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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들판





2-6


저녁, 중대장의 명령에 따라 휴너 중위의 소대는 적이 점령한 참호로 침투를 시도했다.

  절단기를 든 뮐러는 질척한 땅을 기어가 철조망을 잘랐다. 철조망을 자를 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신중을 기울였지만 쇠가 잘릴 때 나는 쇳소리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헤켈은 재공격을 명령한 중대장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이미 참호는 적에게 넘어간지 오래였다. 그런 상황을 뻔히 알면서 공격을 명하다니. 공격의 선종에 서야하는 자신들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조심해. 피아노줄도 있어."


  뮐러가 속삭이며 손으로 피아노줄을 가리켰다. 그것은 적이 아닌 아군이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미리 설치해둔 것이었다.

  낮게 깔린 피아노줄은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좀처럼 확인하기 어려웠다.


  "빌어먹을."


  온몸에 진흙이 묻은 움베가 욕을 내뱉었다. 그들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이동하고 있었지만 언제 적에게 발각당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아직 이 철조망과 전깃줄의 한복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적에게 들킬 경우 그들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이 고요한 밤에, 무슨 위험천만한 일이란 말인가. 입에 총검을 물고 권총을 든 휴너 중위는 뒤따르는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자신이 기어간 자리를 따라 기어오라는 뜻이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조심해."


  뮐러는 몇 번이고 뒤의 부하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거침없이, 그러나 신중을 가하며 철조망으로 장애물들을 자르던 뮐러는 누군가의 실수로 모두가 희생당할까봐 걱정이 태산이었다. 헤켈이 굳은 얼굴로 끄덕였다.


  아직 적들의 반응은 없었다. 프랑스군은 승리에 도취되어 방심하고 있는 것인가?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아직까지 아무런 반응도 없었지만 뮐러의 경험상 적들은 그렇게 머리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전혀 새로운 방법을 보여주며 적들인 독일군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뮐러가 지나간 자리를 기어나가며 헤켈은 적진까지 얼마나 남았을지를 생각했다. 이제 반 정도 왔을까? 어쩌면 그보다 더 멀리 왔던지 또는 한참 남았을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되도록이면 빨리 이 빌어먹을 짓을 끝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지렁이처럼 바닥을 기어가는 일은 이미 전에도 숱하게 겪었다. 제발 다시는 이런 경험을 하지 않았으면 했는데...


  "뮐러, 얼마나 남았어요?"


  "거의 다 온 것 같아."


  뮐러의 말에 헤켈은 움베와 에커만에게 눈짓했다. 준비해. 자신도 총검과 권총을 꺼낸 헤켈은 이제 곧 있을 습격에 대비해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


  갑자기 뮐러가 무언가에 부딪히곤 행동을 멈추었다. 헤켈이 재빨리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시체에 부딪혔어."


  뮐러가 부딪힌 것은 전사한 아군의 시체였다. 벌써 얼음처럼 차가워진 시체는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생전에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상처를 보니 그는 배에 총을 맞아 죽었다. 그것도 단 한방에. 뮐러와 헤켈은 죽은 시체의 발목을 잡아 옆으로 끌어당겼다. 이동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죽은 시체는 매우 무거워 힘을 주지 않으면 움직이질 않았다.

  엎드린 상태에서 팔의 힘만 써야하니 팔뚝에 무척 힘이 들었다. 간신히 시체를 옆으로 치운 둘은 고요하고도 조심스러운 행진을 계속했다.

  하도 오랫동안 기어서 군복을 닮아 사라지는 것은 둘째치고 몸이 뱀처럼 변할 것만 같았다. 직립보행이 특징인 인류가 뱀과 지렁이처럼 기어서 움직이다니 이 무슨 우스꽝그러운 일이란 말인가. 전쟁 때가 아니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위풍당당하게 행진하며 적진을 통과해 적의 수도에 입성하던 장면을 꿈꾸며 입대한 헤켈은 한때 자신이 품었던 망상들이 모두 오래 전의 일처럼 여겨졌다. 공룡들이 지구에서 사라지던 때의 일처럼. 불과 4년 전이다. 겨우 4년.

  - 퍼펑!

  뱀으로 퇴화해 기어가던 병사들의 머리 위로 환한 불빛이 쏟아졌다. 벌써 날이 밝은 것인가?

  아니다. 해는 떠올릴 때 저런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는다. 조명탄이었다.

  조명탄이 터지고 환한 불빛이 온 세상을 비추었다. 땅을 기어가던 헤켈과 전우들은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아니나 다를까 적의 사격이 이어졌다.

  - 타타타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기관총 소리에, 헤켈은 이를 악물었다. 아무래도 침투를 시도하던 다른 소대가 적들에게 발각된 모양이었다. 아직 그들이 있는 곳은 조용했다. 하지만 이곳도 적들에게 들키는 일은 시간문제였다.

  다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뮐러는 되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이미 다른 소대가 들킨 상황에선 그들만의 힘으로 적진에 침투해 참호를 탈환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적의 사격이 시작되기 전에 몸을 내빼는 것이 중요했다.

  이젠 입장이 반대가 되었다. 행렬의 끝에 위치한 에커만이 몸을 돌려 필사적으로 땅을 기어가고, 머리에서 꼬리가 된 뮐러는 앞의 병사들을 재촉했다.


  "빨리 움직여! 기어왔던 곳만 기어가면 문제 없다구!"


  헤켈은 총검 끝으로 움베의 군화를 쿡쿡 찔렀다. 움베는 재촉하지 말라고 짜증을 내는 대신 보다 빨리 몸을 움직였다. 그의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것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곧이어 헤켈이 있는 곳 주변에도 총탄이 튀었다. 적에게 발각된 것이었다. 프랑스어로 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참호 코앞까지 왔던 것이다.


  "후퇴해!"


  휴너 중위가 적의 발사광을 노리고 발포하면서 부하들에게 외쳤다. 전력을 다해 기어가던 에커만은 왼쪽의 구덩이로 몸을 굴렸다. 일단 사격이 그칠 때까지 그곳에 있을 계획이었다.

  에커만은 몸을 피해 움베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도왔다. 그 다음이 헤켈이었고 헤켈은 뮐러의 두 팔을 붙잡고 그의 몸을 끌어당겼다.

  뮐러의 몸이 구덩이 안으로 들어온 뒤, 프랑스군으로 추정되는 그림자가 나타났다. 헤켈은 바로 미리 꺼내어 손에 쥐고 있던 루거 P08을 발사해 상대방을 맞췄다.


  "크악!"


  총알은 무릎을 맞췄고 상대는 뒤로 넘어져 다시 눈에 띄지 않았다. 헤켈은 수류탄을 꺼내 던지려다가 뮐러의 제지로 그만두었다.


  "조금 기다려."


  조명탄의 불꽃이 꺼져 세상이 암흑천지로 되돌아왔을 때에도 사격을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 빈도와 소리가 줄어들었다. 곧 총성은 들리지 않았고 세상은 고요함을 되찾았다.

  뮐러는 구덩이 밖으로 나갔다. 전처럼 헤켈이 두 번째에 서고 움베와 에커만이 뒤따랐다.

  독일 군복을 입은 두더지 네 마리는 가장 마지막으로 복귀한 병사들이었다. 미리 참호에 도착한 휴너 중위는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으며 목을 축이다가 돌아온 뮐러와 그 일행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죽은 줄 알았던 것이다.


  그나마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고 복귀에 성공한 소대는 휴너 중위의 소대가 다였다. 다른 소대들은 전부 기관총 화망에 걸려 괴멸되거나 부상을 입었다. 적에게 빼앗긴 참호를 되찾으려는 시도는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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