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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의 자유, 생명의 자유.


젊음의 자유, 생명의 자유. (1)


제 15척탄병사단, 3대대, 2중대, 1소대, 24601, 잭 발렌타인. 나는 패닉에 빠지지 않게 노력하며 입에 고인 피를 무시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입에서 부글거리며 피거품이 일어났다. 의무병이 내 가슴 밑을 보더니 창백해진 얼굴로 압박지혈을 실시한다. 어째 창백한 게 어제 점심으로 나온 삶은 흰색 무 쪼가리랑 비슷한 색깔이다. 제 15척탄병사단, 3대대, 2중대, 1소대, 24601, 잭 발렌타인. 나는 희미해져가는 의식을 붙잡으려 최소한 이상의 노력을 들이지 않는다. 의식을 잃어도 의무병의 솜씨가 뛰어나다면야 살아날 수 있으니까. 눈앞에서 포탄이 터졌으니 이제 집에 갈 수 있을 거다. 릴리는, 릴리 마를렌은, 잘 지내고 있을까? 크리스마스에서 이틀 정도 지났지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 부를 수 있겠지?

나 잭 발렌타인이 전선에서 24601이란 번호를 부여받기 전에는 작은 마을에서, 부모님 농사나 도우면서 점심으로 감자 한 다발과 커피 한 주전자를 먹는 삶을 살았다. 일은 힘들고, 보상이라고는 맛대가리 없는 감자 한 자루였다. 이런 눈에 미래가 훤히 보이는 일 따위는 딱히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나중에 역병으로 감자가 떼죽음 당할 텐데 말이다. 가능하다면, 만약에 가능하다면 다른 직업을 갖고 싶었다. 적당히 눈치를 보며 캐낸 감자를 자루에 부은 후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뒷문으로 나갔다. 꼴이 이렇지만 그녀는 언제나 이해해줬다. 왜냐하면 그녀 자신도 감자랑 순무를 캐다 왔으니까.

나는 릴리랑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밭 주변을 걸어다녔다. 하지만 곧 릴리가 약속이 있다면서 먼저 가겠다고 했다. 나는 점점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릴리가 뒤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저녁상에 여덟 명이나 앉으니 언제나 그렇듯이 비좁았다. 식탁 가운데에는 삶은 감자 한 광주리와 커피가 넘치듯 들어있는 커피 주전자가 있었다. 각자 접시에 감자를 두어개씩 올리는데,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거다. "

잠시 이어진 침묵 후에 아버지는 "일이 있긴 한데 여기는 시골이니 안전할거다. "라고 하셨다. 사실 무슨 일이 있는지도 알고, 무슨 말을 하려고 하시는 지도 알고 있다. 독일 놈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도처에서 들려왔다. 나는 소문이, 아버지의 나쁜 예상이 틀리길 바랐다. 하지만 '나쁜'이라는 단어 말고도 '끔찍한'이라는 단어가 있던 걸 까먹은 건 내 실수였다.

전쟁이 시작됐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지나가는 말로는 '누가 누구를 쐈네, 죽였네. ', '뭐가 뭐를 쐈네, 파괴했네. ', '어디가 어디를 침공했네, 점령했네. '라고 한다. 프……뭐시기 황태자? 그런 사람이 죽었다는 얘기도 있다. 뭐, 무슨 이유로 시작했든 길어야 3달이면 끝장을 볼거다. 고전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방패와 창을 든 보병이 적의 진격을 가로막고 기병대로 옆구리를 치는 거다. 아니면 신대륙에서 한 것처럼 기관총 몇 개 끌고 가서 설치하기만 하면 더 이상 볼 필요도 없을 거다. 다행인 점은 굳이 시골 촌놈까지 끌어들이진 않을 거란 얘기다. 소위 '문명화'된 도시 놈들이 서로를 죽이려고 안달이 났을테니 말이다. 난 감자만 캐면 된다. 참, 순무도,

최근 신문이 빠른 속도로 팔려서 아예 가판대 앞에서 신문이 채워지길 기다리고 있다. 신문에는 무슨 부대가 어느 지역을 돌파했네, 하는 얘기가 잔뜩 실려 있었다. 신문을 서너 장 넘겼을 때 나는 몸이 굳어졌다. 신문의 한 면을 모병포스터가 전부 차지하고 있었다. 군인들이 열을 맞춰 도열해 있는 가운데, 잘 차려입은 신사가 나를 향해 대뜸 삿대질을 하며 "누가 빠졌습니까? 바로 당신? "이라고 말하는 포스터였다. 가슴 깊이 어딘가에 뜨끔한 느낌을 받고, 애써 무시한 채 떨리는 손으로 신문을 넘겨 십자말풀이를 찾았다.

전쟁, 전쟁에 참여하면 어떻게 될까? 어떤 사람은 완벽한 장군의 지휘 아래 닦여지고 조여지고 기름칠 된 기계처럼, 시계와도 같이 철저하게 움직인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만의 지휘 철학을 펼치며 미지근한 맥주를 들이켰다. 기껏해야 감자캐는 촌놈이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모습이 가관이다. 하지만, 모두가 결론으로 말한 건 단 한가지, 우리 '대영제국'이 승리한다는 것이다. 물론 아일랜드의 감자 캐는 촌놈이 피로연에 낄 자리 정도는 있을 거다. 만약 내가 전쟁영웅이 된다면.

사람이 두 명만 모여도 전쟁에 관한 얘기가 오고 갔다. 아마 조금 더 열정적인 사람은 거울만 봐도 "내가 봤을 때 이번 전쟁은 말이야…."라먀, 열심히 전쟁얘기를 하겠지. 지금 내 앞의 감자부대를 지휘하는 아저씨는, 아들이 있고 그 아들이 연인에게 청혼할 생각이라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영웅'으로서 말이다. 동원령은 아직 내려지지도 않았는데 마치 자기 아들이 벌써 영웅이라도 됐다는 듯이, 자랑스럽고 또 자랑스러운 표정을 내오비고 있다. 들어보니 괜찮은 생각인 것 같다. 대로를 걸으며 하늘에서 휘날리는 흰 종이 쪼가리와 꽃잎을 당당하게 헤치고, 릴리 마를렌에게 전쟁 영웅으로서 청혼하면, 아마 기뻐서 눈물을 흘리며 받아줄 것이다. 그러면 나와 릴리는 고향이나 다른 적당한 곳에서 그간 모은 돈으로 작은 목장을 운영하며 여유롭게 살 수 있을 거다. 그러면 나와 릴리는 같은 시간을 보내고, 같이 늙어가고, 같이 죽어가겠지. 이렇게 보니 영웅이 돼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입대할 거요?"라고 물어본다면 "예, 물론입니다."같은 소리는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은 이상 말하지 않을 것 같다. 문득 그 아저씨가 말했다.

"자네, 입대할 건가? "

나는 말했다.

"예, 물론입니다. "

아이고…….

물론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갑자기 모병관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모병소로 끌고 들어가지는 않았다. 다만 뒷맛이 조금 찝찝할 뿐이었다. 어쨌든 나는 이따가 입대하는 친구들을 배웅하기 위해 한 잔 하러 가야한다. 이 찝찝한 뒷맛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존이 입대한다고 했을 때, 나는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크고 근육질인 녀석이 입대 안하면 누가 하겠는가? 그리고 그 옆에 윈스턴이 동반 입대한다고 했을 때도, 나는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다. 사지 멀쩡한 사람이 가지 않으면 누가 가겠는가? 그리고 그 다음으로 천식환자에 습관성 탈골을 앓고 있는 케니가 자신도 입대한다는 말을 하자, 난 어이가 없었다.

습관성 탈골을 앓고 있는 천식환자마저 입대해버리자, 안그래도 작았던 마을에는 나를 제외하곤 젊은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전쟁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린치당하는 젊은 남자를 보자 나는 모병소로 향했다. 모병소에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았다. 저 중에 진정으로 자원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래도 수상님은 기쁘겠군. 자기를 위해 죽어줄 '애국자'가 이렇게나 많으니 말이다. 여왕폐하와 대영제국에 영광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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