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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 나이츠 - 창공의 기사단


Sortie 007 - 에도 상공 30초 Part 1


  1
  [삐익 삐익]
  [전원 기상하라. 반복한다. 전원 기상하라.]
  짧은 기상벨이 울리고, 나는 눈을 떴다. 처음에는 불편해 죽을 뻔 했지만 이제는 어느정도 적응이 된 해군 침대의 딱딱한 메트리스에서 머리를 떼고 일어난 나는 천천히 눈을 비비면서 기지개를 켰다. 탕탕탕탕, 금속 갑판을 밢고 지나가는 사관들의 발소리는 다급했다. 나도 빨리 일어나 비행복으로 환복한 다음, 지금까지 신었던 편한 군화가 아닌, 철판을 덧댄 전투부츠를 신었다.
  똑똑똑
  [기상하셨습니까, 대위님?]
  “어? 어……”
  [지금 즉시 모든 기사들은 브리핑실로 집결하라는 마이너 중령님의 말씀이십니다. 바로 와주십시오.]
  다시 멀어지는 발소리. 오늘은 3월 29일, 작전 개시일. 그리고 지금은 새벽 2시, 작전 개시 5시간 전이다. 원래라면 자정에 출격을 준비해야 하겠지만, 중간에 예측하지 못한 저기압 전선을 만난 덕분에 그곳을 우회하느라 계획된 시간보다 2시간이나 늦게 작전을 개시하게 되었다고 브리핑실에서 마이너 중령이 설명했다. 브리핑 직후, 우리는 이른 아침을 먹고, 최종 점검과 함께 출격을 준비했다. 그리고 아침 7시 38분, 모든 기사들 각자의 폭격기에 탑승하고, 출격에 준비했다. 폭격기의 항법사 자리에 앉아 지도를 보면서 항법 좌표와 정보를 확실하게 확인한 다음, 마이너 중령의 최종 계기 점검과 함께 우리는 출격을 준비했다. 내 기체는 선도기, 그러니까 활주로도 주기된 다른 폭격기들 덕분에 몇십미터나 짧다. 이거, 이륙할 수 있으려나? 잘못하면 콜드 샷으로 바다에 그대로 처박게 되는 것 아닐까? 하나 다행인 것은, 바람의 속도가 꽤나 빠르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호넷의 함장이 우리의 이륙을 위해 맞바람이 불도록 항로를 변경한 덕분에 20노트의 속력의 바람을 받으면서 우리는 이륙할 수 있었다. 정말 다행이다.
  [벤젠스 00, 여기는 어벤저 01. 출격 준비 완료했다. 이륙 허가를 바란다.]
  [어벤저 01, 이륙을 허락한다. 무운을 빈다.]
  [여기는 큐라소, 무운을 빈다.]
  [에온이다. 무운을]
  [해머다. 무운을 빈다.]
  그렇게 레이드 가는 우리에게 무운을 빈다는 호위 함대 함정들의 무전이 들어오고, 마이너 중령의 신호와 함께, 날개 양쪽에 달린 강력한 프로펠러 엔진이 푸르륵 소리와 함게 돌기 시작했다. 프로펠러의 끝에 칠해진 노란색 부분이 어느새 허공에서 노란 원을 그렸고, 튀어나갈 것과 같은 강력한 느낌이 우리를 압박했다. 브레이크가 풀리자마자 앞으로 튀어나간 우리 폭격기는 250m정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활주 갑판을 박차고 ​날​아​오​…​…​.​.​르​자​마​자​ 바다를 향해 하강하기 시작했다. 천만 다행이도, 우리는 앞에서 불어오는 맞바람 덕분에 충분한 양력을 제때 얻을 수 있어서 정말 말 그대로, 수면에 닿기 직전, 간신하 하늘로 떠오를 수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닿기 직전에 말이다. 물보라가 사방으로 튀기면서 하늘에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어냈고, 그 사이를 뚫고 우리는 고도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폭격기 내부와 무전망에서 환호성이 터졌고, 우리의 뒤를 이어 16기의 쌍발 미카엘 폭격기들이 이륙을 시작했다. 보랏빛 하늘을 누렇게 물들이는 햇빛을 받으면서 이륙하는 16기의 폭격기들이 금세 방어진을 짜고 후소 제국을 향해 가는 동안, 호위 함대는 침로를 반전, 사파이어만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항법사용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원형 방어진을 취한 폭겨긱 편대는 정말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기온은 떨어진다. 전투기 조종사라는 특성상, 체감은 잘 못하지만, 나는 이론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5시간이나 계속된 5만피트라는 고고도에서 비행한 덕분에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일반적인 전투기라면, 나는 더우면 창문을 열고, 추우면 닫아서 온도를 조절할 수 있다. 단발 전투기인 PK 73의 공랭식 엔진에서 뿜어져나오는 열기는 고고도에서도 충분한 열을 조종석으로 전달해주니까. 하지만, 폭격기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날개에서 떨어진 두개의 엔진은 분명 강력한 추력을 생산하고 있지만, 문제는 추력을 생산할 때 나오는 열기가 다 다른 곳으로 간다는 것이다. 엔진에서 멀리 떨어진 동체까지 열은 충분한 양이 닿지를 않았고, 덕분에 나는 털이 잔뜩 달린 항공 점퍼를 입고도 추위에 덜덜 떨어야 했다. 꽝꽝 얼어버린, 얼음장 같이 차가운 초콜렛을 먹으면서 열량을 보충하면서 버틴 우리는 드디어 1시 15분경, 항구가 보이는 해안선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항법사.]
  “예, 중령님. 이창민 대위 입니다.”
  [지형 확인 바란다.]
  지도가……. 어디보자……. 확실하다. 지도에 표기된 해안선과 전에 우리 정찰기가 찍어 놓았던 에도만의 항공 사진이 일치한 것을 확인한 나는 마이너 중령에게 인터컴으로 통보했다.
  “중령님, 확실합니다.”
  최소한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기수 부분에 위치한 항법사의 자리가 가장 전망이 좋다. 그러니까, 확실하겠지.
  [이쪽도 확인 했다. 편대망으로 다들 전환하라.]
  중령이 간단하게 인터컴으로 명령했고, 나는 바로 버튼을 눌러 기내 통신망에서 편대망으로 통신을 전환했다.
  [전방의 해안선은 에도의 해안선으로 확인되었다. 각 폭격기는 폭탄 투하를 준비하고, 기총 사수들은 혹시 모르는 적 요격기의 내습에 대비하라. 비디오의 녹음은 지금부터 10초 뒤에 시작한다.]
  그말과 함께, 나는 임시로 붙어있는 항공 정찰 패널을 조작해 카메라의 촬영을 시작했다. 커스 르 메이 중사는 간이 조준기로 조준을 시작했고, 기총 사수들은 각자의 구역으로 이동해서 기총을 맡은 구획을 향해 돌리기 시작했다. 기총이 그렇게 믿음직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자위 무장이 있는건 나쁜게 아니니까. 단지, 후방의 기총으로 보이는 것들은 전부 검게 칠한 나무 막대기라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녹음 시작. 폭격수들은 각자 투하를 준비하라.]
  커스 르 메이 중사가 폭격 조준기를 보면서 조준을 하는 동안, 나는 기총 사수들과 함께 밖을 살피면서 적의 요격기를 찾기 시작했다. 천만 다행이도, 적의 요격기 같은건 나타나지 않았다. 단 1기도 없다. 덕분에 우리는 르 메이 중사가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 때 까지 아무런 공격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투하 개시]
  활짝 열린 폭탄창에서 차가운 공기가 기내로 들어왔고, 강한 바람이 우리를 때리는 바람에 우리는 귀에서 들려오는 인터컴으로도 서로 통신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올리브색으로 칠해진 500파운드급 폭탄 6발이 중력에 이끌려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뒤이어 에도의 시가지에서 흙먼지 구름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에도의 시가지에 있는 목조 건물들이 나무 파편을 사방에 뿌리면서 폭발했고, 작은 점들로 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번져가는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후소 제국군이 공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건 바로 그때였다. 에도 상공에서 수백개의 회색 꽃이 피어났지만, 대부분 우리가 있는 폭격고도까지 닿지도 못하고 중간에서 폭발해버렸고, 일부 대구경 대공포들만 우리 바로 아래서 몇발 터졌다. 이미 폭탄을 전부 투하한 덕분에 몸이 가벼워진 우리 편대는 항로를 변경, 루스 제국을 행해 비행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요격기들을 보내지 않은 것도, 우리 고도까지 올라올 수 있는 요격기가 없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럴 수도 있다. 혹시 모르지. 만약이라는 것은 항상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제와서 대공포 몇발을 쏜다고 그런게 맞……
  파파팍
  다리쪽에서 뭔가 둔탁한 충격이 전해져온다. 동체가 흔들렸다. 근처에서 지근탄이라도 터진 걸까? 흔들림을 방지하기 위해 의자를 붙잡은 순간, 무엇인가 뜨뜻미지근한, 그리고 찝찝한 액체 한줄기가 얼굴에 촥, 뿌려졌다. 따뜻하다. 차가운 고고도의 공기에서 김을 내고 있는 이 끈적한 액체는 마치 분수처럼 하늘 높이 치솟았고, 푸른색 바지를 보랏빛으로 물들였다. 그리고 그 액체가 내 피라는 것을 눈치 챘을 때야, 나는 고통을 인지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둔탁한 충격, 그 뒤에 찾아온, 마치 뼈를 긁고 살을 베는 것 같은 통증은 내 머리 속에서 고통의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면서 내 생각을 방해했다. 누군가 아무런 조치를 하지도 못하고, 가만히 굳어버린 나에게 다가와서 내 다리를 눌렀을 때야, 나는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는,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아악!”
  “가만히 있어! 지혈을 빨리 해야해!”
  마이너 중령은 익숙하게 내 다리를 들어 올리고 흰 붕대를 피가 쏟아져나오는 다리에 감았다. 붉은 피가 마이너 중령의 얼굴에 팍 튀자 중령은 투덜댔다.
  “젠장.”
  “죄…..죄송 합니다.”
  “자네는 입이나 다물고 있게.”
  하얀 붕대가 감기자마자 붉게 물들어가고, 뒤이어 흘러 넘쳐 마이너 중령의 손과 바닥으로 뚝뚝 흘러 넘쳤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묵묵히 붕대를 감은 다음 강하게 압박했다. 안그래도 산소가 부족한 고고도에서 다량의 피를 잃어버리니 머리가 어지럽고 아프다. 다리에서 전해져오는 고통은 정말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이었다. 폭격기 바닥에 고인 피는 엔진에서 전해져오는 진동 덕분에 덜덜덜덜 떨리고 있었고, 기체가 회전할 때마다 이리로 저리로 옮겨다녔다. 나를 긴신히 지혈시킨 마이너 중령은 나를 떨어지지 않게 의자에 묶어 놓고, 다시 조종석으로 돌아가 편대를 이끌고 적의 대공포망에서 벗어났다.
  [이거 새 기체인데, 재수 없게 피가 묻었네, 젠장]
  누구의 목소리인지도 모르겠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금 그런걸 생각할 여유 따위는 없다. 지금은 그저 조금 쉬고 싶다.
 
  2
  누군가 나를 툭툭 치는 느낌에 나는 눈을 떴다. 폭격수 르 메이 중사였다.
  “대위님, 일어나세요. 곧 탈출해야 합니다.”
  탈출해야 한다. 기체에 이상이라도 생긴걸까? 나는 뒤에 있는 마이너 중령을 돌아보았지만 그는 낙하산은 커녕 어떠한 탈출 도구도 갖고 있지 않았다. 다행이다. 그말은 기체에 문제가 있는게 아니라는 것이니까.
  [각 폭격기, 연료 상태 보고하라.]
  마이너 중령이 편대망으로 날린 무전의 답장은 금방 들어왔다. 16기 중 11기의 연료가 고작 10%도 남지 않았고, 나머지 5기도 끽해봐야 17%정도로 그렇게 충분한 양은 아니었다. 다행히도, 아래쪽에는 거대한 허허벌판만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알았다. 불시착 준비하자.]
  그말과 함께 나는 기수의 내 자리에서 나와 기총사수 자리로 이동했다. 불시착을 하려면 기수와 동체를 땅에 그대로 박아야 하니까, 멀리 떨어지는게 상책이다. 긜고 내 다리도 그렇게 좋은 상태도 아니고. 다리는 마치 와이어가 끊긴 러더처럼 도저히 말을 듣지 않았다. 잘못하면 불시착 해도 탈출을 못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푸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엔진에서 전해져오던 진동이 뚝 끊겼다. 드디어 연료를 모두 소비한 것이었다. 그렇게 꺼진 엔진과 함께, 폭겨기들은 고도를 천천히 낮추면서 활공을 시작했다. 우리가 고고도라서 다행이다. 어느정도 활공할 수 있는 거리를 주니까. 후소 제국군에게 추격당하지 않고 최대한 빨리 루스 제국으로 도망치려면, 우리는 국경과 최대한 가까운 거리에 불시착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5만피트라는 고고도에서 천천히 활공을 시작했다. 하지만 활공은 생각만큼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 30여분쯤 지났을까, 그냥 누렇게 보이던 평원 언덕들의 윤곽이 뚜럿해지기 시작했고, 뒤이어 지면이 점점 가까워졌다. 뒤이어 쿠구궁, 하는 강한 충격파와 함께 폭격기 주변에서 먼지구름이 일었다. 측풍 때문에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기체는 비스듬하게 평원에 불시착했고, 매끈한 표면의 은색 날개가 와지끈 부러지면서 사방으로 금속 파편과 함께 붉은 스파크를 튀겼다. 금속 기체에서 끼기긱 거리는 불길한 소리가 났지만, 베테랑인 마이너 중령이 넓고 고른 평원으로 우리를 유도한 덕분에 우리는 아무도 잃지 않고 무사히 불시착할 수 있었다.
  삐- 하는 소리와 함께 불시착의 강한 충격 덕분에 잠깐 끊겼던 감각들이 다시 되돌아왔다. 감각과 반응이 어느정도 돌아온 나는 무거운 다리를 끌고 카메라 필름과 함께 소총과 권총, 그리고 기병도를 챙겼다. 평소에는 그렇게 가볍던 권총도 마치 천근만근처럼 무겁게 느껴졌지만, 살려면 어쩔 수 없다. 갖고 가야한다. 죽기 싫다면 말이지.
 
  아쉽게도 모두가 도착한 것은 아니다. 16대의 승무원 80명 중에서 2대 10명이 실종되었고, 나머지 70여명 중에서도 나정도의 중상자가 3명, 파편상 2명이 나왔다. 다행이 거동이 불편한 부상자는 나 뿐이었고, 내 다리 상태도 지혈된 이후로 점점 나아진 덕분에 예상한 속도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는 빨리 이동할 수 있었다. 불시착한 폭격기들로 부터 대충 무기와 비상 식량의 회수가 끝난게 오후 6시쯤. 다행히 날이 많이 어둑어둑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곧 있으면 날이 질 시간이었다. 마이너 중령은 아일린 공주와 나를 불러 지도를 보여주면서 우리가 가야 할 블러디스톡 ​크​레​아​포​스​츠​(​K​r​e​p​o​s​t​)​ 요새로 가는 경로를 대충 보여 주었다.
  “부상병들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후소 제국군의 추격이 예상되어 어쩔 수 없네.”
  “알고 있습니다, 중령님. 이동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 우리 70명은 대오를 짜서 사주 경계를 하면서 50km 정도 떨어져 있는 것으로 예상되는 루스 제국의 국경 기지까지 걸어가게 되었다. 다리가 다친 나는 마이너 중령이 부축해줄 사람을 붙어주겠다고 했지만, 자원자가 단 하나밖에 없던 덕분에 나는 그날 하루 걸은 30km 남짓한 거리 동안 계속 해서 아일린 공주의 끝없는 수다를 들어야 했다. 설마 이거, 마이너 중령이 자기 얼굴에 피 튀겼다고 복수하는건 아니겠지…..? 젠장 모르겠다. 아일린 공주는 내가 다리를 다쳤다는 것을 모르는지, 아니면 신경을 쓰지 않는건지 나를 계속 재촉하면서 걷게 만들었다. 분명 걸을 수는 있지만 다리 상태가 좋은 것은 아니라고 말했는데, 어디에서 헷갈린거야? 아니 그전에, 이게 헷갈리고 하고 할 문제인가? 그건 그렇고 나는 왜 이렇게 정신이 없고 횡설수설한거지? 모르겠다.
  “듣고 있나요?”
  “에….?”
  “우으~ 너무해요. 소녀가 말하고 있는데 듣지를 않다니, 기사로서 실격이에요, 실격!”
  아일린 공주가 얼굴을 찌푸리며 내 볼을 콕콕 찌른다. 하지만 한쪽 손은 임시로 만든 목발에, 다른 한쪽은 아일린 공주의 어깨 너머로 짚고 있는 나에게 반격의 여지는 없었다.
  “미….미안해요. 조금 아파서 그래요.”
  “못 걷겠어요?”
  아일린 공주의초록색 눈이 우르우르하게 나를 올려다본다. 그렇게 걱정이 되면 아까부터 천천히 걷지, 왜 하필 대오 선두에서 걷는거냐고.
  “황족으로서 나머지 기사들을 이끌어야지요.”
  “길은 아세요.”
  “아니요.”
  그런데 뭘 이끌어.
  “괜찮아요. 선대의 영령께서 저희를 인도해주실 것이니까요. 창민경, 그런데 아파요? 못 걷겠어요?”
  뭐라고 답해야 할까? 걸을 수 있다고 할까? 아니야, 그냥 솔직하게 엄살 부리고 조금 쉬는게 나을 것 같다. 아까부터 욱신거리는게 뭔가 좋지 않은 느낌이니까.
  “조금 아프기는 한데요.”
  “못 걷겠어요?”
  “아니, 그정도는 아닌데……..”
  “그럼 빨리 가요.”
  뭐? 아니, 분명 내가 아프다고 했잖아! 왜 또 그렇게 해석하는건데? 나는 아일린 공주를 쏘아보았지만 공주는 내 분노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헤헤. 소녀, 정말 기쁘답니다. 후소 놈들에게 복수했네요. 사냐도 이기고, 후소 놈들에게도 본때를 보여주고. 참 잘 되었어요.”
  내 다리만 빼면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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