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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핀 꽃은 일곱 빛깔로 시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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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는 인연 3화 외출(3)


벌써부터 쌀쌀한 초가을 바람을 헤치고 도착한 카미시라사와 댁은 처음 봤을 때와 똑같았다. 단 하나, 마당에 말 없이 뒷짐을 지고 선 케이네 씨만 제외한다면.

"다시 올 거라 생각했네"

케이네 씨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마치 날씨가 쌀쌀하다는 투로 말해온다. 너무나도 담담한 그 모습에 주늑들어 나도 모르게 물러서다가, 그만두었다. 한 쪽에서는 이미 진 것 같은 기분에 움츠러들지만 다른 한 쪽에서는 낯선 오기가 타오른다. 이유도 없고 논리도 없는 궤변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어떻게든 한번 쏘아붙여 주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

"그래? 흑백이라도 뒤집어쓴 기분인걸"

결국, 천천히 가방을 열었다. 필기구를 밀어내자 한 켠에 가지런히 앉아 있던 인형들의 다리가, 팔이, 고개가 스르르 들리며 고해온다... 가장 극단적인 이해방식을 실행할 준비가 되었음을.

한 기 한 기 느릿하게 떠올라 전개하는 인형은 총 6개체. 가만히 손을 들어 보이지 않는 마력의 실을 훑자 인형들의 눈에 푸르스레 영기가 감돌아 임전태세를 갖춘다. 예기가 울려와 찌릿한 손 끝을 진정시키며, 아직까지도 불로 뛰어드는 나방을 바라보듯 측은히 바라봐오는 반인반수에게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힘주어 고한다.

"아까 한 말, 전부 취소해"

"생각 없네"

그녀는 고민해볼 가치도 없다는 듯 단호히 답했다. 천 마디 비난보다도 더 통렬히 가슴을 쑤셔오는 단호함에 이를 꾹 악물고는, 마력의 실을 감아내고 풀어내며 인형들을 움직일 준비를 마친다.

"그럼 어쩔 수 없네. '이렇게' 풀 수밖에"

"...자네는, 이런 걸로 만족하나?"

"상관 안 해"

케이네 씨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두루마리와 낡은 검을 집어들며 훌쩍 날아올랐다. 갑작스레 날씨가 더욱 싸늘해 진 것 같아 머플러를 꼭 여미며 인형들을 뒤따라 날아올랐다...

위쪽의 바람은 더욱 매섭고 쌀쌀해 살갗을 에어 오고 머플러는 깃발처럼 나부껴댄다.

"솔직히 자네가 이렇게까지 막무가내일 줄은 몰랐네"

"들을 기분 아냐"

"준비도 제대로 안 된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그만두는 게 어떻겠나"

저쪽은 보통 데리고 다니는 상해와 봉래가 없는 게 신경쓰이는 모양이지만, 이쪽은 아직도 그런 걸 살필 여유가 남아있다는 데 머리가 뜨끈해져 온다.

"안 듣고 싶다고 했어-! 「Artful ​s​a​c​r​i​f​i​c​e​」​!​"​

"유감이군. 산령「최초의 정각뿔」!"

명멸하는 마력을 품은 채 적을 향해 창검을 들고 쇄도하는 여섯 기의 인형들. 가장 먼저 도달한 인형에 연결된 선이 공명하자, 명멸하던 마력이 출렁이며 찢어지는 듯한 소음과 함께 터져나간다. 이어서 연쇄적으로 대기를 찢어발기는 폭음과 광구, 그를 막아서는 열두개의 피라미드. 사각뿔 탑들이 마치 성좌를 그리듯 미끄러지며 그물을 던지듯 탄막을 내던지고, 세 방향으로 영압을 토해낸다.

신중하게 인형들을 조종해 뿌려지는 탄막을 피하고, 막아내며 탑들이 둘러선 종심에 인형들을 결집시켰다. 팽팽하게 당겨지며 웅웅대는 소리와 함께 요동치는 실들, 그리고-

"「Return ​i​n​a​n​i​m​a​t​e​n​e​s​s​」​!​"​

얼키고 설킨 실들의 폭주와 함께 충만한 마력이 눈 앞을 가득 채색하며 붕괴한다. 허공으로 솟구치는 푸른 불길과 산산조각나는 피라미드를 바라보며, 각자 다음 패를 선언한다-

"「Return ​l​e​g​i​o​n​」​-​!​!​"​

"시부「137년의 덧없음」!"

그녀는 어지러이 날뛰는 6기의 인형편대를 피해 날아다니며 혜성처럼 영롱한 영탄을 쏘아댔다. 그녀를 따라 좌로, 그리고 다시 우로 한 무더기씩 뿌려지는 영탄들은 꼬리를 끌며 허공을 유영하다, 이윽고 점멸하며 붉고 푸른 탄막으로 화해 꽃잎마냥 하늘하늘 허공을 메워온다. 이쪽은 6체가 전부이기에 질은 어찌되었는 압도적인 양에서 너무나도 불리. 인형들이 피격당하는 떨림이 실로, 손가락으로, 팔로 아스라이 전해져 온다.

​"​그​렇​다​면​-​「​S​e​e​k​e​r​ dolls」!"

인형들을 일제히 탄막보다도, 영탄보다도 높이 솟구치게 해 일렬로 정렬시킨다. 잠시간의 침묵과 함께 탄막의 공백. 그 틈을 찌르며 빗발처럼 쏟아져내리는 붉은 빛줄기. 그 중 몇몇이 케이네 씨를 스치고 지나가며 그을린 옷자락이 바람에 휘날려 흩어진다. 뇌리를 가득히 채워오는 저열한 우월감과 만족감에, 구토감이 올라와 입을 가리고 헛구역질을 토한다. 나는...나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이런 걸 원한 게..

​"​미​래​「​타​카​마​가​하​라​」​!​"​

잠깐 감상에 빠진 대가로, 큰 스펠카드의 선언을 고스란히 허용하고 말았다. 바람개비처럼 원을 그리며 회전하는 세 광구가 쏘아내는 일사불란한 푸른 광선들이 퇴로를 차단하고 케이네 씨가 직접 흩뿌리는 미려하고 수없이 많은 탄막이 전 방향을 메우며 쇄도해 온다. 피할 길은-?

"큭..「Trip wire」!!"

전후좌우 어디로도 퇴로가 보이지 않자 황급히 마력의 실에 적의를 가득 불어넣어 다음 스펠카드를 준비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눈이 멀어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밝게 명멸하는 푸른빛의 광선 다발이,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

..

.

"으..음.."

"정신이 드나"

흐릿한 눈을 깜박이자 활짝 열린 미닫이문 사이로 군데군데 그을린 남색 원피스가 눈에 들어온다. 어깨 너머로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으로 보아 찻잔이라도 들고 있을 것 같지만 마시는 것 같지는 않다.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보자 케이네 씨가 옮겨왔는지 푹신한 이불 속에 쏙 들어가 있었다. 몸이 뜨끈뜨끈한 게 아랫목에 눕힌 모양이다.

"미안하네. 그렇게 무방비로 당할 줄은 몰랐는데"

"아아 그래, 져버린 모양이네"

등을 돌린 채 나직히 들려오는 케이네 씨의 목소리엔 미안함이 묻어있어 나를 더욱 초라하게 한다. 억지 투정으로 탄막놀이를 걸어서는 집중도 못 해 져 버렸고, 거기에 상대까지 걱정하게 만들었다. 너무나도 기가 차서 스스로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이 없을 정도다. 그냥 이대로- 다 끝나 버렸으면.

"나는 기껏해야 이 정도인 모양이네. 그래, 인형은 인형처럼 살아가야지. 주어진 대로, 정해진 대로"

자조적인 말을 입에 담고 있자니 공허한 헛웃음이 밀려나온다. 이 말을 어디서 들었더라... 벽지의 주름을 세며 곰곰히 생각하는 동안, 케이네 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만큼은 그게 너무나도 고맙다. 그렇게 한동안 시간이 지나자 케이네 씨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래서, 아큐의 개인사가 대체 왜 궁금한 건가"

"...글쎄, 나도 몰라"

"그런 단순한 호기심이라면 본인에게 물어보면 될 게 아닌가"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잎사귀들 너머로 단발머리를 곱게 자른 누군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가문을 입에 올리며 표정을 잃어가던 그녀의 얼굴도, 과거를 되짚으며 파르라니 떨리던 무명지도, 손에 잡힐 듯 떠올라 가슴을 묵직하니 눌러 온다. 촛불이 흔들리듯 일렁이는 기억을 쫓아 답하니 마치 쉰 듯 목소리가 갈라진다.

"안 물어봐. 절대로"

"어째선가?"

"그렇게 괴로워하는데 어떻게 물어보겠어?"

"본인이 그토록 괴로워하는 걸 굳이 왜 알려는 건가?"

"...그걸 어떻게 모른 체 하라는거야. 이렇게나 눈에 밟히고, 가슴에 걸리는데-"

마치 울어버릴 것처럼 감정이 북받쳐 와 말을 끊었다. 잠시 눈을 감고 감정을 가라앉히고, 억누르고 있으니 케이네 씨가 나직히 중얼거린다.

"나도 참 모자라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린 그녀는 역시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말을 이어나갔다.

"...그 아이와 히에다가의 관계가 원래 지금처럼 안 좋지는 않았네. 여당주라고 수근대는 사람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좋을 정도였지. 그러다가- 그래. 그때부터였지"

케이네 씨는 이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녀의 손에 쥐인 찻잔은 이미 식었는지 아지랑이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지만, 신경쓰지는 않는 것 같다.

"여자가 당주가 되었으니, 든든한 배우자가 있어야 한다는 게 사람들의 생각이었네. 아마 조혼을 생각했던 것 같군... 그리 드문 풍속도 아니니까. 그래서 결국 나이차가 가장 적게 나는 쥬지로 가의 적자와 혼담이 오갔었지. 양가 모두 환영하는 혼담이었지- 단 한명, 아큐만 제외하고"

그녀는 식은 찻잔을 들어 벌컥벌컥 마시더니, 마루에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화라도 난 걸까 싶었지만 곧게 편 그녀의 등에서는 조금도 노기를 읽을 수 없었다.

"그녀는 혼담을 딱 잘라 거부했고, 가신들은 계속 강권했네. 한동안 ​그​리​하​다​.​.​.​혼​담​이​ 슬그머니 들어가버렸지. 그 뒤로는 계속 이 모양이네. 내가 아는 것이라 해도 이 정도가 전부군"

"당신은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케이네 씨의 처진 어깨 너머로 무거운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동안 꼿꼿하던 고개가 수그러든지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금 고개를 든 그녀는 무거운 목소리로 답한다.

"마을의 보호를 일임하는 내가 그런 지극히 개인적인 가문 사이의 일에 끼어들 수는 없네. 후우-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네. 그래, 아큐는 내 소중한 악우 아레의 후손이지. 하지만 또한 나는 ​아​레​,​아​이​치​,​아​요​.​.​.​ 히에다가를 지켜온 이들의 벗일세. 가문을 위해 그 아이에게 희생을 요구해온다면... 나는 대체 어떤 나를 택해야 하는가?"

"....."

"천 년간 만들어온 역사에 스스로를 가둬버린 우스운 꼴일세"

처음으로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쓰게 웃는 그녀의 얼굴은 지치고 피곤해 그렇게 슬퍼 보일 수가 없었다. 그 때문일까, 출렁대며 밀려 오는 감정의 물결을 이기지 못해 반쯤은 울고 반쯤은 웃는 목소리로 기어코 내뱉고 말았다.

"인형이.. 둘이었네?"

그 말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한동안 그녀와 나는 웃는지 우는지 분간할 수 없게 주책없이 낄낄대고 훌쩍였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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