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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어둠 연구소(구. 사회적 어둠)


시작 (2)


오늘 민수가 본 자격증 시험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소문에 따르면 내년 출제 방식이 바뀔 예정이라 마지막으로 시험을 보는 사람들을 위해 조금은 쉽게 냈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굳이 원래도 공부를 잘하는 민수가 언급하지 않아도 쉬운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내년에 뭔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쉬워진 시험은 따로 있었지만, 민수에게 그런 내용은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시험이 끝나고 수험장을 나올 무렵, 유난히 시린 돌풍이 불었다. 기온은 그리 낮지 않은데 왠지 쌀쌀한 기분이 들었다. 눈앞에 밟힌 낯설지 않은 건물이 그 느낌을 증명해주었다. 지금은 이미 사라지고 없어진 자리에 꿰차고 들어온 경쟁 회사의 간판이 보였다. 차라리 전혀 상관없는 회사였다면 덜 했을 텐데 기분이 묘했다. 아마도 저 기업이 꾸민 일로 다니던 회사가 망한 건 아닐까 싶어서일 것이다.

애써 무시하고 묵묵히 걸은 끝에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 이번에는 주말인데도 교복을 입은 학생이 보였다. 의욕을 잃고 멍하니 있는 게 예사롭지 않았다. 마치 동상이 된 듯 앉아 있었는데 한두 시간 앉아 있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저기, 학생. 오늘 무슨 일로 교복을 입고 나왔어요?”

뜻밖에 말을 걸까 생각도 했지만 다른 사람이 먼저 말을 걸었다. 평소 굳이 일면식도 없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은 민수 성격상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의외였다.

“아, 날짜를 착각해서요. 이제 집에 갈 거예요.”

민수는 그런 적이 없었지만, 급우 중에 그런 친구가 한둘은 있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휴일 오전 학교에 갔다가 잠긴 교문 앞에서 형용할 수 없는 허무함을 느끼고 돌아오고 나면, 그다음 주에 주변 애들에게 그런 일이 있었음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학교 가는 날 누군가에게 말할 듯한 표정이나 말투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오늘 날짜를 착각한 것은 분명하리라.

대답을 마친 그 학생은 지금 막 오는 버스에 눈길도 주지 않고 바로 버스가 갈 방향으로 뛰쳐나갔다. 아마도 버스를 타는 것보다 달려가는 것이 집으로 가는데 더 가깝다는 거겠지. 한편으로는 집까지 가서 허무함을 맛볼 만도 한데 이렇게 버스 정류장에서 추위에 떨며 앉아 있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신기할 세는 없어서 바로 버스를 타야 했다. 평소라면 배차 간격이 벌어지니 좀 더 오래 생각에 잠겨있어도 상관없지만, 오늘은 운이 좋았는지 버스를 하나 떠나보내자마자 바로 원하는 버스가 왔기 때문이었다. 예비 차인지 다소 불량한 내, 외관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불평할 수는 없었다. 깨끗한 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 40분이나 이 추위에 기다릴 수는 없다.

“성인 1명이요.”

아까 승하차할 때는 분명 교통카드를 이용했고, 가방 아니면 재킷 주머니에 있을 법도 한데 무거운 기출문제집 밑에 깔리기라도 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주머니 속에 늘 가지고 다니던 작은 지갑 안 비상금을 냈지만, 아무래도 카드가 현금보다 저렴하다 보니 아깝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오늘은 좀 별난 날이네.”

우연히 지정된 옛날 직장이 있던 빌딩 근처의 수험장, 버스 정류장에서 허탈감 하나로 몇 시간 동안 앉아 있던 학생, 보이지 않는 교통카드까지 특이한 일이 연달아 있었다. 그렇다고 머피의 법칙을 가져올 만큼 뭔가 불행한 일이 있거나 기회를 놓친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평소 볼 수 없는 일을 계속 겪으니 영 현실감이 없다. 민수 입장에서는 재미없는 버스 안 TV를 보는 것보다 오늘 일을 되짚어보는 것이 더 흥미있을 정도였다.

집 근처에 다다를 무렵이 되자 나른해지기 딱 좋은 시간대가 되었다. 딱 봐도 오래되어 보이는 차라 좀 더 조심히 운전했는지는 몰라도 평소보단 약간 오래 걸렸는데, 워낙 둔감해서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수험표를 팔랑팔랑 휘저으며 집에 도착하자, 익숙한 단골 짜장면집의 전단이 있었다. 오늘 저녁에는 짜장면을 시켜 먹을 예정이었는데, 마침 전단을 잃어버린 참이어서 잘되었다 싶었다. 휴대폰으로 검색해서 알아봐도 되지만, 명색이 단골집인데 전화번호 하나 찾아보겠다고 지도 앱을 켜고 검색한 다음 다시 전화 앱으로 넘어가는 건 좀 그렇다는 생각에서다.

시킬 것은 많지 않아서 일반 짜장면 하나면 족했다. 그게 설거짓거리도 별로 없어서 좋고, 탕수육이 없어서 먹지 않는 군만두도 따라오지 않는다. 남은 탕수육을 다른 때 반찬으로 써먹을 수 있다는 장점 정도는 있지만, 맞는 주인을 찾지 못하고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사라지는 군만두가 아깝다.

“아, 그래도 지금 이 시간에 시켜먹는 것은 좀 그렇지.”

원래 자격증을 딴 날은 하루 정도 쉬어도 괜찮다는 생각에, 어제 같으면 한창 공부할 시간인 대낮에도 태평하게 잠을 청했다.

 

공부가 잘될 것 같은 맑은 햇살에 추리닝 차림으로 독서실에 다다른 민아는 예상외의 상황과 마주하고 있었다. 고정석이 아니니까 얼마든지 아는 사이와 만날 수 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새 학교니까 과거의 민아를 아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한두 명에 불과하고 그 몇 안 되는 애들은 독서실에 다니지 않는다고 했으니 만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지금 민아가 당황한 것은 그런 한두 명을 봐서 그런 게 아니었다.

“아, 민아구나. 그, 미안해.”

차마, 괜찮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민아는 자신의 잘못에 비해 큰 벌을 받았고 그 처분이 이뤄지던 날 만감이 교차하는 옛 친구의 얼굴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반가움이 묻어나면서도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가도 도로 가라앉았다.

비록 벌은 크게 받았다고 해도 민아 역시 뚜렷하게 진심을 담아 사과할 기회는 없어서 마음이 찜찜했다. 영 공부할 수 있는 기분이 아니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잠깐 카페에 같이 가지 않을래?”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독서실 말고 카페에서 얘기하자는 것이었다. 옛 급우는 특이하게도 오늘 교복을 입고 있었지만, 민아는 자기 생각에만 급급한 나머지 교복을 입었는지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옛 친구, 세은이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아직도 얼굴을 차마 들지 못한 채였다.

묵묵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1층 카페에 자리를 잡고, 각자 원하는 음료를 주문해 자리에 앉자 세아는 입을 열었다.

“그동안 힘들게 해서 미안해. 염치는 없지만 다시 예전처럼 지낼 순 없을까?”

뻔뻔한 한마디였다. 그렇게 힘들게 해놓고선 다시 친구가 되자니, 말이 되지 않았다. 뒤늦게 교복을 입은 모습을 보고 전학을 왔다는 걸 알게 되었으나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다만 한 마디, 깊은 침묵이 흐른 후 나온 말이 있었는데,

“나도 미안했어. 그렇지만 너무 멀리 온 건 아닐까.”

최대한 담담히 내뱉으려 했는데 잘되지 않았다. 오랜 기간 친구로 지내면서 어려운 시기에도 곁에 있으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포기한 친구인데, 내가 이렇게 내쳐도 되는 걸까. 하지만 말투는 거칠었다. 전혀 의도하지 않아도 마음 한편에는 끝까지 함께해주었으면 하는 작은 원망이 뒤섞여 있어서였다.

그냥 아메리카노인데,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차가웠다. 세은이도 마찬가지인지 기껏 카페라떼를 시켜놓고 한 모금 마시다 말고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이래서는 독서실 앞에서 마주했던 난처한 상황과 완전히 같다. 민아도 조금은 위기감을 느꼈다.

“하지만 네 덕분에 더 오래 버틸 수 있었어. 고마워.”

조금 전까지 가시 돋친 말을 뱉고서 이제 와 감사 인사라니,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학교로 전학 오게 되어 전 친구에게 찾아와 부탁한 세은이와 다를 것은 무엇이며, 공부는 잘하면서 이 정도가 민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니 말을 하고도 뻔뻔함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고도 세은이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처음에는 따뜻했던 두 커피가 차게 식도록 정적이 흘러도 서로 간에 말 하나 오가지 않았다.

“아니야, 끝까지 남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세은이에게도 이게 최선이었으리라. 민아는 그렇게 추측했다. 아마 더는 둘 다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커피도 식는데 굳이 카페에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오는 거지? 학교에서 보자.”

문자로만 보면 마치 무슨 일이라도 낼 것 같은 말이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단 한 번도 씁쓸하게 여기지 않았던 아메리카노를 다 마시고 느낀 쓴맛에, 변덕이 생긴 민아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한 말이었다. 씁쓸함이 담긴 민아의 미소에 세은이도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민아보다도 더 심각한 얼굴이 되어있었다. 더더욱 마음이 약해진 민아는 도로 앉았다. 어차피 올라가서 책을 펼쳐봤자 이미 공부는 물 건너 갔겠구나 싶기도 해서다.

“무슨 일 있었어?”

그 오랜 괴롭힘에도 꿋꿋이 버텼으니 이번에도 세은이는 울지 않았다. 다만 이미 울상이 다 되어서 누가 봐도 곧 울 것만 같았다. 등교를 금지당하고 반을 바꾼 몇 개월 사이에, 그리고 다른 친구들과 같은 학교에 간 두 달 사이에 무슨 일이 있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카페에서 들려줄 만한 내용은 아닌 듯, 손사래를 치는 그 손은 몇 시간을 밖에서 기다렸던 것인지 완전히 얼어있었다. 실내에 몇 시간을 있었는데 새빨갛게 되어서 만져봐도 차가웠다. 부모님도 주말에는 일찍 퇴근하시니 집에서 사정을 물어보기는 어려웠지만, 월요일이라면 밤늦게 퇴근하실 테니 약속을 잡기로 했다.

한동안 공부에만 매진해온 민아의 첫 번째 변화였다. 정작 본인은 느끼지 못한 모양이지만, 이날을 기점으로 민아에게도 숨통이 트였다.
오늘도 약간 지연되어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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