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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어둠 연구소(구. 사회적 어둠)


발단 (3)


민아는 무언가 걸리는 듯한 느낌도 없어서 방과후 학교 수업을 들을지조차도 결정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갑자기 생각이 많아져서 민아를 방해하고, 결국 그게 잊어먹게 만드는 결과를 낳은 듯했다. 민아는 보통 새까맣게 잊는 경우가 잘 없었다. 그렇게 잊어버리면 수행이든, 시험공부든 지장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철저했고 노트에도 적어놓곤 했는데, 이번 방과후 학교 신청서 같은 경우 잘 보이는 곳에 신청서를 보관해 두어서 굳이 적지 않았더니 이런 일이 일어났다. 민아가 자신을 너무 믿었던 걸지도 모른다. 등교 정지 이후 자신이 겪은 것이 뭔지 아직도 깊게 느끼지는 못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민아는 침대에 누웠을 때 영문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민아는 자기 전 휴대폰을 잠깐 봤기 때문에, 블루라이트가 자신의 숙면을 방해하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전혀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민아가 잠을 못 자는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어제처럼 생각이 폭주하지도 않아서 차분히 양을 세고 나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찝찝함은 남았지만, 민아가 워낙에 둔해서 그 정도는 그냥 넘어갔다.

한편, 민수도 잠 잘 준비를 했는데, 평소보다 걸리는 것이 있었다. 민아와 비슷하게 방과후 학교 문제였다. 하지만 그걸 알았기에 민수는 오히려 고민을 그만두고 빠르게 잠들기로 했다. 점장님께 조금이라도 잘 보이고 싶은 마음과 학교 행정실에 갔을 때 느낄 창피함이 양 축에서 민수를 계속 흔들었지만 애써 외면해가며 침대에 누웠다. 이미 민수는 생각을 외면하는 데 도가 텄기에 침대에 누운 후에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모두 잊은 척 털어버렸다.


아침이 밝았을 때, 민아는 오랜만에 학교에 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2주만 있으면 방학인데, 생각도 많이 하고 공부도 많이 해서 그런지 주말을 웬일로 길게 느꼈다. 여전히 방과후 학교 신청서에 관련된 내용은 잊고 있었다. 아이들은 다들 관련된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민아는 혼자였기 때문에 그런 것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선생님께서 들어와서 방과후 학교 신청서를 걷으라고 했을 때가 돼서야 겨우 알게 되었다. 다행히 화요일까지였기 때문에 선생님께 혼나진 않았지만, 다들 제출하는 데 혼자서만 제출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민아의 생각과는 달리 많은 친구가 필수 제출인데도 제출하지 않아서 다들 그 얘기로 야단이었다.

민아는 그것도 모른채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인데, 이거 하나 못 챙긴다고 생각하며 자책감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민아는 방과후 학교를 신청할 생각도 별로 없었다. 그러니 어차피 신청 안함에 동그라미 표 그리고 고모 사인만 받아서 내면 되는 데다가 그마저도 신청하지 않는 사람은 내지 않는다고 크게 혼내지도 않기 때문에 정말 쓸데없는 자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거다, 어쩌면 생각은 많지 않아도 이렇게 슬픈 표정을 하고 있어서 다들 접근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민아는 그런 점을 신경 쓰지 않는 아이라 그것조차 여태껏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태도를 바꿀 생각도 당연히 하지 못했다. 선생님께서 간혹 그 태도가 친구를 겁먹게 하는 거 아니냐고 물으셨지만, 민아는 역시나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럴 리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비단 담임 선생님들뿐만 아니라 높은 성적 탓에 선생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민아의 특성상 여러 선생님께서 늘 어두운 태도만 바꾸면 될 거라며 얘기하시는 것이 부지기수였다.

“저기, 너 공부 잘하지?”

“왜? 뭐 가르쳐 달란 얘기야?”

게다가 누군가 물어보면 살짝 까칠한 점도 친구들이 민아를 멀리하도록 만들었다. 덕분에 이번에도 민아는 그 친구에게 아니라고, 싫으면 안 도와줘도 괜찮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민아는 사실 그렇게 가르쳐달라는 부탁이 싫지 않았지만, 진심으로 말하기도 쉽진 않았다. 애초에 가르쳐 주겠다고 말하기 전에 친구들이 떠나가니 붙잡을 수도 없었고 실제로 붙잡아도 친구들이 어색하게 놓으라며 필요 없다고 얘기하곤 했다. 그러니 나중에는 굳이 붙잡게 되지 않은 것이다. 부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친구에게 억지로 가르쳐 줄 정도로 배짱이 있지 않았고, 그 표정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눈치가 없는 건 또 아니었기에 민아는 그럴 때마다 괴로움을 느꼈다. 그래서 아무리 둔한 민아라도 이렇게 가르쳐달라는 부탁이 들어오는 그 순간에는 공부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까칠한 반응을 보이게 되는 걸지도 모르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민아가 여전히 목숨걸고 공부할 때의 태도를 고치지 못했다는 증거였고 친구를 그렇게까지 만들 생각이 없다고밖엔 생각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 와중에 다행인 것은, 민아에게 가진 것이 공부 외엔 아무것도 없는 것을, 그리고 어느정도는 죄를 뒤집어 썼다는 사실을 전교 상위권 학생들은 알고 있어서 부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쌍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민아는 그들이 민아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중위권 아이들과 하위권 아이들의 험담에도 익숙해지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태도에 신경쓰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신을 험담하든, 동정하든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특히나 민아를 심하게 괴롭히는 애들이 있었다. 교묘함을 유지하기 위해 장갑부터 일찍 등교하는 것까지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곤 하는 것이 그들의 행동 특징이었다. 민아는 그렇게 장난을 당했지만, 작년에도 있었던 일이고 재작년에도 있던 일이라 새삼스럽지 않았다. 그렇다고 상처를 입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은 이런 장난에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며 그냥 넘겼다. 그런데 이 애들은 선생님이나 다른 애 앖에서는 한없이 착한 척을 했기에, 눈치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은 또 쟤가 당했구나, 거기서 사고가 멈췄다. 대체 누굴까 궁금해 하는 애들도 없었다. 그렇게 민아를 포함한 모두가 관심을 두지 않자, 그 학생들의 행동은 점점 과격해졌고, 여기저기 민아를 폄훼하는 내용의 포스터를 만들어서 뿌리는 등 엄청난 열성을 보였다. 그 모습을 선생님들이 보시진 못했지만, 어쨌든 포스터를 만들려면 집에서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그거 할 시간에 공부나 더하라고 부모님께 꾸중을 받긴 한 모양이었다. 그 둘이 겨우 일찍 집에서 나와 포스터를 붙일 때 즈음 둘의 얼굴은 꾸중을 길게 들어 초췌해진 얼굴이었다. 과격해진 행동의 영향으로 일부 선생님들이 알게 되셨지만, 잠깐의 일탈로만 여겨서 별 제재를 하지 않았다. 선생님들께선 둘이 괴롭히는 대상이 민아라는 것을 모르는 것도 한몫했다. 그래서 둘은 너무나도 자유로운 환경에서 마음껏 날뛰었다. 민아도 날이 갈수록 심해짐을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그렇게까지 심한 수준이 아니었고, 실제 얼굴을 드러내지도 않았으니 잡을 수도 없다고 생각해서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지 않았다. 고모에게 말씀드리면 좋겠지만 고모는 요즘도 여전히 바빴다. 그러니 고모에게 말씀드리기에도 죄송한 상황이었다. 결국, 민아는 한참을 고민하다 담임 선생님께 자신의 고민을 말씀드렸다. 그때 선생님께선 사실은 알고 있었다고 털어놓으셨지만, 그렇다고 이제부터 민아의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남의 사정에 무관함을 느끼는 민아라 할지라도 미리 조사해 놓은 내용 덕분에 담임 선생님께서 가장 많은 책임을 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의 담임 선생님 또한 그 막중한 책임이 두려워 이렇게 손을 놓고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실을 제대로 알고도 선생님 스스로의 지위를 위해서 눈 감을 거란 사실도.

민아는 이 사실을 듣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 일에 대해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어보였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유일한 기회를 걷어 찬 것이었지만, 아무도 그런 사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선생님들은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결될 거라며 더 이상 간섭하지 않았고, 다만 좀 적극적이지 못해 나중에 자신들이 문책받는다며 걱정할 뿐이었다. 이는 교장 선생님도 마찬가지여서, 보고를 받긴 받았지만 되려 밖에 알려지지 않도록 입 단속을 철저히 하란 말만 할 뿐이었다. 민아는 이미 포기했기 때문에 입 단속이 아무런 의마가 없었음에도 다들 민아가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선생님들은 민아와 단 둘이 대화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자신이 괴롭힘 당한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민아 입장에서는 오히려 기분이 상해서 외부에 알리고 싶어질 만한 발언이었다. 보통은 그런 발언을 하지 않으니 그 누가 들어도 꼭 외부에 알리라는 말로 들렸다.

결국, 그 발언을 지나가던 어느 학생이 들었고, 몇 시간 뒤 SNS에는 학교 폭력 사건을 고발하는 글이 올라왔다. 어느 학교인지는 구사되어있지 않았지만, 그 학교 학생이라면 충분히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하게 적혀있었다. 하필이면 민아와 같은 반에 있었던 학생이었던 것이다. 정의감이 넘쳐서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공론화가 된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늦게 알려진 것은 그만큼 교묘했고, 민아도 티를 내지 않아서였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민아는 이 일을 별로 좋게 보지 않았다. 자신이 포기한 일이고, 1년만 더 버티면 대학생으로써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공론화가 이뤄지면 1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자신을 괴롭힐 것이 분명했기에, 민아는 앞으로 자신이 처할 상황에 두려움을 느꼈다. 지금 와서는 방과후 학교 신청서가 중요하지 않았다. 이 공론화를 어떻게든 막아야만 했다. 더 이상 온라인에 자신의 이야기가 올라가선 안 되었다. 이렇게 퍼지다 보면 중학교 동창들이 또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릴 것이 뻔했다. 고등학교 때의 피해자 낙인은 사회에도 영향을 미칠 만큼 강력한 것임을 민아는 알고 있었다. 대학교 입시에도 영향을 미치고, 대학교가 취업의 반을 쥐고 있는 열쇠이기에 사회에 나가서도 크게 영향을 끼칠 부분임을 알았다. 지금까지의 소문은 약과였음을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 민아는 얼마 전까지 자신이 처벌 받은 것을 정당한 대가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후폭풍을 생각해 보니 그렇지 않았다. 이렇게 사소한 계기로만 불이 붙어도 크게 터지는 폭탄을 자신이 갖다논 셈이었다. 이제와서 무를 수는 없기에 민아는 고민이 산더미처럼 불었다. 그 학생을 직접 찾아갈까 했지만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데다 민아의 입장에선 같은 반인지 조차 확신이 서지 않았다. 급하게 담임 선생님을 찾으려 했지만 직전 시간이 컴퓨터를 쓰는 시간이어서 SNS에 올라올 수 있었음을 떠올리니 담임 선생님을 찾는다고 해서 올린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교탁 앞에 나와서 자신의 이야기를 쓴 아이가 누구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확히는,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민아의 성격이 그렇게까지 용감하지 않았다. 아직 오전 중이라 완전히 퍼지지 못한 소문이고, 학교 자체가 성적 좋은 애들만 가는 곳이라서 휴대폰을 안 내는 학생이 별로 없으므로 기껏해야 집에 돌아갈 때 즈음 휴대폰으로 소식을 접할 것이 뻔하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민아의 생각은 다른 애들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시간이 없으리라 가정한 매우 안일한 생각이었지만, 때로는 그것이 민아를 고통으로부터 멀리하도록 했다. 그러나 고통으로부터 멀리하는 것이 해답이 되진 않았다. 휴대폰을 내지 않은 아이들이 민아가 생각하는 사람 수 보다 많아서 좀 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정의감으로 SNS에 올린 그 학생은 생각보다 좋지 못한 결과에 놀라 삭제하고 사실이 아니라며 발뺌했지만, 이미 복수의 친구들이 사실관계를 전부 확인한 후라서 그런 말은 씨알도 안 먹혔다. 되려 그 학생에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원래 그런 애도 아니면서 왜 그런 소리를 했냐며 나무라는 말이 이어졌다.

선생님들도 삽시간에 퍼진 이 일에 당황하며 학교 폭력 위원회를 열기 위해 분주히 준비했다. 주무 부서에서는 전화기가 쉴 새 없이 울렸다. 역으로 이 때문에 학폭위 준비는 예정보다 밀렸으며, 민아도 바빠져서 교무실에 여러차례 불려가야 했다. 그 와중에 어떤 선생님은 왜 공론화를 시도했냐며 나무랐지만, 그걸 올린 학생이 민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아시고는 사과하는 일도 있었다.

민아의 관점에서, 그동안 선생님들께서 자꾸만 입단속을 하셔서 기분이 나빴는데, 공론화로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꾸지람을 들으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동안은 자신이 참는다고 생각하며 애써 넘어갔는데, 이번에는 참을 수 없었다. 등교 거부를 하고 싶은 심정도 있었다. 어차피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누군가 한 명은 자택에서 대가하고 있어야 한다면, 자신이 자택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보통은 가해자가 집에서 대기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는 모양이었지만, 그렇게 되면 민아에게는 학교에서 받는 학생과 선생님의 불편하고 따가운 시선을 견디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서 그러질 않길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민아가 원하는 것처럼 집에서 대기할 수는 없었다. 선생님들은 심지어 격리도 하지 않아서, 약 3개의 수업이 끝나고 학폭위가 열렸을 때의 처분은 사회봉사 60시간 정도였다. 그 정도로도 충분히 강한 처분이었지만, 격리는 없었기에 민아는 그 둘의 보복에 두려움을 느껴야만 했다. 비록 민아만 느끼는 두려움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정의감 넘치는 그 녀석이 누구인지 몰랐기에 그들의 화는 민아만을 향했다. 선생님들께서는 잘 끝났다며 다시 신경 쓰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민아는 이번에야말로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다. 하지만 두려움을 주었을 뿐, 그들의 화는 실제로 발화하지 않아서 그 이상의 어떠한 위력을 주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들은 사회봉사 60시간을 채우기 위해 바빴다. 민아에게 화풀이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던 모양이지만 정작 민아 반 근처에도 가기 힘들었으니 그들의 화도 점차 사라져갔다. 처음엔 화가 나고, 나중엔 용서하고 자신을 자책하게 된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그들도 결국 자신을 자책하게 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하루 만에 일어났다는 것은 민아에게 별로 놀랄 일이 아니었다.

민수는 오늘도 알바에 나가야 했지만 역시나 예상대로 알바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민수도 언제까지나 나가기 싫다고 안 나가고 옮기고 싶다고 다른 알바로 옮길 수는 없었다. 점주에 따라선 오래 알바할수록 신뢰를 받아 더 높은 자리를 맡기기도 한다는 얘기를 들으니 차마 그럴 수가 없다. 여기가 직영점도 아니고, 자신이 정규직도 아니어서 유통업체에 취직하는 게 말이 안 되지만 민수에겐 조금이나마 희망이 필요했다. 자신의 방만함으로 날린 세월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 가장 오랫동안 하는 것이 이 일이 아닌가. 이렇게 매달리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우스웠지만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누굴 원망하리.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민수는 힘을 쓰는 게 사람과 대화하는 것보다 몇 배는 싫었고 몸이 그렇게 튼튼하지도 않아서 자격 조건에도 맞지 않았으니 늘 그렇게나 싫어하는 서비스직이나 사무직을 하는 수밖에. 앞으로도 그럴 터이니 이젠 변화가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방과후 학교 강사도 해본 거였다. 그래서 이번에 점장님의 제안을 수락한 데에는 다시 도전한다는 명목도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편의점에 가야 했다. 어제 제안을 수락했고, 자신도 어떻게든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여겼기에 어거지로 씼고 출근 길에 올랐다.

오늘도 출근 시간대를 지나 한적해진 시간에 버스를 타고 출근했는데, 오늘은 점장님의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그 어느 때보다 비장하고 매장도 이미 깔끔하게 정리되어있었다.

“점장님,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 소년! 오늘은 지점 평가 있는 날이라 잘 해야 한다. 잘못 찍히면 간판 때야 하니까.”

한 일주일 전 즈음, 곧 있으면 지점 평가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복장을 단정하게 입고 와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집에 갔다 와야 할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장님께서는 이미 청소를 마쳐 두셔서 재고 관리랑 계산만 잘 하면 된다고 말씀하셨지만, 하필이면 고객 응대가 가장 어려운 사람이 민수였기 때문에 이번 평가는 민수에게도 큰 긴장감을 선사해 주었다. 점장님께서는 평가하시는 분이 오시는 시간이 알기 어려울 뿐, 누가 평가하러 왔는지는 육안으로 구별될 만큼 튀기 때문에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다독이셨지만, 그래도 긴장이 되는 민수였다. 평소에도 가끔 POS기를 잘못 만져서 손님을 당황시킨 적이 있는 민수인 만큼, 벼락치기지만 POS기 조작법도 다시 배우고 재고 관리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어디에 어느 상품이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묘한 긴장감 때문인지, 평소보다 손님들의 태도도 비교적 조용했다. 몇몇 분들이 담배를 사려다가,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신분증 검사를 좀 더 꼼꼼히 한다면서 민수에게 왜 이렇게 깐깐해졌냐며 짜증을 내시긴 했지만, 그런 일을 빼고는 지나칠 만큼 신경 쓰이는 공간이었다. 이에 점장님께서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평가에서 불이익을 받지는 않는다며 민수에게 충고하셨다. 그러나, 너무 긴장한 나머지 그런 말조차 잘 들리지 않았다. 아직도 심하게 긴장하고 있는 모습이 오히려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일하던 와중에, 평가할 심사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편의점에 들어왔다. 도저히 편의점에 올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모습이라, 평가라는 걸 눈치채기도 쉬웠다. 풀리지 않은 긴장에 심사원까지 들어오니, 민수는 몸이 굳었다. 점장님께서도 민수의 굳은 표정이 염려되었으나, 이미 심사가 시작되었기에 수상한 행동을 보여주어선 안 되었다.

다행히 그 심사원은 간단히 매장 전체를 훑어보더니, 물건 몇 가지를 집어 계산대로 가지고 왔다. 즉, 민수를 그렇게 유심히 쳐다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난관은 여기서부터였다. 민수가 급하게 POS기 사용법을 익힐 당시에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결제 방법을 가지고 결제해달라는 것이었다.

“앱 카드로 결제해 주세요.”

민수는 그런 것 따위 몰랐다. 체크카드나 신용카드는 들어봤어도 앱 카드는 또 뭐람. 하지만 평가원이 들이민 만큼 앱 카드로도 결제가 되리라. 뭔지는 모르지만 ‘카드’라니 일단 신용카드 결제를 눌렀다. 아닌가? 교통카드의 일종인가? 하는 의문도 있었지만 일단 앱이라니까 삼X 페이 비슷한 것이란 생각이 더 앞서서 골랐다.

한편 점장님 입장에서는 마음이 놓였다. 자신도 이제 겨우 익숙해져 가는 게 바로 앱 카드 결제 법이었다. 그래서 알바생한테는 일부러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우연히 알바생이 맞는 방법으로 눌러준 덕분에 결제가 되긴 한 거다. 하지만 마음이 놓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불안한 부분도 있었는데, 매뉴얼 상 멤버쉽 카드가 있냐고 묻는 것에 먼저였기 때문에 이미 점수가 깎였다는 점에선 안심할 수 없었다. 매장 자체는 깔끔했고, 알바생이 응대를 까칠하게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 외에 점수가 깎일 요인 같은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민수는, 겨우 사라진 심사원의 뒷모습을 배웅하며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래서 스스로 자책하였는데, 점장님께서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을 못 잡으시는 바람에 둘 사이에 매우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결국, 참다못한 민수가 먼저 죄송하다고 사과드렸지만, 점장님께서는 민수가 그러는 것에 불편함을 느껴 괜히 다른 주제로 넘어가려고만 했다. 민수도 그것을 알았기에 오늘은 더이상 말하지 않은 채 조용히 있기로 했다.

하필이면 늘상 한적한 이 편의점의 특성 상, 오늘은 민수와 점장 모두에게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조기 퇴근 시키는 것도 미안해서인지 계속 퇴근하지는 못하고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이 지속되었다.

이 둘이 그나마 위축되지 않을 수 있는 시간은 손님이 올 때 뿐이었는데, 그 중에는 민아도 있었다. 근처 편의점은 아니었지만 단 하루의 변덕으로 잠시 이곳에 들렀던 것이다. 즉, 애초에 여기 올 예정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둘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다. 애초에 민아는 민수의 방과후 강좌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학교에서 몇 번 마주쳤다는 이유만으로 알아보기는 쉽지 않으며, 설렁 알아볼 수 있다 한들 아는 척을 할 이유도 없었다.

그건 민수도 마찬가지여서, 민아의 교복 차림으로 자신이 맡은 방과후 수업을 주관하는 학교라는 것 말고는 알지 못했다. 이전에도 한번 이 학교에서 수업을 한 적이 있지만, 그렇다고 일주일에 여러 번 있는 주요 과목의 방과후 학교는 아니었으므로 민아를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아이 그 이상으로 볼 수는 없었다.

그런 까닭에 서로가 별다른 접점 없이 스쳐지나갔고, 그래서 그때는 민수도 민아도 서로가 만나게 될 거란 것을 알지 못했다. 만약 이 때 만나지 않았더라면 방과후 학교에서 만났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새해가 ​밝​았​습​니​다​.​이​번​에​는​ 연휴가 끼어서 제 시간에 맞춰 올릴 수 있게 되었네요. 앞으로도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최초 업데이트 2018년 1월 2일 오전 12시 10분]
하루를 넘겼습니다. 공부 관련하여 부모님과 다툼이 심해,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부족하여 늦어졌습니다. 다음 편의 연재는 바로 이뤄지지는 못할 것으로 예상되고 아마 내일 즈음 나올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다음주 연재는 예정대로 진행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수정판에 대해 고증 오류 등 의견이 있으신 경우 댓글 남겨주시면 다음에 개정할 기회가 있을 때 수정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차 업데이트 2018년 5월 2일 오전 12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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