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아니면 유키노랑 재혼이라도 해줄 거야?
<치바의 한 요정(料亭)>
하루노: 그렇게 서 있지 말고 히키가야군도 앉지그래?
하치만: 네에……
하치만 (얘기를 나누는 거뿐인데 굳이 이런 고급 요릿집을 택할 필요가 있는 건가……)
하루노: 장소가 별로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네.
하치만: 아뇨, 별로 그런 건 아닙니다.
하루노: 히키가야군도 알겠지만 누나가 제법 유명하거든. 가족과 관련된 은밀한 이야기를 주변의 눈이 있는 커피점 같은 데서 나눌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하치만: 물론 그러시겠죠.
하치만 (서른여덟에 건설 기업 사장에 현 의회 의원직을 겸임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외모마저 뛰어난 유키노시타 하루노다. 덕분에 지금은 그녀를 찬양하는 인터넷 팬까지 있을 정도니, 주변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있을지도 모르는 장소에서 대화를 나누는 건 아무래도 좀 그렇겠지.)
하루노: 응, 그래서 종종 오고 있는 이 가게를 택한 거야. 여기라면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은밀한 얘기를 나눌 수 있으니까.
하치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긴 너무 부담스러운데…… 그냥 차 안에서 해도 상관없는 거 아니냐고……)
하루노: 돈은 걱정하지 마. 누나가 불러낸 거니까 계산은 누나가 할게.
하치만: 뭐, 그러시겠다면야……
하치만 (예전의 나였다면 이 사람에게만은 절대로 빚지려 하지 않았겠지만, 전업주부는 현실을 직시해야 하니까 말이지. 한 끼에 1, 2만 엔은 하는 이런 요정에서 더치페이할 정도로 우리 가계 사정은 여의치 않다.)
하루노: 그나저나 보증 같은 걸 서주다니, 시즈카도 참 바보네. 사람이 너무 좋은 것도 문제라니까~
하치만: ……
하루노: 하지만 히키가야군과 시즈카의 그 불행이 유키노에게 있어선 행운이었던 거네. 그렇지?
하치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하루노: 어라~? 시치미를 떼려는 걸까? 히키가야군이라면 이미 다 눈치챘을 거로 생각하는데?
하치만: ……
하루노: 빚 때문에 오갈 데 없어진 친구를 자신의 집에 살게 해주다니 친구의 귀감이네. 훌륭해~ 감동적인 이야기야~ 그게 순수하게 친구를 돕고자 하는 의도였다면 말이지.
하치만: ……
하루노: 가령 유키노가 도운 게 가하마였다면 누나도 아무 말 안 했을 거야. 히키가야군과 시즈카만이었더라도 아직 신용의 여지는 있지. 하지만 가하마까지 같이 사는 건 명백하게 다른 의도가 있다는 거거든.
하치만 (내가 눈치채고 확신하기까지 두 달이나 걸린 사실을 잠깐 본 것만으로도 전부 눈치채다니 변함없이 무서운 사람이다……)
하루노: 유키노가 이혼한 전남편과 왜 결혼하게 됐던 건지는 알고 있어?
하치만: ……정략결혼이었던 거 아니었나요?
하루노: 으음, 결과적으론 정략결혼처럼 되어버렸지만, 그거랑은 다른데.
하치만: 글쎄요…… 자세한 사정은 말해준 적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요.
하루노: 유키노에게 먼저 물어볼 생각은 안 하는 게 히키가야군 답네~
하치만: ……다른 사람의 연애사엔 참견하지 않는 주의라서요.
하루노: 하긴, 물어봤다 한들 유키노가 히키가야군에게 제대로 대답해줬을 리도 없겠지만. 우리 집이 어떤 집인지는 대충 알고 있지?
하치만: 네, 뭐……
하루노: 으음, 이 누나는 말이야, 유키노시타가의 후계자다 보니까 연애는 마음대로 할 수 있어도 결혼은 마음대로 할 수 없었거든. 유키노시타가에 걸맞은, 유키노시타가에 득이 되는 상대가 아니면 안 됐어.
하치만: ……
하루노: 하지만 유키노는 아니었어. 가문을 짊어지지 않는 그 애는 유키노시타에 걸맞지 않더라도, 득이 되지 않더라도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었어. 물론 전업주부 희망자여선 우리 집 엄마를 설득하는 게 쉽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결국엔 마지못해 허락하셨을 거야.
하치만: 그럼 왜…… 왜 유키노는 정략결혼 같은 걸 한 거죠?
하루노: 히키가야군이 시즈카랑 결혼한 후로 그 유키노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 그 애, 방안에 틀어박혀 히키코모리가 돼버렸어.
하치만: 에엑……
하루노: 밥도 제대로 안 먹고 방에 틀어박혀 밤마다 히키가야군 히키가야군하고 울어대는 게 아주 난리였지. 우리 엄마조차 저러다가 자살하는 거 아닌가 걱정했을 정도니까.
하치만 (진짜냐…… 유키노가 그랬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하루노: 그래도 세 달 쯤 지나니까 어느 정도는 마음이 정리된 것인지 밖으로도 나가고 일도 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세상이 다 끝난다는 듯한 얼굴만은 여전했지.
하치만: ……
하루노: 그런 짓을 2년이나 해댔으니 우리 엄마 아빠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널 잊게 하려고 억지로 결혼시킨 거야. 그렇게라도 안 하면 그 애, 평생 너만 그리워하다가 늙어 죽을 것 같았거든. 결국, 이 꼴이 난 걸 보니 소용없는 짓이었지만.
하치만: ……
하루노: 내 여동생이라지만 참 대단하다니까. 결혼까지 한 남자를 14년이 지나도록 못 잊고 있다니. 유키노가 히키가야군을 만난 게 고등학교 2학년 때였지? 그럼 벌써 20년도 넘게 짝사랑 중인 거네? 꺄아~ 유키노 대단해~! 누나는 흉내도 못 낼 거야~!
하치만: ……
하루노: 으음, 20년을 짝사랑해왔으니 30년, 40년도 가능하겠지? 응, 마음이 망가져 버린 유키노라면 분명 가능할 거야.
하치만: ……죄송합니다.
하루노: 아냐, 히키가야군의 잘못은 아니니까. 사과는 오히려 이쪽이 해야겠지.
하치만: 하아……
하루노: 있잖아, 히키가야군. 히키가야군에게 있어 유키노는 어떤 존재야?
하치만: ……소중한 친구예요.
하루노: 유키노를 사랑해?
하치만: ……친구로서는 사랑해요.
하루노: 유키노가 물어봐도 그렇게 대답할 거야?
하치만: 아마 그럴 거로 생각해요.
하루노: 그렇구나. 히키가야군에게 있어 유키노가 소중한 존재기는 한 거구나.
그럼 유키노는 앞으로도 부질없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히키가야군 옆에서 히키가야군만을 바라보고 살겠네.
하치만: 아뇨, 그렇지는……
하루노: 그렇지 않을 거라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하치만: ……
하루노: 사실 누나도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히키가야군은 유키노에게 있어 독이야. 가까이 있으면 가까이 있을수록 유키노에게 해가 될 뿐이야.
하치만 (유감스럽게도 부정은 할 수 없다……)
하루노: 히키가야군이 유키노를 택하지 않았던걸 뭐라고 할 생각은 없지만, 히키가야군이 유키노를 택해줬다면, 혹은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더라면, 유키노의 인생도 이렇게 미쳐돌아가지 않았을 거로 생각해.
하치만: ……
하루노: 그러니까, 적어도 이 이상 유키노가 망가져 버리기 전에, 유키노에게서 떨어져 줘. 스륵
하치만: ……뭐죠 이건.
하루노: 천만 엔이야. 보증 빚은 이미 다 갚았다니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될 수 있으면 유키노네 집에서 멀리 떨어진 집을 구해서 나가줘.
하치만: ……
하치만 (이게 드라마와 책에서나 보던 '이거나 먹고 떨어져'인가…… 내 인생에 이런 돈 봉투를 받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하루노: 혹시 돈이 부족한 걸까? 누나에게도 적은 돈은 아니지만, 원한다면 더 줄 수도 있는데?
하치만 (더 줄 수도 있다고……? 새삼스럽지만 정말 사는 세계가 다르군. 하루노가 그럴 마음만 먹는다면 나 같은 일개 전업주부를 해코지 하는 건 일도 아니겠지. 만약 거절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하치만: 유키노시타 누나, 이런 돈은 받을 수 없어요.
하루노: 유키노를 위해서 주는 거지, 히키가야군을 위해서 주는 게 아니야. 달리 살 곳이 생겼다는 구실이 없으면 히키가야군도 유키노네서 나가기 힘들잖아?
하치만: 그건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루노: 아니면, 유키노랑 재혼이라도 해줄 거야?
하치만: ……
하루노: 그래 준다면야 누나로서도 환영인데. 그편이 유키노에게도 더 좋을 테고. 만약 그럴 생각이 있다면 시즈카에게 줄 위자료는 누나가 지원해줄 수 있어.
하치만 (농담처럼 가볍게 말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농담은 아닌 것 같다. 하루노는 이래 보여도 시스콘이니까, 기왕이면 여동생이 행복해길 바라는 거겠지. 하지만……)
하치만: 죄송하지만, 저밖에 기대 곳이 없는 늙은 아내를 버리고 딴 여자한테 갈 정도로 가차없는 남자는 아니라서요. 사양할게요.
하루노: 그래,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그러니까 앞으로는 유키노가 괜한 기대를 하지 않게 확실하게 거절해둬. 일말의 여지도 않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줘.
하치만: ……
하루노: 그리고 딱히 두 번 다시 만나지 말라고는 안 하겠지만, 유키노가 미련을 버릴 수 있게 될 수 있으면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특히 단둘이서는.
하치만: ……
하치만 (언젠가 셋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시즈카를 택할 것이다. 아내는 버리지 않는다. 그 마음만큼은 흔들림이 없다. 그런 내가 어중간하게 유키노와 유이의 마음을 받아들여 줘봤자 결국은 모두에게 큰 상처만 주게 되겠지. 이것이 잘못됐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하치만: ……
하치만 (하지만 그렇다고 하루노의 말대로 딱 잘라 거절하고 피하는 게 과연 적절한 선택일까? 도의적으로는 옳지만 적절하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말로 해서 설득될 정도였다면 애초에 일이 이 지경이 되지도 않았을 거다. 마음이 병들어버린 유키노와 유이는 내게 거절당한 충격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해버릴지도 모른다.)
하치만: ……
하루노: 뭐해? 빨리 안 받고.
하치만 (그래, 어느 쪽도 정답이 아니라면…… 적어도 그녀의 가족이 바라는 대로 해주는 편이 낫겠지……)
하치만: ……유키노네 집에선 되도록 빨리 나가도록 할게요. 하지만 돈은 됐어요. 저와 시즈카 둘이서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하루노: 아니, 받아둬. 정 부담스럽다면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갚든지. 무이자로 해줄 테니까.
하치만: 아뇨, 정말 됐……
하루노: 받아. 째릿
하치만: …………
하치만 (뭐야 이거 무서워…… 이 인간 진짜 패왕색 패기라도 쓰는 거 아냐……) 스슥
하루노: 흐음, 그러면 얘기도 다 끝났으니 이제 슬슬 먹어볼까? 여기 요리 제법 맛있다고~ 히키가야군 입맛에도 분명 맞을 거야~
하치만: 아, 네……
하치만 (후우, 이런 건 보통 헤어지기 직전에 하는 거 아니냐고…… 맛은커녕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다만…… 제길, 이 인간 절대로 일부로다……)
<그날 밤, 유키노 집>
하치만 (하루노 앞에선 시즈카와 둘이서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허세를 부렸지만, 현실적으로 지금의 우리 재정상태론 단칸방을 빌리는 게 고작이다.)
시즈카: 희, 흰머리가…… 셋, 넷, 다섯, 여섯…… 큭……
하치만 (애초에 시즈카를 몸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유키노네 신세를 졌던 건데 이제 와서 단칸방을 얻어 나가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고…… 역시 그 천만 엔을 쓸 수밖에 없는 건가……)
시즈카: 아, 아니지…… 벌써 흰머리가 날 리가 없어……
하치만 (하지만 이 돈을 시즈카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좋은 거냐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복권에 당첨됐다고 하는 것도 무리가 있고……)
시즈카: 아직은 나도 젊은 나이니까 말이지…… 그래, 이건 분명 새치야…… 중얼중얼
하치만 (우선은 시즈카가 지금 생활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는 게 순차이려나……)
시즈카: 큭, 언제 이렇게 주름이 많아진 거지…… 파문이라도 수련해둘 걸 그랬나……
하치만: 저기, 시즈카.
시즈카: 어, 어? 왜?
하치만: 유키노네 집에 신세 지게 된 지 석 달 정도 지났는데, 솔직히 어떻게 생각해? 많이 불편해?
시즈카: …………으음, 오랫동안 너와 둘이서만 살았으니까 아무래도 불편한 감은 있지.
하치만: 역시 그런가…… 하긴, 친구인 나도 이제야 겨우 적응됐는데 제자에게 신세 지는 셈인 시즈카 입장에선 더더욱 그렇겠군.
하치만 (게다가 시즈카 입장에선 예전에 자기 남편을 좋아하던 여자들과 같이 살게 된 셈이기까지 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겠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여간 거북한 게 아니었을 거다.)
시즈카: 그래도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최근엔 유키노랑 유이도 친언니처럼 따라주고 있고, 원래부터 적당히 시끌벅적한 건 좋아했으니까. 뭔가 가족이 늘어난 것 같아서 이런 생활도 제법 즐겁다고 생각한다.
하치만: ……응?
하치만 (어라? 생각보다 평가가 좋다? 그야 솔직히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도 100% 솔직하게 대답하지는 않겠지만, 그걸 고려해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긍정적인 평가인데.)
하치만: 의외네. 솔직히 좀 더 불편하게 생각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즈카: 뭐,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유키노와 유이는 내게도 특별하니까 말이지. 그 애들도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고 있고.
하치만: ……
하치만 (사실은 싫지만 나를 생각해서 좋게좋게 말하는 거 아닐까? 이 집에서 당장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싫은 소리 해봐야 서로 마음만 불편해질 뿐이니까. 적어도 내가 시즈카 입장이었다면 솔직하게 말하진 못했을 거다.)
하치만: 시즈카, 만약 이 집에서 나가 살 수 있다면 빨리 나가고 싶어?
시즈카: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거냐? 그럴 돈이 없다는 거 너도 알잖아.
하치만: 아니, 작은 집을 구해 빨리 나가는 거랑 돈을 더 모아서 예전에 살던 것만 한 집을 구해 나가는 것 중 어느 게 더 나을까 싶어서.
시즈카: 글쎄다. 처음엔 솔직히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만, 지금은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이대로 그 애들과 같이 사는 게 제일 나은 선택일지도 모르지……
하치만: 엥? 제일 나은 선택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시즈카: 아무것도 아니다. 하치만, 그러는 너는 지금의 생활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하치만: 나는……
하치만 (유키노와 유이의 병적인 사랑이 부담스럽다. 한지붕 아래 살면서 태연하게 불륜을 저지르려 하는 그녀들이 무섭다. 아내를 배신하고 있다는 사실이 괴롭다. 얼핏 평온해 보이는 관계 뒤로 시커먼 무언가가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 같아서 꺼림칙하다.)
하치만: ……
하치만 (그런데도 한편으론 그녀들과 함께인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내가 있다. 그녀들의 마음이 가슴 아프면서도 기쁘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대로 계속되기를 바라는 내가 있다.)
하치만: ……
하치만 (아니, 내가 이 생활을 어떻게 느끼는지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유키노의 가족이 내가 유키노에게서 떨어지길 바라고 있으니 그렇게 해야겠지. 어차피 언젠가는 파탄 날 관계다.)
하치만: ……뭐, 좋든 나쁘든 간에 언제까지 계속 신세를 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가능하면 빨리 나가야겠지.
시즈카: ……혹시 나를 신경 써서 하는 말이라면 무리해서 그럴 필요는 없다.
하치만: 뭐?
시즈카: 날 신경 써서 무리하게 이 집에서 나가려들 필요 없다는 거다. 유키노도 우리가 무리해서 나가는 걸 원치 않을 테고. 오히려 평생 같이 살아도 괜찮다고까지 말했으니까.
하치만: ……
시즈카: 그리고 좀 전에도 말했지만 나도 이런 생활도 제법 즐겁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하치만: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시즈카: 그래.
하치만: …………
시즈카: 너야말로 이 집에서 나가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그런 거냐?
하치만: ……실은 하루노에게 되도록 빨리 이 집에서 나가달라는 말을 들었어. 내가 같이 있으면 유키노에게 악영향만 끼친다고. 그 뭐냐, 아무래도 남자가 같이 살고 있으면 유키노도 재혼하기 힘들 테니까.
시즈카: 하루노가…… 그렇군……
하치만: 그러면서 이걸 주더라고. 스윽
시즈카: 이건…… 처, 천만 엔……!?
하치만: 이런 돈 봉투를 받으니까 꼭 아침 드라마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더라.
시즈카: ……하치만, 어째서 이런 걸 받아온 거냐. 친구네 집에 신세를 지는 것과는 다르단 말이다. 받아선 안 된다는 거 너도 알고 있잖나?
하치만: 현실을 직시한 것뿐이야. 지금 우리 재정상태론 단칸방이나 구하는 게 고작이니까.
시즈카: 그럼 단칸방에서 살면 될 일이다. 이런 돈을 받아서까지 좋은 집에서 살고 싶진 않다.
하치만: 넌 괜찮아도 난 단칸방 생활은 싫거든.
시즈카: ……
하치만: ……
시즈카: 후우…… 너란 녀석은……
하치만: 앞으로는 나도 알바라도 할 테니까. 나중에라도 갚으면 되지.
시즈카: ……뭐, 됐다. 이미 받아온 건 어쩔 수 없으니까.
하치만: 유키노와 유이에겐 다음에 내가 알아서 얘기할게.
시즈카: 하지만 정말로 괜찮은 거냐? 사실은 그러고 싶지 않은데 하루노의 말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냐?
하치만: 그런 이유도 없진 않지만, 원래부터 집 구할 돈이 생기면 나가려고 했었잖아? 그게 조금 빨라진 것뿐이야.
시즈카: ……그래, 네가 진심으로 그러길 바란다면 나는 좋다. 어느 집으로 할지는 네게 맡기마.
하치만: 그래……
한가지 걱정인 건── 이 집에서 나가겠다는 말에 유키노와 유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점이다. 분명 기뻐하진 않겠지.
속으로 눈물을 삼키면서 애써 웃는 얼굴로 축하할까, 아니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가지 말라고 붙잡을까. 모르겠다.
마음속으로 그 모습을 상상해본다. 애써 태연한 얼굴을 하는 유키노와 울상을 짓는 유이.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쓰라린데 실제로 그 모습을 보게 되면 미어질지도 모르겠다.
<며칠 후>
하치만: ……그래서 그걸 알게 된 우리 부모님이 돈을 주셨거든. 유산을 가불해주는 거라나 뭐라나. 아무튼, 돈도 생겼으니 조만간 집을 구해서 나갈 생각이야.
유이: 거짓말…… 이렇게 갑작스럽게……
유키노: …………
하치만: 뭐, 이제부터 알아보는 거니까 한 달 정도는 더 신세 지겠지만 말이야. 아직 조금 이르지만, 미리 말할게. 지금까지 도와줘서 고맙다.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을게.
유키노: …………
유이: 굳이 나갈 필요는 없잖아? 넷이서 살기엔 충분히 큰 집이고, 나도 유키농도 힛키랑 시즈카 언니랑 같이 사는 걸 조금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하치만: 마음은 고맙지만, 언제까지고 신세 지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유이: 신세 지는 게 아니라 나처럼 그냥 같이 산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그냥 같이 살아도…… 괜찮잖아…………
하치만: 야야, 이 집에서 나간다고 해서 딱히 다신 못 보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울상 짓지 말라고. 오히려 축하해줘야 할 일이잖아.
유키노: …………언니 짓이구나.
하치만: ……
유키노: 그래, 우리 언니가 우리 집에서 나가달라고 한 거구나……
유이: 어……? 그런 거야……?
하치만: 아니, 그러니까 우리 부모님이……
유키노: 거짓말이네.
하치만: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건데?
유키노: 어머, 오히려 왜 그런 뻔한 거짓말을 믿을 거로 생각한 것인지 묻고 싶을 정도인데. 뭣하면 네 부모님께 직접 확인해볼까?
하치만: ……
유이: 힛키……
유키노: 후후…… 바라던 대로 그런 남자와 결혼까지 해줬건만 아직도 부족하다는거네……
하치만: ……
유키노: 언제나 언제나 왜 방해하는 거야…… 그렇게 오랜 시간을 참고 견뎌왔는데…… 이제야 겨우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는데…… 모든 게 잘 돼 가고 있었는데…… 조금만 더 있었으면…… 앞으로 조금만 더 있었으면…… 분명…………
하치만: 야, 야야 무섭잖아…… 진정……
유키노: 용서못해용서못해용서못해용서못해떨어지고싶지않아헤어지고싶지않아헤어지고싶지않아가지마가지마가면안돼가면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어어어──!!!!
하치만: …………
유키노의 마음이 병들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무거운 사랑을 설명할 길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 그녀의 병든 모습을, 망가진 모습을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착각했다. 어쩌면 그녀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해버릴지도 모른다고 그 심각성을 오인했다.
유키노: 부탁이야…… 제발 부탁이야…… 떠나지 말아줘…… 이제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유이: 유키농…… 흐윽……
하치만: …………
언젠가는 아내를 위해 그녀들을 뿌리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울며 매달리는 그녀들을 뿌리치는 자신의 모습이 상상도 안 간다. 거절의 말이 도저히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나는 이 집을 떠날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