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모두가 행복해지는 그런 미래가 있다면……
"유혹해 놓고 이런 말을 하는 것도 그렇지만…… 아마 하치만군을 만족하게 해주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해."
침대에 드러누운 유키노가 불안하다는 듯이 두 팔로 가슴을 감싸며 말했다.
내 시선을 피한 채 작게 눈동자를 떠는 그 모습에 조금 전까지의 적극적인 모습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이런 일을 할 때 난 언제나 가만히 누워있기만 했었으니까……."
하기야 유키노가 좋아하지 않기는커녕 싫어하는 전 남편과의 성생활을 적극적으로 임했을 거라곤 생각하기 힘들다. 목석처럼 굴었을 모습이 어렵지 않게 상상이 간다. 오히려 부부관계를 거부하지 않았던 것만으로도 용하다고 해야겠지.
그리고 그런 유키노가, 마지못해 수동적인 성관계만을 해왔던 유키노가 제대로 된 테크닉을 가지고 있을 리는 없겠지.
"너무 그렇게 마음쓸 것 없다고. 나라고 뭐 특별히 잘할 것 같냐? 네가 그러면 괜히 나까지 더 부담스러우니까 그냥 마음 편히 가져라."
"그건 그렇지만……."
유키노가 어두운 얼굴로 말을 흐렸다. 성관계를 원하면서도 성관계를 두려워하는 그 모습은 마치 연애 초기의 시즈카를 보는 것 같았다.
그 무렵의 시즈카는 나보다 한참 연상이라는 사실에 책임감과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나와 만나기 전까지 성경험이 전혀 없었던 시즈카가 나를 능숙하게 리드해줄 수 있었을 리도 없었고, 이는 곧 성관계에 대한 자신감 상실로 이어졌다. 그런 시즈카를 어르고 달래며 성관계에 대한 두려움과 부담감을 떨쳐내게 하는 데는 반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경우는 전혀 다르지만 자신감 부족이라는 점에선 유키노도 시즈카와 다르지 않다. 나를 만족하게 해주지 못할까 봐, 자신의 형편없는 실력에 내가 실망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 거겠지. 그런 걸로 실망할 리가 없는데 말이다.
"나는 유이나 시즈카 언니처럼 가슴이 크지도 않고……."
유키노가 한층 더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젊었을 적엔 자신은 가슴 크기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사람의 우열은 외견적 특징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며 속사포 같은 기세로 장광설을 쏟아냈던 유키노였지만, 유전적 희망도 덧없이 사라져버린 지금에 와선 완전히 체념해버린 모양이다. 얼굴을 살짝 붉히며 기죽은 모습이 나이에 안 어울리게 귀엽다.
하기야 시즈카와 유이라는 거유들 사이에 끼어서 같이 살고 있으니 기가 죽을 만도 하다. 나라도 15cm 자로는 턱없이 부족한 대물들 사이에 끼어있으면 기가 죽었을 것이다.
"……난 딱히 가슴 크기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민감한 화제다 보니 무난하게 대답했다. 실제로 가슴 크기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 걸 따질 정도로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래, 작은 건 작은 대로 좋아한다고. 그 뭐냐, 가슴이 작으면 심장 소리를 더 가까이서 들을 수 있다잖아?"
그 말이 조금은 위안이 되었는지 유키노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오래전 그 말을 인터넷에서 처음 보았을 땐 자위가 따로 없다며 코웃음을 쳤었는데 이렇게 유용하게 써먹는 날이 올 줄이야. 아이러니하구먼.
"……그래, 하치만군은 가슴이면 다 좋아하는 거구나."
"아니, 별로 그런 의미가 아니다만……."
위로 차원의 립서비스였는데 가슴 성애자 취급이라니 정말 너무하구먼.
그보다 왜 내가 가슴을 밝힌다는 전제인 거냐. 그야 좋아하긴 하지만! 신혼 시절엔 곧잘 시즈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잤었지만!
"그럼 달리 더 좋아하는 곳이 있는 걸까?"
"글쎄다. 특별히 이렇다 할 페치는 없으니까."
가슴이라든가, 엉덩이라든가, 허벅지라든가 좋아하는 곳은 많지만 이건 대부분의 남자가 좋아하는 거니까 성적 도착증 취급을 받아도 곤란하다. 애초에 정신과에서는 신체 부위에 성적 환상을 가지는 걸 페티시로 보지 않기도 하고 말이다.
"의외네. 하치만군은 분명 Anililagnia 페티시일 거로 생각했는데."
"뭐……? 뭐냐 그게?"
에너뭐시기 페치는 또 뭡니까 유키노시타씨. 저 그런 단어는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것 같은데요.
"자기보다 나이 많은 여성을 좋아하는 페티시야."
"……확실히 시즈카는 나보다 나이가 많지만 난 딱히 연상을 좋아하는 게 아니거든?"
그보다 그거 절대로 좋은 뜻 아니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페도필리아의 정반대라는 느낌이다만.
"그래? 13살이나 연상인 시즈카 언니와 결혼했으니까 분명 그런 줄 알았는데."
"연상이라서 시즈카랑 결혼한 거 아니거든? 두세 살이면 모를까 13살 연상이란 건 오히려 마이너스 요소거든?"
남자라는 동물은 젊었을 때는 동갑이나 연상이 취향이더라도 최종적으론 연하 취향으로 귀결되는 존재니까.
"아 그래, 특별히 페치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만, 굳이 말하자면 난 냄새 페치다."
"냄새 페치……?"
"이런 식으로 말이지."
나는 나란히 옆에 누워있는 유키노를 덮치듯이 끌어안았다.
"꺄앗!"
짧은 비명과 함께 몸과 몸이 맞닿으며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시즈카나 유이와는 다른 유키노만의 체취. 이따금 맡던 그 냄새를 가슴 깊숙이 들이마셨다.
"후읍―"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은은한 샴푸 냄새, 얼굴에서 풍기는 옅은 화장품 냄새, 목덜미에서 풍기는 어린 소녀 같은 냄새, 브래지어에 스며든 희미한 땀 냄새마저도 향기로웠다. 갑갑한 마음도 잊게 하는 이 아늑한 향기를 언제까지고 맡고 싶어졌다.
"흐음, 냄새 좋네……."
유키노의 가슴에 묻고 있던 얼굴을 떼며 다시 침대 옆에 나란히 누웠다.
"변태……."
유키노가 얼굴을 붉히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변태라니, 솔직히 다른 페치에 비하면 냄새 페치는 완전 정상 아니냐?"
"개처럼 코를 박고 킁킁거리는 모습의 어디가 정상이라는 거니……."
겨드랑이나 발 냄새를 맡은 것도 아닌데 변태 취급이라니 억울하다.
"그렇긴 한데 너한테서 굉장히 좋은 냄새가 나서 말이야. 아로마테라피가 따로 필요없는 레벨이다."
"그, 그건 과장이라고 생각하는데……."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좋은 냄새가 난다. 지금까지 맡아본 냄새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다.
유이의 냄새도 그에 못지 않게 좋긴 했지만 유키노에 비하면 다소 화장품 냄새가 강해서 아쉬운 감이 있다.
시즈카의 냄새도 예전에는 코를 박고 잤을 정도로 좋아했었지만,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지 별 감흥이 안 온다. 게다가 최근엔 폐경기가 와서 그런지 희미하게 노인냄새가 나기 시작한 지라…… 노인냄새 제거 바디워시라도 사와야 하려나…….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유키노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킁킁 냄새를 맡고 있었다.
"하치만군에게서도 좋은 냄새가 나."
만족스럽다는 듯한 얼굴을 보건대 예의상 하는 말 같지는 않다.
"그래? 다행이네. 땀내라도 나서 싫어하면 어쩌나 걱정했다."
아침에 샤워하고 나서 거의 4시간은 지났으니까.
내가 냄새를 맡는 건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이 내 냄새를 맡는 건 솔직히 좀 거북하다.
중학교 시절, 체육시간에 땀을 흘리고 교실로 돌아왔을 때 옆자리에 앉은 여자애가 날 보며 냄새난다고 얼굴을 찌푸렸던 건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쓸데없는 걱정이야. 내가 네 냄새를 싫어할리가 없잖니."
"그, 그러냐……."
너무나도 스트레이트한 애정표현에 내가 다 멋쩍어졌다.
너 친한 사람과 친하지 않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극단적으로 차이 나는 거 아니냐? 요즘은 나 말고 다른 남자들은 어떻게 대하는지 몰래 훔쳐보고 싶을 정도다만. 봉사부에 막 들어갔을 당시의 내게 지금의 유키노를 보여준다면 분명 기겁을 하겠지. 아마 유키노 본인도 기겁하며 과거의 날 매도할 것이다.
"고마워. 덕분에 긴장이 많이 풀렸어."
유키노가 후훗 미소를 지었다. 본인의 말대로 긴장의 기색은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무리해서 변태처럼 들이댔던 게 효과가 있긴 했던 모양이다.
"그래그래, 굳이 잘하려들 필요 없다고. 너무 잘하는 것도 경험이 많은 것 같아서 좀 깨거든."
뭐, 테크닉이 뛰어난 여자랑 자본 적도 없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처녀였던 유이는 말할 것도 없고, 시즈카도 기본적으로 전부 내게 맡기는지라 테크닉이 뛰어나진 않다. 내가 부탁하는 건 대체로 다 들어주기 때문에 불만은 없지만.
"어머, 처녀만군은 혹시 처녀가 아닌 사람은 싫어하는 걸까?"
"야야, 그럴 리가 없잖아. 사람을 처녀빠 취급하지 마라."
서툴러도 신경 쓰지 않으니까 부담 갖지 말라는 의미에서 한 말이거든?
자이모쿠자조차도 처녀를 따지지 않는 판국에 처녀빠 취급을 당하는 건 참을 수 없다. 난 루믹에서 미망인인 관리인씨를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프리큐어를 보면서 주인공 엄마를 빨았던 사람이라고.
그 이전에 27살도 아니고 37살이나 먹은 아줌마에게 순결을 요구할 리가 없잖아? 처녀빠가 만연한 야겜 덕후들도 37살 먹은 아줌마가 처녀가 아니라고 해서 피꺼솟하진 않을 거다.
"난 그런 거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애초에 나부터가 동정이 아닌데 무슨 자격으로 그런 걸 따지겠냐? 뭐, 동정 따위는 아무런 가치도 없지만."
처녀와 달리 동정에 이렇다 할 가치는 없다. 단 한 번도 뚫린 적 없는 성과 단 한 번도 성을 뚫어보지 못한 병사. 어느 쪽의 가치가 더 클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뭐 동정도 나름의 수요가 없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파릇파릇한 청소년에 한정된 얘기로, 마법사로 전직한 모쏠들의 동정에 가치는 없다.
그런 점에서 마법사로 전직하기까지 2년밖에 남지 않았던 나와, 거미줄 치기 직전이었던 시즈카는 일종의 윈윈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참 안습한 윈윈 관계구먼…….
"……그래도 나는 가지고 싶었어. 첫 키스도, 처음도, 전부 네게 주고 싶었어."
유키노가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주친 두 눈엔 오랜 후회와 아쉬움이 어려있었다. 그런 얼굴을 보고 있으니 조금 전까지의 들뜬 기분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
언젠가 파탄 날지라도 지금 이 순간만은 행복하게 해주자는 생각에 무리해서 웃었건만 조금만 방심하면 이 모양이다. 시즈카와 할 때처럼 서로 행복한 시간이 되는 건 분명 무리겠지. 그러기에는 유키노의 한은 너무 깊고, 아내에 대한 내 애정도 너무 깊다.
동정심과 죄책감에서 비롯된 가식적인 사랑. 젊은 날의 우리가 무엇보다 혐오하던 허울뿐인 공조와 무엇이 다를까. 누구보다도 그것을 혐오했을 터인 그녀가 지금은 누구보다도 그것을 갈구하고 있다. 그 변한 모습이 내 마음을 괴롭혀 온다.
"……하치만군, 키스해주지 않을래? 이번에는 네가 해줬으면 해."
"……그래."
그렇다고 해도 이제는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그녀에게 위로가 된다면, 상처를 아물게 해준다면,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되돌아가는 길 따윈 없으니까.
× × ×
이튿날, 나는 유키노의 손에 이끌려 역 근처에 있는 고양이 카페에 왔다.
집에서부터 걸어서 고작 15분 거리. 이번에 새로 개장했다고 한다.
요즘은 드물지도 않은 동물카페지만 딱히 번화가도 아닌 이런 곳에 생기다니 의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장사가 잘 될 것 같지는 않다. 뭐, 단골손님(예정)은 벌써 한 명 생긴 것 같지만.
"냐앙."
조금 전부터 테이블 위로 올라온 러시안 블루에게 말을 걸고 있는 유키노.
37살이나 먹은 아줌마가 냥냥거린다고 하면 조소가 절로 나오겠지만, 나이에 안 맞게 젊고 귀여운 외모는 그것을 용서하게 한다.
나는 내 옆에 태평하게 누워있는 죽은 가마쿠라와 닮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이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한가롭구먼…….
카페 안에 손님이라곤 우리 둘뿐. 다른 손님의 눈치를 볼 것도 없이 마음껏 고양이들을 독점하고 있는 유키노. 이런 평일 오전부터 고양이 카페에 오려고 한 이유가 이거였군.
어제 유이에게서 이 고양이 카페 광고를 건네받은 유키노가 기쁨에 부르르 떨던 모습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어찌나 좋아하던지 그냥 나 말고 고양이나 한 마리나 키우는 게 더 낫지 않나 싶었을 정도다.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이구나."
"그래,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는 거구나."
……뭐야 이거, 진짜로 하치만 테라피보다 애니멀 테라피가 더 도움되는 거 아니냐? 그럼 유이는 개 카페에 데려가면 되는 건가?
"그렇게 좋으면 한 마리 기르지 왜 안 길렀던 거냐?"
모처럼이니까 전부터 품고 있던 작은 의문을 물어보기로 했다. 이렇게나 고양이를 좋아하는 녀석이 주변의 신경을 쓸 필요도 없는 단독주택에 살면서 고양이를 기르지 않았다는 게 전부터 의아했단 말이지. 뭐 대충 예상은 가지만.
"유이는 고양이를 어려워하잖니."
유키노가 고양이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아니, 유이나 내가 신세 지기 전에도 너 거의 10년은 그 집에서 살고 있었잖아. 혹시 전 남편이 고양이를 싫어했냐?"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나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고양이랑 같이 있으면 즐거우니까."
"뭐……?"
"……고양이와 함께 놀며 웃는 모습을 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
"그, 그러냐……."
그렇게까지 전 남편이 싫었던 거냐……
어제 부부관계를 할 때 남편에게 느끼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필사적으로 참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소름이 돋았지만, 이것도 그에 못지 않게 세다. 이쯤 되면 같은 남자로서 동정심마저 느낀다. 유키노도 그렇지만 남편도 남편대로 지옥 같은 결혼생활이었을 거다.
"야 유키노, 갑자기 이런 걸 물어봐서 미안한데 너 혹시 불임이냐?"
"……갑자기 뭐니?"
유키노가 흘끗 고개를 돌려 가볍게 나를 째려봤다.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했잖아.
"아니, 그 뭐냐…… 너희 부부도 아이가 없었으니까. 혹시 우리 부부처럼 문제가 있나 싶어서 말이야."
뭐, 어제 들은 얘기와 조금 전 들은 얘기를 생각해보면 불임이 아니라 일부러 피임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테이블 위에 앉아있는 고양이의 턱을 간질이던 유키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사람과 부부관계를 했을 땐 언제나 콘돔을 씌우고, 피임약을 먹었으니까. 내게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니까 걱정마렴."
"그러냐……."
역시 일부러 피임한 거였냐…… 콘돔만으론 못 미더워서 피임약까지 먹었다니 정말 철저하시네요.
어쩌면 유키노의 전 남편은 콘돔 없이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해본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어느 의미 나도 유키노의 첫 남자라면 첫 남자일지도 모르…… 아…….
"우, 우오옷―!?"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버렸다. 나 때문에 놀랐는지 옆에 누워있던 고양이가 그르릉 거리고는 옆 테이블로 떠나갔다.
"고양이가 놀라잖니. 갑자기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냐……."
다시 의자에 앉으며 그렇게 대답하자 유키노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난 어쩌면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질러버린 걸지도 모른다. 아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시즈카와의 연애기간 3개월 이후로 단 한 번도 콘돔을 껴본 적이 없다 보니 콘돔을 끼고 해야 한다는 걸 완전히 잊고 있었다.
유이랑 할 때는 러브호텔에 떡하니 콘돔이 있었기 때문에 괜찮았지만, 어제는 무심코 콘돔 없이 해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평소 시즈카랑 하던 것처럼 질내○정.
유키노는 시즈카와 헤어지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었지만, 동서고금의 막장 드라마를 읽어온 내 경험에 의하면 이건 완전히 적신호다. 만삭의 유키노가 승리의 브이를 내미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야, 야 유키노…… 근데 너 어제 안전일 맞지……?"
담담하게 물어보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리고 식은땀이 흘러버렸다.
"……하아."
유키노가 이마를 가볍게 누르면서 한숨을 쉬었다.
"왜 갑자기 안절부절못하나 했더니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구나."
"아, 아니, 그 뭐냐…… 중요한 문제니까……."
"어제는 안전일이었으니까 안심하렴. 게다가 피임약도 먹었으니까."
"그, 그렇군……."
안전일인 건 그렇다 쳐도 피임약까지 먹은 것은 의외다. 유키노의 입장에서는 임신이라도 해버리는 편이 훨씬 유리할 테니까.
시즈카와 헤어지라고 할 생각은 없다고 유키노는 말했지만, 이 불륜도 언젠가는 들통 날 것이고, 그날이 오면 결국 난 누군가 한 사람을 택할 수밖에 없다. 그때 배 속의 아이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비장의 카드가 될 것이다. 시즈카와 헤어질 생각이 없다는 내 마음을 흔들어놓을 정도로. 그걸 유키노가 모를 리는 없다.
"……."
생각해보면 이상한 이야기다. 유키노와 유이는 어째서 시즈카와 헤어지라고 할 생각은 없다고 말하는 걸까?
하룻밤의 외도라면 모를까, 앞으로도 계속 내게 사랑받길 원하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이상한 일이다.
평범하게 생각한다면 나를 회유하기 위한 거짓말이라고 봐야겠지만 그녀들이 내게 그런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 거짓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후아아옹~"
갑자기 테이블 위에서 유키노와 놀고 있던 러시안 블루가 크게 하품을 했다.
"아! 카, 카메라……."
그 모습을 휴대폰 카메라로 찍으려는 듯 유키노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낸다.
그러나 몇 초 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에 맞출 수 있을 리도 없다. 유키노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을 땐 이미 고양이는 하품을 끝마치고 앞발로 목을 긁고 있었다.
"아……."
유키노가 아쉬운 기색으로 그 모습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
유키노가 이런 본연의 귀엽고 상냥한 모습을 허락하는 상대는 얼마 되지 않는다. 아마 한손으로도 충분히 셀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특별한 사람들 속에 시즈카는 포함되어 있는 걸까?
나는 말할 것도 없고, 유키노와 유이에게 있어서도 시즈카는 특별한 존재다.
고교 시절의 선생님. 은사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존재. 시즈카가 있었기에 우리 세 사람은 만날 수 있었다. 변할 수 있었다.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그런 시즈카에게 지금도 나는 감사하고 있다. 분명 그녀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녀들에게 있어 시즈카는 누구보다도 원망스러운 존재다. 유키노와 유이의 입장에서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도둑고양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나에 대한 사랑이 큰 만큼 시즈카에 대한 원망도 컸을 테지.
만취해 시즈카와 잠을 자고 그대로 사귀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들과 난 친구 이상 연인 이하의 관계였으니까. 둘 중 누구와 사귀게 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었으니까.
만약 그 크리스마스날, 유키노네 집으로 가는 길에 우연히 시즈카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혹은 만취해 인사불성이 되지 않았더라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유키노, 너 역시 시즈카가 원망스럽냐?"
이 각도 저 각도로 사진을 찍고 있던 유키노가 손길을 멈추며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솔직하게 대답해주면 좋겠는데."
기나긴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유키노가 후우 깊은 한숨을 쉬고는 나직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어."
"그럼 지금은 아니라는 거냐?"
"그래, 시즈카 언니를 원망하는 건 번지수가 잘못됐으니까. 굳이 누군가를 원망한다면 연적이 유이뿐이라 안이하게 생각했던 나 자신을 원망해야겠지."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학창시절, 누구보다도 남자 문제로 시달렸었던 유키노다. 자신이 혐오해 마지않던 그 행위를 스스로 저지를 수는 없었겠지.
"왜? 혹시 내가 시즈카 언니를 괴롭히기라도 할까 봐 걱정됐니?"
"……."
솔직히 말하자면 유키노와 유이가 내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 유키노가 보증 빚으로 갈 곳을 잃은 우리 부부를 도와줬던 게 순수한 호의로 그런 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혹 내 눈을 피해 시즈카를 괴롭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죄를 지은 건 아니지만 원망받기엔 충분하니까.
"후후, 그럴 리가 없잖니. 시즈카 언니는 내게 있어 하치만과 유이 다음으로 소중한 사람인걸."
"……그러냐."
그것은 시즈카의 남편으로서 무엇보다 기쁘고 슬픈 말이었다. 피가 이어진 가족보다도 소중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배신할 수 있다는 거니까. 1위와 3위의 격차는 헤아릴 수도 없이 크다.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안타깝고 슬플 수 있다는 걸 예전에는 몰랐다.
"……야 유키노, 한 달 전 내가 유이랑 같이 유이네 부모님 댁을 찾아갔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넌 혹시 알고 있냐?"
"……그래, 알고 있어."
역시 그런가. 하기야 모르는 게 더 이상할 거다. 우리 부부가 이사 오는 것에 맞춰 유이와 동거를 시작했을 정도니, 유이와 있었던 일들은 유키노도 모두 알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핫."
나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왔다. 모르는 건 시즈카뿐인 건가. 시즈카만이 아무것도 모른 채, 배신당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바보처럼 웃고 떠들고 있는 건가…….
난 시즈카를 사랑하고 있다. 헤어지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유키노와 유이를 안은 것은 어디까지나 나 하나만 바라보다 인생을 망친 그녀들에 대한 연민과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지, 아내에 대한 애정이 식어서가 아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내가 먼저 그녀들을 유혹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거다.
"하치만,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게 괴롭니?"
"……괴로워."
괴롭다. 괴로워서 밤에도 제대로 잠을 못잔다. 내가 죽는 걸로 원만하게 해결된다면 죽고 싶을 정도다.
"걱정하지 마. 당장은 괴롭더라도 머지않아 당당하게 웃을 수 있는 날이 올 거야."
"뭐……? 그게 무슨 소린데? 나보고 지금 죄책감 가지지 말고 당당하게 바람피우라는 거냐?"
나에게 바람둥이의 재능은 없다. 애정이 식었다면 모를까, 사랑하는 아내를 배신하고 있는데, 속이고 있는데, 어떻게 죄책감이 안 들 수 있겠는가.
그러나 유키노는 그런 뜻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하치만, 난 행복해지고 싶어. 네게 사랑받고 싶어. 예전 같은 쓸쓸한 기분을 더는 맛보고 싶지 않아."
"……."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시즈카 언니를 불행하게 만들고 싶진 않아. 내가 바라는 건 어디까지나 넷이서 함께 행복해지는 거니까."
"……넷이서 행복해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불륜은 언젠가 파탄 날수밖에 없다고."
불륜에 해피엔딩 같은 건 없다. 적어도 한 사람은 상처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언젠가는 맞이하게 될 비참한 결말에 얼굴이 절로 찌푸려진다. 주먹을 움켜쥐게 된다.
그런 내 손을 유키노가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그리고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반드시 그렇다고 정해진 건 아니야. 모두가 행복해지는 미래도 분명 있어."
아무래도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인 모양이다.
대체 무슨 근자감으로 하는 소리인지…….
"아 그렇습니까……."
"응, 그래."
싱긋 웃으며 유키노가 대꾸했다.
그 말대로 누구 하나도 빠지는 일 없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미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더는 바랄 게 없다.
하지만 내게는 그런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시즈카가, 유키노가, 유이가, 혹은 모두가 불행한 미래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유키노는 그런 미래도 있다고 단언한다.
"……정말로 그런 미래가 있는 걸까?"
"있어."
유키노가 테이블 위로 두 손을 내밀어 내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
"하치만이 바란다면 분명 그런 미래가 올 거야. 내가 이루어줄게."
정말이지 반칙이라니까. 역시 이 녀석한테는 못 이기겠다. 저런 상냥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부정 같은 건 못 한다고.
"…………난 모두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유키노가 말하는 모두가 행복해지는 미래라는 걸 나도 한번 믿어보고 싶어졌다. 저렇게나 자신 있어 하니 한번 믿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너의 그 의뢰, 받아들일게."
그리고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에게 다가가 입을 맞췄다.
세 번째로 나누는 키스. 세 번째에 이르러서야 겨우 나는 유키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걸로 네 번째 키스구나."
"엥? 세 번째 키스 아니냐? 어제 거실에서 한번, 네 방에서 한번, 지금 한번."
나는 손가락으로 횟수를 세며 말했다. 다시 세어볼 필요도 없이 세 번째다.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내게 유키노가 손을 뻗는다. 그리고는 펼쳐져 있는 내 약지를 마저 접어주며 장난스러운 미소로 말했다.
"첫 번째 키스는 네가 자고 있을 때 이미 끝마쳤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