‘이쪽은 전부 가기로 결정’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히나타는 살짝 웃고, 다시 출발하자고 기사에게 말했다.
포장이 되지 않은 산길을 차는 덜컹거리며 올라갔다. 산이라 해가 일찍 질 것을 걱정했지만, 다행히 황혼이 시작될 무렵에는 요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근래에 지어진 듯, 꽤나 크고 좋은 시설의 요양원에는 차가 몇 대나 서 있었고 경찰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몇 명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자동차가 두 대나 나타나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잠시 멈춰 주십시오. 이곳은 지금 저희들의 관할 하에-.”
“사정은 들었습니다. 방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희는 그저 별관쪽의 방향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
남자 쪽을 향해 말하던 경찰은, 갑자기 10대 후반의 소녀가 말을 시작하자 조금 눈을 크게 떴지만 곧 시선을 히나타쪽으로 돌렸다. 입고 있는 옷이나 말투등을 보고 대번에 아가씨인걸 알아 차린 거겠지.
“그건 조금 곤란합니다. 사정을 어디까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곧 밤이 됩니다. 밤의 산은 몹시 위험-.”
“그 밤의 산 속에 친구가 사는 별관이 있습니다. 그곳의 경비는 어떻습니까?”
“···별관에, 사람이 있다고요?”
경관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화들짝 뒤를 돌아보더니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봐, 여기 별관이 있다는데 그게 진짜야?”
“예?”
처음 듣는 사정인지 웅성 거렸다. 경관들 사이에서 뭔가 말을 하고 있던, 의사 가운을 걸친 남자가 얼굴이 조금 새파래 지더니 황급히 뭔가 말하기 시작했다.
“···저런, 이기적인 사람. 요양원 주변 경비는 철저히 해달라고 신신당부하고 있더니 별관은 까맣게 잊고 있던건가.”
경관은 혀를 차더니 히나타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 별관이란 곳에 대해 아는 것이라도 있나요?”
“모릅니다. 다만 저희 또래의 여자가 한명, 그 하인들이 조금 있을 거란거 밖에는···.”
저쪽에서 의사 가운을 입은 사람에게 사정을 들은 경찰 한명이 뛰어왔다.
“예, 산속으로 차를타고 십오분가량 더 가면 작은 별관이 하나 있답니다. 최근 어떤 부자에게 장기 임대를 해서 그만 깜빡 잊고 있었다고···.”
“서론은 빼고!”
“현재 그 부자집의 아가씨와 하인이 세명 정도 있다고 합니다. 남자 하인도 한명 있다고는 합니다만-.”
“거기에 대해 범인이 아나?”
“아마 알거라 생각합니다. 이곳에서 몇일마다 식료품을 받아 간다고 합니다.”
“아마노, 두명 데리고 올라가서 거길 지켜라. 범인은-- 식량보급을 위해 거기로 갈 가능성이 크다.”
식량보급이라 말하기 앞서, 말이 조금 머뭇거렸다. 그 미묘한 머뭇거림을 놓칠 정도로 어리석은 아가씨는 다섯명중 아무도 없었다. 분명히 범인은, 여자를 범하고 죽인후 도망중. 그런 상황에서 츠바키란 미인의 존재를 본다면 좋은 일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저희도 가겠습니다.”
“허락할거라 생각합니까?”
경찰은 기가 막히다는 시선으로 돌아 보았지만, 히나카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에겐 남자가 두명있습니다. 저희가 간다면 경찰분들이 한두분만 가셔도 될테고, 차도 저희 것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열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있다면, 제 아무리 범인도 침입을 주저하지 않을까요?”
“···크으.”
“인력 부족은 심각하지만, 이런 소녀들을 위험한데에 보낼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곳에 있는건 절친한 친구입니다. 게다가- 병으로 언제 죽을지 알수 없습니다.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태연히 거짓말까지 하는 히나타에는 스미레코도 조금 놀랐다. 경찰은 질린 듯, 결국 두명을 붙여 주고는 절대로 별관에 도착하거든 범인이 잡혔다는 말이 들릴때까지 별관에서 나오지 말라고 맹세를 받아냈다.
경관 두사람을 태우느라 무거워진 차를 타를 타고, 일행은 가파른 산길을 올라갔다. 산 속이라 그런지, 이제 제법 어두워 지기 시작한 주변을 모두는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둘러 보았다. 저 어두운 나무 사이에서, 살인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등골이 차가워진다.
무서운 시간이 흐르고, 나무 사이로 갑자기 작지만도 않은 건물이 나타났다. 잘도 이런 산 위에 이 정도로 지었구나 싶을 정도의 건물이었다. 열명 이하라면 방학 내내 재워 줄수도 있다는 말이 허풍이 아니었구나. 싶을 정도.
차에서 구르듯 내린 사람들의 앞으로, 갑자기 찾아온 손님들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한 노부부가 허겁지겁 건물에서 나왔다. 츠바키에게 들은 바가 있는지, 환영하는 말을 하려는 듯이 웃던 두 사람은 경찰을 보자 안색이 묘하게 변했다.
“어서 오세요. 혹시 츠바키 아가씨를 찾아오신 산백합회의···.”
“맞습니다. 지금 츠바키는 어디에 있나요?”
급하게 달려들어 묻는 아키하와, 경찰들을 보고 뭔가 상황이 좋지 않음을 느꼈는지 노부부의 안색이 변했다.
“지금 저녁 산책을 하고 계십니다.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만···.”
“이 바보는 끝까지!”
히나타가 신경질적으로 외치고 몸을 돌려 숲 사이로 난 작은 길을 노려보았다.
“찾으러 가야 하지 않을까요?”
“안됩니다. 별장에 들어가서 나오시지 않기로 소우지씨와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경찰 한명이 정색을 하고 말렸다.
“그렇습니다. 일단 아가씨들께 무슨 일이 생기면 주인님을 뵐 낯이 없으니, 일단 별관 안에 계셔 주십시오. 수색은 남자들에게 맡겨 주시···.”
“하지만 그 바보가 저기 있단 말야-!”
-안 좋아. 히나타님은 반년 동안 우리의 기둥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히나타님도 고작 다른 사람보다 동갑이거나 한살 많은 사람. 아무리 속이 깊은 사람이라도, 그렇게 흔들리지 않으려 노력한 것도 이제 한계일까.
스미레코는 히나타와 츠바키 사이의 관계를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고작 몇 번의 만남으로도, 히나타는 츠바키를 생각하고, 츠바키는 히나타의 말은 따른다. 그 관계만은 너무나 당연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히나타님. 부디 진정하세요.”
“그래요, 저희가 나가서 미아가 되거나 하면 오히려 폐입니다. 지금은 침착하게···.”
“그 바보를 지금 당장 만나서 뺨을 올려 붙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 아까부터 바보, 바보 라고 불리는 느낌이 들었는데 정말이었네. 이거 나 지옥귀, 맞을지도.”
마지막 말에 모두의 고개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획 돌아갔다.
어두워지는 나무 사이를, 하얀 그림자가 휘적거리며 걸어오다 멈춰 섰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자, 하얀 유카타를 걸쳐 입은, 여성의 그림자. 틀림없는 츠바키님이.
“츠바키님!”
“츠바키--!!”
모두가 달려 나가려 했다. 그때.
“움직이지 마!”
무서울 정도의 일갈이, 불치병을 앓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거의 이성을 잃은 히나타 마저 무심코 멈춰 설 정도로.
“- 아무래도.”
천천히 손에 든 지팡이를 빙글 들어 쥐었다. - 마치, 목검을 쥐는 것같은 자세.
“나는 지옥귀에다 정말 액운을 타고난 여자 같은데.”
그 지팡이 끝이 향하는 곳, 그녀들과 츠바키의 사이에, 황혼에 으스스하게 반짝이는 날붙이의 빛이 보이고 있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경찰들이었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두 사람의 경찰은, 소녀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서 허리춤에서 총을 뽑아들었다.
“이치로, 무기를 버리고 나와라! 저항하면 죄만 더 무거워 진다!”
“움직이면 쏘겠다! 무기를 버려!”
악다구니를 쓰자, 수풀 속에서 죽은 듯이 있던 그림자가 조금 흔들렸다. 처음엔 웃고 있는 줄 알았지만, 잘 보니 쿨럭거리고 있었다.
“다, 당신들이나 총을, 쿨럭, 버리시지.”
쉬고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총을 가진데다 수도 많은 쪽에게 오히려 총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스미레코는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나무 뒤에 숨어 있는데다 숲 속이어서, 나무가 방해되 권총으로는 아마 저 범인을 맞추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범인이 츠바키님에게 달려 들면 저쪽은 인질을 잡을 수도 있고 이쪽은 츠바키님이 맞을까봐 총을 쏴 그걸 저지 하기도 힘들다.
“거기 아가씨, 달아나!”
경찰도 그걸 잘 아는지, 츠바키를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츠바키는 미동도 하지 않고 지팡이를 들어 살인자 쪽을 겨누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찌 생각해보면 난 나름대로 운이 좋아.”
엉겁결에 스미레코가 매달려 있는 히나타의 몸이 움찔하고 움직였다. 도망가라는데도 도망가지 않는 저 태도에 또 뭐라 소리치고 싶었지만, 범인을 자극할까봐 그렇게 하지도 못하는 마음이 떨리는 몸을 통해 아프도록 느껴졌다.
하지만 그 분노조차 일순간에 꺼 버릴 정도로, 어처구니 없는 말이 이어졌다.
“상황이 이런지라 남녀 일은 포기하고 있었는데, 과연 마리아님. 죽기 전에 남자의 물건 정도는 보고 가게 해 주시는 군. 별로 봐도 기쁘지도 않지만 말야. 아하하.”
“이--.”
모두가 어이가 없어, 순간적으로 가슴속의 뭔가가 느슨해진 그때. 츠바키는 앞으로 달려 들었다.
“무슨-!”
지팡이를 가볍게 휘둘러서, 범인쪽을 겨눈다. 범인쪽은 병색이 역력한 여자아이 쪽이 오히려 쳐들어 올지는 미처 예상 못했는지 조금 허둥거렸지만 곧 나무에서 뛰쳐나와 마주 칼을 휘둘렀다. 츠바키가 다가왔으니 총을 쏘지 못하니, 재빨리 인질을 잡는게 낫다고 생각한 걸까.
“츠바키님!”
스미레코가 뛰쳐 나가려 했지만, 그 어깨를 아키하가 꾹 눌러 잡았다. 스미레코의 앞을 총을 허겁지겁 집어 넣은 경찰들이 경찰봉을 뽑으며 마주 달려간다.
아키하는, 떨리는 손으로 스미레코의 어깨를 누르며 속삭였다.
“괜찮아, 나도 한번도 츠바키는 못 이겼으니까···!”
괜찮을 리가 없다는 것 따위, 아키하의 떨리는 목소리가 이미 알려주고 있었다. 진짜로 날이 달린 칼과 지팡이가, 정말로 목숨이 달린 일이, 검도 시합과 같을 리가 없다.
나무 사이에서 튀어나온, 환자복을 허술히 걸친 남자가 손에 든 번뜩이는 칼을 휘둘렀다. 이제 어두침침해지기 시작한 숲 사이에서 별처럼 번뜩이는 식칼에, 희미하게 달라 붙은 핏자국을 본 것 같아 섬뜩해졌다.
휘두르는 기세는 제법 강했다. 심하게 다쳐도, 인질로 잠깐 삼기만 할 수 있다면 된다는 걸까.
츠바키는- 그 칼을- 차가운 눈으로 보며 지팡이를 데었다. 아무래도 길이가 훨씬 길어서 일까, 츠바키의 검도 실력이 우수해서 일까. 식칼은 나무 지팡이를 반쯤 쪼개고 막혔다. 쪼개진 지팡이 사이에 칼이 끼자, 남자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칼을 뽑으려 했다. 칼은 쉽사리 뽑혔으나- 츠바키는 망설이지 않고 뽑힌 칼날을 손으로 잡았다.
왼손으로 식칼의 날을 잡아 막고, 오른손으로 자유로워진 지팡이를 휘둘러 남자의 목을 후려 찔렀다. 정확하게 동맥이 있는 곳을 찔렀는지, 남자는 괴로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식칼도 놓쳐 버렸다. 괴로운 듯 허리를 굽히며 기침을 하는 남자의 위로 순식간에 달려든 두명의 경찰이 경찰봉을 내리치고 수갑을 채웠다.
“츠- 츠바키님-!!”
스미레코는 그순간 튀어나가 츠바키에게 달렸갔다. 어째서 저런 무모한 짓을. 어떻게 그런 소름끼치는 일을-.
츠바키는 달려오는 스미레코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아아, 꼬맹이양이다. 평안했어?”
“평안 못했어요! 그, 그 손! 피부터-.”
식칼을 맨 손으로 잡고도 멀쩡할 리가 없었다. 크게 베인 손바닥에서 피가 솟구치고 있다. 츠바키는 금새 휘청거리면서, 그 손을 슬그머니 감췄다.
“꼬맹이에겐 너무 잔인해 보여 줄 수는 없지만, 내 피, 하예서 재밌어요.” (주- 일본어로 白いから面百い(시로이카라 오모시로이). 말장난.)
“무슨 웃기지도 않은 말을 하시는 겁니까-! 큰일 날뻔 했다고요!”
울면서, 손수건을 꺼내 급한대로 손바닥을 감쌌다. 서둘러 달려온 사이코와 아키하가 츠바키를 부축해 별관 쪽으로 데려왔다.
“어머. 나는 감사하고 있어. 이런 칼싸움을 해보는 진기한 경험도 죽기 전에 해보고, 게다가 고작 요만큼 다쳐서 저 무서운 언니가 화낼 기운을 뺏었잖아.”
츠바키가 웃으며 바라보는 곳에는, 방금전까지의 무서운 얼굴을 지우고 펑펑 울고 있는 히나타가 있었다. 츠바키는 쓸쓸히 웃으며 그녀를 피를 흘리지 않는 쪽 팔로 감싸 안았다.
“···미안, 히나타.”
“···.”
둘은 아무말 없이, 잠시 껴안고 있었다.
늦은 저녁 식사를 침묵속에 하고, 모두는 약속이 없이도 하나 둘씩 거실가에 모여 앉았다. 서양식으로 지어진 건물 답게, 거실에는 벽난로가 있었다. 본래 병동의 별관이었던 만큼 본래는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쉬던 휴게실이었는지라, 여섯 명이 모여 앉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잠시간의 침묵의 끝에, 자연스럽게 스미레코가 입을 열었다.
“얼마나 남으셨나요?”
“의사는 스무 살을 채우기 힘들 거라고 하더라.”
“언제부터 아셨나요?”
“철들 때부터.”
옷을 꾹 쥐었다.
“왜 숨기셨나요?”
“살아 보려고.”
흔한 말 주제에, 이제 죽을 자의 입에서 나올 말이라는 게 견딜 수 없는 무게를 실어 주었다.
“왜 우릴 부른 거니?”
“이곳의 생활은 평화롭지만, 단조로와서. 학교엔 이제 돌아갈 수 없으니까-. 하다 못해 친구들이라도 만나고 싶었어.”
츠바키는 기운이 없다는 듯이 소파에 몸을 기대다가, 갑자기 소매에서 손을 뻗어 하얀 손수건을 코에 대었다. 잠시후 곧 수건이 조금씩 색이 변하는 것이 보였다.
“가뜩이나 빈혈인데, 이래서야 아무리 먹어대도 모자라지.”
스미레코가 온 이후 벌써 두 번째 코피.
게다가 말은 저렇게 하지만 저녁 식사도, 몸집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은 스미레코보다도 적게 먹었다.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츠바키님.”
슬쩍 다가가, 다치지 않은 오른쪽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아직 어린 자신의 모습이 부디 효과가 있기를 기원했다.
“부탁이에요. 제발 치료를 받아 주세요.”
츠바키는 스미레코를 돌아 보았다.
난롯불이 검은 눈동자의 한쪽 구석에서 타오르고 있다. 전 보다도 하얀, 이제 누가 봐도 병자의 얼굴이 분명한 얼굴은 정말로 조각처럼 흔들림이 없다.
이것이, 죽음을 앞둔 자의 얼굴인 걸까.
츠바키는 살짝 웃었다. 스미레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미안’이라고 속삭이는 소리에. 일어나 천천히 침실로 사라지는 조금 작아진 등에, 스미레코는 울 수밖에 없었다.
“우리, 뭐하러 온 걸까.”
나지막한 스미레코의 흐느낌 사이로, 아키하가 탄식했다.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온 목적은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한번 더 볼 수는 없는 걸까요.”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어요. 이야기 할 시간도 충분하겠지요. 오늘은, 가뜩이나 보통 사람은 일생에 한번 겪기도 힘들 충격적인 일을 겪었잖아요. 일찍 쉬는게 어떨까요?”
사이코의 말에 스즈란이 답한 말은 타당했지만, 아무도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지친 몸에 지친 정신.
히나타가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있었네요.”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츠바키의 마음. 하지만 그녀가 그저 일상을 보내다 죽기를 원한다면, 과연 우리는 그것을 도와줘야 하는 걸까?
스미레코는 그날 밤 잠들지 못했다. 아마 다섯 명의 산백합회 모두가 그러리라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무거운 일주일이 되리란 스미레코의 예상은 보기 좋게 뒤집어 졌다. 아침 일찍 츠바키는 활짝 웃는 얼굴로 산백합회 입원들의 방을, 어디선 났는지 모를 풍령을 딸랑 거리며 다니며 모두를 깨웠다.
아직 새벽이 아니냐고 항의하는, 간밤에 잠을 설친 것이 틀림없는 사람들에게 츠바키는 환히 웃으며.
“나랑 놀아줄 시간, 별로 없으니까.”
라고 말해 버려 모두의 입을 다물게 했다. 정작 말한 본인은, 자신의 죽음을 편리한 구실이 생겼다며 희희락락하는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새삼 숙연해 지자 츠바키는 재미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잘 알겠어.”
갑자기 분위기를 깬 것은, 히나타였다.
“편지까지 써서 사람을 불렀으니, 마땅히 사람을 즐겁게 할 준비는 잘 되어 있겠지?”
“나름대로는 준비했는데. 일주일 동안이나 머문다고 하니 자신이 좀 없어 지는 걸.”
“재미 없으면 돌아 가 버릴테니까 말이야.”
마지막에는 아키하도 씩 웃으며 끼어 들었다. 세 사람의 3학년을 따라 가지 못하는 나머지 세 명은, 어리 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돌아 볼 뿐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세 사람은 환히 웃으며 식당으로 걸어갔다. 식후에 어디로 안내할 것인지 비밀이라는 츠바키를, 양쪽에서 괴롭히는 두 3학년. 2학년 이하의 세 명은 그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곤혹스러워하며 따라갔다.
두명의 3학년, 히나타와 아키하는 츠바키가 하는 대로 모든 것을 따르겠다는 태도를 계속 지켜나갔다. 츠바키가 아침 산책길을 알려 주겠다며 그들 모두를 데리고, 등산이라기 보다는 정말로 산책에 가까운 나들이를 하던 중 스미레코는 참지 못하고 두 사람 사이에 끼어 들었다.
“히나타님, 아키하님. 어떤 생각이시지요?”
“저도 궁금해요.”
스미레코의 뒤로 바짝 따라온 스즈란도, 조금 떨어진 앞에서 흥얼거리고 있는 츠바키에게 들릴세라 목소리를 낮추어 수근 거렸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사이코도 슬그머니 다가와 귀를 쫑곳 세우고 있었다.
“아무 생각 안하기로 한 것뿐이야.”
“예?”
“그렇게 토라진 얼굴 하지마. 귀여우니까.”
“그만 괴롭혀, 아키하. 스미레코양, 어젯밤에 잠을 설쳐가며 아키하와 의논을 했었어요.”
오늘은 컨디션이 좋은지, 지팡이를 획획 휘두르며 저만치서 앞장서 가는 츠바키의 등을 잠시 바라 보고 말을 잇는다.
“하지만 역시 결론을 내릴 수 없었어요. 반년간 나름대로, 츠바키를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 했었지만. 본인의 얼굴을 보고 나자 전부 무너져 버렸어요. 결국 단 한 가지만을 정했어요.”
“뭔가요?”
“내일 저 아이가 웃는다면, 우리를 보고도 웃을 수 있다면. 그 강함을 우리도 받아 들이자. 우리는 반년동안 진심으로 고민했지만, 츠바키는 몇 년간이나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고민 했을 거에요. 그 결정을, 믿어 주자.”
“···츠바키님의 결정이, 스스로를 죽이는 길이라도?”
아키하가 스미레코의 머리를 쓰다 듬었다. 츠바키의 손길과 조금 틀린 느낌에 스미레코는 어쩐지 기분이 나빠져 그 손길을 슬쩍 거부했다.
“우리는 친구라고 자부해. 그러니까··· 저 녀석이 우리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아.”
“떠나려 하시잖아요···.”
기운없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어느새 또 젖어 버리려 한다.
“원해서 떠나는게 아니잖아. 난 말이지, 지금도 나랑 히나타를 2년 이상··· 아니, 중학교때 부터 일지도 모르네. 하여간 그렇게나 감쪽같이 속인걸 생각하면 화가 나. 하지만··· 그만큼 같이 있고 싶어 했다는 걸 생각하면 기뻐져 버리기도 해.”
하지만, 나는 이제 겨우 반년이란 말이에요.
“전력으로 도와 주고 싶지만, 츠바키가 이미 그걸 웃으면서 거부할 정도로 강하다면.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이제 웃어 주는 것, 저 웃음을 지켜 주는 것이라 생각했어.”
하지만, 저는 아직 저런 슬픈 웃는 얼굴 밖에 보지 못했어요.
스미레코의 가슴속의 중얼거림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모두는 츠바키의 재촉에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산 나물 채집. 버섯 채집.
시냇가에서 물놀이.
하늘이 탁 트인 것이 보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초원에서의 피크닉.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낮잠을 자고.
토끼를 발견하고 따라 다닌다.
넓은 탁자에 모여 앉아 향긋한 차와 함께 옛 이야기를 나누며,
모닥불에 둘러 앉아 괴담을 이야기했다.
그저 꿈처럼, 시간은 웃으며 흘러 간다. 웃는 소녀들 중에는 스미레코도 있었다.
하지만- 단 한번도 진심으로 웃은 적은 없었다.
이대로 괜찮은 거야?
이걸로 괜찮은 거야?
스스로, 히나타와 아키하가 내놓은 답 이상을 찾지 못하고. 그저 따라하고 있다.
하지만 이 나날들이 끝난후 정말, 나는,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곳에 도착해, 일곱째 날.
창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어제는 맑았는데-.
“···내 마음 같아.”
창에 후두득 부딫히는 빗방울의 소리를 들으며, 이불 속에서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어두운 실내는 검푸른 빛으로 물들어, 정말 자신의 마음속에 틀어 박혀 있는 듯 했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일어 났어?”
츠바키님의 목소리. 그래, 일어나야 해.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게다가 내일은 아침 일찍 출발해야만 해. 이 날이 지나가고 나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아니, 다시 볼 수나 있을지.
마음만은 급하게 일어났지만, 가슴이 아프다. 몸이 무겁다.
오늘도 또, 하루 종일 웃으며 연기를 해야 하는 거야?
···자신 없어. 힘들어.
“들어 간다.”
문이 열리는 소리, 닫히는 소리.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
조금 운 얼굴을 보이기 싫어, 이불을 뒤집어 썼다.
“세수 안한 얼굴 보여주기 싫어요.”
츠바키는 아무 말 없이, 침대에 걸터 앉았다. 털썩. 그대로 등을, 이불과 그 아래에 있는 스미레코의 몸을 등받이 삼아 뉘여 버린다.
“꼬맹이양.”
“···예에. 금방 일어 나겠습니~.”
“미안. 말로만 꼬맹이양이라고 불러 버렸어.”
“···예?
이불 위쪽으로 슬그머니 들어온 조금 따뜻한 손이 뒷머리를 어루 만졌다.
“꼬맹이양이라고 언제나 불렀는데, 이렇게나 작고 귀여운데. 정작 너무 당차서 어느틈엔가 고교 1학년이란 것도, 심지어는 사실 고교 1학년도 안되는 나이란 것도 그만 잊어 버려. ···이렇게 힘들어 하는데.”
“히, 힘들다뇨.”
“들어줘.”
천천히 뒷머리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기분 좋다. 홑이불이지만 밖에 비가 와서, 제법 따뜻하게 느껴지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어루 만져지고 있자니 고양이가 되어 버린 듯한 느낌. 너무 편안한 그 느낌에, 스르륵 눈을 조용히 감았다.
“히나타와 아키하는 나와 십년 가까이 같이 지낸 아이들이고, 사이코와 스즈란도 고교 시절을 거의 함께 보낸 아이들이지. 하지만··· 꼬맹이양과는 이제 고작 반년. 그것도 몸통은 통째로 잘라 버린 반년이네.”
맞아. 그것 밖에 안되요. 그런데 헤어져야 하지요.
“그런데 깜빡 해 버려. ···꼬맹이양이, 다른 산백합회의 사람들보다도 어느새 내게 바짝 다가와 있곤 해 버려서. 왜 그럴까? ···나는 우리들이 닮았다고 생각해. 기분 나빠?”
닮았다-.
기분 나빴다, 라기 보다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렇게 생각해 본적은 한번도 없었으니까. 너무 당당하고 빛나는 이 사람을 동경한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감히 닮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사실은 모두에게 이야기랄까, 부탁을 하고 싶은게 있어서.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냥 오늘도 놀러 나가 시간을 보내야 할까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비가 와 실내에 있을 수 밖에 없게 되었어. 하늘의 뜻일까.”
손길이 사라졌다. 따뜻해진 목 뒤가 공기와 닿자 조금 서늘했다.
“세수하고 나와 줘. 꼭.”
“예.”
직감적으로 느꼈다. 확신할 수 있었다.
일주일간 그저 산으로 들로, 웃고 이야기하며 장난 치기만 했던 츠바키님이 처음으로 ‘부탁’을 입에 담았다.
그러니까 틀릴 수가 없었다.
이것이, ‘마지막 부탁’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