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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핀 꽃은 일곱 빛깔로 시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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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르익는 인연 3화 사소한 비밀들(3)


짹짹-

삐- 삐-

꼭꼬덕! 꼭꼬꼬꼬...

낯선 새들의 지저귐이 귓가를 간질인다. 아직 무거운 잠기운에 취해 나도 모를 말을 웅얼거리며 손을 휘저었지만 지저귐은 계속해서 끊임없이 귀로 모여든다. 중얼거리며 몸을 뒤척이다 홱 돌리자 이불 속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와 얼결에 눈이 확 뜨인다.

"우웅...여긴 어디?"

눈을 뜨자 낯선 벽지와 열린 미닫이문 너머로 그리 크지 않은 마당이 보인다. 마루 앞엔 닭과 병아리들이 뛰어다니며 땅을 쪼아대고 있고, 그 틈틈이 참새들도 폴짝거라며 한입 보태고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엔 모자는 벗어 두었는지 맨 머리로 다소 추워 보이는 흰 옷만 걸친 케이네 씨가 마루에 걸터앉아 모이를 뿌리고 있었다. 그 차분한 모습은 마치 속세의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말문이 막히게 한다.

"일어났나.. 다친 곳은 좀 어떤가?"

케이네 씨는 내 웅얼거림을 들었는지 고개를 돌려 몸 상태를 물어왔다. 누운 채 뺨을 더듬어 보니 약효가 좋은 덕인지 아니면 처치가 빨랐던 덕인지 아직 붓기가 덜 빠지긴 했지만 감각은 돌아와 있었다. 뭐, 어느 쪽이든 케이네 씨에겐 빚을 진 셈이지만.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부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훨씬 나아졌어. 고마워"

"당연한 걸 했을 뿐이네. 아, 아직 일어나진 말..."

"..."

이불이 맨살 위를 흘러내리는 감촉에 몸을 일으키다 말고 눈만 깜박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내려다보자 흘러내리다 만 이불에 반쯤 가려진 속옷이 보인다.

"뭐, 뭘 한 거얏!!"

빽 소리를 지르고는 이불을 끌어올려 몸을 가리며 등을 벽에 붙였다. 그런 날 보고 케이네 씨가 가만히 웃는데...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면서 소름이 돋는 건 또 희안한 경험이었다.

"별 일 아니네. 간밤에 땀을 많이 흘려서 겉옷을 벗겼을 뿐이네만"

케이네 씨는 차분히 답하며 손을 들어 방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다다미 한켠에 곱게 개인 채 가지런히 놓여있는 옷가지가 보였다. 너무 차분하게 반응하니 민망해서 얼굴이 더욱 더 달아오른다. 뜨거운 얼굴을 도톰한 이불 안에 묻고 있으니, 케이네 씨가 미닫이문을 닫는지 드르륵 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침상이라도 차려오겠네"

그녀가 마루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응, 그렇지. 별 일 있었겠어 설마. 속 검은 케이네 씨라는 건 생각도 못 하겠고... 아무도 없는 건 알고 있지만 한동안 이불 안에서 꼼짝 않고 있다가,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슬그머니 빠져나와 옷을 입었다. 잽싸게 단추를 채우고 있자니 방 한구석에 거울이 달린 화장대가 보여 관심이 쏠린다.

"역시 케이네 씨도 화장은 하는 걸까?"

묘한 호기심에 화장대 앞에 앉았다. 그러나 화장대 위에는 손때가 잔뜩 묻은 참빗 하나만 놓여있을 뿐 흔한 분첩조차도 없었다. 하긴, 얼굴에 분을 두드리는 케이네 씨는 좀 상상하기 힘들다.... 아니, 생각해보면 그녀는 마을 행사라던지 참석할 일이 많지 않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하는 사이에 손은 이미 경첩을 열고 있었다. 경첩을 열자 보이는 것은, 주머니칼과 낡디 낡은 두루마리 하나 뿐이었다.

"왠 두루마리..?"

두루마리를 슬며시 꺼내들다 마음 속에서 고개를 드는 죄의식에 괜시리 움찔하며 문을 돌아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걸로 보아 케이네 씨는 아직 아침을 준비중인 것 같다. 낡아서 부스러지지 않을까 걱정되는 두루마리를 살그머니 펼치자, [언제나 반갑잖은 악우에게, 마지막으로 붓을 드네...] 로 시작하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개인적인 편지인 모양이다.

주체할 길 없는 호기심에 죄책감도 잊어버리고 새가 빵을 쪼아먹듯 야금야금 두루마리를 펼쳐 읽어내려갔다. 친우에게 보내는 편지인지 원수에게 보내는 편지인지 분간하기 힘든 익살스러운 필체에 푹 빠져 정신없이 읽어내려가던 도중, 입을 틀어막으며 두루마리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하마터면 두루마리를 부스러트릴 뻔한 상황에 더 놀라 가슴이 콩닥거린다. 조심스레 두루마리를 들어 올려 한 문장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시 읽었다. 떨리는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짚으면서 확인해 보지만 잘못 읽은 게 아니었다.

더 읽기 꺼려지는데도 지옥의 문조차도 일단 열고 보는 마법사의 습관은 본능적으로 뒷 내용을 펼치고 있었다. 막 다음 문장을 읽으려는 참에, 부엌에서 덜컹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와 황급히 두루마리를 말아넣고 경첩을 닫았다. 상을 들고 오는 듯 마루에서 자박거리는 소리와 수저 부딪는 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소리를 내면 무얼 했는지 전부 들키기라도 할 것 같은 기분에 살그머니 화장대에서 멀어져 이부자리에 등을 대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진정하자 진정.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릴 즈음에서야 간신히 두방망이질치던 심장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소반을 들고 들어오는 케이네 씨를 보고 어색한 웃음을 짓자, 그녀는 여상하게 소반을 내려놓으며 나무라왔다.

"이부자리는 좀 정돈해놓지 그랬나"

"아, 그렇네.. 미안해"

정리한 요를 건네주자 그녀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농에 이불과 요를 정리했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복잡한 심경으로 입술을 꼭 깨물었다. 농을 닫고 돌아서는 그녀의 모습에 아까 마지막으로 읽었던 구절이 겹쳐 맴돈다.

[유카리는 모든 것이 완벽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그녀를 잘 아는 만큼 걱정될 수밖에 없네. 성품에 안 맞는 줄 알면서도 자네도 짐을 들어달라고 요구할 수밖에...]

"차린 건 별로 없지만, 일단 들게나"

소반 한쪽에 앉는 그녀의 반대편에 앉아 떨떠름하게 국을 한 술 떴다.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다. 갖은 생각을 떠올리며 인형마냥 딱딱하게 수저를 입으로 가져가고 있자, 케이네 씨가 걱정스러운 듯 물어왔다.

"입에 안 맞나? 아.. 혹시 볼이 아파서 들기 힘든겐가"

"아...아냐. 잠시 뭘 좀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가... 약은 식사 후에 한번 더 바르게"

"신경써줘서 고마워"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그녀에게 실례다 싶어 고개를 흔들어 두루마리 생각을 치워두었다. 오랫동안 살아온 만큼 그녀에게도 숨기고 싶은 일 같은 건 얼마든지 있겠지. 응, 호의를 받는 입장에서 캐물으면 안되겠지. 그렇긴 하지만...

"유카리와는 언제부터 알게 됐어?"

"...무슨 의도로 묻는겐가"

그런 걸 신경쓰지 않고 궁금한 건 캐고 보는 게 마법사란 족속들의 습성이다. 결국 치워두지 못하고 던진 직설적인 질문에, 케이네 씨는 침착하게 흘러내린 머리칼을 어깨 뒤로 넘기며 되물었지만 손가락이 움찔 떨리는 것만은 숨기지 못했다. 나도 참 주책맞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안 물어보곤 못 배기겠으니 별다른 수가 없다.

"별 뜻은 없어. 그냥 유카리가 신경쓰여서"

"음..하긴 그럴 만도 하네만"

그녀는 천천히 수저를 놀리며 말을 끌었다. 뭐, 나도 거짓말은 아니다.. 유카리가 뜬금없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데 신경쓰이지 않을 리가 없다. 반갑잖게 트인 물꼬에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케이네 씨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충고했다.

"하지만, 그녀와는 되도록 얽히지 않는 편이 좋네. 근래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 같으니 더욱더 그렇겠지"

"그건 동감이야"

직감적으로 그 잘 풀리지 않는 일이 아큐의 제작 의뢰와 밀접한 연관이 있을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얽히고 싶어서 얽히는 게 아니라는 말이 혀 위에서 맴돌았지만 케이네 씨도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고, 나도 더 말하기는 계면쩍어 목구멍 너머로 삼키고는 가만히 저분만 놀렸다. 그저 더 묻기엔 실례겠고, 사정을 밝히자니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놀리는 저분을 따라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엉켜서 떠돈다... 생각에 잠겨있다 보니 어느새 빈 그릇에 저분이 부딪는 소리만 요란하다.

"잘 먹었어"

"변변찮았네.. 차라도 한잔 어떤가?"

"어머, 고마워"

간단히 인사치레를 하고 수저를 놓았다. 신세를 지고서 가만히 앉아있기가 꺼림칙해 상을 물리는 케이네 씨를 도우려 하자 그녀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몇 개 안 되니 괜찮네. 성한 몸도 아닌데 쉬게나"

"그래도 그러기는 너무 미안한데..."

"정 그러면 밤껍질 까는 거나 좀 도와주게"

"응, 그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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