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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핀 꽃은 일곱 빛깔로 시든다


원작 |

여무는 인연 1화 외출(1)


"샹~하이?"

눈부시게 쬐어 내리는 투명한 햇살의 유혹을 견디지 못 하고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귓가에 들려온 건 상해의 목소리였다. 아픈 사람를 차마 깨우지 못하고 일어날 때까지 기다린 모양이다.

"으..응. 지금 몇 시야?"

온몸이 결리듯이 찌뿌둥하고, 자면서 식은땀을 흘렸는지 몸은 축축해 전혀 개운한 기분은 아니지만 머리가 아프지는 않은 걸 보니 몸은 좀 나아진 것 같다. 우드득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자, 누가 꽂아 두었는진 몰라도 체온계가 스르륵 이불 위로 흘러내린다. 들어 보자 수은계는 정상 체온을 가리킨다.

체온계를 치워 두고 조심스레 뭉친 곳을 풀어주자, 상해가 걱정스러운 듯 주변을 맴돌았다. 하긴, 사식 사충의 주문을 익히고 나서 이렇게 아팠던 건 세 번이 안 되는구나. 창 밖을 내다보니 이미 해가 하늘 높이 떠올라 청량한 가을 햇살을 뿌려대고 있다. 정말로, 심하게 늦잠자버린 모양이다. 과연 어떤 꼴일까 궁금해 협탁 위에 걸린 거울을 들여다보자 아주 가관이다. 함빡 젖은 머리칼은 산발해 있고, 얼굴은 말라붙은 땀 범벅으로 모자라 살짝 부어 있어, 거렁뱅이가 이렇지 않을까 싶을 지경이다. 아무래도 일단 씻어야겠다.

"상해, 씻을테니 준비 부탁해"

상해에게 준비를 부탁하고는, 적당히 옷을 챙겨 내려갔다. 땀에 젖고 피곤한 몸을 따끈한 물에 푹 담그자, 피가 머리 끝까지 몰려 올라오는 듯한 느낌에 황홀해진다. 손 끝이 짜릿하게 떨려올 만큼 편안해 잠시 죽은 듯 숨마저도 멈추자, 기분 좋은 온기가 온 몸에 퍼져온다..

한동안 목욕을 만끽하다 몸을 말끔히 닦아내고 나자, 그제서야 피로가 가셨다는 기분이 든다. 파츄리 같은 경우에는 주문으로 간단히 해결하지만, 아무래도 내 마법은 그만큼 깊고 넓지는 않고 그보다도 물로 씻어내는 정신적 만족감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파츄리는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거라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뭐 그 때가 되기 전까진 알 수 없겠지.

습관적으로 부엌에 들어서자, 탁자 위에 마리사가 남겨놓고 간 수프가 보인다. 예상대로 뒷정리는 하나도 안 하고 갔다. 과연 무슨 맛이었던 건지 궁금해 국자로 떠 봤더니 다 식은 수프이지만 향이 괜찮다. 조심스레 핥짝여 맛을 보니 왠지 떫떠름한 맛이 나, 그냥 뚜껑을 덮고 내버려두었다. 아직 인간의 식습관을 따르고 있어 아침 점심을 거른 게 거슬리지만 아무리 그래도 마리사식 요리에 섣불리 도전하고 싶지는 않다.

늦게 일어난 탓에 시간이 붕 떠 버려 하루를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종이를 앞에 두고 고민하며 지루하게 펜대만 굴리던 도중, 문득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 생각해보고는 외출 채비를 갖추기 위해 내 방으로 올라가며 상해를 불렀다.

"상해, 외출할 테니 빨래 좀 부탁할게"

"샹~하이~"

창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자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게 위쪽은 추울 것 같다. 자주 두르는 담황색 머플러를 두르고, 가방에 간단한 필기구를 챙기는 것으로 외출 준비를 끝냈다. 비록 상해가 남긴 하지만 문단속은 물론이고 창문들까지 꼼꼼히 확인한다. 어차피 들어올 만한 사람은 신경쓰지 않을 것 ​같​지​만​.​.​.​기​분​이​란​ 게 있으니까.

​"​그​럼​.​.​홍​마​관​으​로​ 가 볼까"

호수를 지나 붉은 저택이 한 눈에 들어오자 문 앞에 내려섰다. 커다랗고 칠흙같이 검은 쇠창살 대문 앞에는 언제나 보아오던 익숙한 풍경- 암록빛 옷을 입고 별 모양 페치를 멋들어지게 비스듬히 매단 베렛모자를 쓴 문지기, 미령 씨가 보인다. 그녀는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서 있어 언제나처럼 깨어 있는지 자고 있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간만이네요 미령 씨"

간단히 인사를 건네고 문을 밀자, 조는 건지 목례한 건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애매하게 고개가 까딱인다. 저러다 진짜 잠들어서 또 사쿠야에게 한 소리 듣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에 피식 웃고는, 저택 안으로 발을 옮겼다. 본디 방문할 땐 집주인에게 먼저 알려야겠지만 레밀리아는 낮에는 대개 자고 있을 뿐더러 브왈 도서관의 손님에 대해서는 누가 들어오더라도 일체 신경쓰지 않는다. 전에는 파츄리에 대한 존중이려니 했지만 요즘 생각컨대 그냥 귀찮은 것 같다. 홍마관에 매인 집요정들이 청소를 하는 둥 마는 둥 농땡이피우는 복도를 지나자, 익숙하고 커다란 소나무 문이 나타났다.

끼이익-

"안녕하세요 앨리스 씨. 한동한 뜸하셨네요"

문고리를 당기자 언제나 보는 파츄리의 사역마가 품에 책을 가득 안고는, 손 대신 피막 날개같은 날개귀를 팔랑이며 인사를 건네기에 손인사를 건넸다. 소환자보다 패션감각이 월등히 뛰어난 그녀가 없었다면 파츄리는 일 년 삼백육십오일 내내 그 잠옷같은 로브만 입고 살았을 게 뻔하다. 내게도 몇 번 코디를 제안하길래 제안대로 옷을 맞춰 봤는데, 내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제법 괜찮았다.

"생각해보니 그렇네.. 파츄리는 어디 있어?"

"파츄리 님은 동쪽 창가에서 독서중이세요. 참, 찾는 책이라도...?"

"파츄리에게 먼저 물어보고 부탁할게"

"앨리스 씨도 한결같으시네요.. 차는 홍차로 드릴까요?"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타이트한 갈색 정장과 흰 블라우스를 멋지게 팔락이며 어디론가 날아갔다. 사실 굳이 파츄리에게 일일히 물을 필요 없이 이미 필요한 책은 마음대로 빌려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지만, 그래도 주인 있는 물건을 빌릴 때는 먼저 묻는 게 도리에 맞다고 생각한다. 우연히 필요한 책을 빌려갈 수도 있고. 파츄리는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 그래도 별로 상관없다고 하지만,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고 그다지 이해하고 싶은 것도 아니기에...

이번에도 더 늘어난 듯한 책장을 슥 둘러보며 동쪽 창가로 향했다. 실제로는 워낙 장서량이 어마어마해 늘었는지 줄었는지 알 수 없겠지만, 브왈 도서관의 장서가 줄어들 일은 그 민폐덩어리밖에 없으니 아마 늘어났겠지...라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다소 시간이 지나고, 블록 너머로 햇빛을 담아내 아른거리는 창과 소파 너머로 드러난 자줏빛 모자가 보인다. 잰 걸음으로 다가가자 파츄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안다는 듯이 책 읽는 자세 그대로 미동도 없이 말을 건네온다.

"오래간만이야. 마리사가 안부 전해달라던데"

"아아, 좀 바빴어. 마리사는 어제 만났으니 괜찮아"

"그래? 아, 여기 앉아. 음..."

옆에 앉자 파츄리는 왠일로 책에서 손을 떼고 손수 자리를 치워주며 말꼬리를 늘였다. 항상 간단한 인사만 나누고 각자 책을 읽을 따름이었는데 무슨 일일까 영문을 몰라 눈만 깜박였다. 오랜만에 보는 파츄리의 옆얼굴엔 머뭇거림이 베어 있어 낯설었다. 뭔가 중대한 고민을 하는 듯 턱을 괸 채 한동안 말을 고르던 파츄리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꺼낸 말은 기다리게 한 만큼 의외였다.

"흠흠, 크흠. 저번엔 내가 말이 과했어. 취해서 제 정신이 아니었어.. 음, 그러니까 저기. 미안해"

꽤나 오래 고민한 것 치곤 두서없이 횡설수설하며 말을 늘어놓은 그녀는, 재빨리 책을 집어들어 펼치곤 읽는 척 하며 얼굴을 가린다. 대체 뭘 사과하는지 몰라 거꾸로 잡은 책을 빤히 쳐다보다가, 간신히 저번 술자리에서 그녀가 만취한 채 장광설을 늘어놓았던 희미한 기억을 끄집어냈다. 아무래도 그동안 내가 얼굴을 안 비춘 게 그 때문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아니, 산이라도 태울 기세로 탄막을 날려대며 마리사를 쥐잡듯이 잡았던 걸 생각하면 사과 받을 사람은 따로 있지 않나 싶지만- 어쨌든 상관없겠지. 사과에는 자기 만족과 자책감 면제의 측면도 있으니까. 마리사가 파츄리에게 지은 죄가 많은 것도 사실이고.

"신경쓰지 마. 그런 일이 있었던가- 하고 잊고 있었을 정도로 별거 아니니까"

"음, 그래. 음"

"아 참, 히에다가에 대한 책을 찾으려 하는데.. 있어?"

"..히에다가?"

책 너머로 살짝 발그레한 얼굴을 반쯤 빼꼼히 내민 채 고개를 끄덕거리던 그녀는 별걸 다 찾는다는 듯 눈썹을 치켜뜨더니, 허공에 손가락을 튕기며 사역마를 불렀다. 마력을 띈 푸른 불길이 사그라들더니 일반인은 인식할 수 없을 마법의 전언들이 빛살처럼 정교하고, 빠르고 그리고 아름답게 퍼져나간다.

"코아?"

"파츄리 님, 부르셨어요?"

거의 시간차를 느끼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가까운 책장 뒤에서 두 찻잔과 쿠키 한 줌을 올린 쟁반이 나타났다. 은빛 쟁반 뒤로, 세련된 자세로 쟁반을 들어올린 소악마가 얼굴을 내밀더니 사뿐사뿐 다가와 탁상에 쟁반을 내려놓는다.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고수준의 사역 주문이다. 처음 봤을 때는 놀라서 원리를 물었었지.. 그 때마다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미심쩍게 바라보기에 이제는 그만두었지만.

"히에다가에 관한 책이 얼마나 있지?"

"히에다가입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

소악마는 눈을 감더니, 오른쪽 검지로 관자놀이를 짚고 명정상태에 빠졌다. 그녀가 책을 검색하는 동안 차나 마실까 하고 찻잔에 손을 뻗었다. 깔끔한 흰 바탕에 도금된 둥근 테가 인상적인 사기잔과 그 안에서 모락모락 김을 피워내는 말간 홍차를 보자, 파격적인 차림으로 우아하게 차를 내오던 누군가가 눈에 밟힌다.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자, 분명 훌륭한 솜씨임에도 불구하고 그 때 마신 차와 비교되어 입 안이 쌉쓰름해진다. 기분이 미묘해 찻잔은 내려놓고 쿠키를 오독이고 있자니, 한동안 붉은 금발과 날개귀를 펄럭이며 마력을 발산하던 그녀가 눈을 뜬다.

"환생의 술법에 관한 책이 두 권, 초대 히에다노 아이치가 편찬한 사전이 여덟 권, 5대 히에다노 아요가 집필한 문집이 열 다섯 권, 자서전이 세 권, 주치의의 수기가 한 권. 이상입니다"

"원하는 게 있어?"

"..음, 히에다가의 역사에 관한 책은 없어? 최근의 것일수록 좋아"

마땅찮은 책이 없어 턱만 만지작거리고 있자, 그것만으로도 알아본 것인지 파츄리가 물어오기에 디테일을 설명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아쉽다는 듯이 대꾸했다.

"히에다가의 역사에 관한 책은 아레의 후예들이 집필한 것 뿐인데, 구문사기를 포함해서 전부 카미사라시와랑 우선적으로 공유하기 때문에 없어. 궁금하다면 그쪽에 묻는 게 빨라"

"카미사라시와? 케이네 씨?"

"맞아"

"마을에도 들러야겠네.."

"그래도 이건 마저 들고 가세요"

내가 바로 일어날 걸 알아챘는지, 소악마가 싱긋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녀는 정말 눈치가 빠르기에 약간의 반응만 가지고도 상대방의 기분과 느낌을 읽어버린다. 쓰게 웃고 팔걸이에 얹은 손에서 힘을 빼자, 꾸벅 목례를 하고는 책장 사이로 사라져 갔다. 파츄리와 이런저런 주문에 관해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남은 차와 쿠키를 드는 동안, 왜인지 내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은 서적으로 가득한 다른 곳과 다른 찻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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