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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들판





3-7



  강렬한 태양의 빛이 내리쬐는 아침에, 헤켈은 등을 벽에 기대고는 쭈그려 앉았다.

  수통에 남은 최후의 물 몇 방울을 입에 털어넣고, 마약에 취한 정신병자처럼 흐리멍텅한 눈으로 하늘을 보았다가 아래로 눈을 깔았다.

  가까이 있는 휴너 중위는 병사들에게 무슨 말을 전하고 있었다.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내용인지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대충 짐작은 갔다.

  조국의 안녕과 황제를 위해. 앞의로의 삶과 미래를 위해 싸울 것을 독려하는 말이겠지. 알만 했다.

  심지어 그는 더 이상 아무도 믿지 않는 전쟁에서의 승리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헤켈은 광인을 보는 눈빛으로 휴너 중위의 얼굴을 쳐다봤다.

  눈에 그의 얼굴이 들어온다. 해골처럼 깡마르고,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그의 얼굴이.

  나흘 전 포탄 파편이 앗아간 그의 왼쪽 귀는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았고 그의 오른손은 여전히 붕대로 칭칭 감겨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위는 손에서 권총을 놓지 않았다.

  그의 애총인 보어하르트 권총은 이미 쇠약해진 주인처럼 온갖 흠집과 얼룩으로 가득했다.

  헤켈은 시선을 돌렸다. 중위의 말을 경청하는 어리고 나약한 병사들의 얼굴을 살폈다.

  다들 굳어있군. 당연하다. 저들은 전부 처음으로 전선에 온 병사들이니깐.

  가장 어린 병사의 나이는 14살이다. 다른 중대에는 12살짜리 병사도 있다고 들었었다.

  아직 전투를 경험하지 못한 병사들에겐, 그들이 잡은 소총과 머리에 쓴 철모가 너무나도 무거워 보였다. 커다란 철모 아래 가려진 그들의 작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헤켈은 그 반짝거리는 빛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였다.

  독일은 침몰하는 배였다. 그리고 그들은 침몰하는 배에 갇힌 승객들이자 선원들이었다.

  바닥에 벌써 물이 고이기 시작했지만, 배를 떠나지 못하는 승객들. 그리고 아직도 배를 버리지 못하고 미련이 남은 선원들. 이들을 구할 구명보트조차 배에는 남아있지 않다.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신병들과는 달리 헤켈은 쓰게 웃었다. 신병들은 웃는 헤켈을 보고 전투에 익숙해진 고참병만이 저렇게 덤덤해질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예측이 가능했다.

  많아야 절반, 혹은 그 이하가 되겠지. 이번 전투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헤켈은 자신이 이번에는 어디에 있을지 궁금했다.
 

  연합군은 독일군 최후의 방어선인 힌덴부르크 선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들에게는 풍부한 수의 포탄과 기관총, 전차와 비행기가 있었고 독일은 연필 대신 총을 잡은 소년들을 내보냈다.

  결과는 뻔했다. 기차를 타고 전선으로 향한 소년들과 주름진 이마를 가진 중장년들은 전선의 흙이 되었다.

  그들의 나약한 육신은 기관총과 대포와 전차와 비행기의 총과 포탄으로 잘게 다져진 뒤 사방에 흩뿌려졌다.

  땅에 흩뿌려진 인간의 피와 살점은 전쟁이 끝난 뒤 우람한 나무와 아름다운 꽃밭의 양분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날마다 수많은 병사들이,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누군가의 형제이고 누군가의 아들들이 목숨을 잃어갔다.

  죽음의 행렬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이것은 나약한 인간 따위가 감히 막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곧 황제가 연합국에게 강화를 요청할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어디에서 시작된 소문인지 병사들은 묻지 않았다. 그저 그 소문이 사실인지 물었다.

  확실한 것은 없었다. 불가리아가 독일과의 동맹을 파기할 거란 소문도, 술탄이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란 소문도 돌았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으면서, 병사들 사이에선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이 유행처럼 떠돌았다.

  돌격해오는 미군에게 쫓겨 참호를 버리고 도망칠 때, 비크는 되려 참호 밖으로 나가 몰려오는 적들에게 정면으로 달려갔다.

  처음에는 그가 항복하려는 줄 알았다, 하지만 비크의 손에 들린 기관단총을 보고 그가 항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헤켈은 비크에게 돌아오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는 기관단총을 난사하며 떡 버티고 섰다.

  총탄이 두 눈 사이를 관통하기 전까지, 비크는 3명의 미군을 쓰러뜨렸다.

  비크가 땅에 쓰러질 때, 감자로 속이 채워진 마대자루가 뒤로 넘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걸로 끝이었다.


  어느샌가 약지와 중지가 사라진 왼손에서 솟구치는 붉은 선혈을 보면서 헤켈은 살아있음의 이유를 다시금 느꼈다.

  총에 맞아 널부러져, 썩기를 기다리는 시체들이 그에게 말해주지 않았던가. 자신들이 죽은 이유는 죽고 싶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살고 싶었지만 운명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아서라고.

  왼손에서 느껴지는 타오르는 아픔을 느끼면서 헤켈은 아직 자신의 목숨이 붙어있음을 재확인했다. 죽었다면, 그 어떤 통증도, 그 어떤 감정도 느끼질 못했을 테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수없이 많은 죽음을 보면서, 두 개의 손가락을 잃고 살아있음을 느끼다니. 보통 이런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자신이 느끼는 이 감정을 표현할 말을 생각해내지 못한 헤켈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왼손에 붕대를 감던 위생병은 생각보다 아픔을 잘 참아서 놀랐다고 말을 걸었다.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총을 잡았다. 그리고 전선으로 돌아갔다.


  고작 손가락 두 개를 잃은 것으로는 의무대에 있지 못한다. 의무대는 팔 또는 다리가 날아가거나 배에 총을 맞은 병사들만이 머무르는 것이 허용되는 곳이었다. 헤켈이 가야할 곳은 의무대가 아닌 전선이었다.

  최사병들은 보리로 죽을 끓여 굶주린 장병들에게 나눠주었다. 보리와 소금만 들어간 죽은 두 명에게 한 그릇씩 배급되었다.

  헤켈은 에커만과 죽을 나누어 먹었다. 최후의 보리 한 톨까지 숟가락으로 긁어 입에 넣었다.

  보리의 부드러움과 구수한 향이 혀에 남았다. 눈송이처럼 사그라드는 그 향을 조금만 더 느껴보고 싶었다.


  "자네 얼굴이 지금 말이 아냐. 거울 좀 보라구."


  혀로 입술을 햝던 헤켈에게 에커만이 던진 말이었다. 그러는 에커만은 총알이 뺨을 관통해 거즈를 양쪽 볼에 붙이고 있었다. 꼭 치통으로 고생하는 19세기 사람처럼.


  "네 꼴은 차마 사람이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야."


  에커만은 헤켈의 말에 웃어보이려고 했다. 하지만 뺨에 구멍이 나 불가능했다.

  공격에는 A7V 전차 3대와 노획한 Mk IV 1대가 동원되었다. 지금 독일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무기들이었다.


  포탄이 다 떨어진 포병들도 보병들과 함께 공격에 나서게 되었다. 이젠 병과의 차이가 무의미한 수준까지 왔다. 무기도 일단 쏠 수만 있다면 모두 사용되었다. 이 상황에서 무기가 낡았느니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등을 따지는 행위는 멍청한 짓이었다.

  잿빛의 전차들이 포를 쏘면서 전진하고 병사들이 뒤따르며 참호를 나섰다.

  독일군은 날아오는 탄환에 맞지 않으려고 전차 뒤에 바짝 붙어서 전진했다.

  미군의 브라우닝 자동소총 탄환이 전차의 장갑을 두들겼다. 전차병은 총탄이 날아오는 정면을 향해 포탄을 쏘았다.

  자동소총을 쏘던 미군의 몸이 포탄에 정통으로 맞아 갈기갈기 찢어졌다. 기관총 진지가 폭발에 휩쓸리고 모래주머니에 피가 튀었다.

  전차가 참호를 지나갈 때에는 전차병들은 심장을 졸였다. 덩치가 크고 무거운 A7V 전차는 참호를 넘거나 언덕을 오를 때 중심을 잃고 전복되는 일이 잦았다. 반대로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전차는 그런 일이 드물었다.

  평범한 참호 하나를 건너는 데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 다행히 모든 전차들이 무사히 참호를 넘었다. 전차의 측면에 장착된 MG08이 참호의 미군을 휩쓸었다.

  전차들이 미리 휩쓸고 지나간 참호를 간단히 점령한 독일군은 땅에 떨어진 미군의 무기를 주워 바로 다음 참호로 향했다. 헤켈은 생산된지 40년은 넘었을 Gew71 대신 전사한 미군이 가지고 있던 근사한 산탄총을 집어들었다. 사거리가 짧은 것이 조금 흠이었지만, 뭘해도 저 낡은 소총보다는 확실히 좋은 물건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두 번째 참호의 미군도 결사항전의 각오로 저항했다. 미군 참호 바닥에 바짝 엎드려 전차의 포격을 피한 뒤, 불쑥 일어나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총을 발사했다.

  미군의 격렬한 저항은 독일군에게 큰 피해를 안겼다. 그러나 이번에도 전차가 나섰다. 전차를 마땅히 격파할 수단이 없는 적들에게 전차는 살아있는 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A7V의 57mm 포는 무적이었다. 놈의 포탄이 날아간 곳에 남은 적들은 없었다. 독일군은 전진하는 철옹성을 믿었다. 전차는 그들에게 희망이자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다이너마이트를 투척하려던 미군이 헤켈이 쏜 산탄총에 머리가 곤죽이 되었다. 헤켈은 죽은 미군의 손에서 다이너마이트를 빼내 건너편 적 기관총 진지에 던졌다. 적은 산산조각났고, 뜨거운 기관총 부품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에커만은 총검으로 적의 허리를 찔렀다. 총검이 갈비뼈 사이를 파고들어 내장을 헤집었고 미군은 입에서 피를 토했다.

  땅에 쓰러진 적을 무심한 얼굴로 외면한 그는 전사한 미군의 수류탄을 빼앗아 적에게 던졌다. 그러나 적은 수류탄을 주워서 되던졌고 에커만은 재빠르게 몸을 숙였다. 수류탄은 그의 뒤에서 폭발했다.

  살아남아 안도할 시간도 없었다. 계속 전진명령이다. 몸을 앞으로 내빼고 다리를 움직였다.

  미군의 참호를 돌파해 영국군의 진지로 돌격했다.

  미군의 방어선이 뚫린 사실은 조금 전에서야 알아챈 영국군은 독일군의 파도에 휩쓸렸다.

  허둥지둥 움직이는 영국군들을 4대의 전차가 포탄으로 조각내고, 궤도로 짓밟았다. 화염방사기로 적들을 불태우고 총검으로 숨통을 끊어놓았다.

  싸울 의지를 잃은 영국군 병사들이 손을 활짝 쳐들어도, 이미 이성을 잃은 독일군은 그들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육편으로 변한 적들의 살점과 피를 뒤집어쓴 독일군은 광기로 가득했다. 그들의 눈과 온몸에서 광기가 뿜어졌다.

  그것이 삶에 대한 집착이 낳은 광기인지 살육의 흥분이 낳은 광기인지 구분할 길이 없었다.

  6파운더가 좌측의 A7V를 노리고 포탄을 날렸다. 포탄은 땅에 튕겨 전혀 엉뚱한 곳에 떨어졌다.

  새로 장전을 하려는 찰나에 독일 전차병들이 조작하는 MK IV가 적들을 끝장냈다. 같은 6파운더가 불을 뿜어 포탄을 장전하던 영국 병사들을 포와 함께 불덩이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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