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및 문화 콘텐츠 사이트 삼천세계

못다 핀 꽃은 일곱 빛깔로 시든다


Original |

무르익는 인연 5화 사소한 비밀들(5-1)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의 성채로부터 쏟아지는 햇살을 헤치고 집 앞에 내려섰다. 창문에 부딪어 튕겨나오는 천공의 화살들에 눈이 부신다. 손을 들어 그늘을 만들자, 익숙하게 닫히다 만 채 덩그러니 방치된 문이 바람에 달칵거리며 외박한 주인을 맞아준다.

"...마리사 왔구나"

익숙한 광경에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문을 열었다. 현관에 들어서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까만 단화 한 쌍이 널브러져 굴러다닌다. 주인 잘못 만난 불쌍한 단화들을 한 켠에 정리해 두고 현관에 앉아 부츠의 끈을 풀었다. 이번엔 또 얼마나 엉망진창을 만들어 두었으려나. 부디 공방에는 손을 안 댔으면 좋으련만.

머플러를 끄르며 거실을 둘러보자 그저께 마리사가 깨트렸던 커다란 유리창이 일그러진 채 붙어 있었다. 금이 간 채로 뭉그러진 것처럼 억지로 끼워넣은 창문은 영 어색하고 위태위태해 척 봐도 누구 솜씨인지 알만했다. 뭐... 어쨌든 바람만은 막아내는 것 같으니 임시방편으로는 적당하려나. 풀어낸 머플러를 팔에 두르고 계단을 오르자, 윗층으로부터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울려퍼진다. 경박한 듯 하면서도 어딘지 시원시원하고 꾸밈없어 보이는 목소리를 따라 2층의 응접실에 이르자 탁상과 쇼파를 넘어다니며 웃어젖히는 마리사와 필사적으로 마리사를 쫓아 날아다니는 상해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대체 무슨 난리람.

"당장 그만두지 못해!?"

"상-하이-!"

"여기 있지롱~ 쫓아와...어? 앨리스? 으악!"

버럭 화를 내자 잠깐이나마 멈추는가 싶던 것도 잠시, 곧바로 소파를 넘다 바닥에 뒹굴거리는 마리사와 그녀에게 달려들어 투닥거리는 상해를 보며 이마를 짚었다. 일단은 이 소동부터 멈추고 봐야겠기에 마력의 실을 감아들여 상해를 끌어당겼다.

​"​상​-​하​이​상​하​이​상​하​이​!​"​

"헹, 어림없다제"

"어림없이 구는 건 너야... 상해?"

실을 감아들이자 상해가 실이 요동칠 정도로 마구 바둥거리며 마리사에게 달려들었다. 이상하다...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당황스러워 상해와 마리사를 번갈아 바라보자, 마리사는 바닥에 주저앉아서는 혀를 내밀고 상해를 놀려대기 바빠 눈치도 못 챈 것 같다.

"베에~"

"상~하이~"

"마리사, 너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얘가 이러는 거야?"

"아, 별거 아니야. 그냥 요거"

마리사는 모자 안을 뒤적거리더니 낯익은 빨간색 리본을 꺼냈다. 상해에게 달아줬던 리본이다. 그녀가 고양이라도 놀리듯 리본을 팔랑거리자 마력의 실이 팽팽히 당겨오며 상해가 달려들려 안간힘을 쓰기에 진정시키느냐 굉장히 애를 먹었다.

"요란떨지 말고 어서 돌려줘"

"싫어. 도둑의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훔친 걸 내 손으로 돌려주냐?"

"그래? 그럼 어쩔 수 없네"

마리사의 한심한 투정에 은근히 약이 올라 그냥 상해를 붙들고 있던 실을 풀어버렸다. 풀어내자마자 상해는 기다렸다는 듯 당장에 전력으로 마리사에게 날아가 들이박았다. 방심한 채 상해를 놀리고 있던 그녀는 어찌 해볼 새도 없이 정통으로 들이받혔는지 이마를 감싸고 바닥을 뒹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고소해서 얹혀있던 게 내려가는 것 같다.

"우악! 우아아..."

"상-하-이-!"

리본을 안아들고 마리사를 짓밟는 상해를 손짓으로 불러 머리에 다시 리본을 달아주었다. 가지런히 묶인 리본을 매만지며 빤히 바라봐오는 상해를 소파에 앉혀 두고 그제서야 마리사의 상태를 살폈다.

"자, 이 정도면 도둑의 명예를 존중한 처사지?"

​"​으​으​.​.​너​무​하​잖​아​"​

"네가 할 말이 아니라는 생각은 안 들어?"

이마를 감싼 마리사의 손을 걷어내자, 상해에게 얻어맞아 빨갛게 부어오른 자국이 보인다. 주변인으로 인식시킨 사람에게는 일정 수준 이상의 공격은 하지 않도록 설정해 두었는데... 정화 도중에 리셋이라도 된 걸까? 아무래도 나중에 재조정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일어섰다.

"기다려, 약 발라 줄 테니까"

"됐어. 이 정도는 냅두면 나아"

"그러다 흉지면 고운 얼굴을 망칠 텐데?"

"엑! 무,무슨 소리야!!"

"뻔히 만지작거리다 덧낼 거잖아. 안 그래?"

"그 얘기 아니야!"

댓자나 튀어나와서는 살짝 붉어진 얼굴을 절레절레 흔드는 마리사를 뒤로 하고 방문을 열었다. 하루 비웠을 뿐인데 방이 온기가 식어버려 썰렁하다. 처음으로 내 방이 살풍경해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자 고개가 절로 갸웃거린다. 영원정의 토끼가 놓고 간 약함을 열어 소염제 병을 꺼내 열자 퐁 하는 소리와 함께 약냄새가 풍긴다. 이거 한 번도 안 썼던가? 생각해 보니 그랬던 것도 같다... 다시금 응접실을 바라보자 아니나 다를까 마리사는 부어오른 곳을 어루만지느냐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거 봐, 벌써부터 만져대고 있잖아"

"...그 얘기 아니래두"

"손이나 치워줄래?"

손가락 끝에 소염제를 떠 이마에 얇게 펴서 발라주자, 마리사는 입술을 꾹 물더니 고개를 홱 뒤로 젖혔다.

"애처럼 굴지좀 마. 조금 따끔할 뿐이잖아"

"그, 그냥 내가 바를게"

"씻지도 않은 손으로 뭘 바르겠다는 거야?"

"우..."

불만이 잔뜩 들어찬 마리사에게 핀잔을 주고는 부은 곳에 고루 약을 발라주었다. 약을 충분히 발랐다 싶자, 왜인지 꽤나 얌전해진 그녀의 이마에서 손을 떼고 꼭지가 꺾인 모자를 휙 벗겨냈다.

"우앗! 뭐야!"

"이번엔 뭘 슬쩍했어? 성실하게 털어놓으라고"

"우...웃기지 마! 내놔!"

자리에서 메뚜기처럼 튀어오르며 내뻗는 마리사의 손을 피해 등을 휙 돌리고는, 탁상 위에 모자 안에 든 것들을 쏟아냈다. 봉지에 든 별사탕, 기이한 액체가 든 유리병, 조잡한 부싯돌 등 온갖 잡동사니가 굴러떨어진다. 어디보자-

"...마리사?"

"으..으읏.."

"너 대체 무슨 생각이야?"

모자 안에서 굴러나온 아끼는 붉은 머플러를 집어들며 그녀를 한심하게 바라보자, 시선을 내려깔며 맨 머리를 침울하게 매만진다. 마법의 재료를 훔쳐가는 건 괘씸해도 동기는 이해할 수 있지만, 내 생필품을 훔쳐가는 건 용납할 수 없는 건 당연하고 이해도 안 된다. 머플러 하나 살 돈이 없을 만큼 궁색한 것도 아니고. 머플러를 집어들고 마리사를 쏘아보자 한동안 손가락을 비비며 딴청을 피우더니 결국에는 머리를 긁적이며 뻔뻔하게 대꾸해 왔다.

"으...아하하, 저기 슬슬 추우니까 머플러 하나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거 하나 못 살 만큼 빈곤한 건 아니잖아"

"에, 하지만 코우린도 너보다는 못 만든다구..."

"하나 짜 달라고 부탁하는 게 옳다는 생각은 안 들고?"

"부탁하면 분명히 또 뭔가 귀찮은 걸 시킬 거 아냐"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레이무도 그렇고 마리사도 그렇고 왜들 이리 경제관념이란 게 없담? ...물론 레이무는 마리사처럼 민폐를 끼치지는 않지만. 진심으로 한번 걷어차주고 싶은 마음을 애써 꾹꾹 눌러담으며 소파에 앉았다. 한동안 팔짱을 낀 채 가만히 탁상만 노려보고 있자 마리사가 눈치라도 살피는지 슬그머니 옆에 쪼그려앉아 올려다본다.

"..화났어?"

"..."

조용히나 있으면 덜 밉상이지. 얄미워서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마리사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지 쭈삣거릴 뿐 별다른 투정이 없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라도 들릴 법한 침묵이 얼마나 계속되었을까, 뜬금없기 그지없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려퍼졌다.

꼬르륵-

"...."

"...."

댓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