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딛는 첫걸음
옷장을 열고 안에 넣어둔 옷들을 확인한다. 어제도 그제도 똑같은 짓을 했으니 결과는 알고 있는데, 그래도 그만두질 못한다. 분명 내일도 이러겠지. 그리고 그 결과로 한숨이 나오는 거다.
왜 이렇게나 귀여운 옷이 없는 걸까.
아니, 이유는 알고 있다. 안 어울리니까. 키가 크고 머리카락도 짧아서 어릴 적부터 남자애 같다는 소릴 들었지만, 그래도 내겐 요시노가 있었으니까, 지켜야 할 소중한 공주님이 있었으니까, 공주님을 수호하는 기사로 있을 수 있으면 충분했다.
학교에 갈 때는 교복 치마를 입지만, 그럴 때 말고는 대체 몇 년이나 치마같은 걸 걸친 적 없는 건지. 당연히 옷장 안에도 그런 옷은 전혀 없고.
역시나 여자애다운 모습을 하는 게 괜찮을까. 아니면 평소대로의 모습으로 있는게 좋을까. 그이는 지금의 내 모습밖에 모를 거고, 그런 나를 보고 권해 준 거고…….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나, 그, ‘그이’라고…………!’
자신의 생각에 스스로 얼굴을 붉히며, 양 뺨을 손으로 누른다.
아직 고백도 뭣도 받은 것도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나 망상만이 앞서가는 걸까.
‘그래도, 코스모스 문고의 작품에선 자주……아 그런가, 거기 영향을 받은 거구나.’
그 취미 탓에 더더욱 상상만이 퍼져나가는 거다. 수많은 순정만화나 순정소설의 스토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머릿속에서 전개되어 간다. 그중에서 사정 좋은 부분만 취사 선택되어, 뇌내에서 스토리가 재구성 된다.
‘자, 잠깐 기다리라니까! 애초에 나는 유키 군을 잘 아는 것도 아니고, 맞아, 면역이 없으니까 이상하게 이상화 해 버리는 거야. 응 응, 좀 침착하게 유키 군에 대해 생각해 보자. 내가 유키 군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에에―애초에 유키 군은 나보다 키도 작고 연하고, 조금 의지가 안 될 것 같고, 그래도 얼굴은 귀엽고 상냥하고. 의지 안 될 것 처럼 보이지만 하나데라의 학생회장을 하고 있으니까 사실은 모두에게 신뢰받고 있겠지……그렇게 생각하면 연하인 남친이라는 것도 꽤……잠깐, 으아아아아아아, 그러니까, 왜 바로 그런 쪽으로 넘어가 버리는 거야―?!’
나는 머리를 부둥켜 안으며 침대에 쓰러졌다.
그러자,
“…………아까부터 뭐 하는 거야, 레이 쨩?”
“우햐아아아아앗, 요, 요시노?!”
방 입구 즈음에서 요시노가 차가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언제부터 있었어?!”
“레이 쨩이 혼자 표정을 확확 바꾸면서, 방 가운데를 빙빙 돌며 몸부림치거나 신음하기 시작했을 즈음부터. 레이 쨩도 참, 요시노가 온 걸 전혀 깨닫지 못하는 걸.”
뺨을 부풀리며 화내는 요시노.
우와, 곤란해, 요시노한테 들렸나? 아니, 아마 소리로는 안 냈을테니 괜찮을 거다. 그래도 그런 기행을 보여 버리다니. 요시노랑 사귀어온 시간이 기니, 거기서부터 어찌저찌 진실에 도달할 가능성도 있다.
“미, 미안. 조금 고민 하느라.”
“어떤 고민을 하면 그런 상태가 되는 거야?”
“아니, 그건……그, 그보다 볼일 있어?”
“볼일 있어? 가 아니잖아. 오늘은 내 쇼핑에 같이 가겠다고 약속 했었잖아?”
“에, 아, 그랬었나.”
그러고 보면 그런 약속을 어제 했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요시노와의 약속을 잊다니, 꽤나 중증이다.
“너무해! 나랑 한 약속을 잊다니, 이제 레이 쨩 같은 건 몰라!”
“우와, 미, 미안! 조금 정신을 놓고 있었어. 생각났어, 가을용으로 괜찮은 게 나왔으니까 보러 가자고 했었지? 아아아 자, 호오도鳳凰堂의 프루트 타르트 살테니 마음 풀어줘, 요시노오.”
결국 이 날은, 요시노의 마음을 푸는데 하루가 걸렸다. 게다가 그다음, 요시노의 사정 없는 추궁을 받아 나는 그걸 어떻게든 얼버무리느라 힘들었다.
―――이름을 불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문득 시선을 들어 보자,
“레이, 레이도 참, 듣고 있니?!”
사치코의 화난 표정이 정면에 있었다.
“우, 우왓, 사치코? 뭐야, 왜 그래?”
“왜 그래, 가 아니잖아. 그건 오히려 내가 할 말이야.”
기막힌 듯이 사치코가 고개를 저었다.
그 때 간신히 정신을 차린다. 여기는 장미관이고, 오늘도 산백합회 임원은 학교 축제를 위한 미팅을 하기 위해 모여 있었던 거다.
“오고 나서 계속 마음이 다른데 있었잖아. 무슨 생각을 한 거니?”
“무슨 생각이냐니, 별로…….”
거기서, 사치코 외의 모두――시마코, 유미 쨩, 노리코 쨩, 그리고 요시노의 눈길이 나를 향한 걸 깨달았다.
“어제도 이상했었어요, 언니.”
삐친 듯이 요시노가 말한다.
“컨디션이라도 나빠지신 건가요?”
걱정스런 듯 유미 쨩이 물어본다.
“더위에 먹히셨다거나?”
느긋히 시마코가 고개를 갸웃인다.
“언니, 하시려던 말씀은 더위 먹었다가 아닐까요?”
침착하게 태클 거는 노리코 쨩.
“뭐어, 언니라면 먹히는 것도 가능할 지도 모르지만.”
시원스레 수긍하는 요시노. 잠깐, 너무하지 않나.
“어쨌든, 컨디션이 나쁜 거라면 무리하게 있을 필요는 없어. 아직은 무리를 해야 할만한 단계가 아니니까.”
어느샌가 나는 컨디션이 나쁜 걸로 된 모양이다.
“미안, 괜찮아. 조금 멍하니 있었던 것뿐이니까.”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가볍게 뺨을 두드리며 자신을 꾸짖는다.
“레이님, 괜찮으셔요? 너무 무리하시진 않는게.”
그러자 유미 쨩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배려해 준다. 정말 상냥하고 귀여운 애다. 이런 유미 쨩의 남동생이니까 역시 나쁜 애일 리가 없다. 그렇게 되면, 설령 내가……그러면, 나는 유미 쨩의…………앗…………!
“무, 무슨 일이세요 레이 님? 얼굴이 새빨개요.”
다시금 생각이 폭주해 버린 나는, 유미 쨩이 말하는 대로 얼굴에 열이 몰리는 걸 느꼈다.
“미, 미안, 역시 조금 열이 있는 것 같으니까 오늘은 들어가기로 할게.”
“아, 잠깐 레이?!”
내 가방을 들고 달아나듯 비스킷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려나. 혹시나 들킨 건 아니겠지.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한 거지…….’
그리고 나는 장미관을 나가서 집에 도착할 때 까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도록 전력으로 달렸다.
이대로는 안된다고 생각해, 나는 다음날 도장에 나갔다. 무심으로 검을 휘두르면 쓸데없는 생각은 어딘가 사라질 테니까.
하지만 내가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나는 중증인 모양이라, 평소였으면 질 리 없는 상대인 도장에 다니는 중등부 남자애에게 멋지게 한 방을 먹어서 아버지께 엄하게 질책받았다. 아니, 도장 안에선 아버지가 아니라 사범이다.
“뭐냐 레이, 그 영혼 빠진 검은! 할 마음이 있는 거냐!”
“며, 면목 없습니다!”
“이제 됐어. 그런 패기 없는 녀석이 있어봐야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 뿐이다. 오늘은 이제 들어가!”
“…………예.”
이미 나를 바라보지도 않고 있는 사범에게 인사를 하고 도장을 떠난다. 그런 나를 문하생들이 놀란 듯이, 혹은 이상하다는 듯이 지켜본다.
나 스스로도 자신의 칠칠맞음이 한심할 정도였으니, 뭐라 돌려줄 말도 없었다.
“휘두르기 이백번을 한 뒤에 올라가도록.”
“예.”
죽도를 손에 들고, 말 없이 나는 도장을 나섰다.
아버지의 질책이 효과가 있었는지, 휘두르기 중에 무심에 이를 수 있었다. 나는 이마에서 배여나오는 땀을 닦으며 집으로 돌아가, 땀을 씻어내리기 위해 욕실을 향했다. 도복을 벗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욕실에 들어간다.
집의 욕실에는 샤워가 없어서, 연습을 할 때는 미리 욕조를 채워 두도록 어머니께 부탁을 해 둔다. 그러지 못했을 때는 슬쩍 요시노네 집에 가서 샤워를 빌리고 있다. 역시 샤워기 있으면 좋겠는데. 특히 한여름에는 절실하다. 그도 그럴게 검도복은…….
그러다 레이는, 문득 자기 손의 냄새를 맡아 봤다.
“우와…….”
자기 손인데도 그런 소리를 내며 얼굴을 찡그린다. 아니, 이제 와서 이런 짓을 안 해도 알고는 있다. 오랫동안 써온 토시를 끼고 있던 손은, 보통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냄새가 지독한 거다.
“나는, 땀내 나는 편이려나…….”
어렸을 무렵붑터 계속 검도를 해 왔다. 더운 여름날도, 추운 겨울날도 빠지지 않고 훈련을 해 왔다. 어릴 무렵에는 신경도 안 썼다. 중학생 즈음부터 신경은 쓰였지만, 별수 없다고 포기했었다.
하지만 한 번 신경쓰이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 손만이 아니라 팔이나 다리가 냄새나진 않나 코를 가까이 댄다.
―――땀내나는 여자애라니, 역시 아무도 좋아할 리 없겠지.
한숨을 내쉰다.
한 번 손바닥을 바라본다. 이번엔 냄새가 아니다. 검도로 단련된, 여자답지 않은 크고 울퉁불퉁한 손. 수없이 물집이 잡혔다 터지며 단단해져온 손바닥. 그 축제 밤에, 이런 손을 잡고 유키 군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요시노는 내 손을 좋아한다고 말해 준다. 딱딱하고 울퉁불퉁하지만, 상냥한 손이라고 말해 준다.
그래도 그런 건 분명 요시노니 할 수 있는 말이겠지.
평범한 남자애가 보기엔, 당연히 요시노처럼 작고 갸냘프고 하얗고 부드러운 손이 좋을 거다.
손바닥만이 아니다.
나는 두 팔을 만졌다.
결코 두껍진 않지만, 단련된 보들보들한 근육이 몸에 붙어 있다. 팔만이 아니라 다리도 그렇다. 배근육도…….
“정말 나는, 여자다운 부분이 전혀 없구나…….”
스스로도 취미는 여자답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걸모습만 보면 전혀 그런 부분이 없다.
“아니, 그래도 가슴은 제법…….”
하고, 눈길을 내려 자신의 두 언덕을 내려본다.
응, 단련해온 것 치곤 꽤 가슴은 순조롭게 성장해 왔다. 체육 수업 때 등은 방해라고 느낄 때도 있다. 속옷도 지금 입는 건 조금 끼기 시작했다. 그야, 사치코에겐 당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정말, 이상한 것들만!”
나는 욕조의 물을 퍼올려 머리 위에 뿌렸다. 같은 걸 두세번 되풀이한다. 뜨거운 물이 몸에 스며들어, 온몸이 상쾌해진다. 그대로 몸을 가볍게 씻은 뒤, 욕조에 몸을 담근다.
“후―――.”
기분 좋은 피로감이 덮쳐온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도 뇌리에 떠오르는 건 드디어 내일로 다가온 유키 군과의 약속.
욕조에 잠겨 있어도 나는 자신의 몸이 신경 쓰여서 참을 수 없었다. 역시, 좀 더 제대로 씻어서 몸도 마음도 깨끗히 하고 가야겠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괜찮도록……잠깐, 무슨 일이 일어나도라니, 뭐가 일어나는 걸 생각하는 거야 나는?!
아, 그래도 얼마 전에 읽었던 코스모스 문고 중 한 권을 떠올린다. 확실히 주인공인 남녀가 서로에게 고집부리는 동안, 이러쿵저러쿵 하다 그런 곳에 가서 일선을 넘어버린다는 내용. 그 외에도 마음에 드는 순정만화에선 주인공인 여자애가, 그……일을 한다거나. 직접적인 묘사는 거의 없지만, 내 애독서 중에서도 역시 남녀간에 그런 관계는 여러모로 그려져 있으니까.
자신도 언젠가 남자와 사귀게 되어 그런 관계가 되어 가는 건지 생각한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까놓고 말해서 현실감은 전혀 없어서, 리얼함이 느껴지지 않는 상상 세계속의 일이었긴 해도.
실제로 남자와 둘이서 나가는, 즉 데이트라고 해도 괜찮은 상황이 자신에게 찾아와서 처음으로 조금 현실감이 느껴졌다.
그런 일은 절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속 어딘가에서 이상한 상상을 해 버리는 부분이 있어서.
나는 결국 세번이나 몸을 씻어 버렸다.
그리고 욕실을 나갈 즈음에는, 거의 현기증 나기 직전이었다.
자기 기분도, 마음도,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채로 약속날을 맞았다. 분발할 건 없다. 가벼운 마음으로 유키 군과 조금 노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자신을 설득한다.
“맞아. 유키 군도 좀 가벼운 기분으로 권한 걸지도 모르고.”
소리로 내서 말하면서, 자신에게 걸리는 중압을 가볍게 만들려 한다. 밸런타인 이벤트 때의 데이트에선 긴장같은 건 안 했는데, 상대가 바뀌면 이렇게나 기분이 바뀌어 버리는 건가.
세면장에서 머리카락을 고친다.
이렇게 말은 해도 단발이라 그리 손댈 부분이 없다. 머리모양도 평소랑 마찬가지고.
점심을 먹고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는다.
내가 선택한 건 오프화이트의 살로페트. 옷길은 풀오버 니트로 왼쪽 앞어깨 버튼으로 붙어 있다. 아래는 넉넉한 편이고 웨스트엔 허리 끈이 있다. 거기에 옅은 초록색 웨지 샌들을 맞춘다.
여름다워서 좋아하는 옷이긴 하지만, 노출이 많아서 여자치곤 근육질적인 팔죽지가 굉장히 신경 쓰인다. 그렇다곤 해도, 오늘도 날씨가 굉장히 좋다보니 더이상 뭔가 입었다간 꽤나 더울 건 틀림 없다.
나는 이제 체념하기로 했다. 어차피 숨길 수도 없을 거고, 이것도 하세쿠라 레이라는 사람의 일부분인 거니까.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어머, 오늘은 요시노 쨩과 나가는 거 아니니?”
현관에서 샌들을 신고 있자, 어머니가 와서 의아스러운 듯 물어봤다.
“응, 오늘은 검도부 동료들과 약속이야.”
“흐응, 드문 일이네.”
“올해는 수험이라 꽤 모이기도 힘들어 질테니, 그 전에 한 번 놀러 가자고.”
예전부터 생각해 둔 변명을 입에 담는다.
역시 남자와 둘이서 놀러 간다는 말은 부끄러워서 말하기 힘들고, 만에 하나 요시노나 아버지의 귀에라도 들어갔다간 또 까다로워질게 틀림 없다.
“그래. 그럼 오늘은 늦게 올거니?”
“에, 아, 그, 그, 그, 그렇게까지 늦어질만한 사태론 안 갈 생각인데.”
“하아? 무슨 소리 하는 거니. 저녁 밥을 어떻게 할지 묻는 거야.”
어머니가 기막힌 듯 나를 보고 있다. 또 나는 혼자서 쓸데없이 넘겨짚어 버렸다. 더 이상 실수를 하기 전에 나가는게 낫겠다.
“에에, 밤에는 돌아오리라 생각하지만, 혹시 다 같이 먹고 오게 되면 전화 할 테니까.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응, 다녀오렴.”
어머니는 아직 뭔가 말하고 싶어 보였지만, 나를 그대로 배웅해 주었다. 의심받았으려나. 나는 자신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건 그리 익숙하지 않으니까.
그런데도.
밖에 한 걸음을 내딛자, 온 몸을 찌르는 듯한 여름의 광선.
눈부신 태양에 눈시울을 좁히며, 나는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