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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핀 꽃은 일곱 빛깔로 시든다


Original |

여무는 인연 4화 귀가(1)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

카미시라사와 댁을 나서 집에 도착하자, 벌써 태양이 울창한 숲 너머로 산산이 타오르다 아스러진다. 불씨가 옮겨붙기라도 한 듯 집이 홍색과 자색, 적색 그리고 어두운 명암으로 얼룩져 있어 오늘따라 낯설었다. 석양과 그림자로 타들어가는 집 앞에 내려서서 보는 사람은 없지만 날아오는 동안 헝클어진 머릿결과 옷가지를 간단히 정돈했다. 케이네 씨의 탄막에 당해서인지 군데군데 헤진 걸 보니 제법 수선해야 할 모양이다. 마리사의 수프도 처리하지 못했는데 옷 수선까지 할 생각에 절로 어깨가 처진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아직 저릿한 왼팔을 주무르며 문을 열다가- 등골이 오싹해와 그 자리에 멈춰섰다.

..이게 왜 열리지?

"...상해?"

조심스레 상해를 부르며 실을 감아들여 보지만, 돌아오는 건 가볍디 가벼운 메아리뿐. 또 민폐덩어리 흑백이라도 들렀나 싶지만, 그녀라면 이렇게 얌전히 들어올 리가 없는데-

"...희귀한 불청객이네"

"불청객이라.. 초대같은 건 의미없지만서도"

신경을 곤두세우며 거실에 들어서자, 그야말로 뜬금없는 불청객이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있을 곳에 있다는 듯 태연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안락의자에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서는, 흥미로운 장난감을 바라보는 듯 웃음기를 띄면서도 묘하게 꺼림칙히 몸을 훑어오는 자색 눈동자. 모르는 이가 없을 대요괴-야쿠모 유카리. 그녀가 앉아있는 것만으로 집안의 공기가 달라져 간다... 자색이랄까? 흰 천을 자색으로 물들여가는 듯한 이질감에 미미하지만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어지럽다.

"당신이 내겐 무슨 일아지?"

"수수하게 친목 도모 정도로 어떨까나?"

"소스라칠 농담이네"

깔보는 것만 같은 미소에 굉장히 불쾌해져 인사는 생략해버린 채 소파의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친목 도모라니 농담도 정도가 있지, 내가 그렇게 한가하고 무료해 보이나? 적색과 자색을 섞어 걸친 그녀가 허공에 가만히 손을 긋자, 끝이 보이지 않는 허공의 틈새가 입을 벌려 커다란 종이다발들을 토해낸다. 적색 비단 소매에 흐드러지는 그것들은 마치 허공이 피를 토하는 것만 같아 오싹하다.

"바빠 보이네"

유카리는 커다란 종이 묶음을 느긋하게 집어들더니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무성의하게 훑어내린다. 어쩐지 눈에 익은 크기와 재질에 물끄러미 바라보자, 유카리도 알아챘는지 피식 웃기에 시선을 애매하게 내리깔며 힐끔힐끔 살핀다... 마침 넘어가는 한 장에 정밀하고 복잡하게 그려진 낯익은 구조도와 단면도. 그제서야 종이들이 내 설계도라는 걸 알아챘다. 분노인지 부끄러움인지는 모르겠지만 열기가 느껴질 만큼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그녀가 설계도를 알고 보는지 모르고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훑어보는 모양새는 잘 아는 사람의 태도다.

"익숙한걸.."

한동안 설계도를 뒤적거리던 그녀가 뭔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더니 힐긋 쳐다보며 살벌한 웃음을 던져왔다. 그 눈초리가 마치 맹금처럼 날카로워 딱히 잘못한 게 없는데도 팔이 움찔 떨린다.

"제법 복잡한 구조네.. 특출나게 정교해. 실물처럼 말이지"

"주문 내역에 따른 사양일 뿐이야"

"단지 그 뿐?"

"뭘 추가하든 그건 나랑 주문자 사이의 문제야"

"흐응, 그래..."

그녀는 한참이나 설계도를 뒤적이며 무얼 생각하는지 말이 없었다. 홍색과 자색의 석양빛을 둘러서인지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듯한 분위기가 짓눌러와 바라보는 것조차 부담스럽다. 어제와 오늘치 공정이 밀려 있어 당장이라도 뺏어들고 작업을 시작해야 하지만, 눈을 때로는 치켜뜨고 때로는 가늘게 내리깔며 설계도를 읽어내려가는 그녀의 진지함에 압도당했는지 그래선 안될 것만 같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은 일.

"말했듯이 바쁘니까 별 일 없으면 돌아가주겠어?"

어렵사리 꺼낸 불만은 깨끗이 무시당했다. 말없이 대놓고 훑어오는 시선에 마치 뱀이 몸 위를 기어다니는 듯 소름끼치게 걸척지근해 온다. 대체 상해는 뭘 했길래-

"아,상해. 상해는 어떻게 했지?"

"그 아이는.. 그래, 독사탕을 삼켰지. 영면과 수면의 경계라도 보고 있을까나?"

"무슨 짓을 한 거야!"

"별로, 아무 것도"

"느닷없이 찾아와서는 하는 짓거리라곤..."

"그건 그렇네. 그래서 말인데, 네게도 독이 좀 필요하겠어"

미지근하게 웃으며 고개를 애매하게 갸웃거린 그녀가 일어나 천천히 걸어오기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서 뒷걸음쳤다. 다리가 풀려오는 것 같아 멈추려는데 벽이 등에 부딪히며 숨이 턱 막혀 온다.

"뭘 두려워하니?"

"무슨 상관이야"

그녀는 이미 기분나쁠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콧등을 간지럽히는 숨결이 마치 뱀이 쉭쉭대는 것 같아 목덜미는 식은땀으로 젖어들고 턱을 스치는 가느다란 손가락은 뼈만 남은 해골의 그것 같아 심장이 고동친다. 숨소리가 어지럽다.

핥짝-

살며시 내민 그녀의 혀 끝이 눈 밑을 훔치자 정말로 불쾌한 기분이 들어 밀쳐내려 했지만, 두 팔은 어느새 붙들려 벽에 밀어붙여져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들숨과 날숨이 불규칙하게 흐트러져와 혼탁한 머리로 고개를 숙이자 가늘고 섬세한 손가락이 칼날처럼 턱을 밀어올린다.

"어여쁜 인형 아가씨네. 가지고 놀기 좋겠어"

기가 차서 말도 꺼내지 못하고 비웃는 듯한 눈꼬리만 쏘아보자 자색 눈동자가 섬뜩하게 웃으며 말을 잇는다.

"그래, 친구라도 하지 않을래? 원하는 만큼 괴롭혀서 길들여 줄게"

점점 하는 말이 가관이다. 아무리 요괴의 현자, 대요괴 야쿠모 유카리라도 더 이상은 참기 힘들어 느슨히 눌린 왼팔을 거칠게 뿌리쳤다.

"웃기지 마! 이거 놔-!!"

"내가 왜?"

간신히 뿌리친 왼손으로 있는 힘껏 뺨을 후려쳤지만, 허공만 스치는 느낌에 돌아보니 다시금 유카리의 손에 붙들려 있을 뿐. 그녀가 마치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또 해보라는 듯 장난기 어린 눈길로 혀를 내밀어 입술을 훔친다. 대체 뭔데? 뜬금없이 나한테 왜 이래! 이게 돌았나!

"기분이 어때?"

"더러우니 그만둬주겠어?"

"어머, 그거 기쁘네"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그늘 한 점 없는 웃음이 무서워 소름이 쫙 돋는다.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져 쇳소리만 같고, 요동치는 심장의 맥박소리는 터져버릴 것만 같다. 고작해야 두 팔이 잡힌것 뿐인데 거미줄에 옭죄인 나비마냥 앞이 캄캄하다. 어금니가 꽉 맞물리는 소리를 타고 퍼져오는 어지러움. 다시금 뺨을 따라 얼굴선을 더듬어 오는 손 끝이 이제는 살의마저 일으키지만, 기이하게도 그에 앞서 독이 퍼지는 것만 같은 두려움이 살갗 위로 흘러내린다. 흘러내리는 독액에 뻣뻣이 굳어가는 뺨과 혀, 목울대를 타고 스며드는 독기에 잦아드는 숨결. 자색의 뱀은 움츠러드는 먹잇감에 만족스럽게 웃으며 얼굴을 훑어내린 검지와 중지를 핥는다. 두 손가락의 틈새를 드나드는 혀와 그 사이로 늘어지는 타액이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음란하면서도 공포스러워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린다.

"겁에 질린 맛..  독이 잘 듣는 몸이구나"

"누, 누가 겁낸다는 거야!"

"두려움에 질린 눈은 언제 봐도 예쁘단다?"

이제는 거의 발작에 가까운 새된 외침을 내뱉자 그녀가 웃으며 손을 들어올린다. 반사적으로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어 가만히 눈을 뜨자, 마치 인형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레 얼굴을 감싸쥐며 눈을 들여다보는 자색 눈동자에 마음마저 얼어붙는다. 싫다. 마음에 안 들어. 도망칠래. 무서워.

"상해! 화란!"

몸부림치며 발작하듯 상해에, 화란에, 집에 가득한 인형들의 실에 마력을 불어넣자 실이 감겨드는 게 아니라 마력이 헛되이 날뛰며 산산이 흩어진다. 마력의 현을 감아올리고 풀어내야 할 손에는 시체에서 빠져나가는 혼마냥 꺼져드는 푸른 불길 뿐. 식어버린 마력의 잔재에 손 끝만 파르라니 떨려온다. 이해가 안 되어 멍청히 고개를 돌리자 눈 앞을 가득히 채워오는 보랏빛 광기.

"안됐네"

동정하는 듯한 한마디에 유리공이라도 만지는 듯 조심스레 얼굴을 감싸오는 차디찬 손가락도, 묘한 광기가 끓어올라 섬뜩한 자안도, 거기에 아픈 병아리마냥 얼어붙은 나도, 전부 짜증나 화가 ​치​민​다​. ​

빡-

"큭?.. 조금은 의외네. 하긴, 언젠가는 뭐든 질리기 마련이지"

"사람을 물건 취급하지 마, 벌레조차 밟으면 꿈틀거린다고!"

"부질없는 발버둥일 뿐이야. 그저- 좀더 독한 독이 기다릴 뿐이지"

그녀는 내가 들이받아 버린 이마를 소매로 슬쩍 훔치며 요염하게 웃었다. 과연 그 말처럼 인형들은 여전히 다소곳이 앉아 고개 한번 까딱이질 않는다. 단 하나도. 내 몸보다도 익숙히 울리던 현은 물이라도 잔뜩 머금은 듯 늘어져 축축히 그 자리를 메꿔오는 좌절감에 몸서리쳤다. 몇 번이고 필사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려 현을 감아들이지만 감겨오는 실은 겨우 하나 뿐, 결국엔 유카리가 안쓰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왔을 뿐이다. 그와 함께 마음의 틈을 좀먹던 무력감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굴욕감에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들어 들어올릴 수가 없다. 싫어. 도와줘. 누군가 꺼내줘-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마치 마음이라도 읽어낸 듯 짓밟아오는 유카리의 말에 사려문 입술이 바르르 떨려왔다. 마주앉아 시선을 맞춰오더니 이어 옷깃 사이를 비집어 오는 손의 불쾌감에 어깨가 떨려오지만 팔이 움직이질 않는다. 아니, 팔을 움직이려는 마음이 꺾여 무너져내린다. 귓가에 불어넣는 축축한 숨결과 허리를 감싸오는 가느다란 팔, 목덜미를 훑어내리는 입술에 줄이 풀려버린 태엽인형처럼 바들바들 떠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 것도.

목덜미를 간질이던 이질감이 미끄러지며 쇄골을 훑는다. 달달 떨리는 허리를 꽉 끌어안고는, 부드러운 입술이 쇄골에서 가슴으로 흘러내리자 약이라도 마신 것처럼 힘이 죽 빠져나간다. 힘없이 벽에 기댄 채 희롱해 오는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흘리지도 못하는 눈물이 고여갈 때마다 커져가는 이 부딪는 소리가 어지럽다. 이제는 가슴골에서 명치로, 명치에서 배꼽으로 배를 가르듯 미끄러지는 감촉에 허리가 저려온다. 옷 위로도 느껴질 만큼 부드러우면서도 칼날처럼 섬짓해 몸을 잘라내는 듯한 공포. 어딘가 기대 펑펑 울고 싶지만 너무 무서워 목소리도 죽어버리고 나오는 것이라곤 아릿한 신음뿐.

"흐윽..."

"마음껏 울어. 더 독해지면 울지도 못할거야"

"하..하읏.."

등골을 타고 쓸어내리는 불쾌한 손길이 무너져내린 몸을 알쌀하니 얼어붙인다. 그러나 그도 잠깐, 허리 부근을 돌아다니며 나긋나긋히 쓰다듬는 손길에 이번에는 몸이 뜨거워진다. 흐트러지는 숨이 달다. 머리가 뜨겁다. 미쳐 버릴 것 같아-

"이만큼 마시고서도 달아오르는 걸까? 나쁜 아이네. 벌을 줘야겠는걸"

"..아냐! ​흐​.​.​흑​.​.​.​캬​.​.​캭​!​"​

다른 손이 부드럽게 목을 감싸쥐더니, 그야말로 뱀처럼 목을 죄어왔다. 점점 더 세게 죄어오자 어디에 그런 힘이 남아있었는지 몸을 튕기듯 버둥거리며 손을 뜯어내려 했지만, 너무도 무력했다. 언젠가부터 손이 다시금 흘러내린다. 몸이 망가진 것처럼 부들부들 떨리면서도 또한 뱀이 지나가듯 상반신을 쓰다듬고 할퀴어 오는 손길에 달아오른다.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는 게 이런 걸까? 살려달라는 외침과 헐떡이는 숨결이 막힌 목구멍 안에서 부딪혀 소용돌이친다. 점점 커져오는 것만 같은 보랏빛 눈. 마치 자색에 사로잡힌 듯 눈 앞 가득히 보라색이 차오른다-

"쿨럭! 컥! ​학​!​.​.​.​흑​.​.​.​흐​윽​.​.​"​

"저 세상의 향기는 어땠어?"

자색에 완전히 잠겨버리기 직전, 숨통이 트인 목을 감싸쥐자 새된 기침이 터져나온다. 풀려버린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과 굳어버린 혀에서 새어내리는 타액에 목덜미가 축축히 젖어오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런 건 상관 없다는 듯, 유카리는 마치 수식의 답이라도 묻는 여상한 눈으로 기분을 물어온다.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싶지만 눈동자에서 보석처럼 반짝이며 끓어오르는 광기에 사로잡혀 혀가 떨어지질 않는다. 염라의 처분만 기다리는 혼처럼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자, 정말 매력적인 웃음과 함께 얼굴을 두 손이 감싸오더니- 파르르 떨리는 입술에 부드러운 게 겹쳐왔다. 입 속에서 뭔가 말캉한 것끼리 엉키고, 휘젓고, 간지럽힌다. 그 취기에 그대로 녹아내릴 것 같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독한 술처럼 뇌리를 가득 유린하는 황홀함. 얼마나 유린당했을까, 아쉬운 것이 떠나가는 느낌에 눈을 뜨자 혀 사이로 길게 늘어지는 타액에 바싹 얼어붙는다. 내, 내가 뭘 느낀 거지? 아직도 더 겁날 게 있었는지 더럭 겁이 나며 사시나무 떨듯 몸이 떨려온다. 몸이 차갑다. 춥다.

"그럼.. 이 세상의 향기에 취해보련?"

그녀가 품에 얼굴을 묻는다. 토할 것 같다. 바들거리는 몸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용히 숨을 죽이고 감상하더니, 피라도 묻어나올 잔혹한 웃음과 함께 입으로 목덜미의 단추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의 수치심에 입을 열지만, 이어질 두려움을 상상하니 질려버려 소리 없는 비명만 울린다. 생각하는 것조차도 지쳐 이제는 정말 포기하고 짖밟는 대로 짖밟히자고, 풀어헤쳐지는 앞섶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자욱한 보랏빛 뒤로 익숙한 색채가 겹치운다. 너무나도 익숙해서 지겹기 짝이 없는 그 채색을 보자마자 두려움도, 무력감도, 자색도, 굴욕도 다 잊어버리고 뭉클한 반가움이 샘솟듯 차오른다.

와장창-

"..어머?"

"아닌 밤중에 왠 호라인가 했더니.. 어어, 넌 유카리? 뭐야 이건. 아 모르겠다- 움직이면 쏜다? 아, 쏘면 움직이려나? 어쨌든 내가 먼저 움직일 거지만!"

​"​마​리​.​.​.​.​사​?​"​

산산조각나 쏟아져 내리는 유리창과 함께 감아올릴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실- 봉래와 아까부터 자색을 물들여 오던 흑백- 마리사가 뛰어들어왔다. 민폐덩어리에 제멋대로에다가 봉래의 목에 걸린 줄을 잡아끌고 와서는 삐걱거리게 만들고, 하필 유리창을 깨고 들어오고, 지금도 쏟아내고 싶은 말은 한가득이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것에 앞서 반갑워서 울고 싶다. 창을 꼬나쥐며 마광을 안고 번득이는 봉래와 나란히, 마리사가 팔괘로를 들어 똬리 튼 자색의 뱀을 겨눠왔다.

"흥이 깨져버렸네. 겁에 질린 인형 아가씨는 귀여웠는데 아쉽게 됐어"

"움직이면 쏜다고 했다?"

유카리는 흥미가 식었다는 듯 무관심한 눈으로 손가락을 튕기며 일어섰다. 목전에는 창이, 등 뒤에는 팔괘로가 들이밀어졌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심지어 이 흉흉한 와중에서도 여상히 눈을 감고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하는 무신경함에 마리사가 혀를 차는 소리가 지독한 정적 사이로 울려온다...

잠시 후 그녀가 눈을 뜨자,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분위기가 일변했다. 방금 전 까지는 요사하기 그지없는 뱀이었다면 지금은 서릿발이 감도는 소나무. 표정이 바뀐 것 뿐인데 요염하기 짝이 없던 눈가에 이제는 정기가 충만해 엄격한 절도마저 흐른다.

"다소 실례했네. 이쯤 세월을 훔치면 재미있는 일엔 자제하기가 쉽지 않아"

"...약이라도 처먹었냐?"

고고한 자색의 눈동자는 신랄하게 쏘아붙이는 마리사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멍하니 올려다보는 나만을 내려다보며, 두 손을 모아 어딘지 상상하기 싫은 곳을 부러트리는 시늉을 한다. 마리사는 팔괘로를 던질 기세로 휘두르며 삿대질을 해댔지만 깔끔하게 무시당했다.

"오늘 들이마신 독을 잊지 마. 잊는 순간 이렇게- 망가트려 버릴 테니까"

"야 임마! 어이! 거기 서!"

그녀는 무시당한 것에 분기탱천한 마리사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듯 섬짓한 경고를 남기고 여유롭게 웃으며 등을 돌렸다. 그 손이 목을 휘어쥐는 듯한 착각에 아직도 간헐적으로 움찔움찔 떨려오던 몸이 경련한다. 휘적휘적 사라지는 자색 옷자락 뒤로 팔괘로가 공명하며 공기를 울려오지만,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등을 보인 채 멀어져 간다. 마리사는 그 태평한 태도에 질렸는지 입술을 꾹 깨물며 팔괘로를 집어넣었다.

끼익-

기괴한 모양으로 허공을 잡아 찢은 틈새 사이로 유카리의 모습이 사라지자, 마치 향이 바람에 휘말려 날아가듯 답답한 공기와 묘한 광기가 서서히 빠져나간다. 이윽고 시간이 자색의 흔적을 씻어내리자 십 년쯤 주저앉아 있었던 것처럼 힘이 빠져 그대로 자리에 무너져 버렸다. 마리사가 내준 손을 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키자, 다리에 힘이 없어 비틀거릴 뿐 제대로 설 수가 없었다. 부축을 받아 소파에 쓰러지듯 몸을 눕히자 민폐덩어리가 소란스레 눈 앞에 손가락을 흔들어대며 숫자를 묻고 난리법석을 피운다.

"대체 뭐야, 저 자식? 어이, 괜찮냐 앨리스?"

​"​.​.​흑​.​.​.​흐​윽​.​.​"​

"야, 좀 봐봐. 이거 몇 갠지 알겠어?"

손가락을 눈 앞에 디밀어대는 마리사가 금방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아 흔들어대는 손을 양손으로 끌어안았다. 당황스러운지 시끄럽게 왱알거리는 그녀를 보자 이제서야 움츠러든 몸이 좀 풀리며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온다. 안도감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어떻게든 닦아내려고 하지만 도저히 멈추질 ​않​았​다​. ​

​"​마​리​사​.​.​.​흑​.​.​흑​!​"​

"야, 야..! 끙...뭐어- 그래도 괜찮은 모양이구만. 다행이다"

애써 괜찮은 척 하던 것도 잠시, 결국 마리사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트렸다. 마리사는 난감한 듯 멈칫거리지만 앞에 따듯한 온기가 있다는 게 너무나도 고마워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직도 몸이 움찔움찔 떨려 오지만 다독여오는 손길에 두려움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숨을 돌리며 고개를 들어올리자 그제서야 내가 무슨 꼴을 하고 있는지 감이 잡힌다. 부끄러워 얼굴을 바닥으로 떨구며 어색한 목소리로 고마움을 전했다.

"...고마워"

"에이,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런데 너, 단추는 잠궈라. 다 보여"

"어, 어딜 보는 거야!"

"안 볼 테니 빨리 잠그기나 하라구"

짖궃게 능글맞은 얼굴을 들이미는 마리사를 밀쳐내며, 황급히 유카리가 풀어내린 앞섶을 끌어안아 가렸다. 그녀가 낄낄거리며 고개를 돌리자, 머쓱하게 돌아앉아 옷자락을 수습했다. 단추를 잠그고 있자니 아까 전의 두려움이 떠올라 손가락이 머뭇거리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유카리의 의도에 대한 의문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기도 한다. 마지막 단추를 채우다 말고 그녀가 대체 왜 방문한 것일까 생각하고 있으니 뒤에서 마리사가 같은 것을 물어온다.

"그런데 말이야, 걘 대체 왜 와서 저런대?"

"...글쎄. 모르겠어"

반쯤만 솔직한 심정으로 대답했다. 유카리가 온 이유가 인형과 어떻게든 관계되어 있을 거라는 건 짐작이 간다. 하지만 대체 왜 끼어들어 어중간하게 훼방을 놓는 건지는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애초에 남이 뭐라고 하건간에 그만둘 생각은 없으니 상관없지만... 하지만, 또 이렇게 당해버린다면 그때는- 내가 과연 제정신일까.

"설마... 아니다 관두자. 네가 모르는 걸 낸들 알겠나. 후아- 다 귀찮고 난 이만 올라가서 잠이나 자고 갈란다. 침대 비좁진 않지?"

마리사는 뭔가 영감이 떠올랐는지 손가락을 튕기더니, 아무래도 내가 지쳐 보였는지 말하다 말고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끊었다. 평소 같으면 내 기분 같은 건 신경쓰지 않고 주절거렸을 터인데 이건 또 의외라, 별다른 토를 달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게다가- 이래서야 혼자서는 잠이나 잘 수 있을지 걱정되기에 솔직히 말하면 고맙다. 그녀는 기지개를 펴며 2층으로 올라가다 말고 돌아보며 어깨를 툭툭 쳤다. 무슨 말인지 몰라 눈만 깜박이다가 비로소 이해하고는 머뭇머뭇거리다 결국 어깨를 빌려 층계를 올랐다. ...얘는 오늘따라 눈썰미가 왜이리 빠르담.

몇 번 주저앉을 뻔하며 침대에 몸을 눕히자, 마리사는 옆에 벌렁 드러누워서는 모자를 아무렇게나 휙 던졌다.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눈을 감고 가만히 숨을 죽이자 또다시 뇌리에 자색이 가득히 떠올라 와 한 차례 몸이 멋대로 경련한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며 팔을 허우적대는데, 어둠 속에서 따듯한 손이 어깨를 감싸왔다. 그녀는 떨림이 가라앉을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더니 슥 돌아누으며 잠꼬대처럼 웅얼거렸다.

"오늘은 특별 무료 서비스라구. 다시 없는 기회니까 마음껏 쓰라고..."

"..그럼 잠시만 빌릴게"

얼굴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질 정도로 확 달아올라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지만, 차별없이 가려 줄 어둠을 핑계삼아 사양하지 않고 마리사의 등을 껴안고 얼굴을 묻었다. 규칙적으로 콩닥거리는 소리에 몸을 기대고 있자니 긴장이 풀려와 쏟아지는 잠을 견딜 수가 없다.

...그래, 이대로 있자. 오늘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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