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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어둠 연구소(구. 사회적 어둠)


우연한 만남 (3)


민수가 찾아가야 하는 보건소는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도시가 발전하면서 중심가가 옮겨져 도심에서 가려면 다소 거리가 떨어져 있지만, 가까운 시험장이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듯 민수의 집도 변두리에 위치해 오히려 가는 게 더 편했다.

처음에는 버스를 타고 갈까, 그런 생각도 했으나 워낙에 외출을 자주 하지 않는 걸 민수 본인도 알고 있기에 조금이라도 더 움직이기 위해 걸어서 가기로 했다. 사실은 두 정거장 거리인 만큼 버스비가 아까웠던 탓도 있지만, 그건 버스를 타지 않기로 하고 나서야 떠올랐기 때문에 그만큼 중요한 이유는 아니었다. 어차피 민수가 이동 비용을 내는 게 아니어서 더 그랬다.

준비를 다 마치고 보건소로 향하는 길에, 문득 보건증도 발급받는 데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카드로 내도 되지만, 생각해보니 걸어간다고 카드도 챙기지 않아 현금으로 내야만 했다.

여기서 누군가는 간편 결제 서비스를 이용하면 안 되겠냐고 물을지 모르겠지만, 민수의 휴대전화는 오래된 기종인 데다가 출시 당시 기준으로도 보급형이어서 어디에서나 쓸 수 있는 간편 결제 서비스는 사용할 수 없었다. 일부 오프라인에서 쓸 수 있는 간편 결제 서비스가 가맹점을 늘리고는 있지만, 보건소에서 쓸 수 있는지는 물어봐야 하는데 민수가 그런 귀찮은 과정을 거칠 리 없었다.

사실 어쩌면 계좌에서 돈을 뽑는 과정이 더 번거롭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어차피 간편 결제를 안 받는다고 한다면 다시 ATM으로 돌아와 돈을 찾아야 해서 꼭 번거롭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어쨌든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ATM으로 다가갔을 때는 민수가 보건소로 향하겠다고 결심한 지 30분이 지난 후였다. 아무런 방해가 없다면 민수네 집에서 보건소로 가는데 15분 남짓 걸리므로, ATM 하나 찾을 때까지 15분이 걸린 셈이다. 어쩌면 이보다 빨리 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주말이라서 문제가 생겨도 고칠 수 없는 것인지 몰라도 주변에 있었던 가장 가까운 ATM은 기계가 고장 나 사용할 수 없었다.

결국, 은행 지점 내에 있는 365코너까지 가서야 금융 업무를 해결할 수 있었는데, 이마저도 휴일에 금융 업무를 간단하게 보려는 사람들로 인해 기다려야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우두커니 기다리는 것만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겨우 찾은 만 원을 들고 보건소 앞에 다가갔을 때, 민수는 기운이 쑥 빠지는 느낌을 받았다. 시간 감각이 무뎌진 탓에,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조차 헷갈려서 쉬는 날인 일요일에 보건소 앞에 섰다.

“아, 그래. 오늘은 일요일이었지.”

그나마 오늘이 다른 요일인지 철석같이 믿지는 않아서 다행이라면 다행인데, 단 하루 만에 의욕을 잃어버린 탓에 장 보러 갈 기분이 들지를 않았다. 사실 보건소에 가는 것과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었어야 하는 일이건만, 나온 김에 장을 볼 생각을 했으니 더더욱 가기가 싫었던 듯싶다.

하지만 별수 있나. 저녁을 먹기 위해선 무언가 시켜 먹든가, 밖에 나가 외식을 하던가, 장을 봐서 요리해야 한다. 시켜 먹는 건 요새 너무 자주 해서 물리고, 외식은 지금 시간이 애매해서 차라리 장을 보는 편이 집에서 당장 요리를 하지 않더라도 나았다.

그래서 민수는 별다른 예정 식단은 없었지만 일단 동네 마트로 향했다. 가면 장도 볼 수 있고, 영 집에 가서 요리할 기운이 나질 않으면 푸드코트에서 식사를 해결하면 그만인 선택지였다.

요즘 마트도 경영 실적이 나빠지면서 구석구석 입점했던 소규모 점포들을 줄인다는데, 다행히 이 동네는 변두리인데도 불구하고 과거 도심이었던 시절이 영향을 주었는지 아직도 마트가 있었다. 장사가 그다지 잘되지 않는 모습을 보면 곧 없어질 것도 같기는 한데, 민수가 가지 않는 때에는 장사가 잘되는지 벌써 십몇 년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오늘 오랜만에 마트에 갔을 때는, 그동안 본 적이 없는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폐점으로 인한 정리라면 모를까, 아직 문을 닫을 시간대도 아닌데 장 보고 저녁 먹기 딱 좋은 시간이라 그런지 카트를 몰고 다니기엔 힘들어 보일 정도였다.

어차피 민수는 혼자 살기에 그 정도까지는 필요가 없었고, 플라스틱 장바구니에 사흘 정도 먹을거리를 담아두는 정도가 적당했다. 마트 가기 전 아무것도 정한 게 없는 만큼 거의 충동적으로 모든 걸 샀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조합하면 그럴싸한 장바구니 목록이었다.

이틀 치도 아니고 사흘 치를 모으니 아무리 한 명이라곤 해도 장바구니가 넘치도록 많은 양이었는데, 막상 계산대에 가서 물건을 하나둘 내려놓다 보니 생각보다는 많지 않은 양이라는 데 두 번 놀랐다. 그리고 세 번 놀란 것은, 계산원을 맡고 계신 남성분의 얼굴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이라는 점이었다.

“선생님……?”

다만 비슷한 모습일 뿐, 다른 사람인지 나지막이 부른 익숙한 호칭에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민수가 알고 있는 그 선생님은 실제로도 이제 은퇴할 나이셔서, 설령 지금 여기 서 계신 마트 계산원분과 형제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모두 다 합해서 십만오천이백 원입니다. 포인트 적립 카드 있으십니까?”

포인트 적립 겸, 어차피 간편 결제 밖에는 민수에게 돈을 지불할 방법이 없었기에 바코드 창을 띄우고 계산원분께 휴대전화를 건네드렸다. 선생님과의 재회였으면 좋으련만, 그런 아쉬움을 달래며 소형 장바구니에 사흘 치 식량을 담기 시작했다.

지갑도 안 챙겨 나올 만큼 정신없는 와중에 주머니에 소형 장바구니가 있었던 것은 단순 우연이어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민수에게 자신이 얼마나 소지품 정리를 하지 않는지 깨닫는 시간이 되었다.

 

그렇게 장을 보고 나서, 역시나 집에 가서 요리할 기운은 나지 않았기에 푸드코트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가기로 했다. 이럴 때 푸드코트와 식품관을 서로 마주 보게 배치한 누군가는 반드시 칭찬받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일렬로 배치된 메뉴판을 쭉 둘러보았다.

“산채 나물밥, 냉면, 우동, 베이컨 볶음밥, 돈가스…….”

우동과 돈가스는 집 앞에서도 먹을 수 있으니까 탈락. 베이컨 볶음밥은 오늘 샀으니 제외. 두 가지 선택지만 남은 채 박빙의 대결을 펼쳤다. 그나마 건강을 챙기자면 산채 나물밥이 단연 으뜸이겠으나, 누가 푸드코트에 건강을 챙기기 위해 오는가. 냉면도 괜찮았지만 여기 온 이래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어서 감히 새로운 시도를 해보긴 꺼려졌다.

“그래도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냉면이겠지.”

민수 앞에 줄을 선 누군가도 같은 생각인지, 한참을 고민하는 낌새를 보이더니 결국 냉면을 골랐다. 그래도 익숙하게 메뉴를 고르는 것을 보니 이곳에 자주 온 듯해, 민수도 그 사람의 선택을 따르기로 했다.

“냉면 하나 주세요.”

​“​7​0​0​0​원​입​니​다​.​”​

말로는 30년 전통이니 하는 말이 푸드코트 국숫집 간판 위에 달려있었지만, 이 마트가 30년이 채 안 되었는데 전통인가 싶었다. 물론 옮겨와서 지금 마트 안에 있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신뢰도는 높지 않았다. 그리고 맛이 있다고 해도 민수 취향일지는 별개였다.

 

저녁 시간대 붐비는 자리 틈바구니로 2인석 하나를 날름 차지하고선, 잠깐 기다리자 냉면이 나왔다. 앉을 곳을 찾느라 고생한 보람도 무색하게 쉴 시간도 없이 일어나야 해서 살짝 짜증도 났지만, 푸짐하게 나오는 양을 보고 입을 다물게 되었다.

“일단 양은 합격이라 이거지.”

새로운 음식을 먹어볼 때만은 예전의 민수처럼 눈이 반짝 빛났다. 평범한 냉면 맛이었지만, 그래도 냉면이 비싸다고 자주 국숫집에 가질 않았던 걸 생각하면 오랜만에 먹는 맛이 그렇게 맛있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국수를 한 그릇 다 비우고 집으로 향하는 길, 어둑어둑했지만 그날따라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기분이 살짝 떴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외출이라는 자각이 그런 형태로 풀린 것인지는 몰라도, 주변에서 보면 민수의 표정부터 분위기까지 전부 살아있는 사람처럼 변했다고 말할 수준이었다. 그만큼 그동안 생기도 없었고 어두침침했다는 뜻이다.

사실은 근거 모를 자신감에 그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산책을 고민할 정도였으나, 생각해보니 역시나 무게가 나중에는 운동 기구처럼 작용해 내일 보건소에 다시 갈 수 없을 것만 같아 포기해야 했다.

그 정도로 기세 있게 집에 막 돌아왔을 때, 민수는 자신이 여태껏 살아온 이 집이 영 좋은 상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마신 지 몇 시간이 지났는데 여전히 책상 위에 올라와 있는 사이다 캔, 건조대에서 아직도 정리하지 않은 삼 일 전 그릇, 일어난 뒤로 개지 않은 이불. 이전의 완벽주의자 내지는 공붓벌레가 한 행동이라곤 믿을 수 없었다. 늦은 시간이지만 장바구니를 잠깐 부엌 식탁에 기대어 놓고 정리를 시작했다.

“이건 또 왜 덜 말랐지?”

삼 일 전부터 말리기 시작한 그릇인데도 잘못 놓았는지 여전히 시리얼을 담았던 그릇엔 물기가 남아있었다. 누가 대신 먹고 여기에 다시 얹어놓은 건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오늘 점심에 놓은 것 같은 상태였다.

그 밖에도 방 이곳저곳을 뒤지다 보니 이중인격으로 살아온 것은 아닌지 착각할만한 쓰레기나 정리 안 된 물건들이 즐비했다. 실제론 민수가 단순히 기억을 못 하는 거였지만 그걸 스스로가 눈치챘다면 아직도 민수 머리 한가운데에 물음표가 가득하지는 않았으리라.

분명 좁은 원룸인데 순식간에 마루에 펼쳐둔 작은 쓰레기봉투와 분리배출용 바구니가 가득 찼다. 서랍, 책장, 카펫 밑에도 얇은 종이 책자 같은 것이 나뒹굴고 있었다는 사실에 경악을 멎을 수 없었다.

두 시간이 지나 겨우 정리가 끝나자, 이번엔 또 노트북 모니터에 비치는 자신의 어두컴컴한 몰골이 보였다. 앞머리가 눈을 찌를 만큼 내려온 지금, 어둡게 안 보이는 것도 어려웠으나 이력서 사진을 찍을 생각을 하니 한 번 가꿔 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내일은 보건소를 가야 하니까 당장은 할 생각이 없지만, 어쨌든 미용실 예약을 하기로 했다. 나가는 걸 정말 귀찮아 한 탓에 진작에 잘랐어야 하는 머리를 민수는 이렇게 결심을 해야만 자를 수 있었다.
본 우연한 만남 시리즈는 앞으로도 좀 더 진행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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