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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 나이츠 - 창공의 기사단


Sortie 008 - 피의 꽃 Part 1


  1
  "전체 차렷!"
  "사냐 공주님께 대하여, 경례!"
  처처척! 절도 있는 포즈와 함께 제복 접히는 소리가 갑판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는 왼쪽부터 차례로 단상 위의 나와 사냐 공주를 향해 신고를 시작했다.
  "에르데 제국 해군 제 12 항공 기사단 소속 릴리엘 마세나 중위!"
  "에르데 제국 제 11 항공 기사단 소속 요하네스 미야 소위!"
  "에르데 제국 제 11 항공 기사단 에간 펠츠 소위!"
  "이상, 3인은 에르데 황실 직속 제 44 항공 기사단에 배속된 것에 대하여 신!고! 합니다!"
  강하게 부는 짠 바닷바람이 우리의 제복을 휘날리게 했다. 아..... 적당히 하고 그만 들어 갔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물론 언제나 그렇듯이 내가 바라는 것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게 끝이 아니라, 우리 기사단이 새로이 배속된 항공모함 승조원들과 새로운 동료들의 축하 연설이 있으니까. 놀랬냐? 우리 지금, 항공모함에 있는거다.
  "400년하고도 7년도 ​전​에​.​.​.​.​.​.​.​.​"​
  아..... 연설이 길어지려고 하고 있어.......
 
  내가 귀환하고 나서도 나는 한차례 전투 초계에 당해야 했다. 돌아오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출격한 나는 그 정신 없고 피곤한 와중에도 3기나 격추해내는 쾌거를 달성했고, 최총 격추수 22기를 공인받아 공식적으로 에이스로 올라갈 수 있었다. 안해본 사람들은 이 기분 모르겠지. 절대 모를거야. 얼마나 이게 기쁜 일인지! 나의 에이스 등극을 축하한다고 갈란드 중장이 황제의 대리로 나에게 와서 제국의 아이언 와이 훈장을 수여한 다음, 커스텀 도장을 할 수 있는 권리까지 수여해줬다. 거기다가, 황실 기사단임에도 불구하고, 개인 문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까지 받고 말이다. 내가 아무리 프로파간다용이라고 해도 말이야, 이건 조금 편애 수준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잘 봐주는게 아닌지 무섭단 말이지. 생각을 해봐라. 공식적으로, 나는 에르데 제국의 기사다. 그리고 우리의 장비는 전부 황실의 재산이다. 황실 직속 기사단이니까. 그런데 거기다가 내가 원하는 고유 도장과 노즈 아트를 그릴 수 있다는 거다. 정말 대단하지 않냐? 이거?
  ​"​.​.​.​.​.​.​.​.​.​.​하​여​,​ 우리는 ​언​제​나​.​.​.​.​.​.​.​.​.​"​
  그건 그렇고, 사냐 공주 연설은 언제 끝나는거야? 빨리 끝내야자 기서 도장을 할거 아니야?
 
  우리 제 44 항공 기사단은 정원 마세나 중위, 미야 중위, 그리고 펠츠 소위의 합류로 정원이 8명으로 증가했다. 통상적인 기사단의 정원수가 12명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턱없이 부족한 규모이지만 우리는 부대 특성장 잠시라도 전장에서 떨어질 수가 없다. 덕분에 휴식과 재정비 같은건 다 때려 치고 나의 합류와 동시에 바로 요크타운급 정규 항공모함 ESS 호넷에 배치되었다. 이말은 다시말해, 우리 기사단은 이제 해군 소속이라는 말이다. 지상근무 부대에서 항공모함 탑재 항공대로 변한건 대찬성이지만, 그 때문에 내 PK 73을 포기해야 했다는 것은 매우매우 불찬성이다. 기수에 기총이 몰려있어 무장의 집중력이 높은 PK 73을 포기하고 대신 받은게 고작해봐야 Eu-40F '블랙 캣' 전투기였으니까. 사실 PK 73을 굳이 포기할 이유는 없었지만, 높으신 분들이 하도 부품 수급이 어렵다고 징징대는 덕분에 포기해야만 했다. 누군 이러고 싶겠냐고. 거기다 블랙캣 전투기의 성능이 더 좋은 것도 아니다. 기총수는 주익에 중기관총 8정이라 무장수는 늘어난 것 같지만, 오히려 구경은 줄었다. 12.5mm라고! 12.5mm! 믿을 수 있어? 20mm도 아니고 12.5mm라니! 무슨 문 두드리는 것도 아니고! 거기다 그 못생긴 외모라니! 이걸 전투기라고 만들어 놓으거야? 이건 그냥 맥주통에다가 날개 달아놓은 거잖아.
  "그러게 말이야."
  갑판 끝에 앉아 다리를 공중에 차고 있던 내 옆에 다가온 나탈리가 말했다.
  "같은 공랭식 엔진이라도 저렇게 기수를 못생기게 만들수 있는건지 모르겠어."
  PK 73의 기수가 작고 아담하고 예쁘다면, 저건 무슨 거대한 먹장어가 입을 벌리고 있는것 같다.
  "적절한 비유네. 뭐 마력수가 PK 73이랑 같다는 사실에 만족해야지 어떻해."
  그렇네. 불만족스러운 전투기에게서 받는 이런 불만족스러운 기분을 나탈리가 어느정도 커버해주니 다행이다. 나탈리는 그냥 내 옆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게 심적 안정감을 주는 친구니까.
  ​"​.​.​.​.​.​.​.​.​.​.​"​
  이런. 너무 바라봤나보다. 나탈리가 무슨 할말이 있는줄 알고 나에게 시선을 돌리잖아.
  "왜?"
  "아니, 그냥."
  절대 밝은 태양빛에 반사된 그녀의 피부가 아름다워서 그런거 아니다. 나탈리랑 나는 그냥 친구니까.
  "에헤~"
  뭐가?
  "너 지금 나 예쁘다고 생각한거야?"
  ​"​.​.​.​.​.​.​.​.​.​.​"​
  여하튼 내 속마음은 다 꼬집어서 본다니까.
  ​"​.​.​.​.​.​.​.​.​뭐​ 사실이니까."
  "풋"
  너도 참 웃기단말이지. 칭찬해도 그냥 웃어 넘기니까 말이야. 그렇게 생각한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려 푸른 하늘에 반사된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짠내음의 산들바람이 내 볼을 간지럽혔다. 그래서 나는 나탈리가 혼자서 뇌까리던 말을 미처 듣지 못했다.
  "사람 애태우는 법은 정말 잘 안다니까."
 
  뭐 어쨌건, 우리 44 항공 기사단을 포함한 31 기사단, 22 기사단, 17 기사단, 도합 4개 전투 항공 기사단을 탑재했고, 그 외에도 대함 공격부대인 1개 뇌격 기사단, 그리고 1개 급강하 기사단을 탑재한 호넷은 우리의 참가로 완벽하게 항공모함 전투단 Task Force 38을 완성할 수 있었다. 정규 항공모함 ESS 호넷과 ESS 레인저, 호위 항공모함 2척, 중순양함 1척, 경순양함 3척이라는 규모의 전력이 모인 TF 38은 에르데 제국 해군이 동원할 수 있는 함대의 3분의 1이었다. 개전 직전 사파이어만에서 주력 전투함들이 격침당한게 조금 아프기는 했지. 어쨌건, 우리는 빅토리아 대륙 바로 위, 후소 제국의 빅토리아 침공 거점이자 후소 해군 항공대 폭격기 세력의 거점인 기니아 제도를 치기 위해 빅토리아 시티를 떠났다. 우리 TF 38 소속의 전투함들 뿐만 아니라 3천명 규모의 상륙부대 또한 같이 말이다. 이른바 '불의 고리' 작전이라고 명명된 이번 작전은 3천명의 해병대 상륙부대가 기니아 섬의 우리 기지에 합류하는 동안, 우리, 그러니까 해군 함대는 남쪽으로 내려오는 후소 제국 기동 함대를 저지하는게 임무다. 하지만 나나 사냐 공주나, 나탈리나 가장 냉정한 에리카 대위도 상황을 조금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다.
  "이번 작전은 쉬울거에요."
  사냐 공주를 시작으로 나탈리와 에리카 대위도 거들었다.
  "맞아. 당장 가용 가능한 전투력의 3분의 1을 동원하는 거잖아. 전함이 없다는게 아쉽지만, 전투기를 200여대 가까이 동원하는 작전이라고? 공중 우세는 확실히 장담할 수 있으니까.
  "프로필라이넨 중위의 말이 맞습니다. 공중 우세를 확실히 장담할 수 있으니,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다는게 오라버니의 전언입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기습적인 에도 공습 때문에 이놈들이 조금 쫄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 결론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상황은 빠르게 돌아갔다.
 
  2
  "나탈리"
  "응?"
  "그런데 왜 너는 나랑 같은 방에 있는거야?"
  "왜냐니? 룸메이트잖아, 우리."
  "그러니까 왜 우리가 룸메이트냐고?"
  나탈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2층 침대에서 고개를 빼곡 내밀고 나를 처다보았지만, 나는 너를 이해할 수가 없다. 넌 여자고 난 남자잖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내가 뭘 할수도 있는지 생각은 안하는거냐?
  "그냥. 요즘 네가 사냐 공주에 하도 푹 빠져 지내길래 나도 조금 그 시간을 만회하고 싶었을 뿐이야."
  누가 푹 빠져지낸다는거냐.
  "거기다가 불미스러운 일이 뭔데? 나한테 이런저런그런짓을 하려고?"
  ​"​.​.​.​.​.​.​.​.​.​.​.​.​.​"​
  그렇게 받아치면 할말이 없음죠.
  "네가? 나한테?"
  하긴. 내가 설마 네 몸에 손을 대겠냐만은. 설마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뭐, 그렇긴 하네."
  "그러니까 문제 없지?"
  응. 아쉽게도 말이야. 너랑 같은 방에서 잠을 잔다고 생각하니까 이상한 느낌이라고.
  [삐익 삐익]
  그리고 비상벨이 나를 구제해주었다. 응? 잠깐. 비상벨?
  ​"​이​거​.​.​.​.​.​.​.​.​.​ 비상벨 맞지?"
  "응. 맞는데."
  그리고 나랑 나탈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브리핑 실을 향해 걸어갔다.
 
  부대 당직을 서고 있던 에리카 대위가 오늘의 브리핑을 맡게 되었다.
  "후소 제국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게 에리카 대위가 가장 먼저 한 말이었다.
  "우리 해군 잠수함 1척이 기니아 제도 북부 해안선 근처에서 이동하던 후소 함대를 포착했습니다. 대잠 초계망이 예상보다 촘촘해서 자세한 근접 정찰을 하지는 못했지만 뒤이어 육상기지에서 발진한 아군 정찰기가 후소 제국 함대의 구성을 정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아군 정찰기는 위치가 들켜 무전으로 정보를 전송하는데 성공하고 격추당했습니다. 그리고 이게, 정찰 사진입니다."
  뒤이어 에리카 대위 옆에 있던 사병 하나가 투영기에 투명한 사진을 하나 올렸다. 어디보자. 당장 구별할 수 있는 대형함만 무려 10척이나 되는군. 뿐만 아니라 주변에 산개된 호위함들까지 합치면 대략 30여척 정도의 함대로 규모가 확장된다. 정말, 대규모 함대다.
  "현재 우리 정보부대가 확인한 바로는 5만톤급 정규 항공모함만 3척에 소형 호위 항공모함 2척, 순양전함 2척,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1척, 그리고 구축함 13척입니다. 그 외에도 상륙 작전을 통해 병력을 증강시킬 모양인지 수송함도 12척이나 데리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함대가 방어진형이군. 이 중앙에 있던 오밀조밀한 것들이 다 수송함들이었다고? 12척이나? 6천명은 되는 규모잖아. 기지 주둔 병력 500과 증원된 해병대 병력 3천으로 되겠어?
  "예상보다 큰 규모에 함대 사령부는 긴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에게 전투 초계에 나서라고 하더군요. 우리를 통해 적의 전력을 떠볼 생각인 것 같습니다."
  CAP, 전투초계로 적이 어디에 있을지 정찰하라니, 우리가 무슨 우주 전투 차량인줄 아는가봐?
  “에리카 대위.”
  “예?”
  “적 함명은 파악 되었어?”
  솔직하게 말해 함명은 관심 없다. 내가 알고 싶은건 항공모함에 탑재된 비행단의 단대호다. 그게 우리 기사단의 주적이 될 놈들이니까. 내 질문을 정확하게 알아들은 에리카 대위는 바로 질문의 답을 주었다.
  “적의 정규 항공모함은 쇼카쿠와 즈이카쿠, 그리고 쇼호로 판독되었습니다. 적의 순양전함은 공고급 순양전함 2척으로 판단되며, 정확한 함명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한담. 후소 제국은 정예 중의 정예인 제 1항공함대 소속 제 1, 2 항공 전대를
  투입하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그리고 이건 전혀, 전혀 좋은 소식이 아니다.
  ​“​…​…​부​기​사​단​장​님​?​”​
  “응?”
  “명령을.”
  나는 사냐 공주를 슬쩍 처다보았지만, 사냐 공주는 그냥 웃고만 있었다. 누가 기사단장이야?
  “응? 왜요, 창민경?”
  “아니, 기사단장은 너잖아.”
  “신경쓰지 마시고 빨리 명령이나 내려주세요, 창민경.”
  “………”
  뭔가 이상하지만 상관 없겠지. 그건 그렇고, 이걸 어떻게 해야 한다……. 우리가 초계하면서 커버해야할 범위는 기니아 제도 북부 해역, 600 제곱 킬로미터 정도의 구역이다. 일단, 너무 넓다. 이 넓은 해역에 고작 8기의 정찰기를 투입해서 뭘 어쩌자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어. 사실 1기씩 따로따로 8구역으로 나눠도 되지만, 기니아 제도 해안선 근처에는 아군 견시들이 있고, 에르데 제국 구축함대와 잠수함대도 몇척씩 떨어져 퍼져 있다. 그렇다면 굳이 우리가 전부 커버할 필요는 없겠지. 2기씩 4개 편대로 나누어서 하자.
 
  편대 조직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신입 3명은 유나 중위까지 합쳐 4명으로 묶은 다음 2개 편대로 조직, 북서쪽 방향의 수색을 맡겼다. 문제는 내 파트너. 사냐 공주와 나탈리가 동시에 나에게 윙맨 신청을 해버렸다. 나도 사냐 공주를 고르고 싶었지만, 왠지 모르게 나탈리를 골려야 할 것 같은 의무감 때문에 나탈리를 골랐다. 아니, 정확하게는 지금까지 내 윙맨은 언제나 타날리였으니까, 나탈리를 고른 것 뿐이다. 절대, 절대 나탈리의 살의가 가득 담긴 시선때문이 아니다. 절대 아니야…… 어쨌든, 윙맨 파트너를 정한 다음의 일은 일사천리로 쉽게 풀렸다. 호넷이 맞바람을 향해 선수를 돌리기를 기다린 다음, 엔진 출력을 최대로 올리고 갑판을 떠나면 되는 것이니까. 지난번 폭격기로 이륙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아무런 이륙 사고 없 차례로 이륙한 우리 편대 8기는, 각자의 윙맨과 함깨 4개의 엘리먼트로 떨어져 나가 각자의 수색 방향을 향해 나아갔다. 물론, 내 전투기 뒤에는 지금까지 대로 나탈리가 따라왔다.
  전혀 익숙하지 않은 RS-120TT 공랭식 엔진의 시끄러운 진동과 함께, 나는 조종석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단둘이 비행해 보는것도 정말 오랜만이네]
  뭔가 그리운듯한 나탈리의 목소리. 그렇군. 이렇게 단둘이 비행해보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다. 그날, 스토왈트 소령의 추격을 물리치고 홈 아일랜드를 떠난 그날 이후로, 아니, 정확하게는 졸업식의 그날 이후로 말이다.
  [네탓이야.]
  “뭐가?”
  [이상한 느낌이 들잖아. 졸업하기 전에는 항상 붙어 다녔는데, 이제는 이렇게 둘이 비행하는게 이상하다고. 다 너탓이야.]
  “잠깐만, 그게 왜 내탓이야?”
  [네가 만날 사냐공주의 응석만 받아줘서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는거잖아.]
  누가 누구 응석을 받아줘? 그리고 사냐 공주는 나한테 응석 피운 적도 없거든?
  [남들이 보면 코웃음을 치겠다.]
  “………..”
  나탈리에게 별 할 말은 없다. 내가 응석을 받아줬다는거나 나탈리를 거들떠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나탈리랑은 같이 보내던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거에 대해선 정말 할말이 없다. 내가 의도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 말이다.
  “미안.”
  [네가 여자한테 인기가 너무 많아서 그런거야. 책임져, 이창민.]
  누가 여자한테 인기가 많다고?
  [너.]
  “너, 내 친구 맞아? 사람 바뀐거 아니지?”
  […….바보.]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나탈리가 저런 말을 한다는게 이상하다. 졸업하기 전에 친구라고는 나탈리 하나밖에 없던 내가 여자에게 인기가 많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다.
  […….. 정말 바보.]
  ……..화제를 바꾸자.
  “아, 나탈리. 너 그때 네가 임관때 준 선물 기억하지?”
  ​[​기​억​하​는​데​…​…​.​?​ 그게 뭐?]
  “아니, 지난번에 잘 썼다고.”
  앞에 있는 구름층을 피해 오른쪽으로 턴을 하면서 나는 말을 이었다. 관성 때문에 몸이 한쪽으로 쏠렸지만, 이제는 숙달된 몸이다. 내 몸을 단단하게 조이고 있는 벨트가 쏠리는 몸을 바로잡아 주었을 때, 나는 말을 이었다.
  “그 권총 덕분에 살았거든.”
  나탈리가 내 임관식 때 준 선물은 다름아닌 권총이었다. 지구에서 직수입해온 콜트 M1911 권총이었다. 45 구경이라는 막강한 위력의 권총은 지난번 후소 제국과의 교전에서 탁월한 효과를 드러냈었다. 한발한발 쏠 때마다 나가는 확실한 신뢰성과 한번 맞으면 그대로 제압해버리는 45 구경의 강력한 총알. 그때 그게 아니었으면 나는 아마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 살아있는것 자체가 기적이지.
  [흥. 그때 그게 쓸모 없을거라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
  “파일럿이 권총을 언제 쏴보겠어?”
  [스토왈스 소령님께서 항상 준비는 지나치지 않다고 강조하셨잖아.]
  “………..”
  뭐 그건 그렇군.
  [그래도 그거 잘 썼다니, 잘 됬네.]
  “말했잖아. 그거 아니었으면 난 죽었을 거라고.”
  [……..남편 잘 보조하는게 아내의 역할이니까.]
  “응?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나탈리가 뭐라고 한 것은 같은데 워나 작게 말해서 잘 듣지는 못했으니까. 고개를 뒤로 옆으로 돌려 나탈리를 바라봤지만 나탈리는 그저 고개를 앞으로 향한채 내 시선을 무시했다. 파랗던 하늘은 어느새 저녁 6시 반쯤이 되자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시간 한번 빠르네.
  [기억나?]
  침묵을 먼저 깬건 나탈리였다.
  “응?”
  [아니, 노을 보니까 생각나는게 있어서.]
  “아. 그때 그이야기?"
  무슨 이야기인지 궁금한가? 그렇다면 얘기해줄 수도 있다. 나와 나탈리의 소중한 추억중에 하나니까. 그때가 아마, 우리가 생도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하루 휴가를 받아봤을 때였을거다. 거의 6개월동안 사생활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심한 인격적 모독을 스토왈트 소령에게 들어가면서 마음고생을 해온 우리에게 10년 묶은 가뭄의 단비와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얼마나 신났던지. 그렇게 행복한 시간을, 나는 나탈리와 함께 바닷가에 가서 놀았다. 그때도 비행기만을 사랑했던 나에게 있어서 유일한 친구가 나탈리였으니까, 나탈리의 바닷가 가자는 말을 쉽게 거절할 수 없었다. 하지만 거기서 문제가 생겼다. 나탈리의 반지를 잃어버린거다. 바닷가에서 수영을 하다가 어느새 손가락에서 쏙 빠져버렸다는 기가막힌 이야기다.
  [그거…….네가 준거였는데…….]
  “잃어버린건 어쩔수 없었잖아.”
  나탈리는 정말 슬퍼했다. 내가 준거였는데 제대로 찾지도 못하고 돌아서야 했으니까. 나탈리가 이 얘기를 꺼냈을 때 마음 한구석이 조금 뜨끔하기는 했지만, 이미 지난 이야기다. 가슴 한쪽이 아려오는구나.
  [그래도 말이야, 나 그날 너무 행복했어.]
  “나도 좋았어.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풀 수 있었잖아.”
  [………..]
  또 다시 이어지는 뭔가 이상한 침묵이다. 나는 다시한번 나탈리를 돌아보았고……. 으악, 나를 죽일 듯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어!
  “오…왜?”
  [……바보]
  오늘 제가 왜 이렇게 매도 당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 좀 설명 해주실래요? 일단 나탈리의 기분을 좀 풀어줘야 겠다. 등 뒤를 맡기고 싸우는 사람의 기분이 좋지 않으면 안되잖아. 물론 나탈리를 못믿는게 아니라, 나탈리의 안전을 생각해서다. 전투를 치루는 사람의 마음이 우울하면, 죽을 확률도 늘어난다. 언제나, 자기는 살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나탈리?”
  [……..뭐.]
  조금 차가운 목소리지만, 이 말을 들으면 조금 달라지겠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밖을 한번 더 쓰윽 훑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동안 같이 시간을 못보냈잖아.”
  [지금 같이 있는데.]
  “아니, 지금 말고. 나중에 말이야.”
  [그게 뭐?]
  “나중에, 후방으로 돌려져서 휴식을 취할 때, 잠깐 같이 산책이라도 나갈까?”
  나탈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슬쩍 옆을 보니 고개를 도리도리하면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거냐, 너?
  “어때?”
  [너 지금……. 데이트 신청 하는거야?]
  그렇게 되나? 여자랑 남자랑 같이 나가면 데이트인거야? 그런거야? 몰랐다. 잠깐, 그럼 이 비행도 데이트가 되나?
  ​“​그​렇​게​…​…​되​나​?​”​
  [………..]
  나탈리는 아무말 없이 잠깐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들었던 나탈리의 쾌활한 목소리 중에서 가장 즐거운 목소리로, 나탈리는 말을 이었다.
  [좋아! 약속이야! 다음에 돌아가면 데이트 하는걸로!]
  친구랑 놀러 나가는데 데이트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나탈리가 편하다면 그걸로 된거겠지? 된 걸꺼야………. 나중에 이 일이 사냐 공주에게만 흘러들어가지 않도록 하면 된다. 나탈리는 즐거운지 어느새 콧노래 까지 흥얼거리면서 비행하고 있었다. 나참, 그렇게 좋나.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면서 지는 눈부신 저녁 노을을 피해 나는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하늘에 비친 보랏빛 바다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아니. 아니다. 마치 누가 검은 도화지에 분필선 하나를 그어놓은 것 처럼 하얀 선이 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여러개. 그 선의 끝을 훑으려고 했지만, 재수 없게도 구름에 가려버렸다. 일단 내가 발견한 것 부터 확인하자. 나는 바로 나탈리를 호출했다.
  “나탈리.”
  [왜애?]
  미안. 아무래도 즐거운 기분을 망치게 될 것 같아, 나탈리. 정말 미안해.
  “11시 방향, 방위 323도쯤에 항적이 보이는데, 너는 어때?”
  [잠깐만.]
  나탈리의 목소리가 바로 변했다.
  [흐흥……. 정말이네. 항적 맞는거 같아. 아, 구름에 있어서 안보였는데, 저기 있네. 적 함대. 창민아, 11시 반 방향, 방위 355도.]
  나탈리의 말을 따라 나는 시선을 옮겼다. 정말이군. 있다. 찾았다. 아까 에리카 대위가 보여줬던 투영기 사진과 똑같은 대형을 취하고 있는 대규모 함대였다. 피아 확인은 쉽다. 항공모함 갑판 가운데 그려진 거대한 붉은 원.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해도, 문제 없겠지? 후소 제국의 기동전단이다.
 
  3
  고공 4만 피트라는 고도는 꽤나 춥다. 하지만 단발 전투기의 특성 덕분에 나는 그다지 추위를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엔진이 바로 앞에 있잖아. 하지만 내 몸은 추위와는 전혀 다른 이유 때문에 떨고 있었다. 긴장감이다. 조금 바보 같긴 하지만 웬지 긴장된다. 처음으로 해보는 항공모함 작전이라서 그런걸까? 홈 아일랜드에 있을 때 모의 훈련을 충분히 한 줄 알았는데 말이다. 나참. 덕분에 나는 똑같은 말을 여러번 반복하고 있었다.
  “나탈리, 신호는 보냈지?”
  [20번째야, 창민아. 적당히 하지?]
  ………나탈리의 인내심도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구나.
 
  후소 제국의 기동전단을 발견하자마자, 나는 나탈리를 통해 호넷과 교신했다. 현재 초계에 나가있는 우리 44 기사단과 급강하 폭격 기사단 1개가 바로 이곳으로 집결하겠다고 했고, 나는 속도를 최저 속도로 줄인 채 천천히 후소 제국 기동전단 상공을 날고 있었다. 여기저기 퍼져있는 구름 덕분에 우리는 아직 들키지 않았지만, 30분 정도 걸릴 예정이었던 증원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연료는 보조 탱크 덕분에 아직 73% 정도 남아 있지만, 날이 점점 어둑어둑 해지는 상황에서 빨리 귀환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말이다. 후딱 해치우고 복귀 해야지. 전천후 전투기가 아닌 이 쓸모없는 블랙캣 전투기는 야간 작전이 불가능하단 말씀이다, 이말이다. 뭐, 모든 항공모함 함재기들이 그렇지만.
  [창민아, 온다. 6시]
  [창민경, 많이 기다렸죠? 저희가 왔어요~]
  나탈리의 말과 함께 사냐 공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냐 공주, 요즘 왜 이렇게 하이 텐션인걸까……….
  [제 43급강하 폭격 기사단 기사단장 맥스 레슬리 중령이다.]
  “호위를 맡은 제 44 기사단의 부기사단장, 이창민 대위 입니다.”
  [귀관과 같은 에이스가 호위를 해준다니, 믿고 우리 등을 맡기겠네.]
  헤헤. 아무리 내가 공식 에이스라지만 조금 낯간지럽고 쑥스럽군.
  “하하. 티끌 하나 나지 않고 모두 무사히 돌려보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좋아, 그 기세다, 대위.
  [잠깐, 왜 저는 지휘체계에서 제외된 것인가요, 중령?]
  사냐 공주가 중간에 끼어들어 칭얼대지만, 레슬리 중령은 재치있게 넘겼다.
  [미천한 신분의 제가 감히 공주님께 말씀을 올릴 수 없어서 그랬습니다. 용서 하십시오.]
  재치가 아니라 아부 같지만 말이다. 어쨋든, 이곳은 전장이고, 빨리 해치우고 모함으로 귀환해야 한다. 안그러면 어두운 밤에 착륙도 못하고 고기밥 신세가 될테니까.
  …….이 근처 해역에 식인 상어가 많다 하더라. 설마 크라켄도 나오는거 아니겠지?
  [이제 잡담은 그만 하고 슬슬 공격을 개시하죠, 부단장님.]
  "알았어, 대위. 중령님, 엄호하겠습니다.”
  [좋아. 후소 제국 놈들의 엉덩이를 걷어차주자고.]
  Let’s kick some Jap’s asses. 과거 우리 세계의 미국에서나 쓰이던 비속어를 에르데 제국에서도 들을 수 있을줄은 몰랐네. 레즐리 중령은 그 무전과 함께 10km 전방의 적 함대를 향해 편대를 짜면서 날아가기 시작했고, 그에 맞춰 우리 44 기사단도 2개의 핑거포 진형을 형성한 채 그 뒤를 따라갔다. 일단 공식 석상에서는 사냐 공주가 기사단장이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사냐 공주를 포함한 에리카 대위나 유나 중위, 그리고 다른 에르데 제국의 리히트들은 사냐 공주 대신 나를 실질적인 44 기사단의 지휘관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덕분에 내 무전 콜사인도 우리 44 기사단의 통신명칭인 '파파가이' 끝에 01이 붙게 되었다.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이제는 익숙하다.
 
  우리가 5km 거리까지 접근했을 때야 후소 제국은 공습을 눈치챘다. 우리를 요격하기 위해 함선에서 서치라이트로 켜고 어둑어둑해지는 밤하늘을 샅샅히 훑기 ​시​작​했​지​만​.​.​.​.​.​.​.​.​ 항공모함 함대전에서 이건 말 그대로 바보짓이다. 지상기지라면 야간 전투기 운용이 가능하다. 하지만 항공모함이라면 다르다. 갑판도 좁고 짧고, 어두워서 제대로 된 빛을 비쳐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어쩌겠냐? 우리의 공격은 이미 시작되었는걸. 항공모함들에서 하나 둘 요격기들이 발진하기 시작했지만, 둔중하고 무거운, 그래서 더더욱 좋은 급강하 성능을 가진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들에게 제동을 걸 수는 없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붉은 다이빙 플랩이 펼쳐진 돈틀리스들은 6기씩 2개의 편대로 나누어 후소 제국의 기동전단을 향해 급강하를 시작했다. 귀를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고공에 울려퍼지고, 빠르게 멀어지던 돈틀리스들이 다시 급상승을 시작했고, 거의 수직에 가깝게 내려꽃힌 250kg 철갑탄들이 물기둥과 불기둥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공격의 한가운데는 가장 가까이 있던, 함대 외곽에서 요격기들을 날려보내던 후소 제국의 소형 항공모함이 있었다. 에르데 제국이나 후소 제국이나, 브리타니아 제국을 제외한 테라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항공모함 갑판을 나무로 만든다. 덕분에 250kg이라는 무거운 철갑탄은 운동에너지로 전환된 위치 에너지의 보정을 받아 손쉽게 나무 갑판을 부수고 들어갔고, 관통 신관이 작동함과 동시에 격발했다. 제대로 명중했나보다. 무려 2개의 불기둥이 항공모함에서 솟아나고 있으니까. 명중당한 후소 제국의 항공모함은 아무런 움직임을 멈춘 채 가만히 해류와 관성의 힘으로 앞으로 흘러갔다. 갑판에 주기되어 있던 몇기의 전투기들과 뇌격기들이 힘없이 바다로 빠졌다. 뜨거운 불길이 항공기들을 덮쳤고, 연속적인 폭발이 선체 이곳저곳에서 일어났다. 확실한 격침이다!
  [격침!]
  [적기 15기, 12시 방향, 저고도!]
  레즐리 중령의 목소리와 함께 에리카 대위의 목소리가 무전을 통해 내 귀로 들어왔다. 이건 좀 불편한 사실이지만, 조종석에 앉은 나로서는 아래를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에리카 대위가 하는 대로 따라했다. 위쪽만 보인다면, 위와 아래를 뒤집으면 되지. 나는 조종간을 옆으로 뉘었고, 뒤이어 온 세상이 반바퀴 뒤집혔다. 15기와 그 뒤에서 달아오는 하얀 전투기들 수기가 상승하면서 돈틀리스들을 추격하고 있었다. 저 전투기, 처음 보는 놈들 같은데. 분명, 지난번에 받은 정보에는 고정식 랜딩기어가 달린 함재기였다. 신형기인가? 커다란 기수에 점점 좁아지는 꼬리, 그리고 굉장히 커다란 타원형 날개. 어디서 많이 본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엔진 근처의 배기구에서는 불이 화악 타올랐지만, 저렇게 빌빌거리는 엔진으로는 여기까지 올라오다가 속도를 잃어버린다. 현재 우리의 속력은 고도 8천피트에서 100노트. 적기는 대략 고도 6천피트까지 상승하려고 하고 있다. 그것도 저속으로 말이지. 속도나 고도에서 우리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 숫적으로는 조금 밀리겠지만, 일단 이 블랙캣을 한번 믿어보자.
  “적기 육안 확인. 12시 방향, 방위 008에서 돈틀리스를 추격 중이다. 파파가이 10은 나를 따라 적기의 뒤를 잡고, 파파가이 20은 뒤쪽에서 대기하다가 우리의 공격이 끝나면 바로 공격한다. 이의?”
  [없어요. 창민경의 작전대로 진행해요.]
  [파파가이 21, 수신.]
  “나탈리, 뒤를 부탁해.”
  [라져.]
  후소 제국의 전투기들이 돈틀리스들의 꼬리를 잡았을 때, 나는 반전되어 있던 기체 그대로 강하를 시작했다. 아래로 쳐진 기수가 공기를 가랐고, 수억개의 공기 분자들이 전방의 방탄 유리창과 강철 창틀을 마구 치기 시작했다. 고도계의 바늘이 반시계 방향으로 2바퀴 돌고, 속도계의 바늘이 650 근처를 가리켰을 때, 나는 다시 한번 조종간을 옆으로 뉘였고, 거꾸로 날고 있던 내 기체는 충격과 함께 기수를 번쩍 들면서 수평을 되찾았다. 캐노피 위에 달린 백미러에 나탈리와 사냐 공주, 에리카 대위의 전투기가 들어온 것을 확인한 나는 몇천피트 아래에서 돈틀리스를 추격하면서 날고 있는 후소 제국의 전투기들의 뒤로 다가갔다. 돈틀리스의 7.62mm 기관총의 예광탄 줄기가 이미 어둑어둑해진 기니아 제도의 밤하늘을 갈랐지만, 후소 제국 전투기들은 간단하게 피하면서 천천히 그 거리를 좁혀나갔다. 하지만 아직 우리의 접근은 모르는지 아무런 회피기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들 개별 사격 준비해요. 나는 400m 전방에 있는 놈. 나탈리는 그 오른쪽의 윙맨. 사냐 공주는 430m 전방에 있는 놈, 에리카 대위는 그 왼쪽에 있는 놈으로. 4기 격추한 다음 바로 고도를 올린 다음 개별 추격해요.”
  [[라져.]]
  아무런 이의도 없다. 모두들 가만히 내 명령을 따를 뿐이었다. 이거, 조금 묘한 느낌이 들지만…….. 이런, 집중하자, 집중! 나는 신중하게 페달을 움직여 러더의 트림 각도를 조절했다. 그리고 조준기의 한가운데에 적기의 꼬리가 들어왔을 때, 나는 왼손을 들어 준비 완료라는 수신호를 보냈고, 뒤이어 뒤쪽에서도 손을 들어 답신했다. 준비 완료다.
  “사격!”
  말과 함께 나는 조종간의 방아쇠를 당겼고, 주익에서 전해져오는 덜덜거리는 진동과 함께 노란색 예광탄 궤적들을 바라봤다. 마치 빨려들어가듯이, 예광탄들은 그대로 후소 제국 전투기의 꼬리날개에 명중했고, 무게 중심을 잃어버린 전투기는 아무런 회피 기동조차 하지 못한채 바다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부서진 나무 파편들이 캐노피를 노크하고 지나갔고, 나는 그 다음 제물을 찾기 시작했다. 그제야 우리가 자신들의 뒤에 있다는 것을 알아챈 후소 전투기들은 재빨리 산개하기 시작했지만, 우리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파파가이 20, 유나 중위와 3명의 신입 기사들의 편대가 급강하를 하면서 또한번 공격했고, 3기의 적기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화염에 휩싸인 채 바다로 떨어졌다. 황급하게 산개하는 후소 전투기들을 엄호하듯 우리를 향해 적 함대의 대공포화가 격해졌지만, 대공포화 쯤이야, 전투기로는 간단히 피할 수 있지. 나는 간단하게 지그재그 비행을 하면서 대공포화를 피한 다음 편대 전체를 호출했다.
  “파파가이 01에서 파파가이 00에게. 돌아가자.”
  [레즐리 중령이다. 우리도 귀환하겠다.]
  마지막 빛을 하늘에 비추면서 해수면 아래로 천천히 사라지는 해를 향해 기수를 돌린 나는 편대를 이끌고 모함으로 항로를 잡았다. 1기 격추. 돌아가서 검은 줄을 1개 더 그려넣을 수 있다. 이로서 23기 격추, 달성이다!
 
  야광으로 빛나는 계기판들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나는 천천히, 신중하게 기수를 들어올렸다. 항공모함에서 비춰주는 대공 서치라이트가 눈이 부실 정도로 나에게 빛을 퍼부어주고 있었지만, 사실 별 도움 안된다. 눈만 부신걸. 오히려 더 중요한건 계기와 고도계다. ​2​0​0​…​…​.​1​5​0​…​…​1​0​0​…​…​.​ 덜컹, 하는 조금 강한 충격과 함께 기체 전체가 요동쳤다. 그것이 신호임을 깨달은 나는 주저 없이 스로틀을 뒤로 당긴 다음 브레이크를 밟았다. 꼬리의 테일 후크가 착함용 와이어에 잘 걸렸는지 팽팽한 강철 밧줄이 나를 뒤로 잡아당겼고, 나는 그대로 캐노피를 열고 블랙캣 전투기 밖으로 뛰어내렸다. 야간 착함이라는 말도 안되는 짓을 성공시켰다! 바다 위에서 진행되는 항공모함 착함은 정말 어려운 과정이다. 게다가 지금 시간음 밤. 아무리 달빛이 해수를 빛춰주고 있다고 해도, 어려운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나는 착륙할 때 아무런 흠집 하나 없이 고르게 착륙할 수 있었다. 내가 착륙한 다음 다른 편대원들도 하나 둘 착함을 시작했고,
  야간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무사히 우리 기사단과 급강하 기사단은 착륙을 마쳤다. 기체에서 내린 모두는 다들 스트레스와 피로를 호소했지만, 오늘 항공모함 격침이라는 예상 외의 전과에 즐겁게 웃으면서 항공모함 안으로 들어갔다.
  “나탈리, 4기만 더 격추하면 되네.”
  누군가 지나가는 인기척을 느낀 나는 그렇게 말했다. 나탈리다. 어두워서 그녀의 얼굴을 잘 보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친한 친구다. 그것도 여기서 어렸을 때 부터 같이 날아온. 내가 나탈리의 기척 조차 눈치를 못챌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응? 으응…. 고마워. 너도……..”
  “뭐 급해?”
  나탈리는 어째 내가 말을 거는걸 반기지 않는 모양이다. 웬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나와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것 같다. 하지만 이해가 안되는데?
  “응? ​아​니​…​…​그​게​…​…​…​”​
  아, 화장실인가 보다. 미안, 내가 괜히 잡았네, 나탈리. 빨리 가. 그녀의 눈가 언저리가 조금 빨갛다고 생각했지만, 그때 나는 단순히 부끄러워서 그런 줄 알았다.
 
  생각보다 늦어진 귀환이어서 함대 사령관 플레이크 제독이 조금 화를 냈지만, 사냐 공주가 달래고 레즐리 중령이 항모 격침이라는 자랑스러운 전과를 보고하자 화가 많이 누그러졌다.
  “그래도 이렇게 야간에 가까운 시간에 공격을 감행하는 일은 다시는 용서 못하네, 대위. 제 44 기사단의 전술적 결정권 및 그에 따른 책임은 자네에게 있다는걸 명심하게.”
  미치겠군. 그러니까 나, 기사단장 아니라니까!
 
  어쨌건, 단 한기도 잃지 않고 무사히 돌아온 우리는 우리의 기체를 정비대에 맡긴 채 쉴 틈도 없이 바로 브리핑에 참석했다. 나탈리는 빼고. 방에서 문을 걸어잠그고 나오지를 않는다. 무슨 일 있나? 브리핑은 호넷에 탑승한 6개 기사단의 항공 기사 모두와 호위 함대의 함장들이 참석한 상태로, 무려 플레이크 제독이 직접 브리핑을 실시했다. 호넷의 호위를 맡은 중순양함 아틀란티아, 대공 경순양함 에온과 이슬라의 함장들도 동석한 이 브리핑은 생각보다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일동 기립! 제독 각하께서 입실하닙니다.”
  앞에 있는 작전 계획서의 개요를 훑어보면서 앉아있던 나는 플레이크 제독이 들어오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고, 읽고 있던 작전 명령서를 내려놓느라 한발 늦게 일어서버렸다.
  “음, 그래. 다들 앉고, 함대 사령부에서 내려온 작전을 하달하도록 하겠네.”
  플레이크 제독은 그 말과 함께 손짓을 했고, 뒤이어 참모들이 나무 모형 몇개를 해도가 놓여진 중앙의 탁자에 올려놓았다.
  “제 44 기사단과 아군 정찰기 세력을 통해 지속된 오늘 하루 동안의 수색은 성공적으로 끝났네. 특히 사냐 공주께서 직접 지휘하시는 44 기사단은 적 함대를 발견 후, 43 급강하 폭격 기사단과 함께 적 함대를 급습, 소형 항공모함 격침이라는 전과를 세우고 돌아왔네.”
  순식간에 시선이 우리와 43 기사단으로 쏠렸다. 크흠. 이런 과도한 시선은 조금 불편한데 말이야. 어째 사냐 공주와 에리카 대위, 그리고 다른 리히트 기사들은 어깨를 당당히 펴고 조금 즐기는 듯한 분위기다.
  “후소 제국군에게 처음으로 항공모함 손실을 안겨 준 것은 대단한 전과고, 40여기에 달하는 적 항공기가 사라진 덕분에 비교적 작전은 수월해졌다고 믿고 싶지만, 일은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는군. 부관?”
  부관이라 불린 젊은 남자 대령이 하나 앞으로 나와 흑백 사진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이거, 아까 봤던 그 후소 제국의 신…..형기?
  “그동안 후소 제국은 코드명 ‘카를’이라 불리는 고정식 랜딩기어의 단좌 전투기를 운용해왔지만, 오늘의 교전 도중 새로운 신형기와의 접촉 보고가 올라왔네. 이게 바로 그놈들일세. 아군 통신반의 감청 결과에 따르면 0식 함상 전투기라고 해서, 우리의 코드명도 ‘제로’라고 붙혀졌네.”
  제로 전투기. 웬지 익숙한 이름이다. 어디에서 들어봤는지 잘 기억은 안나지만.
  “짧은 교전이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이 제로들은 카를보다 상승력이 우수하고, 엔진의 힘도 좋아진 것 같네. 오늘은 물론 44 기사단이 뒤에서 급습한 덕분에 쉽게 7기를 격추시킬 수 있었지만, 내일 전장에서 맞붙으면 어떻게 될지는 그 누구도 모른지.”
  플레이크 제독은 주변을 훑어본 다음 해도에 자신의 제독 지휘봉을 가져갔다.
  “일단 지금 당장 교전의 우위는 우리에게 있다는건 확실하네. 적은 항공모함 한척을 상실했고, 덕분에 일단 지금 당장은 속도가 비교적 느려졌겠지. 해안선을 따라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적 함대를 우리 에르데 제국 해군의 잠수함대가 일차적으로 따라 붙을 생각이야. 그 다음, 전투기들의 작전이 가능해지는 내일 오전 7시, 육군의 폭격기들과 호위기들의 엄호 아래 우리도 모든 함재기들을 발진시켜 적 함대를 급습할 것이네. 함재기들을 발진시킨 직후, 함대는 즉시 반전, 남쪽으로 변침해서 적의 예상되는 근접전을 회피할 생각일세.”
  제독의 말과 함께 참모들이 푸른색 나무 모형들을 지도의 아래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독의 말이 조금 이상했는지 좌중이 술렁였지만, 제독은 손을 들어 일축했다.
  “지금 우리에게는 전함은 한척도 없네. 비록 적의 전함이 구식 순양전함이라고 해도, 우리 중순양함과 경순양함들로는 어떻게 해볼만한 상대가 아니야. 그대들의 끓어오르는 피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닐세.”
  정확한 한단이다. 포격전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전함이다. 애시당초 이런 포격전을 예상하고 만든 배들이니까. 적의 공고급 순양전함이 구식 12인치 포 9문을 장비하고 있다고 해도, 이쪽 중순양함들은 끽해봐야 8인치다. 12인치와 8인치포. 이건 비교가 불가능한 전력차다. 당연히, 함대를 최대한 보존해야 하는 에르데 제국의 제독으로서는 현명한 결정이다.
  “제독 각하, 저희는 황제 폐하와 제국을 위해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명령만 하신다면 적 전함을 들이 받기라도 하겠습니다. 후소 제국 놈들을 이번에 죽이지 못한다면 언제 기회가 있겠습니까, 각하!”
  물론 현명한 결정에 모두가 찬성하는건 아니지. 호넷의 호위를 맡은 대공 경순양함 에온의 함장, 에이저 페이지 대령이 일어났다. 그녀의 말에는 에르데 제국에 대한 충성이 잔뜩 묻어나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다 좋은 결정이라는건 아니지. 나는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손을 들고 일어섰다.
  “대령님께는 죄송하지만, 제독 각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페이지 대령님, 아직 적은 많습니다. 지금 에르데 제국이 필요한건 죽은 영웅이 아니라 살아있는 군인입………”
  “대위는 입 다물고 있어. 감히 에르데 제국의 귀족 출신인 저희들이 참석하는 자리에 필그림 출신의 평민이 끼어드는거야?”
  아직도 그게 발목을 잡는거냐? 이래서 난 신분제가 싫다니까. 나를 무슨 불가촉 천민으로 바라보던 페이지 대령의 고개가 갑자기 숙여졌다.
  “페이지 대령! 창민경이 비록 천한 필그림 출신이기는 하나, 나, 사냐 공주의 생명의 은인이자 제 1기사이기도 해요! 방금 그 실언은 거두도록 하세요!”
  사냐 공주의 사자후에 좌중이 순식간에 썰렁하게 얼어붙었고, 곧 이어 언짢은 표정의 플레이크 제독이 상황을 정리해줬다.
  “에온 함장의 말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이게 최선이니 지금은 따라주게. 이창민 대위의 말대로, 아직 죽일 후소 놈들은 많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대위는 상황을 보면서 끼어들지 안끼어들지를 구분하게나.”
  크흠.
  “어떻게 되었건, 내가 함대를 반전시킨다고 해서 적전 도주가 용납된다거나 하는건 아닐세. 기사단들은 기사단 대로, 각 함정들은 함정 대로 최선을 다해 싸워주길 바라네. 황제폐하와 우리 제국의 신민들의 목숨이 그대들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명심하게.”
  “”예! 제독 각하!””
  “자세한 작전 개요는 명령서에 있으니 읽어보고, 오늘은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이상, 해산.”
 
  작전 브리핑이 끝나자 순식간에 내부는 시끌벅적 해졌다. 나는 내 옆에 앉아있던 사냐 공주에게 고맙다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에리카 대위.”
  “예, 부단장님?”
  “사냐 공주 못봤어?”
  “공주마마께서는 브리핑이 끝나자 마자 바로 중앙으로 ​달​려​가​셨​습​…​…​아​니​,​ 저기 오시는군요.”
  사냐 공주는 자그마치 경순양함의 함장이자 직급으로도 상관인 페이지 대령을 끌고 내게 오고 있었다.
  “자. 창민경 앞에서 제대로 사과하시오, 페이지경. 내가 정치적 실권이 있는건 아니지만, 내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섭섭하게 대하는 사람들의 인생을 끝장내지 못할 정도로 무능한건 아니니까.”
  “공주께서 말씀해주신대로, 본관이 조금 심했던 것 같다. 사과하지, 대위.”
  나는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걸 사냐 공주가 막았다.
  “아니, 제대로 이름을 불러서 사과하세요, 페이지경.”
  “……..이창민 대위, 본관의 사과를 받아주겠나?”
  ​“​…​…​.​알​겠​습​니​다​.​”​
  솔직하게 상관 없는데 말이야. 사냐 공주의 만족한 표정을 본 페이지 대령은 가볍게 플래티눔 블론드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는 해군용 모자를 고쳐 썼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필그림들에게는 좋지 않은 기억이 있어서 말이야.”
  무안했는지 페이지 대령이 입을 열었다. 나는 피곤해서 그만 방에 들어가 자고 싶었지만, 감히 대령 앞에서 그럴만한 용기가 나지는 않았다. 사냐 공주는 또 에리카 대위와 저쪽에서 얘기하고 있지만, 내가 움직이면 사냐 공주가 욕먹잖아. 알아서 잘 처신해야지, 어쩌겠어?
  “저희도 그때의 일은 반성하고 있습니다, 대령님.”
  “우리 부모님이 그때 거기에 계셨다가 돌아가셨거든. 나는 조부모님이 키워주셨고.”
  ​“​…​…​…​.​죄​송​합​니​다​.​”​
  “아니, 대위의 잘못은 아니니까. 다시 생각해보니까 내가 무례했네.”
  그렇게 말한 페이지 대령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해해줄래?”
  그리고 나는 가볍게 손을 붙잡았다.
 
  대령과의 화해가 끝나고 나는 바로 방으로 돌아왔다. 일단 지치다. 비행할 때는 모르지만, 일단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나는 바로 지쳐버린다. 무슨 비행이 마약도 아닌데 말이다. 어쨌건, 나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 일단 나탈리의 상태부터 살폈다.
  “아픈데 없다니까. 그냥 졸려서 한숨 잔거야. 걱정하지마.”
  네 눈가에 피가 묻어있는게 보이는데 걱정하지 말라고? 잘 때 눈이라도 비빈거냐?
  “어, 어떻게 알았어? 창민이 너, 이제는 눈치가 좀 빨라졌는데?”
  당황하는게 보이지만 무시해주자. 나는 나탈리에게 잘 자라고 인사한 다음 불을 끄고 아래쪽 침대에 몸을 뉘였다. 딱딱한 함상용 매트리스는 전혀 내 피로를 덜어주지는 못했지만, 나는 단순하게 누웠다는 사실 하나에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은 길고 긴 날이 될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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