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그가 떠나고 반년, 아니 내가 그를 떠나고 반년인가. 오늘도 눈을 감으면 눈앞에 보이지 않는 그를 마음속에서 그린다. 그런 그가 나를 바라보지 않은 것에 고통을 느끼며 감은 눈을 뜨면 그는 사라진다.
집으로 가는 길, 가을의 고독감과 높은 하늘이 내 자신을 마치 거대한 대자연에 홀로 남겨둔 것만 같다. 유달리 평소보다 바람소리가 잘 들리며, 걸으면서 생기는 구두소리는 내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그때부터일까 집으로 가는 길조차, 지금의 나에겐 너무나 낯설게 느껴진다. 마치 세상이 날 홀로 버려둔 것처럼 혹은 나는 처음부터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집이 있지만 돌아갈 곳이 없어졌다. 모순되는 생각에 실소를 지으면서 집으로 돌아간다. 몸은 집에서 쉬면되지만 내 마음은 어디서 쉬면 회복할 수 있을까? 생각이 많아지니 머리가 더욱 아프다. 그래서 나는 집에 도착하기까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회복할 수 없다면 적어도 악화시키지는 말자.
오늘도 혼자서 저녁식사를 끝낸 후 후식으로 차를 준비한다. 찻잎을 넣어둔 진열장을 열고 쭉 살펴보는데 홍차잎을 발견하자 나도 모르게 입을 굳게 닫고 만다. 아직도 남아있었구나. 다 버렸는지 알았는데. 홍차 잎이 담겨있는 유리통을 따로 빼자 그동안 쓰지 않았는지 먼지가 같이 떨어져 나온다. 침침한 기분이 더 우울해질 거 같다. 오늘은 레몬티로 하자.
"후훗."
고양이는 귀엽구나. 오늘도 음침했던 기분을 고양이들에게 치유 받는다. 이런 생활이 벌써 몇 년째일까? 나의 학생으로써의 생활은 어렸을 때부터 그대로다. 자취를 시작하면서부터, 학교에서 귀가하면 저녁 준비 후 식사를 끝내고 한 잔의 차와 취미생활로 하루를 마무리 짓는다. 그동안에 잊을 수 없는 일들이 그렇게나 많이 있었는데, 그것들이 나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다. 발전이 없는 이런 나약한 나를 예전의 나라면 절대 용납하지 않았겠지. 더욱 더 단련하고, 다듬어서, 앞으로, 위로, 그리고 당당하게 나아가려 하겠지. 이것도 다 네가 나쁜 거야.
‘딩동~’
초인종소리가 들린다.
“언니?”
“야하로, 유키노 잘 지냈니?”
“무슨 용무야? 딱히 아무 일 없으면 돌아가.”
마치 다 알고 있다는 식으로 바라보는 눈, 그리고 스스로가 위에서 있는 자라는 것을 인지하듯 기품 있는 모습은 여전하다. 그리고 분명 이 인사는 내 심기를 불편하게하려는 고의가 느껴진다. 그렇지만 그런 깔보며 도발적인 언행보다는 이에 지려고하지 않는 내 행동이 더욱 지금의 내 모습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만 같다.
“아하하, 그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그때와 지금의 너 다른 사람이니까, 같은 말해봤자 무섭지도 않아요~.”
“그러네, 난 옛날의 내가 아니야. 하지만 그게 지금의 나에겐 아무런 문제없고, 언니가 내 집에 있어도 된다는 이유는 되지 않아. 어서 나가줘.”
“그래 알았어. 어차피 이제는 와도 아무런 쓸모도 없을 거 같으니까. 이렇게 생기가 없는 건 장남감으로도 재미없으니까. 바이바이, 유키노짱.”
그렇게 말하곤 아무런 미련이 없다는 듯 언니는 나갔다. 물론 나는 인사도 없었다. 그녀의 방문으로 잠깐이나 인기척이 느껴진 집에서는 진공상태인 마냥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거실에 있는 시계의 소리만 이 공간이 멈추지 않았다는 걸 알려준다. 오래가지 않아, 그런 침묵이 눈물로 깨지게 된다. 왜 일까? 언니 같은 건 처음부터 싫어했고, 이젠 동경하지도 않고 있는데. 오늘도 나는 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체, 마음의 응어리를 품고 잠자리에 든다. 오늘 같이 이 감정이 내 전신을 지배하는 때, 나는 이 감정을 마주하기보다, 잊는 것을 선택했다. 그때처럼 그리고 그때부터.
그날 이후, 더 이상 언니가 날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 사실을 깨달은 난, 내 자신이 다시 한 번 싫어졌다. 그 이유도 모르고 이러한 내 마음 속에 휘몰아치는 감정도 모르겠다. 그저 이대로는 안 된다. 어떠한 논리적인 사고도 배제한 체, 그저 이 결론만이 내 머리 속에서 나올 뿐이다. 난 다시 한 번 배움이 필요할거 같다. 그렇게 생각하고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가능하면 이 장소에 오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빛나고 아름다운 추억을 주었지만, 그 과분함이 마지막에는 비수가 되어 내 마음을 찌른 장소. 이곳은 다름아닌 나의 모교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수학여행 후 미우라양의 기분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겨울의 추운 바람이 나를 현실로 돌려놓는다. 낙엽은 이제 다 떨어져 앙상한 나뭇가지들만이 회색빛 하늘을 가리고 있다. 세상의 종말이 온다면 이런 풍경일까라는 생각과 함께 지혜를 얻고자, 과거 내가 살아 숨 쉬었던 장소에 간다. 자고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가야하지 않을까.
“안녕하세요, 히라츠카 선생님.”
“그래, 유키노시타. 약속시간보다 5분 일찍 온 걸보니 여전하구나. 대학생활은 어떠냐?”
졸업식 이후 처음 보는 선생님은 그대로인거 같다. 여전히 하얀 가운을 걸치고 담배냄새가 약간.... 나지 않네?
“선생님, 혹시 담배 끊으셨나요?”
“아~ 건강에 신경 써야지. 이제 나이도 있고 결혼이나 장래를 생각하면 나도 변해야지. 아하하...”
기운 없는 웃음, 아직 파트너는 찾지 못하셨나보다. 하지만 자세히 관찰하니 선생님은 꽤나 변하긴 것 같다. 남자아이 같던 행동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인자하고 여성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무엇이 선생님을 바꾸고 있는 걸까?
“선생님, 실은 상담드릴께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응? 뭐냐 유키노시타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 사양 말고 얘기해봐라. 일단 교무실에서 있는 것 보다는 조용한 장소에 가는 게 좋겠지? 너도 오랜만이니까 봉사부실에 가자.”
선생님과 함께 봉사부실로 가는 길을 걷고 있으니, 처음 그녀에게 봉사부 가입을 권유 받았을 때가 생각난다. 처음에는 그저 오지랖 넓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했었지만, 그녀는 진정한 의미로 이상적인 선생님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먼저 삶을 살아가고 있기에 인생의 선배로써,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준다. 그 때의 나는 구원받았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의 배려 아래, 그와 그녀의 만남으로 말이다. 그래서 오늘 다시 한번 나는 선생님의 도움을 받으려한다. 비록 지금은 내 옆에는 그와 그녀가 없지만....
“아.”
걸음이 멈춘다. 역시 언니가 말한 대로구나. 지금도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언제나 의존해왔고 지지대가 필요했다. 지지대가 날 배신할 때마다 나락으로 떨어지고, 다른 지지대를 찾아 올라간다. 이 서글픈 현실을 잠시나마 잊고자 한 때 아름다웠던 과거의 풍경을 회상하려 고개를 돌려 창가를 보니, 그리웠던 풍경보다는 서글픈 웃음을 짖고 있는 내 자신이 보였다.
“이야, 이곳에 오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구나. 너희들 졸업하고는 올 일이 없어서 말이지. 조금 더럽지도 모르겠지만 여기가 말하기 편하지 않겠니? 힘든 일이 많았나본데. 자, 들어가서 얘기해보자.”
“배려 감사합니다, 히라츠카 선생님.”
“유키노시타, 너 눈이 갑자기 왜 그러냐? 마치 히키가야처럼 눈이 썩은 거 아니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지금의 넌 혼이 빨려나간 인간 같구나.”
“실례네요, 선생님. 그저 피곤한 것뿐이에요.”
이 상황에서도 거짓말을 하다니, 나는 정말 솔직하지 못하다. 인정하기 싫지만, 선생님의 말씀대로 최근 그처럼 눈이 조금씩 썩는 것처럼 보인다. 늦은 시간이지만, 노을빛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이 방 안에서 만큼은 솔직해지자. 적어도 이 장소에서는 후회 없이 좋은 추억만을 남기고 싶다.
“지금 저가 보기에 선생님은 변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시간은 졸업식 이후 아니 어쩌면 훨씬 그 전부터 멈춰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졸업식 이후에..”
눈에 힘이 들어간다. 조금이라도 느슨해지거나 눈을 감으면 바로 눈물을 쏟아 낼것 같다. 무엇이 슬퍼서 눈물이 나는 것일까? 지금 나의 한심한 모습 때문일까? 혹은, 어려서부터 우울했던 내 삶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와 그를 떠나 보내야했기 때문일까? 모르겠다. 생각이 많아지고, 나 스스로도 내 자신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욱 눈에 힘이 들어가게 한다. 참아야 된다. 이곳에서는 즐거웠던 일만 기억하고 싶다. 그러니까 울면 안 된다. 내 삶에 얼마 없는 아름다운 청춘을 보낸 고교생활의 이 장소에ㅅ....
“유키노시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울어도 괜찮다. 어차피 지금 학교에는 아무도 없다. 무엇보다도 울음을 참는다고 해서 좋아질 것도 없다. 실컷 울고 그 다음에 속편하게 말해봐라. 내가 있지 않느냐 끝까지 기다려주마.”
정말, 이럴 때 만큼은 어느 남자보다 멋지고 든든한 선생님이시다. 선생님이 인기 없는 이유는 남자보다 더 남자 같은 성격에 있지 않을까라는 소박한 의문이 생겼다. 역시 선생님은 변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이 나에게 작은 안심을 준다. 그리고 그 안심과 함께 나는 오늘 그동안 쌓여있던 감정을 주저 없이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