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및 문화 콘텐츠 사이트 삼천세계

사회 어둠 연구소(구. 사회적 어둠)


우연한 만남 (6)


사실 세은이도 조금은 그럴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아니, 민아가 이 학교에 오는 것이 더 이상하다고 확신했을 정도다. 특목고처럼 긴 시간 준비해서 진학하는 학교도 아니고, 단순히 인문계 고등학교이면서 가장 가까운 곳이라 가고 싶은 거라고 했으니까. 이제는 상처 때문에라도 친구들이 잘 가지 않을만한 곳, 그리고 가장 친구들과 마주치기 어려운 학교로 골라 갔겠지. 하지만 그저 생각에 그치고 마는 것과 실제 겪는 감정은 달랐다.

그때 담담히 어디를 갈 거라 말했던 민아의 목소리. 그리고 결국엔 오해로 시작해서 갈라서게 된 지금. 누가 누굴 배신한 적 없지만, 이 결과는 마치 배신한 자의 마지막과 배신당한 자의 결정을 보는 듯했다. 반 배치표를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번 훑어봐도 보이지 않는 민아의 이름에 머리는 이해를 했지만 끝끝내 감정적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다들 새로운 친구들, 새로운 반에 들떠있을 지금 이 시점에 함부로 서럽게 울 수는 없다. 그건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집에 돌아가서야 서럽게 울 수 있었다. 어쩌면 앞으로 다시는 마주칠 수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는 공포감이, 또 실낱같이 붙들고 간절히 바라왔던 약속이 깨어진다는 것에 대한 슬픔이 세은이를 그토록 우울하게 했다. 아무리 고등학교에 가면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 있다고 하지만 3년 동안 유일한 친구로 여겨왔던 민아와 고등학교 들어와 처음 얼굴을 맞댄 친구 사이의 깊이는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절반 이상의 중학교 동창들이 이 학교로 진학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친구라 한들 실제로 믿고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좀 다른 차원의 문제일 수밖에.

민아가 이 학교에 올 거라는 허튼 믿음에서 비롯된 잘못한 선택 때문에 앞으로의 학창 생활이 그리 밝지 못할 걸 생각하니 앞이 컴컴했다. 남들은 보통 입학식 날에 설레기도 한다던데 초등학교 때나 중학교 때 세은이가 느꼈던 그런 벅찬 기대는 고등학교 입학식 앞엔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 반 배정표에서 민아를 찾느라 자신을 MVP니 뭐니 하며 치켜세우던 녀석이 혹시나 같은 반이 되어버린 건 아닐지, 하는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부모님께서도 그런 세은이를 걱정하셨지만, 별달리 하실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새로운 친구를 만들면 된다는 뻔한 위로는 어차피 일말의 도움조차 되지 않으리란 걸 알기에 그저 바라만 보고 계셨다. 마음만 같아서는 인맥을 동원해서라도 민아를 만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었으나 쉽지도 않을뿐더러 세은이에게 함부로 약속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 입학식을 치렀다. 여느 학교에서나 들을 수 있다는 고리타분한 교장 선생님의 연설을 비롯해 뻔하디뻔한 평범 그 자체인 입학식이었다. 다행히 민아를 괴롭혔던 아이들과는 같은 반이 아니었다. 달리 말해 반에는 ‘아는 사이’가 하나도 없었고, 민아와 세은이 사이에 벌어졌던 일은 대략적이면서도 과장된 소문으로만 아는 급우가 절반 정도였다. 어떤 의미로는 운이 좋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풍문이라는 게 자극적이면 자극적일수록 널리 퍼지는 법이다 보니, 소문을 퍼뜨리기 좋아하는 발 넓은 녀석 하나라도 있다간 세은이에게 좋을 것이 없었다. 즉, 소문을 들은 급우가 절반이라는 뜻은 그 소문의 진위와는 전혀 상관없이 반 전체가 곧 알게 될 거란 얘기다. 게다가 같은 반에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야기가 아무리 왜곡되고 진실로부터 멀어져도 바로잡아 줄 사람도 없었다. 세은이가 사실이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다 해도 하루 이틀 본 사람보다는 아무래도 더 오래 본 사이의 말을 들을 테지.

그래서 예전부터 소극적이었던 세은이는 이번에도 나서지 못했다. 이 일이 있기 전이라면 그래도 한두 명 정도는 친구로 두기 위해서 말도 걸어보고 외향적인 친구와 친해지기 위해서 노력하기라도 했을 터인데, 아무래도 겁이 나서 좀처럼 할 수 없었다.

이 와중에도 세은이에게 말을 거는 급우가 몇 있었으나, 들리지 않았다. 마치 저주하는 말처럼 들려서, 몇 번 다그침을 당하고 나서야 누가 말을 했냐는 듯 겨우 갸우뚱하는 것이 전부였다.

당연히 이런 정신 상태로는 학교 수업도 제대로 들을 수 없어서, 선생님께서 무언가 세은이에게 질문해도 5번 중 3번은 못 알아듣고 초점을 흐린 눈으로 칠판을 바라만 보고 있곤 했다. 그렇다고 수업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어서, 수업이 끝난 후 그의 교과서에는 수업받은 내용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처음에는 친구들이나 선생님의 도움으로 어떻게든 학교생활을 이어갔지만, 이는 별로 오래가지 못했다. 어디가 아픈 것도, 특수 학급에 소속되어야 하는 상황도 아닌데 자꾸만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게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오히려 선생님의 질문을 피하고자 일부러 그렇게 넋을 놓는 게 아니냐는 의심마저 나올 정도였다.

“야, 강세은. 넌 양심도 없냐?”

이번에도 세은이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잠을 청하고 있었으니 들리지 않는 게 정상이기는 했다. 세은이가 점심시간에 잠을 잔다는 것 자체가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기는 했으나, 이제 한 달도 안 본 사람의 습성을 그가 알 턱이 없었다.

“일어나서 대답해봐. 너 때문에 반 분위기가 개차반이잖아.”

세은이는 지긋지긋한 악몽을 꾸고 있었다. 넋을 잃은 채 흘려보낸 3년이라는 시간 끝에 이름도 모르는 시골 대학교에 진학했는데, 같은 학과의 바로 옆자리에 민아와 세은이를 집요하게 괴롭혀왔던 그 녀석이 앉아 있었다. 제 딴에는 상큼한 미소를 보내온다고 웃는 표정에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헛된 시간을 보낸 것만으로도 후회가 막심한데, 끔찍한 녀석의 얼굴을 보고 있어야 한다니 울화가 치밀었다.

입학하자마자 전과, 편입, 반수 그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와중에 그 녀석은 태연하게 말을 꺼냈다.

“민아는 요즘 잘 지내냐?”

예상보다 한계는 빨리 찾아왔다. 그 녀석의 얼굴에는 이미 손바닥 자국이 남아있었고, 생글생글하던 표정은 순식간에 차갑게 굳었다.

“네가 살갑게 굴어주니 눈에 뵈는 게 없지?”

그 순간 시야가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잠에서 깬 영향도 있었고, 세은이를 다그치던 그가 의자를 빼버렸기 때문이다. 순간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해 발버둥을 치는 바람에, 그는 갑자기 다리를 걷어차였고 주변 아이들은 은근히 바라보며 키득거렸다.

“야, 씨! 지금 뭐하는 거야!”

드디어 상황을 파악한 세은이는 다급한 마음에 연신 사과했다.

“아, 미안해. 그치만 네가 한 일이 있잖아. 아니, 지금은, 아. 미안해. 그냥 내가 잘못했어. 뭔가 착각이 있었던 것 같아. 다시는 안 그럴게. 그, 얼굴은 괜찮아? 얼굴……. 아니, 내가 다리를 걷어찼구나. 미안해.”

보다시피 조금 전까지 악몽을 꾸고도 완전히 잠에서 깨지 못해 사과 내용은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나 어떤 트라우마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해서 넋을 잃고 학창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 정도는 그가 유추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었기에 뭐라고 화를 내거나 웃을 순 없었다.

“아냐. 내가 미안했어. 그렇게 막 사과하지 않아도 돼.”

하얗게 질린 채로 연신 꾸벅거리는 세은이의 모습은 사실 누가 봐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주변에서 은근히 엿보고 있었던 급우들도 키득거리기를 멈췄다.

“아, 그, 그래도. 아니야. 아무것도 모르는 너한테 무턱대고 발차기를 한 내 잘못이야. 미안해.”

겨우 의자에 앉아 식은땀을 흘리며 마지막 사과를 하고,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축구 시합을 위해 밖으로 뛰쳐나간 학생들 덕분에 세은이 앞의 의자는 대부분 비어있었으나 남아있는 급우들의 시선은 모두 세은이를 향했다. 아니, 정확히는 세은이를 향하고 싶어하나 눈치를 보는 모양이었다. 실제로도 아직 악몽의 기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상황이어서 차라리 그게 나았다. 수업 시간까지 20분이나 남은 게 이럴 때는 도움이 되었다.

“그, 내가 자면서 잠꼬대같은 걸 하지는 않았어?”

“아니, 전혀. 머리칼에 가려져서 식은 땀을 흘리면서 자고 있는지도 몰랐어.”

아직 바로 옆을 떠나지 않은 그가 미안한 기색을 보이며 답했다. 한결 안심한 표정을 보이는 세은이의 모습을 본 급우들도 덩달아 불안한 마음이 다소 가라앉았다.

“무슨 일이 있었어?”

“아냐. 아무것도. 예전 일이야.”

굳이 밝힐 일도 아니지만, 밝혀져도 반의 분위기에 영향을 끼칠 만큼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세은이를 본다면 설사 소문을 알고 있다고 한들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는 다른 학교 출신인 데다 학기 초라 몰랐지만 세은이를 바라보는 급우의 3분의 2는 이미 소문을 알고 있었다. 아까의 키득거림은 그의 무모한 행동을 비웃는 웃음이 아니라, 세은이의 과거와 현재를 빗대어 힐난하는 목적의 웃음이었던 거다. 이미 세은이는 짐작하고 있었고 그래서 굳이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이날 5교시는 처음 보는 선생님의 수업이었다. 이제 3주 차에 들어섰으니 진작에 뵈었어야 했으나, 지난주에 선생님 사정으로 학교에 나오시지 않았기에 이번 주에나 뵐 수 있게 되었다.

“사회를 맡게 된 서재현이다. 반갑다.”

다른 선생님과 비교했을 때 압도적으로 딱딱한 말투를 쓰시는 사회 선생님의 수업은 의외로 인기가 있었다. 유머도 기발한 아이디어도 없었는데 그랬다. 사회 선생님의 수업을 먼저 들은 반으로부터 들리는 풍문은 선생님의 외모가 출중하여 몇몇 학생들이 열심히 들었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그리 출중한 외모도 아니었다. 다소 말끔한 차림이기는 했으나 지난주 사정으로 못 나온 것에서 볼 수 있든 어느 쪽이든 아주 건강한 혈색을 보이지는 못했다.

그러니 굳이 이유를 찾자면 한없이 관대한 선생님이라는 것이 컸다.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려도 듣지 못해 늦게 들어오는 학생에게 벌점이든 출석부상의 불이익이든 부과하는 법이 없었고, 심지어는 수업이 끝날 무렵 학교 밖에서 사 온 음료수를 들고 나타난 학생에게 앉으라는 눈빛 이외에 그 어떤 말도 꺼내지 않으셨다.

게다가 졸리거나 듣기 거슬리는 목소리도 아니어서 듣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논란이 될만한 발언도 하시지 않았고, 수업 내용도 그렇게 지나치게 잠이 올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그래도 간간히 조는 아이들이 있었으나 그렇다고 깨우지는 않으셨다.

“세은이는 학교가 끝나면 교무실로 찾아와라.”

그런 선생님께서 유일하게 학생을 교무실로 부르신 것은 4월 첫째 주 어느 날이었다.
다소 늦게 업로드해서 죄송합니다.
잦은 휴재 및 연재 지연은 대다수 건강 문제이나, 비축분을 만들어두지 않은 저의 탓도 있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1권 연재가 마무리되면 비축분이 완성되었을 때 2권 연재를 시작하는 방식으로 최대한 분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댓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