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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핀 꽃은 일곱 빛깔로 시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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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트는 인연 2화 히에다 가 방문(1)


오래간만의 인간 마을이다. 물건을 사고, 팔고. 인사를 주고, 받고. 모르는 사람들의 생생한 활기가 피부를 아플 정도로 찔러오는 듯한 착각에, 눈가를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정말, 변함없이 시끄럽네"

"활기차니 좋지 않나?"

"..어떻게 보면 그럴지도"

마을에서 유일하게 아는 사람인 케이네 씨는 알 듯 말 듯한 웃음과 함께 찻잔을 내려놓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이라기 보다는 사람(?) 이지만 그다지 상관없겠지. 우연히도 만나 붙들려 버렸지만 차 한잔 정도로 크게 불편할 건 없다. 다시금 차를 한 모금 넘기자, 그녀가 몸을 살짝 기울이며 은근히 물어왔다.

"흠흠, 저번에 말했던 일 말이네.. 의향이 궁금하네만"

"모르는 애들에겐 익숙하지 않아서. 미안해"

"음.. 그건 쉽게 익숙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케이네 씨는 저번에 제안해 왔던, 서당에서 아이들에게 공예를 가르쳐 달라는 이야기를 다시금 꺼내왔다. 찻잔에서 시선을 들어올리자 기대에 찬 시선과 마주쳤다. 이 사람은 정말로 내가 모르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데 흥미가 있을거라고 생각한 걸까. 좀 더 확실하게 거절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처지가 곤궁해진다면 그리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일단 유보했다.

"생각해 볼게"

예의상 웃으면서 대답하자, 그녀는 못내 아쉬운 눈치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사람. 그녀와 아는 사이긴 하지만 서로 신경써줄 만큼 친밀한 사이는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생판 남인데, 왜 이렇게 신경쓰는 걸까.

자세를 바로잡은 그녀는 뭔가 말하려다 말고 얕은 한숨을 내쉬더니, 평범하게 물어왔다.

"그래, 오늘은 마을에 무슨 일인가?"

마을에 오고 안 오는 건 지극히 내 개인적인 사정이지만, 마을의 수호자인 케이네 씨로서는 드나드는 외부인들의 목적을 알아둘 책임이 있겠지. 어차피 나도 히에다가의 길을 물어야 하니 공평한 셈이다.

"히에다가의 당주에게 주문을 받았어"

"히에다가..? 아큐가 말인가?"

"아큐?"

"히에다노 아큐. 현 당주라네. 저번 축제에서 만나보지 않았나?"

"아. 이름은 잊고 있었어"

기억을 되짚자, 아까 본 서신 말미의 서명이 떠올랐다. 숙련된 달필이었지만 묘하게 무게감이 없었던 건 그런 까닭이었나. 그런 나이에 이런 주문이라니 어쩐 일일까- 하고 약간 궁금해졌지만, 접어 두고 고개를 끄덕이며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말인데...길 좀 알려주겠어?"

"가깝네. 저기 보이는 푸른 기와집이거든"

"그래? 고마워"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자 남색 기와를 얹은 몇 채의 집이 나란히 우아하게 처마를 들어올린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상해에게 가방을 들려 일어나려는 차에, 케이네 씨가 머뭇거리며 팔을 붙잡았다. 눈을 깜박여 연유를 묻자, 어딘지 가라앉은 표정으로 답해온 말은 상당히 의외였다.

"앨리스.. 부탁이네만, 그 아이에겐 부디 잘 해 주게"

"걱정 마. 고객에 대한 서비스 정신 정도는 있어"

케이네 씨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건넸다.

히에다가의 문을 두드리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보기에는 지척인 것 같았는데, 과연 천년을 이어온 명가답게 생각보다 집이 많이 크다. 홍마관의 걸쇠보다도 육중한 문고리를 들어 부딪자 텅- 하는 무거운 소리가 울린다. 이 정도 되는 가문이라면 미령 씨 같은 문지기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다. 하긴 그녀처럼 하루 종일 문을 지킬 수 있는 인간은 없겠지.

끼익-

잠시 후 문이 열렸다. 꽤 열기 힘들어 보이는 두 문 사이로 나타난 사람은 검소한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청년. 인간 명가의 안내 방식은 어떤 것일까... 설마 저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멍하니 쳐다보는 것은 아닐 텐데. 잠시 기다리고 있자, 허둥지둥 허리를 숙여 인사하기에 손을 흔들어 간단히 맞인사를 건넸더니 더욱 허둥거렸다. 이상한 사람이다.

"어, 어떤 용무로 오셨... 방문하셨습니까"

"히에다노 아큐를 만나러 왔어. 이미 얘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

"예. 잠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는 말을 더듬으며 허겁지겁 어디론가 달려갔다. 찻잔을 반쯤 비울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청년은 간 데 없고 잿빛으로 바랜 머리칼을 품위있게 정리한 풍채 당당한 노인이 휘적휘적 걸어왔다. 여유 있는 걸음걸이로 보나, 번잡하지 않으면서도 고급스러운 옷차림으로 보나 제법 지위가 있는 사람인 듯하다.

"본가의 가신인 미즈로 유베이입니다. 죄송합니다. 손님을 바깥에서 기다리게 했군요. 다 제 불찰입니다"

"앨리스 마가트로이드. 익숙한 손님은 아닐테니까"

"익숙해져야 하는 것이 이곳의 업이지요. 충분히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런​데​.​.​.​당​주​님​께​는​ 어떤 일이온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

"서신을 받고 왔어. 얘기가 없었나?"

"...아닙니다. 당주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사과부터 하는 노인의 태도는 정중하면서도 기품있어 모자란 데가 없었다. 유베이의 뒤를 따라가며, 정원을 눈에 담는다. 마을 안이라서일까, 큰 나무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신 키 작은 잡목과 매끄러운 바위들이 안정감있게 늘어서 정적인 광경을 그려낸다. 때문인지 차분하고 무거운 공기가 감도는 가내를 지나, 도착한 곳은 약간 떨어져 있는 별채였다. 독특한 필체로 '柳花館' 이라 멋들어지게 적힌 현판이 걸린 별채는 깔끔하고 정갈하지만, 이런 명가의 당주에게는 좀 모자라지 않나 하는 의문을 품게 하는 규모였다.

"이게 당주관이야?"

"아닙니다. 현 당주님께선 건강상의 문제로 대개 여기서 집필하고 계십니다"

대수롭잖다는 듯 답하는 유베이의 태도는 지극히 평범했지만, 그 평이함 속에 뭔지 모를 이질감이 섞여들어 마치 모래를 씹은 듯 막연한 불쾌감을 일으킨다. 하지만 남의 가문사에 외부인이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을 터. 아무 말 없이 유베이가 별채에 고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당주님, 유베이옵니다. 서신을 받고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

드르륵-

잠시간의 침묵 후, 유화관의 미닫이문이 열리며 이곳의 당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정한 단발머리와 운치있는 꽃 모양의 머리장식, 큰 키는 아니지만 균형 잡힌 몸, 온유한 표정과 고운 얼굴. 모두 명가의 당주에 걸맞는 재색이었지만, 급히 대충 걸친 듯한 겉옷 사이로 드러난 팔꿈치까지 소매를 걷어붙인 윗옷과 맨 다리가 드러나는 치마는 꽤 당황스러웠다. 유베이를 돌아보자, 고개를 숙이고 있음에도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이 선명히 보인다.

​"​당​주​님​.​.​.​.​크​흠​,​ 소신 한 말씀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충언은 즐거운 일이지만, 나중의 즐거움으로 미뤄 두기로 하지요. 들어오세요 앨리스 씨"

당주, 히에다노 아큐는 미지근하게 웃으며 휘적휘적 몸을 돌렸다. 그리해서, 나 역시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노인을 뒤로 하고 다소 떨떠름한 기분으로 유화관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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