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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싹


새벽


약간의 두려움과 풍부한 설렘이 차가운 새벽 공기에 섞여 여명으로 떠올랐다. 모피 망토를 어깨에 걸치고 흰 입김을 뿜어내며 뱃전에 서성인지도 한참, 한없이 이어져 있을 것 같던 바다도 결국은 끝이 났다. 세상은 사실 평평하지 않고 동그란 구 모양이라고 밝혀진 지도 벌써 이백 년은 넘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세스는 저 멀리 희게 밝아지는 항구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가 황도인가요?”

“예, 맞습니다. 마담 ​르​와​이​얄​(​M​a​d​a​m​e​ Royale).”

귀하신 황녀가 해가 뜨기 전부터 나와 있는 바람에 얼굴이 찬바람에 스쳐 얼어붙도록 옆에 시립해 있던 선장이 덜덜 떨며 대답했다.

날이 추우니 들어가 계시라는 그의 정중한 부탁에도 세스는 고집을 부렸다. 북부의 특산품이라는 털모자와, 손에 착 달라붙는 사슴가죽 장갑과, 보들보들한 비버 가죽 망토를 뒤집어쓰고 덜덜 떨면서도 갑판에 서 있었다.

북쪽의 가을은 생각 이상으로 차가웠다. 본국에서 짐을 챙길 때에는 남쪽의 가을 날씨를 생각하고 무슨 짐을 그렇게 두꺼운 것만 골라 챙기느냐 느긋하게 생각했던 그녀는 타고 있던 배가 북상하면 할수록 추위에 질렸고, 급기야는 감기 몸살에 걸려 기침과 콧물을 달고 살았다.

하지만 통통 뛰는 심장이 그녀를 잡아 이끌었다. 지금만큼은 나와 있는 것이 그녀 자신에 대한 예의일 것 같았다.

톱날이라도 박힌 듯 날카로운 바람이 뺨을 에일 듯이 불어왔다. 세스는 저 멀리 항구가 보인다고 바로 도착하지 못한다는 걸 뼈저리게 배웠다. 선원이 타온 코코아를 홀짝이며 서너 시간은 족히 지나고 나서야 세스 일행이 탄 배는 항구에 도착했다. 물 사이로 빠끔 고개를 내밀었던 해는 성실하게 달려가 하늘 한가운데에서 빛나고 있었다.

항구에 도착했다고 끝이 아니었다. 거대한 배가 정박하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렸다. 뺨이 발갛게 얼고, 공기가 스며든 폐부에 자잘한 얼음조각이 맺히지나 않았을는지 의심될 무렵에야 배가 완전히 멈췄고 배와 육지 사이에 널빤지로 된 다리가 놓였다.

건너편에는 마차 여러 대와 사람들이 바글바글 서 있었다. 세스가 선장에게 에스코트를 청해 내려가려던 그 순간,

가장 키 큰 남자가 행렬을 이탈해 훌쩍 뛰어오르듯 올라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반갑소.”

발음이 대단히 딱딱했지만 분명 로렌에서 사용하는 남부 갈리아 어였다. 세스는 눈을 둥글게 떴다.

아주 잘생긴, 아니 아주 아름다운 남자였다. 머리를 길러서 묶는 남쪽의 귀족들과는 달리 옅은 레몬색 금발을 목덜미에서 짧게 쳐서 다듬었다. 새순 같은 연둣빛 눈이니 좀 따스해 보이기도 하련만, 흰 피부 때문인지 오히려 아주 차가워 보였다. 표정이 없어 얼음으로 빚어놓은 것 같다. 키가 아주 커서, 굽 높은 구두를 신었는데도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꺾다시피 해야 했다.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미리 머리칼이 옅은 금발이라는 사실을 듣지 못했다 하더라도, 온몸에 흐르는 당당한 오만을 보면 모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 이 사람이.

“춥지 않으신가요?”

그러나 세스가 꺼낸 말은 외모에 대한 칭찬이 아니라 그의 차림에 대한 경악이었다. 그는 목깃 높은 검은 예복을 입고 하늘색 어깨띠를 두르고 있었는데, 그 위에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았다. 잔뜩 껴입은 세스와는 대조적이었다.

“처음 한다는 말이 그거요?”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렇게나 바람이 차가운데 외투도 안 입고 나오셨잖아요.”

“오늘 날씨를 두고 춥다고 하면 앞으로 고생할 거요.”

“아하, 북쪽에서 오늘 날씨는 그리 추운 날씨가 아닌가보군요? 역시 북쪽 날씨는 무섭군요. 적응하도록 노력해 볼게요.”

그의 뒤로 수행원들이 따라붙었다. 황제는 내밀었던 손을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슬그머니 내려 괜히 허벅지를 한 번 쓸어내렸다. 세스는 웃음을 삼키고는 황제의 딸다운 자태로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로렌의 루이즈 세바스티엔 조제핀 자비에라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기쁩니다, 폐하.“

“코시카의 옐렌 파블로비치요. 그럼 이쪽으로.”

옐렌 황제는 몸을 돌리려 했다. 세스가 이렇게 말하기 전까지는.

“손도 안 잡아주시나요? 여긴 너무 높아서 무서운데요.”

그는 세스의 손을 낚아챈 다음 그대로 널빤지 다리를 내려갔다. 보폭이 너무 커서 따라잡기가 힘들었지만 그녀는 끌려가면서도 살랑살랑 흔들리는 레몬색 뒤통수를 보며 웃었다. 머리카락 옆으로 삐져나온 귓바퀴가 선명한 분홍색을 띠고 있었다.

가벼운 분위기의 로판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P.S. 남녀 주인공의 이름인 세스와 옐렌은 현실에 없는 이름으로서 창작한 이름입니다.
P.S.2. 제가 쓰는 다른 소설인 여름 눈송이 TS 외전에서 발전시킨 이야기입니다만, 여름 눈송이를 보지 않으셔도 괜찮도록 쓸 예정입니다. 몇 가지 설정이 다르고, 성별이 바뀌었기 때문에 성장 과정도 달라졌습니다. 가벼운 이야기로 한 권 분량 내외에서 끝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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