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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꿈꾼 세상


신음하는 조선


조선의 마지막 성군 정조가 죽자, 조선도 함께 죽는다.

세도정치의 극악함으로 조선은 산업화를 이루는 유럽의 열강들이나 러시아, 중국, 일제에 대항할 힘을 마련하지 못한다.

이 시기 들어온 천주교는 세도정치로 잔혹해진 삶을 천주교의 평등사상으로 극복하려는 움직임으로 빠르게 확산되어 가고 평등사상에 놀란 지배자들은 탄압을 시작한다.

이하응은 바보짓을 서슴지 않으면서도 빠르게 세력을 구축하여 결국 정권을 손에 쥔다.

1858년 청과 영국의 아편전쟁을 본 러시아는 발 빠르게 아이훈 조약을 맺고, 청은 ​블​라​디​보​스​톡​(​해​수​애​[1])와[2] 흑룡강성 이북의 땅을 러시아에 주고 만다.

1863년 전격적으로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이​하​응​)​은​ 강대국인 청마저 영토를 힘없이 러시아에게 빼앗기고, 러시아가 통상을 요구하며 조선에 오자 조선은 놀라 자빠진다.

이에 자신들의 천주교를 합법화하려는 선교사들은 조선정부에 본국의 힘을 실어주겠다며 의사를 타진한다.

조선, 프랑스, 영국의 삼국동맹이 형성되어 러시아에 대항하려던 움직임은 시들해지고, 탄압은 본격화 된다.

병인박해로 자국의 선교사들이 죽으며 구실을 얻은 제국주의자들은 본색을 드러낸다.

 

쾅~ 콰광하며 대포가 연신 발사되는 프랑스의 군함에선 이윽고 상륙군이 내려와 강화도를 점령해 나간다.

어차피 선교사가 죽지 않아도 들어왔을 프랑스지만 빠르게 강화도를 쳐들어온다.

이에 이하응은 즉각 막을 것을 명하고 무관들을 파견한다.

무관들은 120명으로 구성된 정찰대가 문수산성을 정찰하러 오자, 이를 발견하고는 즉각 사격하여 프랑스는 27명의 사상자를 내며 퇴각한다. 1866년 10월 26일 일이다.

또 다른 제국주의자인 미국은 조선에 제너럴셔먼호라는 무시무시한 철선을 대동강에 띠우며 평양에 와서는 오만하게 통상을 요구한다.

강물이 빠져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지만 대포를 쏘며 군민을 죽이고, 관리를 포로로 삼기도 한다. 1866년 8월 21일 일이다.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면 처지를 알고, 설설 기어도 이방인에겐 배타적인 것이 사람일진데 저 지경으로 오만 무도하니 배가 불타는 것은 당연하다.

핑계가 마련된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이 1871년 이루어지는 것은 또 당연했다.

정족산성을 군함과 함께 공격하던 프랑스군은 500여명의 조선군에 의해 패퇴하고 결국 군을 물린다. 동년 11월 11일 일이다.

이에 철수하며 불을 지르고 약탈한 물건을 옮기는 짓을 하며 조선왕조실록마저 훔쳐가는 만행을 저지른다.

충청도의 내포평야는 전라도의 호남평야처럼 수평선 너머까지 이어지며 가야산의 산세와 맞닥드리는 곳에서 끝난다.

이 곳 가야산의 주봉의 서쪽에 있는 무덤은 어느 양반가의 묘인지 상석 몇 개와 비석 하나가 놓여져 있고, 봉분도 높지 않아 그저 양반의 무덤이라고 상상된다.

이 묘에 미국, 필리핀, 조선, 중국인 등의 일단의 무리들이 열심히 삽과 괭이질을 하며 도굴을 하는데 누가 봐도 몹쓸 짓이다.

이 일을 주도한 자는 오페르트란 자로 상인이며 학자다.

학자란 작자가 묘를 도굴하다니 몹쓸 일이고, 오페르트 남연군묘 도굴사건이다. 1868년 일이다.

오페르트란 자는 조선에 두 차례 통상 교섭을 요청하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하응의 아버지의 묘를 도굴하여 시신으로 흥정을 하려는 것이다.

점점 날이 밝아 오는데 도굴이 늦어지고, 마을 주민들이 낫과 삽 같은 무기들을 들고 떼로 몰려오는 것이 보인다.

이윽고 포위되자 총을 들이 밀며 위협한 오페르트 일행은 빠르게 배로 튄다.

이 소식을 들은 대원군은 더 조선의 문을 꼭 닫는다.

조선의 백성들도 오페르트란 자를 분노하여 이하응을 지지하고, 모방범죄가 발생하며 어쩔 수 없이 화적이 된 조선백성들은 양반가의 무덤을 도굴하여 시신을 빼와 인질극을 벌이는 해프닝도 발생하였다 하니 오페르트란 자가 조선에 끼친 해악은 크다.






1870년 5월엔 독일과 일본의 관리들이 부산 앞바다에서 통상을 요구하며 난동을 벌인다.

1871년 6월 10일 미 해군은 함포사격을 지원받으며 강화도 초지진에 상륙한다.

이를 조선군이 육탄전까지 하며 방어하지만 무기의 열세는 엄청나서 결국 조선이 패퇴를 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조선의 무고한 군사들은 정말 맹렬히 싸우다 240여 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익사, 20명이 포로로 잡히며 미군은 2명 전사 10명 부상의 경미한 피해를 입는다.

일제의 군함 운요호가 해로탐사를 이유로 강화도에 출몰하고, 이어 영종도를 침략하여 관군과 민간인 30여 명을 죽인 것은 1875년 8월이며 1876년 1월 강화도조약이란 불평등 조약을 일제와 맺게 된다.

메이지 유신 이후 네델란드를 근대화 모델로 받아들여 중화학 공업정책을 우선시하고, 섬나라 원숭이들은 매번 지진에 신음하는 자신들의 땅이 두려워 원숭이들답게 본능에만 충실하여 또 조선을 넘본다.

1885년 1월엔 러시아의 힘이 청의 땅을 자신들과 청이 싸울 때 거저먹은 전례를 생각하며 조선에까지 힘을 미칠까 두려워 다른 제국주의자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슬픈 일이 연속 발생하는 조선엔 외교를 뒷받침할 만한 철선도 총도 자력으로 생산하지 못하는 나라가 되어 당하기만 한다.

폭력에 항의하지만 힘이 쎈 자들은 폭력인지도 모른 채 약자들을 두들겨 팬다.

1863년 집권에 성공한 대원군은 여러 개혁정치로 국가의 재정을 불어나게 하지만 경복궁이 막 완성될 때 큰 불로 다 타고, 다시 지으나 불어난 재정으로도 감당을 못하게 된다.

이에 백성들은 ‘조선 8도의 돌은 모두 경복궁의 주춧돌 감이다.”하며 비아냥거리고, 이런 흐름을 감지한 양반이 가세하여 몰락의 길을 걸으며 청의 군대에 납치되어 천진에 구금되는 일까지 발생한다.

청은 청대로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놓지 않으려 애쓰고, 신흥세력인 일제가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는 와중에 민비는 자신의 친족들로 하여금 다시 세도정치의 길로 조선의 백성들을 옥죄어 간다.

세도정치에 신음하는 백성은 각지에서 민란을 일으킨다.

동학의 강경파인 이필제는 경상도 영해를 점령하였다가 능지처참 당한다.

배고픔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화적이 되어 관가를 습격하고, 1879년엔 일본에서 전파된 콜레라에 의해 많은 백성이 죽는다.

섬나라 원숭이들은 별걸 다 조선에 전한다.

한편, 고종은 1880년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등의 조치로 맞서지만 청의 압력과 일제, 미국, 러시아 등의 나라와 수교를 맺으며 저울질을 한다.

1882년엔 13개월치의 월급이 밀린 구식군대에 모레와 쌀을 섞어 준 1개월치 월급에 분노로 일어나 일제 공사관을 습격하는 등의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공사관을 습격 당한 일제는 지들이 한 짓은 까맣게 잊은 듯이 다시 불평등조약을 강요하고, 1884년엔 개화를 부르짖던 개화파에 의해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많은 수의 신하들이 죽는다.

이럼에도 계속 이어지는 세도정치는 결국 전국적인 민란으로 이어지고, 1893년 전라도에서 일어난 전봉준의 봉기는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룬다.



1894년 왜적들이 궁궐을 침탈하는 만행을 벌이자, 동학의 평등이 당연하기에 받아들인 농민군의 분노가 끓어오름은 긇는 냄비처럼 덜겅~거리며 타오른다.

동학 농민군의 보국안민 척양척왜의 기치는 나라를 지키려는 당연한 백성의 움직임이고, 일제는 개틀링기관총[3]과 무라다 소총, 네델란드의 머스킷[4]의 신식 총으로 무장하여 임진왜란 초기처럼 조선의 백성을 마구 도륙한다.

보국안민의 ‘보(輔)’ 는 지킬 보(保)가 아닌 도울 ‘보’ 이다.

‘나라를 도와 백성을 지킨다.’ 는 의미로 ‘나라를 도와 바로 세운다.’란 의미이다.

민비는 1895년 10월 일제의 사무라이에 의해 시해된다.

민비가 아무리 친척들을 앞세워 백성들을 신음하게 했어도 한 나라의 왕비다.

그런 왕비를 궁에서 버젓이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타국의 칼잡이들이 서걱서걱~ 쓸어서 죽인 역사는 고금을 통해 들어 본 일이 없다.

을미, 을사, 정미의병장들은 유인석, 이강년, 문석봉, 허위, 박준영, 이인영, 민용호, 최익현, 이설, 김복한, 전해산, 이소응, 이석용, 홍범도, 김도현, 신돌석, 안담사리, 정용기[5]선생 등의 의병장들이 전국적으로 일어나 일제와 싸우고 관군과 싸운다.

이런 의병의 투쟁은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일제가 조선을 빼앗아 그야말로 신음의 통치를 하는 1915년 까지 거족적으로 일어나 수치도 아직까지 모른다.

1904년 ‘런던데일리’ 지 특파원으로 조선을 찾은 맥켄지가 양평에서 만난 의병장은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좋습니다. 왜놈의 노예로 살기보다는 자유인으로 죽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라며 웃었다 한다.

 

[1] 해삼위, 해수애 우리 할아버지들이 블라디보스톡을 읽던 이름입니다.

[2]문법이고 머시고 간에 편하게 읽으면 그만이기에 읽히는 대로 씁니다.

[3]개틀링기관총은 미국의 발명가 개틀링이 만든 기관총이고, 그가 개발한 이유는 이렇게 무시무시한 무기 앞에서는 죽음뿐이니 전쟁을 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로 만든 휴머니스트다. 그러나 일제는 동학농민군에게 이 총을 사용하고, 수많은 의병이 이 기관총에 산화한다. 이론상 1200발이 가능하고, 1분에 600발에서 무리를 해서 쏜다면 800발 정도가 가능하다 한다.

[4]머스킷은 네델란드의 소총으로 현대화된 개념을 탑재한 후장식 소총이다. 장전을 해야 발사를 하고, 탄창식은 아니지만 빠른 속도의 사격이 가능한 소총이다.

[5]정말 다 올리고 싶지만 이 정도만으로 만족해야 할 듯 합니다.


조선은 뿌리 깊은 유학의 나라입니다.

세도정치가들은 충과 효의 정신을 자신들의 부패나 학정을 감추기 위한 도구로 양반의 몰락을 두려워하며 더욱 그들의 지배논리로 거품을 물게 됩니다.

그러나 충과 효를 지배논리가 아닌 정말 나라를 자신의 힘으로 지켜내려 한 많은 의병들은 일제에 협조하지 않고, 단식, 순국하거나 변절치 않으며 교수형 당한 것은 충과 효의 사상에 뿌리를 둡니다.

500여 년을 이어온 조선은 구한말 여러 사건으로 변화를 겪지만 충과 효의 사상을 근본으로 삼기에 경술국치까지 많은 유학자가 의병을 일으키고, 세계에서 유래가 보기 드문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우당, 석주, 일송, 백야 선생 등의 선구자가 나옵니다.

그런 인식하에 글을 읽으셔야지 아니면 글이 서두부터 재미가 없을 겁니다.

물론 제가 묘사력이 약한 것이 1차 원인이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보시는 분들 마음이시겠지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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