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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들판





2-9


저녁, 영국군과 마주보는 곳으로 이사를 온지 하루 만에 임무에 차출된 그들은 스스로의 운명을 저주하며 조심스럽게 야간산책에 나섰다.

  1914년, 마른 전투가 독일군의 패배로 끝나면서부터 시작된 참호전은 끝을 보이지 않았다. 양측은 방어선 확장을 명목으로 날마다 참호를 팠고, 나중에는 스위스 국경에서 북해까지 이어지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이런 참호를 끝도 없이 만들다보니 서로 뒤엉켜, 하나의 참호로 연결되는 경우도 왕왕 발생했다. 간신히 참호를 완성했는데, 알고보니 적군의 참호와 서로 이어지는 바람에 적의 기습을 받아 참호를 통째로 빼앗기거나 다른 참호로 보낸 전령이 적의 포로가 되는 일이 흔하게 발생했다.

  때문에 병사들은 아군의 참호라 할지라도 되도록이면 그리 멀리까지 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곳에 뭐가 있을지 아무도 모르니. 그렇다고 전혀 안 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이렇게 일정한 주기마다 소규모의 병사들을 보내 적의 침투여부를 확인하곤 했다.

  코에 부목을 댄 헤켈은 부상을 입은 몸으로 임무에 차출되어 화가 단단히 난 모습이었다. 하지만 소대장의 명령을 거역할 수도 없었고, 또 부상을 이유로 혼자서만 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움베와 에커만도 알아서 임무에 동원되지 않았는가.


  "넌 코도 부러졌는데 좀 쉬지 그러냐?"


  웅덩이를 피해 발을 벌리던 뮐러가 낄낄거렸다.


  "됐습니다."


  쉰다고 말하면 두 다리는 멀쩡하다는 이유로 데리고 갈 거면서. 뮐러는 좋은 전우의 표준과도 같았지만 때론 사람 놀리는 일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 점이 유일하게 헤켈을 짜증나게 만들었다.

  길을 걷는 도중에 빨간색 페인트로 칠해진 표지판이 보였다. 저게 뭔지 궁금해진 움베가 물으니 비크가 답을 달아주었다.


  "예전에 여기까지 왔었다고 표시를 해 둔 것입니다. 잊어먹으면 곤란하니까. 좀 더 가야해요."


  100m쯤 앞으로 가자, 길이 두 개로 나뉘어졌다. 비크는 지체없이 오른쪽 길을 택했다.


  "이곳이야말로 진짜 미궁이군."


  에커만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뮐러는 비크에게 저 참호도 이군이 판 것이냐고 물었다. 그저 비크는 대답 대신 싱긋 웃기만 했다.


  "확실한 것은, 인간이 저 참호를 팠다는 겁니다."


  비크가 데려온 한 이병이 한 말이었다. 그래, 독일군이든, 영국군이든 다 똑같은 인간이라 이거지.

  마침내 적당한 위치에 도착한 일행은 멈춰서 땅을 파고 지뢰를 매설했다. 앞에는 누군가가 철조망을 설치해 두었다. 그 철조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단지 그 철조망을 설치한 이가 어느 군대인지만 모를뿐이다.

  전쟁만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학교에서 공부를 하며 친구들과 아이스크림을 먹을 나이였을 이병 셋은 능숙한 솜씨로 땅을 파 안에 지뢰를 심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지뢰를 심고 그 사이에 또 지뢰를 심었다. 누구든지 저기에 발만 디뎌도 다시는 빠져나오질 못하겠군.

  지뢰를 매설하는 작업은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지뢰를 심을 동안 수상한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냥 안도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그들과 같은 임무를 부여받은 적들이 언제 이곳으로 올지 몰랐다. 일행은 서둘러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들은 길이 두 개로 나뉘어지는 부분을 지나 표지판이 있던 지점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그러나 표지판이 이상했다. 다른 누구보다도 그 점을 먼져 알아챈 이는 뮐러와 비크였다.


  "다들 멈춰."


  뮐러가 손을 뻗어 제지하자, 일행 모두가 걸음을 멈췄다. 권총을 뽑아든 뮐러는 조심스럽게 표지판을 살폈다.

  표지판은 그들이 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앞쪽으로 향해 있었지만, 되돌아올 때는 반대쪽으로 돌려진 상태였다.


  "무기를 들어라."


  뮐러의 말 한마디에 전원 무기를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소총 대신 루거를 들고 온 헤켈이 뮐러의 어깨를 두들겼다.


  "적들이 아직 이 근처에 있을까요?"


  "나도 모르겠어."


  어쩌면 적들은 금방 다른 곳으로 떠났을지 모른다. 게다가 날이 밝아올 때까지 이곳에 머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뮐러는 결심을 굳혔다.


  "일단은 가자. 언제 어디서 적이 나타날지 모르니, 다들 주의하...."


  뮐러는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바로 코앞에서, 납작한 브로디 철모를 쓴, 영국군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처음 서로를 발견한 양측은 너무 놀라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랐다.

  상대방인 영국군들도 당황해서 얼어있을 때, 뮐러의 총이 선두의 영국군 소위의 머리를 맞췄다. 뒤늦게 에커만과 움베의 MP18이 불을 뿜어 적들을 쓰러뜨렸다.

  기습을 당한 영국군은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그러나 그들의 수는 독일군의 두 배에 달했다. 독일군 참호의 기습이란 임무를 받아 침투를 시도한 영국군은 길을 잃고 헤매다가 독일군과 마주한 것이었다.

  순식간에 9명의 아군을 잃었지만 영국군은 곧장 반격에 나섰다. 참호 가장자리로 흩어진 영국군은 몸을 숨기곤 소총을 쏘아대며 수류탄을 던졌다.

  헤켈은 뮐러의 뒷덜미를 잡아 넘어뜨렸다. 한발 늦게 적이 던진 수류탄을 본 움베와 에커만도 고개를 숙였다.

  - 펑!

  수류탄이 터져 지뢰의 매설에는 능숙하지만, 이런 근접전은 경험이 없던 이병 둘의 머리가 날아가고 다른 한 명은 팔뚝에 파편이 박혔다. 부상을 입은 이병이 멍한 얼굴로 넘어지고 비크가 수류탄 핀을 뽑고 던졌다.

  땅에 떨어진 수류탄을 주워 되던지려던 영국군 하사가 헤켈이 발사한 9mm 총탄에 목을 맞아 넘어지면서 수류탄을 놓쳤다. 수류탄 위로 엎어진 영국군이 폭발과 함께 두 동강 나고, 양옆에 있던 두 명이 부상을 입었다.

  헤켈은 참호 밖으로 나가려고 벽을 기어오르던 적병의 옆구리를 맞췄다. 그러자 총에 맞은 적이 폭발하여 동료들과 함께 날아갔다. 헤켈이 쏜 탄환이 그 영국군 병사가 가지고 있던 수류탄에 명중한 것이었다. 엄청난 행운 -그 영국군에게는 불행이지만- 이었다.

  살아서 무사히 도망친 영국군은 소수였다. 그들은 도망치는데 바빠 두 명의 부상병들까지 남겨두고 달아났다.

  움베가 부상을 입은 이등병의 팔뚝에서 파편을 뽑고 챙겨온 붕대를 감는 동안 헤켈과 에커만은 부상을 입고 신음하는 두 스코틀랜드 군인들을 치료했다. 둘 다 무릎에 파편이 박혀 일어설 수 없는 형편이었다. 한 명씩 부축해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비크는 머리가 날아간 두 이병의 시체 앞에 서 있었다. 뮐러의 부름에도 그는 미동도 않았다. 아직 어린 그 병사의 두 눈은 죽은 동료들을 떠날 줄 몰랐다.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라네."


  뮐러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비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곤 죽은 소년병들의 인식표를 떼어냈다. 내일, 두 가정이 아들의 전사소식을 듣게 될 것이다.

  시체를 만들어줄 시간도 없었다. 적이 언제 반격하러 나타날지 몰랐다. 그래서 대충 상의로 덮어둔 뒤 도망치듯 진지로 복귀했다.

  포로들의 몸을 수색하니 지도가 나왔다. 이 소식은 즉시 중대장에게 보고되었고 중대장은 대대장에게 보고를 올렸다. 이와 별개로, 부하들의 죽음을 전해들은 노텐슈타인 중위는 얼굴에 표정의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다. 쾡해진 얼굴에서 쏙 들어간 눈알은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고, 세상소식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익숙해진 일이라서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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