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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들판





1-3


뮐러는 철조망 아래로 한 사람이 엎드려서 간신히 지날 수 있는 구멍을 발견했다. 그가 지나가기엔 구멍이 약간 작았다.

  배를 땅에 깔고 누운 뮐러는 야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뒤의 3명은 경계를 섰다. 언제 어디에서 총알이 날아올지 몰랐다.

신중하고, 빠르게 행동해야 했다.

그래야만 그들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마침내 구멍이 뮐러가 통과할 수 있을 크기로 커졌다. 뮐러는 지렁이처럼 몸을 꿈틀거리며 구멍을 통과했다. 그 다음엔 헤켈이었다.

  헤켈도 몸을 바짝 엎드려 기어서 구멍을 지나갔다. 일행 중 체격이 가장 작은 움베는 앞의 두 명보다 손쉽게 통과했다.

마지막으로 에커만까지 구멍 밖으로 나오자 그들은 다시 움직였다.

  이동하는 중에는 서로 말도 하지 않았다. 소리가 들릴까봐 숨도 코로만 쉬었다. 지금 이 상황에선 개미들의 말소리조차 적에게 들릴 것 같았다.

  몸을 숙여서 이동하느라 벌써 다리와 허리에 무리가 왔지만 꾹 참았다. 아프다고 조금만 일어섰다간 그대로 황천길을 지날 수 있었다. 전선에서는 아주 사소한 행위조차 목숨을 앗아가는 위험한 일이 되었다. 항상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이다.


  참호 밖으로 나온지 10분, 포탄이 만들어낸 커다란 구덩이가 나타났다. 뮐러는 잠시 쉬었다 가기로 결정했다. 그렇지 않아도 휴식이 필요했던 부하들은 뮐러의 결정에 즉시 동의했다.

  구덩이 안에는 물이 고여있었다. 흙과 같은 색의 질척거리는 흙탕물이.

  네 병사들은 발이 물에 빠지지 않게 주의하면서 구덩이에 몸을 뉘었다. 헤켈은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하지만 참았다.

  담배가 모자란 것도 있지만,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담배를 피우는 짓을 할 수 없었다. 담배 연기와 그 불씨는 저 멀리에서도 보였다. 요즘엔 연기가 보이기만 해도 포격이 쏟아졌다. 헤켈은 담배에 자신의 목숨을 걸 생각따윈 없었다. 목숨이 걸린 문제라고 생각하자 어느새 흡연에 대한 욕구는 사그라든지 오래였다.

  하지만 에커만은 달랐다. 그는 흡연을 하고 싶어지만 즉시 행동에 옮기는 타입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뭐라고 하지 않았다.

  왜냐면 에커만의 담배는 씹는 담배이기 때문이다. 씹는 담배는 연기가 나지 않고 불도 필요하지 않다. 이렇게 은폐가 생명인 전장에서는 매우 이상적인 담배였다.

문제는 일반 담배보다 구하기가 더 어렵다는 점이었다.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고 생각한 뮐러가 다시 움직였다. 아직 목표까지 멀고도 멀었다.


단 한 장의 지도에 의지해서 목표지점까지 달랑 4명이서 가야 했지만, 뮐러는 길을 찾는데 상당한 도사였다.

  움베도 길을 매우 잘 찾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뮐러의 위상에는 견주지 못했다. 반대로 심각한 길치인 헤켈은 항상 이들에게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존경심을 가졌다.

  전사한 프랑스군과 독일군의 시체가 철조망에 뒤엉킨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살은 서서히 썩기 시작했고 군복은 너덜너덜해져 본래의 색을 잃어버렸다.

  아마도 저 둘은 목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서로 치열한 사투를 펼쳤을 것이다. 철조망에 몸이 엉키면서까지 말이다. 독일군의 손에는 커다란 야삽이, 프랑스군의 손에는 영국군이 쓰는 총검이 들려져 있었다. 그러나 싸움의 승자는 없었다. 패자도 없었다. 그들은 상대방 중 한 명이 다른 한 명의 목숨을 끊어놓기도 전에 눈먼 총알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그들의 목숨을 끊어버린 총알은 누구의 총알일지 궁금했다. 프랑스군의 것인지 아니면 독일군의 것인지 지금으로썬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둘 중 한 명은 아군의 총알에 죽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제와서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찌되었든 둘은 이미 죽었으니깐.

  "지금 우리가 어디까지 왔죠?"

  움베의 질문에 뮐러는 지도를 살폈다. 지도에 표시된 빨간 줄을 손으로 짚어가던 뮐러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겨우 5분의 1까지 왔어."

  맙소사. 적어도 반은 온 줄 알았는데.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고 움직여서 그런지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움베와 두 명은 지금까지 온 것보다 훨씬 더 먼 거리를 가야한다는 뮐러의 말에 낙담한 얼굴이 되었다.

  "짜지 마라. 나도 힘드니깐."
  "배도 고프고. 이럴 줄 알았으면 뭐라도 먹고 오는 건데."
  에커만의 말에 뮐러는 그러니깐 아직 네가 멀었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위장이 음식물로 가득 찬 상태에서 총상을 입으면 더 위험하다는 사실 몰라? 게다가 움직이는 것도 더 힘들고."
  그러나 에커만은 지지않고 어차피 총에 맞는 거라면 둘 다 똑같다고 대꾸했다. 뮐러는 에커만의 말에 상대할 마음도 없는지 부지런히 앞만 보고 움직였다.


조금 더 이동하자 이번엔 무더기로 쌓인 시체들이 나타났다.

이번에도 전의 경우처럼 프랑스군과 독일군의 시체가 이리저리 널려있었다. 그들은 기관총의 집중사격을 받았는지 몸이 구멍투성이였다.

  몸에 난 수많은 구멍들에선 피가 흘러나오다가 멈추어서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시체들 밑에 고인 피 또한 굳어서 본드처럼 시체들과 땅을 서로 접착시키는 역할을 했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일반인들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틀림없이 비명을 지르며 줄행량을 치거나 기절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전선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진 그들에겐 조금도 놀라울 것이 없었다. 병사들에겐 하늘 위의 구름처럼 많이 보는 것이 시체였다. 평시에 매우 예외적인 경우에만 죽은 사람을 보는 일반인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시체더미를 지나쳐 앞으로 나아갔다. 아무도 없는 버려진 참호가 나왔다. 참호의 벽면에 새겨진 낙서를 보니 프랑스군의 것이었다.

  뮐러는 참호 안을 뒤져보기로 했다. 참호 안에는 그 어떤 생명의 징후도 찾을 수 없었다. 시체도 없는 것을 보니 전투가 벌여지기 전에 적들은 참호를 떠난 것 같았다.

  참호 안을 뒤지던 헤켈은 나무상자 위에 놓여져 있던 루거 P08 권총을 발견했다. 권총은 장전된 상태에 외관도 상당히 깨끗했다. 프랑스군이 아군으로부터 노획했다가 모종의 이유로 두고 간 모양이었다.

  다른 곳을 둘러보던 움베는 뜻밖의 횡재를 얻었다.

놀랍게도 한 귀퉁이에 포장된 초콜릿이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뻔했다. 조금 전 시체를 보고도 아무 반응이 없다가 초콜릿 하나에 이렇게 놀라다니. 일반인들이 보면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모습이었다.

  "운이 좋았어."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띈 뮐러가 한 말이었다. 임무에 차출되었을 때 다 죽어가던 표정이었다가 초콜릿 하나에 웃음꽃이 피었다.

  초콜릿은 상하지 않은 듯했다. 아니, 약간 상했어도 맛에 이상이 없었으면 끝이었다. 초콜릿을 발견한 이는 움베였지만 다들 공평하게 나누어 먹었다.

  전시에는 구경조차 힘든 그 귀한 초콜릿을 먹다니 그들은 스스로 운이 매우 좋다고 여겼다. 달달하면서 씁쓸한 초콜릿의 맛과 향에 혀가 녹아내렸다.

초콜릿의 크기는 그리 큰 편이 아니라 금방 없어졌지만 그들은 잠깐이나마 황제가 된 기분을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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