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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핀 꽃은 일곱 빛깔로 시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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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르익는 인연 1화 사소한 비밀들(1)


텅- 텅-

히에다가의 대문 앞에 서서 홍마관의 걸쇠보다도 육중한 문고리를 두드리자, 오늘은 문이 금새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처음 방문할 때 만났던 어벙한 청년이 허리를 숙여 맞이하기에 이번에도 간단히 손인사를 건넨다. 그는 한두 번 마주친 걸로 벌써 익숙해졌는지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며 쾌활하게 물어온다.

"오늘도 당주님을 방문하시나요?"

"응, 왜? 혹시 바쁘다거나..."

"아뇨! 오시면 즉시 모시고 오라고 특별히 명하셨거든요"

활기차게 웃으며 안내하는 청년을 따라서 아직은 낯선 가내를 지나 유화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청년이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다른 사용인들과는 달리 소소한 이야기를 걸어오기에 적당히 응해 주었다.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걸 즐기지는 않지만 과한 예의보다는 그래도 이 쪽이 낫다. 정원은 어떠냐고 묻기에 관목이 많은 게 아늑해 보인다고 답해주었더니 자신이 관목을 관리한다며 시원하게 웃는다. 정중하지는 않지만 이상하리만치 생기에 넘치는 게 인상적이라 생긋 마주 웃어주었다... 좀 시끄럽긴 하지만.

"당주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잠,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하세요!"

언제 도착했는지, 청년이 길게 읍하며 손님이 도착했음을 별채에 고한다. 어쩐지 다급해 보이는 아큐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유화관 안쪽에서 우당탕탕 하고 뭔가 뒤집어엎는 듯한 소음이 들려온다. 착각이겠지? 뭔가 뒤집어엎다가 조용해지고, 또 이것저것 뒤적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다시금 조용해진다. 기다리다 지루해 가방을 인형에게 맡기고 마루에 앉아 책을 읽고 있을 즈음, 미닫이문이 조심스레 열리며 아큐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가지런히 정리된 보랏빛 엷은 단발이 다소 상기된 얼굴과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같은 보랏빛인데도 진하게 묻어나는 듯한 누구의 보랏빛과는 느낌이 정말 다르다.

"들어오세요 앨리스 씨"

"응, 부츠만 벗고"

나무구멍에 들어가는 다람쥐처럼 쏙 들어가버리는 아큐를 보고 피식 웃으며 부츠의 끈을 풀었다. 아직까지도 읍하고 있던 청년이 이제서야 몸을 곧게 피며 허리를 두드린다. 아무래도 허리가 꽤나 아플 것 같다. 사용인이란 일도 꽤나 고생이구나... 목례하는 돌아서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아주니 뭐가 그리도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성큼성큼 걸어간다. 역시 이상한 사람이야.

"오늘은 예쁘게 차려입었네?"

"네. 이거요- 케이네 씨가 선물해 주셨거든요. 예쁘죠?"

"응, 정말 잘 어울리네. 뺏어입고 싶을 정도인걸?"

별채 안에 들어서자, 거울 앞에서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옷을 살피던 아큐가 두 손을 꼭 모아쥐며 기대감 어린 눈망울로 물어왔다. 옷 자랑 하려고 오래 걸렸던 건가? 어쨌든 활기찬 그녀의 모습이 보기 좋아 빙긋 웃으며 칭찬했다. 뭐, 꼭 그 때문만은 아니고 재봉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는 내가 보기에도 옷은 훌륭했다. 저런 화복을 후리소데라고 하던가? 언뜻 보기에도 화사한 자주빛 바탕에 수수하면서도 섬세한 진달래빛 자수, 거기에 보면 볼수록 이목을 잡아끄는 눈처럼 흰 오비는 정말 기가 막힌 배색이다. 수수한 줄만 알았던 그녀에게 이런 안목이 있다니... 케이네 씨, 다시 봐야겠어요. 혼자 입어서인지 이곳 저곳 옷맵시가 흐트러진 부분을 바로잡아주자 아큐는 부끄러운 듯 소매로 뺨을 가렸다. 그 행복해 보이는 미소에 아침까지의 침울하던 기분이 좀 씻겨 내려가는 듯 하여 상쾌하다. 그런데 엄격하고 검소한 케이네 씨가 어쩐 일로 이런 훌륭한 옷을 선물한 걸까? 화복엔 해박하진 않지만 한 눈에 무척 고급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케이네 씨는 제자들에게 부탁하면 꽤 저렴하게 만들 수 있겠지만...

"그런데 케이네 씨가 왠일로..?"

"얼마 후면 제 열 일곱 번째 생일이거든요. 깜짝 놀랄 거라더니... 아, 차 달여 올게요!"

아- 생일이었구나. 열 일곱 번째 생일이라면 아마 마을에선 성년이 되는 나이였던가? 전혀 모르고 지나갈 뻔 했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인 후, 인형에게 가방을 내려놓게 하고는 아큐의 팔을 붙들었다.

"선물받은 옷을 더럽히면 안 되겠지? 오늘은 내가 할게"

"괜찮아요! 문제 없어요"

"아냐, 한 번쯤은 내가 타주고 싶었어"

그녀의 다도 솜씨라면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었다고 소매를 적시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괜히 걱정되기에 가만히 자리에 앉혔다. 한 번쯤은 내가 타주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고. 응, 그녀에겐 어쩐지 뭔가 해주고 싶다. 찬장에서 우아한 다기를 꺼내 물을 덥히고 있으니 아큐가 샐쭉하니 불평해 온다.

"그치만.. 주인은 저고 앨리스 씨는 손님인걸요"

"주객전도의 훌륭한 예라고 해 둘게"

소매로 입을 가리고 쿡쿡 웃는 모습에 마음이 평안히 가라앉는다... 조심스레 다관을 기울여 우려낸 차를 단아한 찻잔에 따르고 있자니 놀랄 만큼 차분해진다. 어느새 이곳이 꽤나 마음 편한 곳이 되었다는 게 좀 의외라는 생각을 하다 찻잔이 넘칠 뻔 했지만 어떻게든 무마했다. 아큐의 솜씨를 생각하니 비교되는 것 같아 좀 부끄럽다.

"다식은 제가 준비할게요"

"아, 그래줄래?"

조심조심 찻잔을 올린 접시를 소반 위에 내려놓는다. 아까 너무 많이 채웠던 찻잔이 넘칠락 말락 찰랑대기에 진땀이 빠진다. 생각해 보니 내 손으로 직접 차를 달여본 지도 꽤 오래된 것 같아 나도 차 정도는 상해에게 맡기지 말고 직접 준비할까 싶은 생각이 든다. 넘칠 뻔한 찻잔이 내 앞에 오도록 은근슬쩍 돌려놓고 있으니 아큐가 모모야마와 센베이를 소반에 차려놓으며 다소곳이 앉는다.

"다리 아프겠다. 편히 앉자"

"웅, 이런 옷을 입어본 건 오래간만이라 잠깐쯤은 이렇게 앉을래요"

배시시 웃으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그녀는 샘이 날 만큼 화사했다. 괜시리 센베만 오독거리다 차를 한 모금 들어 목을 축이자 아무래도 좀 떨떠름하고 진해 그녀가 끓인 것만 못한 것 같다. 스스로 알면서도 쓸데없이 평을 물어 확인하는 마법사의 습관이 이럴 땐 참 마음에 안 든다.

"차는 어때? 괜찮아?"

"신선해요. 뜨겁게 우려내서 향이 더 깊이 퍼지면서도 입에 남진 않네요. 저도 다음엔 이렇게 ​달​여​봐​야​겠​는​데​요​?​"​

"그래? 그럼 다음엔 기대할게"

"얼마든지요"

같은 말도 다르게 말하면 이렇게 느낌이 다른가? 생긋 웃으며 후한 평을 해주는 아큐의 미소에 쪼잔한 시샘도 눈 녹듯 녹아버린다. 한동안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작업에 대한 이런저런 의논을 나누며 찻잔을 다섯 번쯤 비우자 방이 말간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창호지 너머로 쏟아지는 석양이 드리운 아큐의 곱디 고운 자태에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깨끗이 씻기는 것 같다.

"어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그렇네.. 너무 빨리 지나가서 아쉬운걸"

"아, 앨리스 씨. 잠깐만요! 드릴 게 있어요"

슬슬 일어날 채비를 하려 하자, 아큐가 손을 잡으며 말리더니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두루마리와 서적 무더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무얼 준다는 걸지 궁금해 기대하고 있으니 그녀가 품에 책 두세권을 안고 걸어왔다. 받아드니 표지에 제목을 쓰지 않은 책들이다. 죽 넘기며 훑어보니 시와 그림, 글귀들로 가득했다.

"..이게 뭐야?"

"구문사기를 집필하면서 틈틈이 쓴 걸 모아서 제 문집을 만들었어요. 한 권은 앨리스 씨, 한 권은 케이네 씨 드릴 거에요"

"어머..?"

예상하지도 못했기에 놀라움과 기쁨을 감추지 않고 두껍고 질긴 풀빛 표지의 책을 품에 안았다. 나도 일단 마법사이기에 인형만큼은 아니지만 책은 무척 좋아한다. 하물며 그녀가 직접 쓴 몇 권 없는 책이라면야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잠깐, 다른 한 권은 케이네 씨 몫이라고 했었나?

"마음에 드세요?"

"정말 고마워! 아 그래, 돌아가는 길에 케이네 씨 것도 전해 줄까?"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문제없어. 돌아가는 길에서 가까우니까"

"저, 그렇다면 이것도 좀 같이 부탁드릴게요"

아큐는 다른 상 에 차곡차곡 눌린 서찰 사이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 두루마리에 곱게 말았다. 케이네 씨에게 답례 편지를 쓴 모양이다. 두루마리와 책을 가방에 넣고 섬돌에서 부츠 끈을 묶다가 문득 묻고 싶은 게 생겨 아큐를 돌아보았다.

"저기... 앞으로도 자주 들러도 될까?"

"언제든지요. 앨리스씨가 오는 건 즐겁거든요"

"그래? 그럼 사양하지 않고 종종 놀러올게"

"기대하고 있을게요"

혹시나 그건 싫다고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약간이나마 안고 있었지만 기우였던 듯하다. 가슴 한켠에 똘똘 뭉쳐 있던 긴장이 거짓말처럼 풀어져 시원한 웃음이 나온다. 밝게 웃으며 배웅하는 그녀에게 마주 웃어주며 작별인사를 나누고, 다음 번에 대한 기대로 설레임에 부푼 마음을 안고 울긋불긋한 노을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글에서 지금의 상해인형의 자율도는, ​말​하​자​면​.​.​.​고​성​능​ 시뮬레이터 정도의 수준입니다. 앨리스가 입력해준 명령 범위 내에서 쌓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약간의 변동성을 가진다고 할까요. 일본어가 부족해서 확실히 확인하진 못했지만, ZUN씨의 설정에서는 상해가 반자율인형이라는것 같아 그 정도를 가정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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