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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경기 시리즈


Original |

9화. 아니면 유키노랑 재혼이라도 해줄 거야?


<치바의 한 ​요​정​(​料​亭​)>​

하루노: 그렇게 서 있지 말고 히키가야군도 앉지그래?

하치만: 네에……

하치만 (얘기를 나누는 거뿐인데 굳이 이런 고급 요릿집을 택할 필요가 있는 건가……)

하루노: 장소가 별로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네.

하치만: 아뇨, 별로 그런 건 아닙니다.

하루노: 히키가야군도 알겠지만 누나가 제법 유명하거든. 가족과 관련된 은밀한 이야기를 주변의 눈이 있는 커피점 같은 데서 나눌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하치만: 물론 그러시겠죠.

하치만 (서른여덟에 건설 기업 사장에 현 의회 의원직을 겸임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외모마저 뛰어난 유키노시타 하루노다. 덕분에 지금은 그녀를 찬양하는 인터넷 팬까지 있을 정도니, 주변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있을지도 모르는 장소에서 대화를 나누는 건 아무래도 좀 그렇겠지.) 

하루노: 응, 그래서 종종 오고 있는 이 가게를 택한 거야. 여기라면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은밀한 얘기를 나눌 수 있으니까. 

하치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긴 너무 부담스러운데…… 그냥 차 안에서 해도 상관없는 거 아니냐고……)

하루노: 돈은 걱정하지 마. 누나가 불러낸 거니까 계산은 누나가 할게. 

하치만: 뭐, 그러시겠다면야……

하치만 (예전의 나였다면 이 사람에게만은 절대로 빚지려 하지 않았겠지만, 전업주부는 현실을 직시해야 하니까 말이지. 한 끼에 1, 2만 엔은 하는 이런 요정에서 더치페이할 정도로 우리 가계 사정은 여의치 않다.)

하루노: 그나저나 보증 같은 걸 서주다니, 시즈카도 참 바보네. 사람이 너무 좋은 것도 문제라니까~

하치만: ……

하루노: 하지만 히키가야군과 시즈카의 그 불행이 유키노에게 있어선 행운이었던 거네. 그렇지?

하치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하루노: 어라~? 시치미를 떼려는 걸까? 히키가야군이라면 이미 다 눈치챘을 거로 생각하는데?

하치만: ……

하루노: 빚 때문에 오갈 데 없어진 친구를 자신의 집에 살게 해주다니 친구의 귀감이네. 훌륭해~ 감동적인 이야기야~ 그게 순수하게 친구를 돕고자 하는 의도였다면 말이지.

하치만: ……

하루노: 가령 유키노가 도운 게 가하마였다면 누나도 아무 말 안 했을 거야. 히키가야군과 시즈카만이었더라도 아직 신용의 여지는 있지. 하지만 가하마까지 같이 사는 건 명백하게 다른 의도가 있다는 거거든.
           
하치만 (내가 눈치채고 확신하기까지 두 달이나 걸린 사실을 잠깐 본 것만으로도 전부 눈치채다니 변함없이 무서운 사람이다……)

하루노: 유키노가 이혼한 전남편과 왜 결혼하게 됐던 건지는 알고 있어?

하치만: ……정략결혼이었던 거 아니었나요?

하루노: 으음, 결과적으론 정략결혼처럼 되어버렸지만, 그거랑은 다른데. 

하치만: 글쎄요…… 자세한 사정은 말해준 적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요.

하루노: 유키노에게 먼저 물어볼 생각은 안 하는 게 히키가야군 답네~

하치만: ……다른 사람의 연애사엔 참견하지 않는 주의라서요.

하루노: 하긴, 물어봤다 한들 유키노가 히키가야군에게 제대로 대답해줬을 리도 없겠지만. 우리 집이 어떤 집인지는 대충 알고 있지?

하치만: 네, 뭐……

하루노: 으음, 이 누나는 말이야, 유키노시타가의 후계자다 보니까 연애는 마음대로 할 수 있어도 결혼은 마음대로 할 수 없었거든. 유키노시타가에 걸맞은, 유키노시타가에 득이 되는 상대가 아니면 안 됐어.

하치만: ……

하루노: 하지만 유키노는 아니었어. 가문을 짊어지지 않는 그 애는 유키노시타에 걸맞지 않더라도, 득이 되지 않더라도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었어. 물론 전업주부 희망자여선 우리 집 엄마를 설득하는 게 쉽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결국엔 마지못해 허락하셨을 거야.

하치만: 그럼 왜…… 왜 유키노는 정략결혼 같은 걸 한 거죠?

하루노: 히키가야군이 시즈카랑 결혼한 후로 그 유키노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 그 애, 방안에 틀어박혀 히키코모리가 돼버렸어.

하치만: 에엑……

하루노: 밥도 제대로 안 먹고 방에 틀어박혀 밤마다 히키가야군 히키가야군하고 울어대는 게 아주 난리였지. 우리 엄마조차 저러다가 자살하는 거 아닌가 걱정했을 정도니까.

하치만 (진짜냐…… 유키노가 그랬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하루노: 그래도 세 달 쯤 지나니까 어느 정도는 마음이 정리된 것인지 밖으로도 나가고 일도 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세상이 다 끝난다는 듯한 얼굴만은 여전했지.

하치만: ……

하루노: 그런 짓을 2년이나 해댔으니 우리 엄마 아빠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널 잊게 하려고 억지로 결혼시킨 거야. 그렇게라도 안 하면 그 애, 평생 너만 그리워하다가 늙어 죽을 것 같았거든. 결국, 이 꼴이 난 걸 보니 소용없는 짓이었지만. 

하치만: ……

하루노: 내 여동생이라지만 참 대단하다니까. 결혼까지 한 남자를 14년이 지나도록 못 잊고 있다니. 유키노가 히키가야군을 만난 게 고등학교 2학년 때였지? 그럼 벌써 20년도 넘게 짝사랑 중인 거네? 꺄아~ 유키노 대단해~! 누나는 흉내도 못 낼 거야~! 

하치만: ……

하루노: 으음, 20년을 짝사랑해왔으니 30년, 40년도 가능하겠지? 응, 마음이 망가져 버린 유키노라면 분명 가능할 거야.

하치만: ……죄송합니다.

하루노: 아냐, 히키가야군의 잘못은 아니니까. 사과는 오히려 이쪽이 해야겠지.

하치만: 하아……

하루노: 있잖아, 히키가야군. 히키가야군에게 있어 유키노는 어떤 존재야?

하치만: ……소중한 친구예요.

하루노: 유키노를 사랑해?

하치만: ……친구로서는 사랑해요.

하루노: 유키노가 물어봐도 그렇게 대답할 거야?

하치만: 아마 그럴 거로 생각해요.

하루노: 그렇구나. 히키가야군에게 있어 유키노가 소중한 존재기는 한 거구나.
           그럼 유키노는 앞으로도 부질없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히키가야군 옆에서 히키가야군만을 바라보고 살겠네.

하치만: 아뇨, 그렇지는……

하루노: 그렇지 않을 거라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하치만: ……

하루노: 사실 누나도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히키가야군은 유키노에게 있어 독이야. 가까이 있으면 가까이 있을수록 유키노에게 해가 될 뿐이야.
 
하치만 (유감스럽게도 부정은 할 수 없다……)

하루노: 히키가야군이 유키노를 택하지 않았던걸 뭐라고 할 생각은 없지만, 히키가야군이 유키노를 택해줬다면, 혹은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더라면, 유키노의 인생도 이렇게 미쳐돌아가지 않았을 거로 생각해.

하치만: ……

하루노: 그러니까, 적어도 이 이상 유키노가 망가져 버리기 전에, 유키노에게서 떨어져 줘.  스륵 

하치만: ……뭐죠 이건.
 
하루노: 천만 엔이야. 보증 빚은 이미 다 갚았다니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될 수 있으면 유키노네 집에서 멀리 떨어진 집을 구해서 나가줘.

하치만: ……

하치만 (이게 드라마와 책에서나 보던 '이거나 먹고 떨어져'인가…… 내 인생에 이런 돈 봉투를 받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하루노: 혹시 돈이 부족한 걸까? 누나에게도 적은 돈은 아니지만, 원한다면 더 줄 수도 있는데?

하치만 (더 줄 수도 있다고……? 새삼스럽지만 정말 사는 세계가 다르군. 하루노가 그럴 마음만 먹는다면 나 같은 일개 전업주부를 해코지 하는 건 일도 아니겠지. 만약 거절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하치만: 유키노시타 누나, 이런 돈은 받을 수 없어요.

하루노: 유키노를 위해서 주는 거지, 히키가야군을 위해서 주는 게 아니야. 달리 살 곳이 생겼다는 구실이 없으면 히키가야군도 유키노네서 나가기 힘들잖아?

하치만: 그건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루노: 아니면, 유키노랑 재혼이라도 해줄 거야?

하치만: ……

하루노: 그래 준다면야 누나로서도 환영인데. 그편이 유키노에게도 더 좋을 테고. 만약 그럴 생각이 있다면 시즈카에게 줄 위자료는 누나가 지원해줄 수 있어.

하치만 (농담처럼 가볍게 말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농담은 아닌 것 같다. 하루노는 이래 보여도 시스콘이니까, 기왕이면 여동생이 행복해길 바라는 거겠지. 하지만……)

하치만: 죄송하지만, 저밖에 기대 곳이 없는 늙은 아내를 버리고 딴 여자한테 갈 정도로 가차없는 남자는 아니라서요. 사양할게요.

하루노: 그래,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그러니까 앞으로는 유키노가 괜한 기대를 하지 않게 확실하게 거절해둬. 일말의 여지도 않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줘.

하치만: ……

하루노: 그리고 딱히 두 번 다시 만나지 말라고는 안 하겠지만, 유키노가 미련을 버릴 수 있게 될 수 있으면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특히 단둘이서는.

하치만: ……

하치만 (언젠가 셋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시즈카를 택할 것이다. 아내는 버리지 않는다. 그 마음만큼은 흔들림이 없다. 그런 내가 어중간하게 유키노와 유이의 마음을 받아들여 줘봤자 결국은 모두에게 큰 상처만 주게 되겠지. 이것이 잘못됐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하치만: ……

하치만 (하지만 그렇다고 하루노의 말대로 딱 잘라 거절하고 피하는 게 과연 적절한 선택일까? 도의적으로는 옳지만 적절하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말로 해서 설득될 정도였다면 애초에 일이 이 지경이 되지도 않았을 거다. 마음이 병들어버린 유키노와 유이는 내게 거절당한 충격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해버릴지도 모른다.)

하치만: ……

하루노: 뭐해? 빨리 안 받고.

하치만 (그래, 어느 쪽도 정답이 아니라면…… 적어도 그녀의 가족이 바라는 대로 해주는 편이 낫겠지……)

하치만: ……유키노네 집에선 되도록 빨리 나가도록 할게요. 하지만 돈은 됐어요. 저와 시즈카 둘이서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하루노: 아니, 받아둬. 정 부담스럽다면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갚든지. 무이자로 해줄 테니까.

하치만: 아뇨, 정말 됐……

하루노: 받아.  째릿

하치만: …………  

하치만 (뭐야 이거 무서워…… 이 인간 진짜 패왕색 패기라도 쓰는 거 아냐……)  스슥

하루노: 흐음, 그러면 얘기도 다 끝났으니 이제 슬슬 먹어볼까? 여기 요리 제법 맛있다고~ 히키가야군 입맛에도 분명 맞을 거야~

하치만: 아, 네……

하치만 (후우, 이런 건 보통 헤어지기 직전에 하는 거 아니냐고…… 맛은커녕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다만…… 제길, 이 인간 절대로 일부로다……)



<그날 밤, 유키노 집>

하치만 (하루노 앞에선 시즈카와 둘이서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허세를 부렸지만, 현실적으로 지금의 우리 재정상태론 단칸방을 빌리는 게 고작이다.)
 
시즈카: 희, 흰머리가…… 셋, 넷, 다섯, 여섯……  큭…… 

하치만 (애초에 시즈카를 몸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유키노네 신세를 졌던 건데 이제 와서 단칸방을 얻어 나가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고…… 역시 그 천만 엔을 쓸 수밖에 없는 건가……)

시즈카: 아, 아니지…… 벌써 흰머리가 날 리가 없어……

하치만 (하지만 이 돈을 시즈카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좋은 거냐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복권에 당첨됐다고 하는 것도 무리가 있고……)

시즈카: 아직은 나도 젊은 나이니까 말이지…… 그래, 이건 분명 새치야……  중얼중얼

하치만 (우선은 시즈카가 지금 생활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는 게 순차이려나……)

시즈카: 큭, 언제 이렇게 주름이 많아진 거지…… 파문이라도 수련해둘 걸 그랬나……  

하치만: 저기, 시즈카.

시즈카: 어, 어? 왜?

하치만: 유키노네 집에 신세 지게 된 지 석 달 정도 지났는데, 솔직히 어떻게 생각해? 많이 불편해?

시즈카: …………으음, 오랫동안 너와 둘이서만 살았으니까 아무래도 불편한 감은 있지.

하치만: 역시 그런가…… 하긴, 친구인 나도 이제야 겨우 적응됐는데 제자에게 신세 지는 셈인 시즈카 입장에선 더더욱 그렇겠군.

하치만 (게다가 시즈카 입장에선 예전에 자기 남편을 좋아하던 여자들과 같이 살게 된 셈이기까지 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겠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여간 거북한 게 아니었을 거다.) 

시즈카: 그래도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최근엔 유키노랑 유이도 친언니처럼 따라주고 있고, 원래부터 적당히 시끌벅적한 건 좋아했으니까. 뭔가 가족이 늘어난 것 같아서 이런 생활도 제법 즐겁다고 생각한다.

하치만: ……응?

하치만 (어라? 생각보다 평가가 좋다? 그야 솔직히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도 100% 솔직하게 대답하지는 않겠지만, 그걸 고려해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긍정적인 평가인데.) 

하치만: 의외네. 솔직히 좀 더 불편하게 생각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즈카: 뭐,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유키노와 유이는 내게도 특별하니까 말이지. 그 애들도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고 있고. 

하치만: ……

하치만 (사실은 싫지만 나를 생각해서 좋게좋게 말하는 거 아닐까? 이 집에서 당장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싫은 소리 해봐야 서로 마음만 불편해질 뿐이니까. 적어도 내가 시즈카 입장이었다면 솔직하게 말하진 못했을 거다.) 

하치만: 시즈카, 만약 이 집에서 나가 살 수 있다면 빨리 나가고 싶어?

시즈카: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거냐? 그럴 돈이 없다는 거 너도 알잖아.

하치만: 아니, 작은 집을 구해 빨리 나가는 거랑 돈을 더 모아서 예전에 살던 것만 한 집을 구해 나가는 것 중 어느 게 더 나을까 싶어서.

시즈카: 글쎄다. 처음엔 솔직히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만, 지금은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이대로 그 애들과 같이 사는 게 제일 나은 선택일지도 모르지……

하치만: 엥? 제일 나은 선택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시즈카: 아무것도 아니다. 하치만, 그러는 너는 지금의 생활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하치만: 나는……

하치만 (유키노와 유이의 병적인 사랑이 부담스럽다. 한지붕 아래 살면서 태연하게 불륜을 저지르려 하는 그녀들이 무섭다. 아내를 배신하고 있다는 사실이 괴롭다. 얼핏 평온해 보이는 관계 뒤로 시커먼 무언가가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 같아서 꺼림칙하다.)

하치만: ……

하치만 (그런데도 한편으론 그녀들과 함께인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내가 있다. 그녀들의 마음이 가슴 아프면서도 기쁘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대로 계속되기를 바라는 내가 있다.) 

하치만: ……

하치만 (아니, 내가 이 생활을 어떻게 느끼는지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유키노의 가족이 내가 유키노에게서 떨어지길 바라고 있으니 그렇게 해야겠지. 어차피 언젠가는 파탄 날 관계다.)

하치만: ……뭐, 좋든 나쁘든 간에 언제까지 계속 신세를 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가능하면 빨리 나가야겠지.

시즈카: ……혹시 나를 신경 써서 하는 말이라면 무리해서 그럴 필요는 없다. 

하치만: 뭐?

시즈카: 날 신경 써서 무리하게 이 집에서 나가려들 필요 없다는 거다. 유키노도 우리가 무리해서 나가는 걸 원치 않을 테고. 오히려 평생 같이 살아도 괜찮다고까지 말했으니까.

하치만: ……

시즈카: 그리고 좀 전에도 말했지만 나도 이런 생활도 제법 즐겁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하치만: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시즈카: 그래.

하치만: …………

시즈카: 너야말로 이 집에서 나가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그런 거냐?

하치만: ……실은 하루노에게 되도록 빨리 이 집에서 나가달라는 말을 들었어. 내가 같이 있으면 유키노에게 악영향만 끼친다고. 그 뭐냐, 아무래도 남자가 같이 살고 있으면 유키노도 재혼하기 힘들 테니까.

시즈카: 하루노가…… 그렇군……

하치만: 그러면서 이걸 주더라고.  스윽

시즈카: 이건…… 처, 천만 엔……!? 

하치만: 이런 돈 봉투를 받으니까 꼭 아침 드라마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더라. 

시즈카: ……하치만, 어째서 이런 걸 받아온 거냐. 친구네 집에 신세를 지는 것과는 다르단 말이다. 받아선 안 된다는 거 너도 알고 있잖나?

하치만: 현실을 직시한 것뿐이야. 지금 우리 재정상태론 단칸방이나 구하는 게 고작이니까.

시즈카: 그럼 단칸방에서 살면 될 일이다. 이런 돈을 받아서까지 좋은 집에서 살고 싶진 않다.

하치만: 넌 괜찮아도 난 단칸방 생활은 싫거든.

시즈카: ……

하치만: ……

시즈카: 후우…… 너란 녀석은……

하치만: 앞으로는 나도 알바라도 할 테니까. 나중에라도 갚으면 되지.

시즈카: ……뭐, 됐다. 이미 받아온 건 어쩔 수 없으니까. 

하치만: 유키노와 유이에겐 다음에 내가 알아서 얘기할게. 

시즈카: 하지만 정말로 괜찮은 거냐? 사실은 그러고 싶지 않은데 하루노의 말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냐?

하치만: 그런 이유도 없진 않지만, 원래부터 집 구할 돈이 생기면 나가려고 했었잖아? 그게 조금 빨라진 것뿐이야.

시즈카: ……그래, 네가 진심으로 그러길 바란다면 나는 좋다. 어느 집으로 할지는 네게 맡기마.

하치만: 그래……


한가지 걱정인 건── 이 집에서 나가겠다는 말에 유키노와 유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점이다. 분명 기뻐하진 않겠지. 
속으로 눈물을 삼키면서 애써 웃는 얼굴로 축하할까, 아니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가지 말라고 붙잡을까. 모르겠다.
마음속으로 그 모습을 상상해본다. 애써 태연한 얼굴을 하는 유키노와 울상을 짓는 유이.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쓰라린데 실제로 그 모습을 보게 되면 미어질지도 모르겠다.



<며칠 후>

하치만: ……그래서 그걸 알게 된 우리 부모님이 돈을 주셨거든. 유산을 가불해주는 거라나 뭐라나. 아무튼, 돈도 생겼으니 조만간 집을 구해서 나갈 생각이야.

유이: 거짓말…… 이렇게 갑작스럽게……

유키노: …………

하치만: 뭐, 이제부터 알아보는 거니까 한 달 정도는 더 신세 지겠지만 말이야. 아직 조금 이르지만, 미리 말할게. 지금까지 도와줘서 고맙다.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을게. 

유키노: …………

유이: 굳이 나갈 필요는 없잖아? 넷이서 살기엔 충분히 큰 집이고, 나도 유키농도 힛키랑 시즈카 언니랑 같이 사는 걸 조금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하치만: 마음은 고맙지만, 언제까지고 신세 지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유이: 신세 지는 게 아니라 나처럼 그냥 같이 산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그냥 같이 살아도…… 괜찮잖아…………

하치만: 야야, 이 집에서 나간다고 해서 딱히 다신 못 보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울상 짓지 말라고. 오히려 축하해줘야 할 일이잖아.

유키노: …………언니 짓이구나.

하치만: ……

유키노: 그래, 우리 언니가 우리 집에서 나가달라고 한 거구나……

유이: 어……? 그런 거야……?

하치만: 아니, 그러니까 우리 부모님이……

유키노: 거짓말이네. 

하치만: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건데?

유키노: 어머, 오히려 왜 그런 뻔한 거짓말을 믿을 거로 생각한 것인지 묻고 싶을 정도인데. 뭣하면 네 부모님께 직접 확인해볼까?

하치만: ……

유이: 힛키……

유키노: 후후…… 바라던 대로 그런 남자와 결혼까지 해줬건만 아직도 부족하다는거네……

하치만: ……

유키노: 언제나 언제나 왜 방해하는 거야…… 그렇게 오랜 시간을 참고 견뎌왔는데…… 이제야 겨우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는데…… 모든 게 잘 돼 가고 있었는데…… 조금만 더 있었으면…… 앞으로 조금만 더 있었으면…… 분명…………

하치만: 야, 야야 무섭잖아…… 진정……

유키노: ​용​서​못​해​용​서​못​해​용​서​못​해​용​서​못​해​떨​어​지​고​싶​지​않​아​헤​어​지​고​싶​지​않​아​헤​어​지​고​싶​지​않​아​가​지​마​가​지​마​가​면​안​돼​가​면​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싫​어​어​어​어​─​─​!​!​!​!​

하치만: …………


유키노의 마음이 병들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무거운 사랑을 설명할 길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 그녀의 병든 모습을, 망가진 모습을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착각했다. 어쩌면 그녀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해버릴지도 모른다고 그 심각성을 오인했다. 


유키노: 부탁이야…… 제발 부탁이야…… 떠나지 말아줘…… 이제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유이: 유키농…… 흐윽……

하치만: …………


언젠가는 아내를 위해 그녀들을 뿌리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울며 매달리는 그녀들을 뿌리치는 자신의 모습이 상상도 안 간다. 거절의 말이 도저히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나는 이 집을 떠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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